수도자의 신분과 예언자적 소명
< 영성생활 제3호 중에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덕근 수도원장 아빠스 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자의 신분을 교회의 종말론적 증인이며 교회 성성의 표징이요 신약교회의 예언자로 이해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수도 신분은 수도자들을 현세 걱정에서 더 잘 해방시켜주는 그만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 천상 보화를 더 잘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얻게 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더 잘 증거 하여,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다.
수도 신분은 또한 하느님의 성자께서 세상에 오시어 성부의 뜻을 세우시던 그 생활. 성자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생활을 보다 철저히 본받고 교회 안에서 영구히 재현하는 것이다. 수도 신분은 마침내 모든 지상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의 탁월성과 그 최상 요구를 특수한 모양으로 밝혀주며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과 교회 안에서 기묘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적 권유를 서원하는 수도 신분이 비록 교회의 교계적 구성에 관계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교회의 생명과 성회에 속하는 것이 확실하다”(교회에 관한 교의 현장 제44항). 수도자는 통상적인 사회생활을 버리고 독신적 정결과 복음적 가난과 자녀적 순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수도 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나라를 이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 하는 예언자의 직분을 수행한다.
일반적 의미에서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교, 불교, 흰두교 등의 큰 종교에서는 항상 찾아 볼 수 있는 삶의 한 양식으로서, 그것은 구도자가 삶의 의미를 절대자에게서 찾으려는 인간 생활의 본질적인 한 차원이다. 죄와 고통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삼중고에 시달리는 인간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할 때, 궁극에 가서는 절대자인 신 안에서 삶 의미를 찾게 되고 신에게 자기를 맡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절대자 안에서 찾았으며 또 계속 찾고 있는 수도자는 그 종파를 넘어 절대자를 이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은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에 개입하신 사실과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믿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이가 ‘이미 오셨으나 아직 완전히 오시지 않은 하느님’을 계속 찾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본질적인 한 차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수도자는 극단적 회심의 의미를 지닌 수도생활로 하느님의 존재와 그 나라를,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이 세상에 선포하고 증거 하는 사람이라 하겠다.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종교적 활력소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 왕직과 제사장직이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외면적 종교 행위에 통일적 요소였다면, 예언자들의 역할은 이 외부구조에 하느님의 영을 주입시키는 영적 활동이었다. 신약 교회도 외면적 조직과 순수한 영적 강화의 두 요소가 병존하고 있다. 주교단을 중심으로 한 교계제도와 순수한 성령의 은사인 수도생활, 이 두 요소는 교회의 외부 구조와 그 영적 사명을 대표한다. 이런 관점에서 수도자는 분명히 신약 교회의 예언자요 그들의 일차적 사명은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사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발생과정을 보면 교회 안에서 수도자의 예언자적 역할은 더욱 분명해 진다.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은 교회의 복음적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세속 도시를 떠나 사막에 은둔했다.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에 따라 온 제국이 그리스도 교화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기 교회의 복음 정신은 나날이 그 빛을 잃어가게 된다. 교회는 성직주의와 형식주의에 떨어지기 시작하고, 순교까지 각오하면서 복음정신에 투철하던 신자 공동체는 종교 자유의 부산물인 정교 밀착으로 이교적인 사람, 정치적 야심가 까지 모여 들면서 복음 정신을 잃어가는 소위 ‘대중교회’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순수한 복음적 생활을 갈망하던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절제함으로써만 초기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 할 수 있다고 믿고 사막으로 물러났던 것이다. 흔히 이 때문에 초기 수도승 운동은 수도승들이 일반적으로 이 세상을 등진 것으로 이해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초기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은 로마, 알렉산드리아, 비잔티움 같은 세속 도시를 거슬려 시위를 벌인 것이 아니라, 이런 도시 가운데서 나날이 복음 정신을 잃어가는 교회와 자기 자신을 거슬려 시위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은 교회 안에 은사적인 수도생활을 설정하여 교회의 쇄신을 준비시키시고 또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존 수도회나 새 수도회의 탄생으로 교회를 새롭게 하시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확인시키셨다. 이 역사적 관점에서나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서나 수도자는 교회 안에 예언자의 직분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어떤 사실에 대한 예보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그 백성과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예언자들은 이 역사적 위기에 간섭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느님 앞에 바로 서 있도록 자극했다. 그들은 재난의 날에 앞으로 다가올 행복의 날을 선언했고 압박을 당할 때는 해방을 약속했다.
예언자들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충실성을 이 세상에 증언했다. 예언의 내용은 장래 일에 대한 예보나 윤리적 삶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자신이며, 진리에 대한 어떤 설명이 아니라 진리의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제 예언자의 소명은 자못 분명해진다. 그것은 하느님의 존재, 그분의 사랑과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영적 사람’이 되는 일이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에 관한 일에 대한 증인이 된다는 것을 뜻하고 증인이 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이 체험하며 아는 것을 세상에 증거 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수도자가 참 예언자라면 그는 먼저 하느님의 존재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빠스카 신비를 그리고 하느님 성령의 끝없는 사랑과 구원을 어떤 모양으로나 먼저 체험하고, 자신이 체험한 이 진리를 선포하고 말로 뿐 아니라 가장 설득력이 있는 자기 생활로 증거 해야 한다. 수도자는 교회와 이웃을 위한 어떤 직접적인 봉사 행위 이전에 그의 존재와 수도생활 자체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구원 신비를 전하는 사람이다. 수도자는 통상적인 사회생활을 버리고 독신과 가난과 순종의 복음적 권고를 이행하는 수행생활에 몸 바침으로써 ‘변두리의 사람’. 하느님과 세상의 경계에 선 사람이 되었다. 이제 이 세상을 위한 수도자의 주된 역할은 하느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맺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 관계, 곧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인간은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 증거 하는 일이다.
세상이 금력과 권력 그리고 현세적 지식 앞에 머리를 숙일 때 수도자는 오히려 가난과 겸손과 침묵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긴다. 그리고 수도자는 회심과 함께 끊임없는 수행으로서 인간의 최종 목표는 회개함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임을 보여 주거나 적어도 권고한다.
정신문화가 그 빛을 잃고 기본적 도덕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이 나라 사회 현실은 또 물질적 세속적 힘에 둘러 싸여 정신적 영향력을 크게 잃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영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면서까지 외형적 성장에 급급한 교회의 모습은 수도자들이 먼저 ‘수도하는 생활’에 충실함으로서 하느님이 맡기시고 교회가 인정한 예언자적 역할을 다 해야 할 긴박함을 느끼게 한다. 또 생산적 행위를 존재 그 자체보다 우위에 두는 현대의 실천적 오류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와서, 혹시나 활동만을 중시하고 영적 삶을 경시하는 사고가 수도자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 수도자들은 수도생활 자체가 본질적인 사도 적이며 모든 사도 적 활동은 수도생활의 한 가지 표현이요 결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수도자 개인과 공동체가 수행하는 생활에 충실함으로써 수도자와 수도공동체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될 때 수도 신분은 올바른 의미에서 참 예언자의 직분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교회와 세상은 구원의 진리를 ’말‘로 전하는 이들 뿐 아니라 말로 전하는 이 진리를 ’삶‘으로 증거 하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