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여 가난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빌1:29)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된다. 그리 하여야 하나님께서 예수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갖다 주실 수 있다. 이것이 경책의 뜻이다. 하나님의 교훈이다.
옛날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바알에게 가서 물었다. 사람들은 중병이 들어도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묻는 것이 되는가. 낫게, 좋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죽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살려다가 고생 당했다. 예수와 같이 죽었으면 영광이고 평안했을 것이다. 살려는 것이 죽는 것이 되었다. 복을 구하는 것은 화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이 뜻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슬프게 하는 것이 된다. 신구약 어디에 연락宴樂하는 것이 있느냐? 연락하면 바알에게 묻는 것이 된다.
병이 나면 약 쓰는 것이 죄냐고 묻는다. 신구약 어디에 병나면 약 쓰는 것이 죄라고 했느냐 묻는다. 병이 나면 의의 약을 쓰라고 부탁하셨다. 나무뿌리나 풀잎사귀를 쓰라는 데를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 약이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위생이다. 겉으로 정결해도 죽고 병난다. 그러나 신령한 말씀을 따라가면 부활이요 영생이니 얼마나 좋은 위생이냐. 이 약은 의심 없다. 세상 약 쓰는 것은 꼭 나을지 모르니까 미신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낫는다고 믿는 병원으로 가나 못 낫는 수도 있고 죽기도 한다. 기도들은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 들으신다. 엘리사가 나아만 문둥병자에게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여 순종함으로 나았다. 신령한 물에 목욕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물에 목욕하자 다 나았다. 꼭 나았다.
목사나 장로들이 흔히 와서 성경 묻는 것은 당신들 속에 있는 것과 씨름 부쳐보는 것이요 알아보실 마음으로 묻는 것이 아니다. 듣는 이는 조심해서 들을 것이요 판단하지는 말 것이다. 눈감고 고요히 생각하고 상고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기만 할 것이다. 판단은 말 것이다. 신구약간에 말씀을 살펴서 증거 삼을 것이 요긴하다.
예수께서 내 짐은 가볍고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셨다.(마11:25) 내가 무엇을 갖고 있으면 무겁고 다 버리면 아주 쉽고 가볍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골2:20) 의문의 뜻이 무엇인가. 그릇된 학문, 곧 음란치 말라는 뜻이다. 창세기에 아담에게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나를 패망케 하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