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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89. [역경의 열매] 김연수 (1-24) “여보 미안, 작년부터 ‘밥퍼’ 시작했어” 남편 통보에…
“이미 당신이 내 결정에 동의했다고 믿어”
다일영성수련원장 김연수 사모가 남편 최일도 목사와 함께 2015년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찍은 사진. 다일천사병원에서 척추측만증 치료를 받은 뽀안(가운데)도 함께했다.
1989년 7월, 그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조용히 얘기 좀 하자던 남편이 그간의 일들을 털어놨다.
“여보, 미안해. 당신하고 먼저 의논해야 했는데, 나 작년 가을에 다일공동체를 시작했어. 할아버지들과 행려자들에게 라면 끓여주는 일로 시작된 거야. 물론 당신과 함께.”
나는 너무나 놀라고 당황했다. ‘내가 언제?’ 턱밑까지 올라온 질문을 꿀꺽 삼켰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의 말은 계속됐다. “당신은 한 번도 내 결정에 안 따른 일이 없으니 이미 당신이 내 결정에 동의했다고 믿어.” 기가 막혔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결정이 하나 있는데, 이것도 무조건 따라 줘야 해. 나 교회 개척할 거야. 청량리에서.”
내 남편은 ‘밥퍼’로 유명한 최일도 목사다. 그동안 남편이 하는 일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빈민 구제는 나라님도 못 한다던데, 설마 계속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간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사인을 남편에게 수없이 보냈다.
그러나 끝내 남편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남편의 음성이 확고부동한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잘됐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명색이 10년 넘게 수도했는데 가난하고 병든 사람 돌보는 일을 극구 반대했으니 마음 한구석에는 자책과 죄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밥퍼 사역은 이렇게 당황스러움과 자책감 사이에서 시작됐다. 내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께 징집돼 이 길을 걸은 지도 햇수로 벌써 32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걸어온 길이 꽃길은 아니었다. 그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걸었던 것 같다.
“먹는 사람이 일한다. 먹다 망한 집은 없다.” 요즘 들어 어머니 말씀이 자꾸 떠오른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 모두 인심이 좋았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면 고추 한 근, 찹쌀 한 되, 마늘 한 접이라도 싸 주셨다. 어떤 이는 아침부터 와서 점심까지 먹고 갔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왜 우리는 남들에게 먹는 걸 주고 그래야 해?”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문전성시 이룬 집이 성공하는 거지, 집에 손님 한 명 없으면 그 집은 망한 집이야”라며 “그런 말 마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연습을 시킨 것 같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어머니께 물려받지 않았나 싶다.
부창부수라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는 동네 이웃이 이사갈 때면 전날 들러 “내일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게”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 시절엔 이사를 가려면 전날 짐을 다 싸 놨다. 아침밥을 짓기위해 싸놓은 짐에서 식기를 다시 꺼내고 넣는 일이 번잡스러우니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오라는 얘기였다. 이렇게 밥 먹고 떠난 이웃은 1~2년 뒤 고향을 찾을 때 꼭 우리 집을 다시 찾았다.
아버지는 딱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한 번은 늦은 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와 우리 가족을 당황시켰다.
김연수 다일영성수련원장 약력=수도여자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 서강대 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1978년 '시문학'으로 등단. 다일복지재단 상임이사·상임대표 역임. 현 다일영성수련원장
* [역경의 열매] 김연수 (1) "여보 미안, 작년부터 '밥퍼' 시작했어" 남편 통보에…
* [역경의 열매] 김연수 (2) 집안일 돕지 않고 책만 읽어 '서당도령' 별명 붙어
* [역경의 열매] 김연수 (3) "나를 밟고 가라" 부모 만류에도 수녀 되려 서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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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연수 (2) 집안일 돕지 않고 책만 읽어 ‘서당도령’ 별명 붙어
어려운 이웃에 늘 먼저 손 내밀던 아버지, 여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는 신념 확고해
베푸는 삶을 보여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1952년 9월 23일 생전 처음 전북 남원 광한루로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어머니는 큰오빠가 첫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선물한 나일론 치마 저고리를 입고 가셨다.
아버지께선 4일 열심히 농사일하고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장터로 나갔다. 하얀 세모시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중절모를 쓰신 아버지가 부채를 살살 흔들며 장에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젊은 여자를 데려온 날도 장터에 간 날이었다.
사연인즉슨 집으로 오는 길에 물가에서 누가 슬피 울더란다. 아버지가 찾아가 무슨 일이냐 물으니 죽으려고 한다는 거다. 알고 봤더니 그 젊은 여자는 아버지가 자주 가던 국숫집 아저씨의 며느리였다. 그냥 놔둘 수 없어 일단 집에 데려왔다고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국숫집 형편이 어려워져 집 없이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한다.
국숫집 부부는 우리 집에 와서 2년 가까이 살았다. 방 3칸짜리 농가였는데 사랑채는 또 누구 빌려줘서 이분들은 윗방(안방의 옆방)에서 지냈다. 우리 가족은 안방에서 다 같이 지냈다. 대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던 오빠 둘이 집에 올 때면 좁은 방이 꽉 찼다. 아버지는 국숫집 부부가 움집을 하나 얻어 나갈 때까지 기다려줬다.
내 고향 충청남도 논산군 양촌면 남산리 2구는 ‘당골-담곡’이라 불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이었다. 거기서 우리 아버지가 제일 신식이었다. 대전 가서 택시 기사 해서 소 한 마리 끌고 오면 출세했다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여자라도 고등과(고등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말씀을 입이 닳도록 하셨다.
다행히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했다. 글 읽기를 갓 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과서들을 읽고 또 읽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때는 교실마다 5권씩 비치된 동화책을 전부 빌려다 읽었다. 그래도 나는 읽을거리가 고팠다. 다락으로 기어 올라가 오빠들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큰오빠가 읽고 쌓아둔 사상계, 시사영어의 영화해설, 조선시대 야화집, 고교종합생물 등도 읽었다.
오죽했으면 어릴 때 별명이 ‘서당도령’이었겠는가. 학교 갔다 와서도 심부름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고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붙여 준 별명이었다. 한번은 개울가로 어머니와 빨래를 하러 갔는데 아주머니들이 내 흉을 보고 있었다. “연수, 왜 서당도령이라고 부르는 애 있자녀. 갸는 못 쓰겄슈. 핵교 댕겨와서도 책상다리 뻗쳐놓고 공부만 한다네요. 그런 지지배를 어따가 써먹겄슈.”
그 말을 들은 엄마가 빨랫감을 물에 던져 넣으며 일갈을 날렸다. “냅둬유. 우리 연수는 호미자루 안 잡고 펜대 잡고 살 건 깨로 냅둬유.” 내가 1978년 문단에 시인으로 등단했을 때 어머니의 이 말이 떠올랐다. 그때 딸에 대한 어머니의 꿈이 내 인생에 대한 예언이었구나.
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우리 동네엔 고등학교가 없어 논산 시내에 있는 샌뽈(St. Paul)여고로 갔다. 마침 큰오빠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곳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큰오빠 집에 살며 학교에 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수녀의 길을 걷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3) “나를 밟고 가라” 부모 만류에도 수녀 되려 서울로
천주교 미션스쿨 다니며 수녀 동경… 식구들 공주교대 가기 원했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사대 입학키로
김연수 사모(왼쪽)가 쌘뽈여고 2학년 시절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함께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며 어울렸던 이 친구와 같은 날 세례도 받았다.
내가 다닌 쌘뽈여고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주교 미션스쿨이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소속으로 당시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최신식 학교였다. 입학 축하 미사부터 전혀 생소한 종교의식에 어리둥절했지만, 까만 원피스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머리에는 검은 베일을 쓴 수녀님의 모습에 왠지 모를 동경과 설렘에 가슴이 뛰었다. 여고 생활은 인생의 또 다른 길에 눈을 뜨게 했다.
그 무렵 나는 사색에 빠져있었다. 큰오빠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하교 후 3살이던 조카랑 놀아주는 일과 그림 그리는 일을 제외하면 늘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특히 인생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한 문장이었다. “한 자밖에 안 되는 촛불 같은 인생, 캄캄한 밤에 켠다면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될 텐데.” 나는 수도 생활이야말로 한밤중에 켜는 초와 같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개교기념일인 성바오로 축일에 큰오빠와 함께 세례를 받으면서 그 마음은 더 커졌다. 1년 뒤 수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70년 1월 대학입학 시험을 이틀 앞둔 날 오후였다. 쌘뽈여고 교장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큰오빠가 날 찾는 전화였다. 쌘뽈여고 국어교사였던 큰오빠는 내가 고3 되던 해 공주사대부고로 전출 갔다. “공주 오빤데, 바꿔줄까” 물으시는 교장수녀님께 나는 “그냥 모른다고 해주세요. 지금 전화 받으면 서울로 시험 보러 못가요. 조금 전에 여기서 떠난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부모님께 공주로 가겠다고 인사드리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목적지를 서울로 바꿨다. 아침 일찍 공주로 가겠다고 떠난 내가 저녁이 다 돼도 도착하지 않자 큰오빠가 급히 전화를 건 것이다. 집에선 내가 공주교대에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학교에서 원하는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으로 향해 있었다. 당시 학교는 4회 졸업생인 내가 서울로 진학하길 바랐다.
“연수야, 너 들르면 꼭 공주로 연락하라고 하신다. 연락 안 하면 형제 인연을 끊겠다고 하시는데….” 교장수녀님의 걱정스런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소서. 이 시험에서 떨어지면 부모님과 오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만일 주님의 은혜로 합격한다면 저를 수도 생활로 부르시는 것으로 알고 따르겠습니다.’
그해 2월 “서울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나는 뒷문을 열고 수도사대 입학을 위해 집을 나섰다. 언제 따라왔는지 동생이 손을 내밀었다. “언니, 이거라도 갖고 가.” 도망치듯 나선 언니가 안쓰러웠는지 꼬깃꼬깃 접힌 1000원짜리 지폐 2장을 내 손에 꼭 쥐여줬다.
‘세상 모든 출가자가 너나없이 한 번은 가족과 아프게 이별했을 거야. 어차피 떠나야 한다면 지금 떠나자. 한 번은 겪을 일이야.’ 눈에 고인 눈물을 털어내며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4) 같이 살자며 붙잡는 조카 떼놓고 수녀원으로
대학 자퇴하고 수녀 수련생 준비 중 큰오빠 부음 듣고 공주로 내려가, 올케와 업어키운 조카 보니 눈물이…
2015년 큰조카 용정이 내외(양쪽 끝)와 찍은 사진. 당시 서울북부지검 부장검사였던 큰조카가 검찰청 사람들과 함께 서울 동대문구 밥퍼운동본부에 봉사활동을 왔었다.
대학교에 진학한 후 나는 수녀원의 청원자가 됐다. 공부보다 수녀 되기에 더 관심이 많았기에 청원자로 4년을 살기가 힘들었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자퇴서를 냈다. 이유를 묻는 교수님들께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곧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선 중증의 종교병에 걸렸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이 무렵 나는 큰오빠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수녀 수련생이 될 준비를 모두 마친 1971년 겨울 큰오빠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얼마 후 올케언니와 조카 셋을 남긴 채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32세였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이튿날 해가 뜨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현실부정이었다. 긴 여행을 가는데 의자 등받이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큰아들을 잃은 부모님의 상실감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오빠는 내게 항상 힘이 돼주던 든든한 멘토였다. 어릴 적 막내 여동생 응석에 좋은 건 모두 막내 여동생 차지가 될 때 큰오빠는 늘 내 몫을 챙겨 줬다. 용돈을 받아도 그중 얼마를 떼어내 꼭 내게 줬다. 그런 모습에 막내 여동생은 “큰오빠는 언니 오빠, 작은 오빠는 내 오빠”라 부르기도 했다. 오빠 무릎에 앉아 그 시절 유행하던 노래를 따라 불렀고,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함께 별을 보기도 했다. 큰오빠는 쌘뽈여고 시절엔 하숙집 주인이었고, 우리 학교 고전문학 선생님이었다. 세례도 함께 받았다. 큰오빠가 공주로 이사한 뒤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큰오빠 집을 찾아 조카들과 놀곤 했다.
오빠 소식을 듣고 공주로 내려가는 그 길이 어찌나 깜깜하던지…. 공주에 도착해, 지금은 변호사가 된 큰조카 용정이를 만났다. 용정이는 대뜸 날 끌어안더니 “이제 고모가 우리랑 같이 살아”라고 말했다. 큰오빠 집에서 하숙할 때 내가 말을 가르치고 업어 키웠던 조카였다. 큰오빠가 교사로 있는 공주사대부고 소속 초등학교에 합격해 새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조카의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큰오빠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지만, 그래도 아이 셋을 홀로 키울 올케언니를 도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도 그걸 바라는 눈치였다. 마침 자퇴도 했겠다 고민이 깊어졌다. 수련생이 되겠다는 마음도 조금 흔들렸다. 날 위로하러 내려온 수련장(수도원 수련생을 관리하는 분)님께 이 사실을 털어놨다. 수련장님은 같이 성당에 가서 기도하자고 했다. 나는 ‘하나님 원하시는 걸 수련장님 통해서 알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 기도를 마치고 나온 나에게 수련장님은 “연수 네가 조카를 돌보는 게 잘 돌보겠니, 아니면 하나님께서 잘 돌보시겠니”라고 물었다. “하나님이요”라고 대답했다. 돌아온 말은 “그럼 수녀원으로 가자”였다. 나는 눈물을 글썽이는 조카를 떼어놓고 돌아섰다. 흡사 자식을 떼놓고 가는 기분이었다. 조카들에게 미안했는지 나는 수련생활을 하면서도 옛날이야기를 써서 보내곤 했다. 다행히 조카들은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잘 자랐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5) 나는 가톨릭 수녀였고 그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첫 서원 후 복학, 공부 정진해 시인 등단… 같이 수업 받게 된 남편과 운명적 만남
김연수 사모(왼쪽에서 두 번째)가 1977년 수도여자사범대학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 학사모 대신 베일을 썼다.
수녀원에서 나는 김연수라는 이름 대신 김 아네스 로즈로 불렸다. 아네스는 어린양이라는 의미였고, 로즈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꽃송이란 뜻을 담고 있다. 나는 ‘수녀가 되려고 태어난 사람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도생활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3년의 수련을 거친 후 나는 첫 서원을 했다.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기 위해 세상의 사랑을 포기하는 정결을 서원했다. 세상의 재물은 물론 내 의지까지도 주님 앞에 봉헌했다. 그런 내게 수녀원에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라는 소임을 줬다.
나는 자퇴했던 수도사대 국어국문학과에 3학년으로 복학했다. 3년 전 학교를 떠날 당시 학교 측에서 자퇴 후 복학을 권했던 만큼 다시 돌아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학교로 돌아온 난 오탁번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시문학 공부에 정진했다. 성과도 있었다. 졸업하던 해인 1977년 3월 ‘시문학’을 통해 문단에서 1차 추천을 받았고, 이듬해 10월 추천이 완료되면서 명실공히 시인이 됐다.
등단과는 별개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계성여중 국어교사로 임용됐다. 여기서 난 담임교사, 학교신문 담당, 시화반 지도교사 등을 겸직했다. 교사 4년 차 때는 종교주임을 맡았다. 10년 가까운 수도생활에 종신서원까지 한 나였지만, 막상 학생들을 지도하려니 성경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교육관에서 유 데레사쟌 수녀님이 지도하는 ‘베델성서반’이 진행 중이라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날의 그 선택이 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로 들어서는 걸음임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유 수녀님이 계신 교육관으로 갔다.
“유 수녀님,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도 베델성서 공부하려고 왔어요.” 갑작스런 방문에 양해를 구하며 문을 열었다. 유 수녀님은 어떤 젊은 남자와 대화중이었다. “로즈 수녀님, 잠시만요.” 유 수녀님은 나를 그 청년에게 소개했다. “두 분 서로 인사해도 좋을 것 같네요. 이분은 최일도 전도사님, 그리고 이분은 김 아네스 로즈 수녀님이세요.” 남편과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편은 그때 나를 보고 하얀 프리지어 꽃이 웃는 듯, 코스모스가 인사하는 듯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그런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깐 인사만 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수녀였고 그는 개신교 전도사였다. 그가 천주교 성서 모임에 있는 것 자체가 뜻밖이라 별 관심을 안 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매주 화요일 베델성서를 공부했다. 최 전도사라는 청년도 매주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몇 주가 지났을까. 성경공부가 끝나자 그가 시문학이라는 월간지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시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며 시 한 편을 펼쳐 들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짚고 있는 시는 내가 김연수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시였다. 그가 내 본명을 알 리 만무했다. 이런 우연이 있을까.
***[역경의 열매] 김연수 (6) ‘사랑의 세레나데’ 부르며 첫 눈에 반했다 고백
장미 꽃다발 들고 찾아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자주 전화하다 급기야 민박집 스캔들까지 생겨
김연수 사모가 수녀였던 시절 최일도 전도사와 함께 찍은 사진. 수녀원을 개방하던 날 최 전도사가 찾아와 사진을 찍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최일도 전도사라는 청년이 세상에 나와 있는 수많은 시 중에서 내가 발표한 시를 찾아들고 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나는 얼른 그 시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다고 했다. 나는 웃기만 하고 돌아섰다.
그날 이후 최 전도사는 하루는 장미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고 또 하루는 새벽기도 후 곧장 왔다며 출근길의 내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인솔하는 계성여중 학생들 틈에 끼여 따라다니기도 했고, 어느 날부터는 달빛이 너무 밝다는 둥 밤하늘이 너무 맑다는 둥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그러나 내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난 학생들 여름수련회 책임자였는데 레크리에이션을 맡은 생물 선생님이 논문 관계로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대체 인력을 구해야 했다. 그때 최 전도사가 떠올라 그를 여름수련회에 합류시켰다. 누구보다 애써주는 그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수련회를 마칠 때쯤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시골에 가서 휴양할 것을 권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그에게 우리 고향에라도 가서 민박을 부탁해 보라고 했다. 조용하고 맑은 동네니 쉬기 적당할 것 같아 건넨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찾아가 민박을 소개받겠다던 그가 다른 집으로 가지 않고 그냥 우리 집에 눌러앉았다. 황당하면서도 ‘최일도답다’는 생각을 했다.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던 이 일이 수녀원에 알려지면서 스캔들로 번졌다. 휴양을 다녀온 그가 아는 수녀님께 무심코 한 얘기가 교장수녀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길로 교장수녀님께 불려갔다. 수녀가 친정집에 남자를 가라고 해도 되느냐는 책망과 함께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전화를 받기만 했지 걸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난 그에게 누구에게도 내 얘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소문은 발이 달린 듯 삽시간에 퍼졌다. 한참이 지났을까. 교무실 전화벨이 울려서 받았다. 최 전도사였다. 목소리가 안 좋았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지난번 전화 이후 음식을 먹지도,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고 했다. 만성 간염이라는 말에 딱한 마음이 들어 통닭 한 마리를 사 들고 병문안을 갔다. 그는 반가워하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시를 들려줬다. 병원에 머문 시간은 10분도 안 됐지만, 그가 쓴 시는 병원을 나서서도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최 전도사는 퇴원 후 날 찾아왔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자신의 반려자로 정했다는 말과 그 이후로도 계속 연모해 왔다는 말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내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갑자기 그가 노래를 불렀다. 김동명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수선화’였다. 노래를 마치자마자 그는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번민에 빠졌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7) ‘수도생활’이냐 ‘사랑’이냐… 번민 갈수록 깊어져
“난 다섯 살 연상에 수녀다” 강조해도 연상연하 커플 줄줄이 대며 막무가내
최일도 목사가 전도사 시절 수녀였던 김연수 사모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최일도 전도사의 행동은 늘 내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그가 처음으로 결혼하자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신분상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과 내 나이를 밝혔다. 내가 수녀가 아니더라도 결혼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 전도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저보다 다섯 살 많으시군요. 오히려 제겐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세상의 연상연하 커플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그리고 이 말도 덧붙였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부인 캐더린이 수녀였다는 것도 아시죠.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안 돼요.”
내 번민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해 10년 세월을 살아온 수도생활도 중요했다. 더욱이 난 종신서원을 했다. 수녀원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내게 결혼을 하자는 청년은 개신교 전도사였다. 그럼에도 나는 점점 그에게 빠져들었다. 내 머리는 수도생활을 주장했지만, 내 가슴은 그의 말에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선택은 고통이었다. 어느 한쪽이 현격히 차이가 있을 땐 비교적 고통이 적겠지만 양쪽이 동량의 가치로 팽팽하게 맞서니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수도원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금의 순수한 사랑의 열정 때문에 (최 전도사가) 상처를 입겠지만 사랑의 상처는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사랑은 뿌리가 튼튼해서 한 싹이 잘리면 또 다른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그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새싹을 틔울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난 생각도 떨칠 겸 수원 ‘말씀의 집’으로 피정을 갔다.
수련 이틀째였다. 창세기 12장 1~5절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을 묵상하는 가운데 뜻밖의 음성을 들었다. ‘네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이미 고향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왔잖아요?” 이어서 들려온 음성은 ‘이곳은 이미 너의 고향이 됐다’라는 말씀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난 이날 묵상 속에 들은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내 속마음인지 식별하기 위해 계성여중 교사직을 그만두고 몇 개월 동안 소임지를 떠나 기도에 전념했다. 한 달간 침묵하는 수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기간 최 전도사는 나를 찾기 위해 애를 쓰며 돌아다녔다. 침묵 수련이 끝났을 때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날 찾아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최 전도사님을 사랑한다”며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결론 내렸다”고 선을 그었다. 그가 떠나고 나 역시 말씀의 집을 떠나 충남 홍성 광천읍의 작은 성당으로 갔다.
최 전도사는 이번에도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를 찾아왔다는 이유로 나는 다시 내 모교인 쌘뽈여고로 소임지를 옮겼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또 나를 찾아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8) ‘하나님! 그를 살려주세요, 그에게로 가겠습니다’
가사도로 가겠다는 마지막 전화통화에 살아만 있게 해달라 기도…마음 돌린 그와 통화 후 수녀원 떠날 준비
실연의 아픔에 모든 걸 던지려고 떠난 최일도 목사가 가사도에서 찍힌 사진. 가사도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인연을 맺은 이장이 최 목사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었다.
저녁 기도시간 15분 전 전화벨이 울렸다. 한 수녀가 받더니 말없이 날 바꿔줬다. 수화기 저편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깐 사이에 남자 목소리로 바뀌었다. “저, 최일도입니다.” 자기 이름으로는 아무도 나를 바꿔주지 않자 학교 근처 제과점 주인아주머니를 통해 전화한 것이다.
일부러 냉정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곤 황급히 전화를 놓으려는데 귓등으로 다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녀님, 정말 이러시면 이 세상에서 다시는 제 목소리 못 듣게 될 겁니다. 이대로 가사도(加沙島)로 갈 테니까요.” 전화는 ‘탁’ 소리를 남기고 끊겼다.
기분이 석연찮았지만, 그렇게라도 단념하고 돌아섰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지 사방에 장애물뿐이에요. 내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답니다. 내 사랑은 이제 자취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나 봅니다. 가사도 앞바다에 모든 추억을 던졌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 맞춰봐도 그의 마지막 말이 섬에 틀어박혀 낙도 선교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날 밤 기도를 어떻게 끝냈는지 기억에 없다. 곧바로 수녀원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울며불며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하나님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끝없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부턴가 마음에 하나의 결심이 자리 잡으며 점차 평정을 찾았다. 기도는 차분해졌고, 일관성 있게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그를 살려주세요. 만일 그를 살려 보내시면 제가 이 삶에서 죽고, 그에게로 가겠습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저희를 통해 이루고 싶은 일에 협력하는 길이라 여기겠습니다.’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로 해일처럼 부풀고 뒤집히던 내 마음이 잔잔해졌다. 그리고 지난여름 수원 말씀의 집에서 받은 ‘네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1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기도하다가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미치면 저절로 눈이 떠졌고, 길을 걷다가도 그만 다리에 기운이 쑥 빠지면서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길이 없어 그저 애꿎은 전화기만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그였다. 실제 가사도까지 갔던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음을 돌려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목이 멨다. 그의 말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제가 서울로 갈게요. 그대로 기다리세요. 가서 말할게요.”
그와의 통화 후 난 수녀원을 떠날 준비를 했다. 종신서원을 풀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다. 10년 넘는 세월 동안 수녀원에서 얽히고설킨 관계의 뿌리가 잘리면서 이별의 출혈이 낭자했다. 그러나 용기를 냈다. 1981년 7월 24일 나는 수녀원의 문을 열고 바깥세상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뎠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9) 10년 넘는 수녀원 생활 정리… 신혼의 행복 시작
순탄치 않은 결혼, 결연한 의지로 감행… 좁고 낡은 단칸방 신혼집이지만 행복
1982년 9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김연수 사모와 최일도 목사가 기념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짓고 있다.
나는 매사가 낯설고 서툴렀다. 10년 넘는 수녀원 생활 동안 대중문화를 접한 일이 없었다. 누가 가수 조용필씨 얘기를 하기에 그가 시인이냐, 소설가냐 물었던 적도 있다. 내게 더욱 낯선 것은 개신교 예배와 신앙의 표현이었다. 되도록 홀로 기도하고 침묵 속에서 묵상하던 나는 선언하듯 크게 드러내는 신앙표현을 따라 하기 힘들었다.
최일도 전도사는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크고 작은 여러 교회들로 인도했다. 우리는 그중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에 정착했다. 예배 분위기도 잘 맞았고 고 김동익 목사님의 설교도 큰 은혜로 다가왔다. 적응에 시간은 걸렸지만, 우리는 남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첫 데이트 때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다 그가 선물이라고 건넨 주부생활 잡지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전도사가 내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지금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5~7년 후에 목사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학력고사를 보고 장로회신학대에 들어가는 건데 목사가 되려면 9~10년은 걸려요.”
나는 무엇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선택이 먼 훗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두 번째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찬성했다. 머릿속으로 앞날을 그려봤다. 10년 동안 학생과 살아갈 일이 막막했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계성여중 교사로 있을 때 다른 교사들을 보니 혼자 벌어 애 셋도 키우고 하더라. 내가 벌면 되지’하는 생각이었다.
그날 나는 수녀 시절 품어왔던 ‘모든 이의 모든 것’이란 모토 대신 ‘오직 당신의 행복을 위해’를 내 생의 캐치프레이즈로 선택했다. 최 전도사는 한 번에 장로회신학대에 합격했다. 얼마 후 나도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취직했다. 얼마 뒤인 1982년 9월 4일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이 쉽지는 않았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길 원했다. 수녀 출신에 나이도 다섯 살이나 많은 나와의 결혼은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부모님과 형제, 자매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수녀원에 들어갔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결연한 의지로 우리는 결혼을 감행했다.
혼수도, 많은 사람의 축복과 격려라는 장식도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의 모든 것이 됐다. 신혼집은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최대의 선물이고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때의 마음을 담아 썼던 시 ‘그대 약속 별빛 되어’ 중 일부를 소개한다.
“두렵지 않습니다./ 그대 손잡고 가는/이 길/ 안내장도 지도도 없이/ 고향 떠나 찾아나선/ 낯선 길도/ 그대의 약속 별빛 되어/ 달빛 숨은 어둠조차 길을 엽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0) 어렵사리 만든 등록금, 밥 굶는 친구 식권 사준 남편
월급만으로 등록금·생활비 감당 어려워 수업 마치고도 원고 교정 아르바이트
아들 산이의 백일 때 집에서 찍은 가족 사진. 여유가 없었던 결혼 초에는 기념일은 돼야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결혼 후 내 일과는 새벽 5시 30분 아침 식사 준비로 시작됐다. 밥을 먹고 아침 묵상을 끝내면 설거지할 틈도 없이 성북역(현 광운대역)을 향해 뛰었다. 오전 7시 40분에 출발하는 경원선 열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교사 월급으로는 남편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감당하기 어려워 원고 교정 아르바이트도 했다. 교감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도 퇴근하지 않는 날 보며 “남편 뒷바라지도 팔자”라며 측은해 했다. 의연한 척했지만, 서글픔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내 맘을 어떻게 알았는지 짧은 글로 날 위로하곤 했다.
그런 내게도 남편이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남편은 때때로 용산에 있는 행려자·노숙자 식당인 ‘베들레헴집’에서 봉사하다가 집에 못 들어오고 이튿날 곧바로 학교에 가곤 했다. 명절 때는 이집 저집 친구집을 찾아다녔다. 남편은 내 생각과 너무도 다르게 행동했다. 난 봉사를 해도 결혼한 사람은 집에 들어와야 하고, 명절엔 멀리 갔다가도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그가 등록을 놓고 고민하는 일이었다. 남편은 신학생이 너무 많은데 자기까지 신학공부를 하는 게 어쩐지 하나님께, 그리고 친구들에게 잘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를 간신히 말려 등록금을 들려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2주 정도 지났는데 등록금을 아직 내지 못했다고 했다. 밥 굶는 친구가 있어 식권을 사줬다나. 등록금이 모자라 낼 수 없었다고 했다. 어렵사리 만든 등록금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혼한 다음 해에 첫째인 아들 산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기르면서 교직생활을 하기가 버거웠다. 아기를 맡아서 봐 줄 사람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1년은 친정엄마가 맡아 줬지만, 그다음부터는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사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았다. 이번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라왔다. 남편의 교육전도사 월급 15만3000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물질적 결핍은 때로 사랑을 이지러지게 하고 사람을 각박하게 몰고 간다. 이때는 돈 때문에 다툰 적도 많았다. 돈을 벌기 위해 학습교재도 팔아보고 개당 200원 남는 샴푸도 팔아보는 등 무진 고생을 했다. 나는 이런 고생이 힘들었고, 남편은 고생하는 나를 보며 괴로워했다. 하는 수 없이 한 학생에게 국어 과외공부를 시켜주고 10만원을 받아 간신히 삶을 꾸려 나갔다.
둘째 가람이가 태어나니 나가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일 아침 금식기도 후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광장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다행히 시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겠다며 전도사직을 내려놓고 오셨다. 그러나 풍선효과처럼 한 문제가 해결되니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결혼을 반대했던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화를 내며 야단을 치시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1) 남편 수상한 씀씀이에… “혹시 숨겨놓은 식구 생겼어?”
고부갈등에 양쪽 달래다 지친 남편… 밖으로 돌며 지출 늘어 외도 의심
시어머니 현순옥 여사의 팔순 때 찍은 사진. 결혼 초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어머니는 지금은 누구보다 며느리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는 든든한 우군이 됐다.
아무리 노력하고 잘 모시려 해도 시어머니 눈에 나는 시원치 않은 며느리였다. 목사 딸도, 장로 딸도 아닌, 수녀 출신 며느리가 예쁘게 보일 리 없었다. 사사건건 나를 못마땅해 했다. 두 손주를 돌보다 힘이 들어 짜증을 내는 것도 나에 대한 구박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와 다시 따로 살 순 없었다. 아이 돌봄 문제도 있지만, 가람이가 생겨 집을 이사하면서 시어머니 돈을 많이 빌렸던 터라 곧바로 두 집으로 나눠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됐다.
그 시절 나를 봤던 친정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울었다. 얼굴에 생기가 하나도 없이 너무 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친구는 내 모습을 보더니 “너는 사막에서 나와 진흙밭에 빠졌구나”라며 안쓰러워했다.
시어머니와 나의 불화로 더 힘든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쪽저쪽 달래다 지친 남편은 아예 밖으로 빙빙 돌았다. 시집살이에 남편의 무관심까지 점입가경이 따로 없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다른 곳에서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와서도 무슨 일인지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다.
그 무렵 남편이 ‘식대’라고 적고 가져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당시 우리는 조금 기이한 지출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일정액의 돈을 경대 서랍에 넣어두고 꼭 필요한 만큼 각자 꺼내 쓰는 방식이었다. 내가 벌어오는 돈을 쓰는 게 행여 남편에게 부담될까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다만 1만원이 넘는 돈은 용도를 기록해두기로 했다.
한동안 참다가 남편에게 조용히 물었다. “당신 식대가 왜 갑자기 그렇게 늘었어요. 어디 숨겨놓은 식구라도 생겼어요.” 그래도 남편은 말이 없었다. 기껏 꺼내는 말이 직무상 만남이라느니 상담이라느니 군색스러운 변명 정도였다. 이쯤 되자 나는 밤늦도록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오는 일과 돈이 없어지는 일을 연결 지어 추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틀림없어. 어떤 여자를 만나는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참을 수 없었다. 그날부터 그의 수첩을 몰래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첩에 여자 이름도 몇 나오고, 만난 장소도 나와 있었다. 주로 찻집 이름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학교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수첩에 나와 있는 찻집 이름을 찾아 헤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남편은 당시 상담을 청해 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하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다양했는데 젊은 자매도 있었다. 남편이 상담한 내용 중에는 목회자에 대한 신뢰를 갖고 털어놓은 개인적 비밀도 있어서 설령 아내라 해도 말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 리 없는 난 그날 밤 남편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했다. 오히려 남편은 자기를 의심한다며 버럭 화를 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기가 막혔다. 순간 난 결심했다. 집을 나가자. 시어머니 일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남편이란 사람이 날 위로하기는커녕 딴 맘 먹고 밖으로 나돌다니. 아무리 기도하며 이겨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2) 쏟아지는 눈물 참으며 아이들 밥 차려 놓고 집 나와
집 나갈 마음 들 때면 빨래하며 달랬지만 도저히 화 풀리지 않아 ‘예수원’으로 가출
김연수 사모가 도피차 찾아간 강원도 태백 예수원의 전경. 김 사모는 약속도 없이 온 자신을 예수원 식구들이 따뜻하게 맞아 줬다고 회상했다. 국민일보DB
몇 번인가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입다 벗어 놓은 옷가지며 이불 홑청을 다 뜯어서 빨았다. 내가 살던 자리는 내가 정리해 놓고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탁기가 없어 빨래를 큰 그릇에 담고 세제를 풀어 박박 빨아댔다. 부풀어 오르는 거품이 내 분노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빨래가 다 끝날 무렵이면 집을 나가겠단 결심도 물에 씻긴 듯 사라졌다.
빨래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날도 있었다. 이날은 특히 심했다. 자정 넘어 가까스로 붙였던 눈을 떼고 부스스 일어났다. 동이 트기 전이었다. 가방에 갈아입을 옷 두 벌을 넣고 세면도구와 성경, 찬송가를 챙겼다. 남편은 지난밤의 다툼은 잊었는지 입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자는 아이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났다. ‘맘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다가 문득 아이들 밥이라도 해놓고 가자는 생각에 다시 들어왔다. 조용히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아침상을 차려놓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며 태백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예수원’이었다.
저녁이 다 돼서야 예수원에 도착했다. 나는 뜬눈으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예수원 사람들에게 금식한다고 말하고는 홀로 계곡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봤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슬픔이 한꺼번에 폭발했는지 자꾸만 눈물이 났다. 큰 소리로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사흘을 보냈다. 밤에는 예수원에서 지내고 아침 일찍부터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산골짜기 나무 그늘에 앉아 울다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도 지치면 멍하니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나흘째 되던 날부터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흐르는 계곡물만 바라봤다. ‘물은 시시각각 부닥뜨리는 수많은 장애물을 말없이 스치며 어쩌면 저렇게 잘도 흘러가는 걸까. 그런데 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내 삶에 박혀 있는 몇 개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왜 여기 와 있는 걸까.’
생명은 어쩌면 번민의 작은 알갱이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울음 대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는 대로 다 불렀다. 그러는 사이 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오랜 번민이 계곡의 물줄기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나를 조금씩 자유롭게 했다. 며칠 굶었는데도 힘이 솟았다.
나는 고뇌의 저편에서 돌아와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위로가 몰려왔다. ‘그들은 모든 변화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 그분 안에 있다는 건 긍정적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무얼 두려워하랴.’
순간 시어머니와 남편이 받았을 상처와 아픔이 내게 오롯이 전달됐다. 내가 힘든 것처럼 저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아픔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또 울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아픔에 눈먼 장님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고, 그분들을 더욱 사랑하지 못한 후회함과 아픔 때문에 울었다.
‘사랑하다 얻은 상처는 더욱 사랑할 때만 치유되니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 말하자.’ 다음 날 나는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3) 남편의 ‘대책없음’은 하나님의 ‘대책’이었나
가족 부양 않고 빈민선교 고집하는 남편, 직장까지 정리하며 무언의 경고 했지만 단독목회의 길
김연수 사모의 남편 최일도 목사가 개척한 다일공동체교회 초기 모습. 최 목사는 1989년 서울 청량리 뒷골목, 588홍등가 주변 폐업한 인쇄소 사무실을 빌려 교회를 세웠다.
예수원에서 돌아온 후 시어머니와의 갈등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됐다. 그런데 남편이 가끔 어디로 사라지고 밖에서 돈을 쓰고 오는 일은 그치지 않았다. 나는 벼르고 벼르다 어느 날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는 날 청량리의 한 설렁탕집으로 데려갔다. 거기엔 집 없는 노인들 몇 분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앉아 있었다. 남편은 익숙한 듯 곧바로 계산대로 가 그들의 밥값을 계산했다. 이어 그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다시 가게를 나왔다. “여보 봤지? 요즘 내가 밖에서 하는 일이야. 궁금히 여기는 돈도 이렇게 썼고.”
여우를 피해 범을 만난다더니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설마 계속할 건 아니죠.” 집에 도착하자마자 매몰차게 말했다. 남편은 “뭐, 봐가면서…”라며 얼버무렸다. 속이 탔다. 나는 그날부터 남편을 ‘대책 없음’이라 불렀다. 돌이켜보면 남편의 대책 없음은 하나님의 대책(大策)이었다. 그러나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직장을 정리했다. 가족들 생계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남편이 그 일을 그만둘 거로 생각했다.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돈으로 조그만 차를 한 대 샀다. 곧 졸업하는 남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앞으로 집안 살림 이끌어 가려면 바쁠 테니까 신발 바꿔 신고 열심히 뛰어 달라는 일종의 주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빈민선교는 이제 끝내야 한다는 단호한 경고의 의미이기도 했다.
난 남편이 신학교만 졸업하면 큰 교회 전임전도사로 부임해 가계를 책임져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남편은 졸업 후 어떤 교회로도 부임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생계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통장 잔고가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7살, 5살 두 아이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하는 수 없이 전에 하던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기독교서회에서 리메이크하는 책들을 받아다 원고를 다시 쓰기도 하고, 번역 원고들의 윤문 및 문법 교정을 시작했다. 원고 한 장당 500원짜리였다. 나는 매일 원고를 썼다. 살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하루 150장까지 쓸 때도 있었다. 이렇게 몇 달을 살자 오른손 엄지손가락 인대가 늘어났다. 그래도 책 한 권을 마치면 30만~40만원 정도 수입이 들어왔다.
손에 붕대를 감고 원고를 쓰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은 마지못해 집 근처 교회에 전임전도사로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3달을 못 넘기고 그만뒀다. 얼마 뒤 다일공동체교회를 개척했다. 1989년 9월 10일 다일공동체와 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남편의 대책 없는 행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이 신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힘들 때마다 남편이 목사가 돼 교회에 부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힘을 내곤 했다. 그만큼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었지만, 도무지 즐겁지가 않았다. 남편은 내 기대와 달리 청량리 뒷골목, 그것도 588 홍등가 주변 폐업한 인쇄소 사무실을 빌려 단독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4) 남편 “당신은 선녀”… 실제는 늘 ‘나무꾼’ 역할
남편 대신 육아·직장일 병행하며 생계 책임지는데 남편은 역 주변 행려자와 라면 끓여 먹어
김연수 사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일할 때 사무실 옥상에서 직장 동료들과 함께했다.
결혼 전 남편은 자신을 나무꾼으로, 나를 선녀로 불렀다. 어느 때는 선녀가 천사로 바뀌기도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이 부르는 호칭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역할은 바뀌었다. 나무꾼 여자와 선남으로. 생존의 험준한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먹을거리와 땔감을 장만하는 건 내 몫이었다.
교회를 개척하고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계에 대한 걱정을 할 때마다 남편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며 담대해 했다. 참 신기하고 놀랍게도 남편의 말은 현실이 됐다. 남편을 따라 다일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던 날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의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다만 이번에도 나무꾼의 역할은 나였다.
창립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크리스챤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 강원용 목사님으로부터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챤아카데미는 1960년대 도입된 대화운동, 중간지도자 교육, 의료보험법, 모자보건법 등의 산실이 된 곳으로 내가 두 달 전에 이력서를 내놨던 곳이었다.
그간 해왔던 원고 아르바이트는 하는 만큼 수입이 돼 돌아왔지만, 그런 만큼 시간을 돈으로 계산하는 나쁜 버릇이 생겨 점점 멀리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만남조차 반갑게 여기지 않는 내 모습에 놀라 월급 받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왔다.
출근 첫날 자리에 앉자마자 감사 기도를 드렸다. 다행히 월급도 내가 교사로 있을 때만큼으로 책정됐다. 내게 주어진 일은 강 목사님의 책들을 읽고 관련 인사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자서전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설교 테이프를 풀어 원고로 만드는 일도 했다.
강 목사님의 설교 정리는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난필에 한문과 영어, 독일어를 섞어 쓴 원고라 일은 고됐지만 내용이 너무 좋았다. 매 설교가 구약·서신서·복음서 세 개 텍스트로 짜여 있었고, 이를 꿰뚫는 해석과 지혜 그리고 미래를 예견하는 놀라운 힘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훌륭한 기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한국사와 기독교 역사에 족적을 남기신 분의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이곳에서 일을 배우면 남편의 목회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겠단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우리는 직장 근처인 수유리로 이사했다. 반지하였지만 직장에서 가까워 아침에 출근했다 아이들 점심 챙겨주러 잠깐 들르기에 용이했다.
이렇게 내가 육아와 직장 일에 매달리는 동안 남편은 청량리역 주변에서 노숙하는 행려자들과 본격적으로 라면을 끓여 먹기 시작했다. 난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회를 개척했으니 날마다 교회에 가서 전도를 하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남편은 허름한 점퍼에 낡은 구두를 신고 출퇴근했다. 내가 퇴직하며 샀던 차는 낡은 봉고차로 바꿨더랬다. 그 통에 우리 두 아이는 사뭇 불만이었다. 남들로부터 너희 아빠 실직자 아니냐는 질문까지 받았단다.
하루는 윗집 아이들한테 “너네는 가난해서 지하실에 살지. 집도 없어서 세를 살고 있잖아”라는 놀림도 받았다. 이런 얘길 들을 때면 속이 너무 상했다. 하루는 참다 참다 남편에게 “지금은 독립운동 한다고 처자식 팽개치고 만주벌판 헤매는 시대가 아니에요. 가족 희생시키면서 하는 건 미덕이 아니에요”라고 쏘아붙였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5) 남편에게 통장 내밀며 “행려자들 밥 지어주세요”
행려자에게 라면 먹이는 게 안타까워 밥 못 넘기는 남편 보며 함께 울어
김연수 사모의 남편 최일도 목사가 다일공동체 초창기 시절 서울 청량리에서 행려자들을 대상으로 라면을 끓일 때 썼던 양은 냄비.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르바이트도 다시 시작했다. 마침 반포에 아는 분이 자기 아들과 친구 4명에게 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문법 정도 가르치면 되겠거니 해서 갔더니 뜻밖에 독서지도를 해달라고 했다. 나름의 독서지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반응이 괜찮았다. 덩달아 아이들 성적도 올라 학부모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입소문이 나더니 여기저기서 같이 하자는 데가 많았다.
내가 이렇게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며칠에 한 번씩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어떤 날은 벼룩이 튀는 옷을 입은 채로 아이들을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 벼룩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은 톡톡 튀는 벼룩이 신기하다며 마냥 재밌어했다.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려니 속이 끓어올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부글거리는 맘을 부여잡고 밥상을 차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남편이 밥을 제대로 먹질 못했다. 몇 번 밥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다가는 이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처음엔 속이 안 좋은가보다 했다. 하지만 남편 눈가에 가늘게 맺힌 눈물을 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마음 한구석에 짚이는 게 있었다. 그는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삶이 뭔 거 같아요. 삶은 라면이에요”라고 남편이 물었던 적이 있다.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린가 했는데 평소 술주정이 심하던 젊은이가 남편에게 묻더란다, 삶이 뭐냐고. 왜 어떤 놈은 살맛 나고, 자기는 죽을 맛이 나냐고. 남편이 뭐라 할 말이 없어 듣고만 있는데 곁에 있던 노인이 삶은 라면이라고 했단다. 남편은 두 사람의 대화가 하도 어이가 없어 웃으려다가 문득 그게 웃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삶이 라면으로 이어지는 기막힌 현실에 그만 울컥하더라고 했다.
남편은 청량리 한복판에서 행려자들과 같이 먹고 함께 뒹굴어도 결코 그들과 똑같을 수 없는 자신을 보면서 자책했다. 그들에겐 라면을 끓여주고 자신은 집에 와서 따뜻한 밥을 먹는다는 것에 목이 메어 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뒤집히다 못해 꺽꺽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되려 머쓱해했다.
한참을 울다 남편에게 예금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으로 당신 소원 푸세요. 한 끼라도 밥을 해서 그 사람들에게 실컷 먹여 보세요.” 남편은 놀란 눈을 하고 “이걸 어떻게 갖고 가느냐”고 했다.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고 일부러 나는 “무거운 라면 끓일 물도 들고 다니면서 이렇게 가벼운 것도 못 들고 가냐”고 면박을 줬다.
그리고 진심을 전했다. “하루라도, 한 끼라도 그분들에게 밥을 지어드리세요. 당신 소원이기도 하고, 내 소원이기도 해요. 그러니 제발 속울음 좀 그만 울어요.”
남편은 그 돈으로 10인분 밥을 지을 수 있는 전기밥솥 4개와 40명분의 수저를 샀다. 남편은 그해 부활절에 흰쌀로 지은 밥과 소고깃국, 김치와 잡채 등을 식판에 담아 거리의 식구들과 나눴다. ‘밥퍼’의 시작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6) 영성훈련의 꿈, 개신교 최초 수련원으로 결실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수련원 열고 싶어 강원룡 목사님 찾아가 운영 계획 털어놔
김연수 사모가 지난 1월 경기도 가평 설곡리 다일영성수련원에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0년 전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올해 200회를 맞았다.
신혼 초 광장중학교 교사 시절 교감 선생님이 한번은 내게 꿈이 뭐냐고 묻기에 이렇게 답했다. “산 좋고 물 좋고 경관이 수려한 곳에 기도하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들이 조용히 묵상할 수 있는 ‘침묵의 집’을 짓고 싶어요.”
남편과 결혼하고 수녀복을 벗으면서 개신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다. 내가 찾은 건 영성수련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아이고, 그야말로 꿈이네”라며 혀를 차셨지만, 난 그때 영성수련원에 대한 꿈을 진지하게 꾸고 있었다. 남편 신학교 커리큘럼에도 관련된 내용이 없길래 장로회신학대 오성춘 교수님을 찾아가 “P학점(이수/미이수)으로 처리할 수 있는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신학대 교실 하나만 내어 주실 수 있느냐”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물론 수업이 쉽게 생길 리 없었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발로 뛰면서도 영성수련에 대한 꿈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귀 밝으신 분이셨다.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영성수련의 첫발을 떼게 도우셨다. 입사한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강원룡 목사님을 찾아가 “이곳에서 풀려고 들고 온 보따리가 있는데 이러다간 풀어보지도 못하겠습니다”고 운을 뗐다. 강 목사님이 “그 보따리가 뭐냐”고 물으시기에 영성수련 계획을 말씀드렸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지만 강 목사님은 시원하게 “한 번 해봐”라고 말씀하셨다.
1980년대 말은 각 교단 신학대마다 영성신학 강의가 막 시작됐던 때였다. 나는 일주일 동안 기도하며 목회자들을 위한 영성수련 프로그램안을 작성했다. 총 4단계로 구성된 수련과정을 우선 수립하고, 단기·중기·장기 수련안을 부가적으로 덧붙인 계획안이었다. 우리나라 1호 영성신학 박사인 가톨릭대 박재만 교수님을 비롯해 한신대 김경재 목사님, 오 교수님 등이 계획안 작성에 도움을 주셨다. 계획안은 크리스챤아카데미 임직원 설명회와 교회 협력위원회, 신학자 협력위원회 심사를 거쳐 최종 프로그램으로 확정됐다.
이 과정에 어려움도 있었다. 영성수련 프로그램의 기본이 되는 침묵에 대한 이견을 조율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목사님들은 영성수련 전 과정을 침묵 속에 진행한다는 데 어색해 했다. 대화시간을 갖고 나눔의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견해였다. 그러나 나는 깊이 있는 영성생활을 위해선 침묵수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침묵수련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훈련이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고 여겨졌다.
다행히 목사님들의 양보로 이 논쟁은 일단락됐다. “저렇게 고집이 세니, 수녀원에서 10년씩이나 살았지.” 목사님들로부터 칭찬인지 질타인지 모를 말을 들으면서 얻어낸 결과였다. 영성수련이 좋은 표현인지, 영성훈련이 적합한 표현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었지만 영성수련으로 최종 합의됐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개신교 최초 공식 영성수련이 1990년 7월 18일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7) 가평에 터 잡은 영성수련원… ‘회복의 쉼터’로 자리매김
영성수련원은 영적으로 재충전하는 곳… 1999년 이후 누적 참가자 수 2만명 달해
경기도 가평 설곡리에 위치한 다일영성수련원 전경. 하나님께서는 ‘산 좋고 물 좋고 경관 수려한 곳에 침묵의 집을 주세요’라는 기도를 문자 그대로 이뤄주셨다.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진행된 영성수련 프로그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논쟁이 됐던 침묵수련은 참가자들로부터 가장 좋은 프로그램으로 뽑혔다. 2위는 묵상기도였고, 3위는 영성신학 강의였다.
영성수련 프로그램이 최초로 개신교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목회자가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일일이 다 응할 수 없어 남편과 함께 ‘영성수련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을 썼다. 남편이 신학대학원 졸업논문을 영성수련에 관해 썼고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책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챤아카데미가 대화운동에 사업의 초점을 맞추면서 1년6개월 정도 진행된 영성수련 프로그램은 그걸로 막을 내렸다. 나 역시 다일 사역이 많아지면서 1992년 1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진행된 영성수련 참가를 끝으로 크리스챤아카데미 종교사회분야 간사직을 사임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이때의 경험은 훗날 내가 다일공동체에서 다일영성수련원을 시작하는 데 초석이 됐다.
나와 남편은 여러모로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지만, 앞으로 더욱 정진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1999년 4월 5일 다일영성수련원을 열었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에 터를 마련했다. 애초 예정된 곳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무산돼 어렵게 구한 곳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 몇 년 후 예정지였던 곳을 가보니 산사태가 나 계곡이 돼 있었다. 이곳에 수련원을 지었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나는 그간 다일공동체 가족들과 하던 영성수련을 더 체계화했다. 청량리 도심 한복판이 다일공동체의 나눔과 섬김의 사역 현장이라면 영성수련원은 주 안에서 쉼을 얻고 영적인 재충전을 하는 곳이었다. 3단계로 나눠 1단계 ‘아름다운 세상 찾기’ 2단계 ‘작은 예수 살아가기’ 3단계 ‘하나님과 동행하기’란 이름을 붙였다. 남편은 1·2단계를, 나는 3단계를 주로 맡았다.
소문을 듣고 찾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2004년 우리는 좀 더 넓은 설악면 설곡리 터로 이전했다. 지금의 설곡산 영성수련원이다. 이곳에 올 때도 이중계약 논란이 불거지는 등 계약부터 인수, 리모델링까지 과정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나 온 다일공동체 가족이 눈물로 기도한 끝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각보다 더 큰 위로와 은혜를 부어주셨다. 우리 권리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찾으면서 이중계약 논란은 잘 해결됐고, 설곡산 영성수련원은 매년 2000명 넘는 이가 찾는 곳으로 성장했다. 누적 참가자 수는 2만명이 넘는다. 영성수련 200회를 맞은 올 초에도 70명의 수련생이 모였다.
외국에서도 찾아오는 지금의 다일영성수련원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밥 지을 쌀이 없던 시절에 ‘산 좋고 물 좋고 경관 수려한 곳에 침묵의 집을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올려 드렸던 기도가 떠오른다. 감사하게도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이유로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믿음을 회복해 교회로 돌아왔다. 이혼을 두고 고민하던 부부가 첫사랑을 회복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거나 건강을 회복한 사람도 많았다. 하나님은 역시나 귀가 밝으신 분이다. 또한 기도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뤄주시는 분이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19) 기독교 최초 무료병원 ‘다일천사병원’은 주님의 기적
남편의 평소 지론대로 시작한 천사운동 밥퍼와 함께 언론에 조명… 뜨거운 관심
2002년 10월 4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기독교 최초 무료 병원 다일천사병원이 문을 열었다. 사진은 개원식날 병원 전경.
100만원씩 1004명이 낸 돈으로 병원을 건립하려는 천사운동을 시작하면서 우린 10억400만원이면 그럴싸한 종합병원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우리가 병원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됐다.
병원 건립 과정에서 만난 한 병원 관계자는 “종합병원이 되려면 최소 40병상 규모를 갖춰야 하고 한 병상 당 1억은 필요하다”고 했다. 부지매입과 건축비 등을 포함하면 종합병원을 짓는 데 최소 80억원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다. 단지 목표액을 조정했을 뿐이었다. 현실을 보면 종합병원을 세울 조건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우리 기도는 간단했다. “무료병원을 허락하소서.” “잔금을 무사히 치르게 해주소서.” 소리 없는 기도는 하늘까지 가고, 끊임없는 기도는 온 세상을 감동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천사운동을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 천사운동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남편이 다일공동체 밥퍼 사역을 알리기 위해 수없이 되풀이했던 말이다. 무료 병원 건립을 위한 천사운동을 전개하면서 남편이 외친 구호는 “아픈 사람은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가 있습니다”였다. 너무나 당연해 무의식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이 말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천천히 번져 나갔다.
언론도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004명의 천사회원이 최초로 모인 ‘제1회 천사의 밤’ 행사는 방송사 9시 뉴스에 소개될 만큼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다. 일간지와 월간지, 각종 방송에서 다일의 밥퍼 사역과 함께 천사운동을 소개했다. 남편이 쓴 책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사역은 좀 더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천사운동으로 모은 헌금이 20억원을 넘어서자 남편은 1998년 12월 다일복지재단을 설립했다. 더 투명하게 잘 관리하기 위해 사회복지법인을 만든 것이다. 남편과 이사진들 전원이 내게 상임이사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이사(집 옮기는 일)를 그만큼 했으면 됐지, 또 무슨 이사(재단)에요. 더욱이 상임이라뇨.”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남편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쓸 돈 못 쓰고 보낸 귀한 헌금 관리를 가장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 가장 신속하게 보고 받을 수 있겠다는 남편 생각도 일리가 있어 마지못해 수락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2002년 10월 4일 가난한 공동체가 만든 기독교 최초 무료병원 다일천사병원이 문을 열었다. 세워진 것도 기적이었지만, 오늘까지 운영되는 것이 더 큰 기적이다. 18년간 무의탁 노인, 노숙인, 외국인 근로자 및 절대 빈곤지역에 사는 이웃나라 어린이 등이 찾아와 생명을 얻고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다는 말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20) 남편이 쓴 ‘밥퍼’ 폭발적 반응… 인세 3억 모두 기부
책 유명해지며 강의·방송 출연 요청 쇄도
남편 최일도 목사가 쓴 책 ‘밥 짓는 시인 퍼 주는 사랑’ 표지 사진.
1995년 12월 5일 남편이 쓴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밥퍼)’이 나왔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목사가 쓴 글이라 얼마나 팔릴지 모른다는 출판사의 걱정은 기우였다. 당시 출판사 쪽 표현을 빌리면 “목사님, 책이 설사 나듯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밥퍼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남편에게는 국내외 강의 요청이 쏟아졌다. 방송사 출연 요청도 줄을 이었다. 나도 함께 출연해달라는 곳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막내 별을 임신하고 있어 정중히 거절했다.
이 무렵 나는 너무 감사한 일이 많았다. 밥퍼로 유명세를 치렀지만 그만큼 사역에 날개를 달았고, 노산임에도 별을 건강하게 낳았다.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전개되는 동안 밥퍼 인세가 3억원을 뚝딱 넘어섰다. 나는 이 돈으로 뭘 할지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선 집을 한 채 사야지. 30평 정도 아파트를 사고 남는 돈으로는 뭘 할까’ 당시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가 1억8000만원 정도였다. 독서지도 하는 곳 대부분이 반포, 압구정 쪽이었던 터라 그곳 학부모들로부터 이사 오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렇게 온갖 꿈에 부풀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 돈을 곱게 집안일에 쓰게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남편이 인세를 찾아오라고 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남편이 되도록 적은 금액을 갖고 오라고 하길 바라며 물었다. “얼마나요?” 남편의 말은 단순했다. “얼마긴, 전부지!” 이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돈을 한꺼번에 주신 건 우릴 통해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어서일 거야. 그러니 목적대로 써야지”라고 말했다.
야속함이 몰려왔다. 몇 푼이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어디든 다니며 일했던 나였다. 만삭의 몸으로 전철을 세 번씩 갈아타며 학생들 가르치러 이리저리 뛰었는데 어떻게 나와 가족을 위해선 한 푼도 안 남기고 다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루 다 쓸 수 없을 만큼 속상했다.
은행에 가면서도 ‘1억원 짜리 수표 2장, 5000만원 짜리 수표 2장을 만들자. 최악의 경우 5000만원이라도 우리 가정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돈을 지키자’는 생각이었다. 마치 큰 전쟁에 나가는 병사와 같은 비장한 마음이었다.
내가 출판사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말했다. “제 아내도 뜻에 동의해서 이렇게 돈을 다 갖고 왔네요. 1억5000만원은 북한에, 나머지 1억5000만원은 다일공동체에 기증하겠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모든 돈을 내놨다.
북한에 보내기로 한 돈은 특수 결핵진료 차량을 제작해 유진벨재단을 통해 북한에 보내졌다. 그로부터 3년 뒤 그 결핵 이동진료 차량을 통해 10만명 넘는 사람이 검진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공동체에 헌금한 돈은 다일영성수련원을 위해 쓰였고, 현재 다일공동체 모원이 되었다.
지금 와서 이때를 떠올리면 부끄러운 마음 가득하다. 가정을 위한답시고, 돈에 대한 애착으로 잔머리를 굴렸던 내 모습에 자책감도 든다. 남편의 선택은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되고 부당해 보여도 세월이 흐르고 보면 늘 옳았다. 그래서 이젠, 이해가 잘 안 될 때도 남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나보다 멀리 내다보는 남편을 더욱 존경한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21) 다일의 나눔정신, 아시아 빈민국으로 뻗어가
배고픔에 목숨 거는 북한 아이들 걱정에 중국에서 고아원 열며 시작된 해외사역
김연수 사모가 남편 최일도 목사와 함께 2017년 8월 중국 훈춘시에서 다일어린이집 이양식 후 아이들과 포옹을 하고 있다.
사랑은 본래 뿌리가 튼튼해 많은 줄기를 내린다. 다일공동체의 사역도 그랬다. 밥 굶는 이가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가 그 한 명을 위해 밥을 짓겠다는 게 다일공동체의 나눔 정신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아의 빈민 국가들로 이끄셨다.
다일의 해외사역은 1997년 중국에서 시작됐다. 결혼하면서 천사회원이 된 부부의 헌금이 씨알이 됐다. 부부는 첫 아이를 낳고 천사회비를 가져왔다. 둘째를 낳고선 “불쌍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천사회비와 함께 2000만원을 더 갖고 왔다. 이 소식이 알려져 몇 사람이 동참했다. 우리는 두만강 옆 중국 지린성 훈춘시에 어린이집(고아원)을 열었다. 이곳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북한의 라진, 선봉이 만나는 지점으로 북한 아이들을 위한 사역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꽃제비로 불리는 북한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양식을 구하러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우린 그들을 위해 쌀과 기초물품이 담긴 다일생명키트를 만들어 두만강 주변에 놓아뒀다. 훈춘시에서 태어난 고아들을 조선족, 한족 할 것 없이 힘껏 보살폈다.
2017년 8월 우리는 다일공동체 훈춘시 어린이집을 공식 이양했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중국 정부가 이제는 스스로 어린이집을 운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감사함으로 이양식을 치렀다. 훈춘시 민정국은 만 20년간 수고와 희생에 감사하다며 우리에게 감사패를 줬다.
우린 성인이 돼서 어린이집을 떠난 아이들이 명절에 고향으로 오면 머물 수 있도록 아파트 2채를 마련했다. 사랑의 씨앗이 마음 밭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는다. 어린이집 졸업생들은 현재 다일애심회라는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 중이다.
많은 분이 어떻게 다 넘겨주고 빈손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에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여긴다.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 믿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중국 다일공동체를 통해 이를 충분히 보여주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고아들을 돌보던 중국 다일공동체의 얘기가 금방 주변 국가에 알려지면서 우리의 사역은 베트남, 캄보디아로 확장됐다. 예측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이 있었다.
한 번은 캄보디아 다일공동체(캄다일)를 통해 척추측만증 환자인 뽀얀이가 다일천사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한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며 캄다일로 찾아왔다. 심장판막증 환자인 르은이 엄마였다. 캄다일 원장이 본 르은이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동맥과 정맥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렵게 긴급후원금을 모아 르은이를 한국으로 데려와 수술을 받게 했다. 기초체력이 약해 3번이나 중환자실에 들어갔지만, 감사하게도 잘 치료됐다. 새파랗게 죽어가던 르은이가 언제 배웠는지 싸이의 말춤을 추며 퇴원할 때 우리 모두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르은이의 엄마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애가 이렇게 건강해졌다”며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요, 후원자들과 의료진 덕분”이라고 고백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면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은 하나님 사역의 희미한 그림자일 뿐임을 고백하게 된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22) 지진 난 네팔에 구호대… 도착하자 밥부터 짓기 시작
구호활동 감명받은 주민이 기증한 땅에 국내외 후원받아 3층 규모 고아원 건축
다일긴급구호대가 2015년 4월 네팔 대지진 당시 이재민에게 전달할 30㎏ 쌀포대를 등에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걷고 있다.
2015년 4월 25일 네팔 대지진 뉴스가 전 세계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네팔에 분원이 2개나 있는 다일공동체도 큰 충격으로 흔들렸다. 그곳에 3명의 한국인 선교사와 그들의 자녀,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 단원 3명이 파송돼 있었다. 현지인 스태프도 적지 않았다. 먼저 그들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한솥밥을 먹는 가난한 아이들도 눈에 밟혔다.
소식이 전해진 첫날, 우린 긴급구호대를 조직했다. 네팔행 첫 비행기로 구호대를 파송하기로 했다. 비행기가 뜨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인도를 통해 육로로 들어가는 방법도 마련해놨지만, 다행히 비행기가 떠 다음 날 구호대 1진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로 출발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입국 허가를 위해 대기 중인 각국 구호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네팔 경찰과 군대의 안내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무작정 대기해야 할 판이었으나 다일공동체 현지 스태프들의 안내로 곧바로 재난 지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우린 신두팔촉 진앙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 텐트를 치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여진이 계속됐지만 다일이 어떤 단체인가. 첫 사역을 밥퍼로 시작한 단체 아니던가. 경황 중에 끼니조차 잊고 황망해 하던 주민들이 울며 밥을 먹었다. 하루가 지나자 다른 나라 구호팀들도 도착했고, 이들 역시 우리 식탁에 와서 밥을 먹고 구호활동을 펼쳤다.
다일공동체는 계속 구호대를 보냈다. 2진, 3진에 이어 9진까지 파견했다. 의료진들도 함께했다. 30㎏ 쌀자루와 생수, 모포들을 이재민들 거처를 찾아가 전달했다. 방역기를 둘러메고 전염병 예방을 위한 소독·방역 작업도 함께했다. 무너진 교회와 집들을 다시 세우고 환자들도 돌봤다.
9차에 걸친 사역을 마무리할 무렵 동네 주민이 갑자기 찾아왔다. 지진으로 발생한 40여명의 고아들이 걱정된다고 했다. 고민 끝에 우리가 고아원을 짓겠다고 했다. 그러자 힌두교인 한 사람이 자신의 땅을 기증하겠다고 동참했다. “다일의 구호활동을 처음부터 봤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너무 착하고 사랑이 많은 것 같다”며 “너무 큰 감동을 받아서 땅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 국내외 후원을 받아 40여명의 고아를 돌볼 수 있는 3층짜리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후원금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고 네팔 정부의 압박으로 기존 다일 사역이 문을 닫는 위기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고비마다 늘 길을 열어주셨다.
애초 네팔 사역의 시작부터가 주님의 계획하심 안에 있었다. 네팔 다일공동체 책임자인 부먼 팀세나 원장은 한국에 근로자로 와서 일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어느 날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어긋나 청량리역 광장에서 서성이다 밥퍼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저 같은 외국인에게도 밥을 주나요”라고 묻던 그는 “당연하지.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밥퍼야”라는 말에 감동해 물어물어 다일공동체 교회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교회 최초로 외국인 신자가 됐다.
현재 다일공동체는 네팔뿐 아니라 전 세계 10개 나라, 17개 분원에서 나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곳곳에서 팀세나 원장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23) 사는 동안 만났던 분들, 글에 담아 고마움 전하고 싶어
수녀원 나온 뒤 절필 선언, 5년여 흐른 뒤 시·수필 조금씩 발표… 글 쓰기 힘든 여건에도 주님 인도하셔
김연수 사모가 펴낸 시집과 수필집들. 이 중 ‘사랑이 있어도 때로는 눈물겹다’는 종합 베스트셀러 6위까지 올랐다.
“김연수 학생은 시인이 돼야겠네.”
수녀원에서 3년의 수련을 마치고 대학에 복학했을 때 내가 쓴 시를 처음 본 오탁번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오 교수님의 농담 섞인 말은 후에 현실이 됐다. 대학 졸업 1년 만에 시단에 등단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박목월 교수님께 시론을 배울 때도 시만 썼지, 시인이 될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화가가 될 생각은 해봤다.
첫 시집이 나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수녀원에 있으면서 시를 쓰고 발표했지만, 남편을 만나 수녀원을 나온 뒤에는 절필을 선언했다.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다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속죄였다.
5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와 수필 등을 조금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첫 시집 ‘숨어 사는 신화’가 나왔다. 다행히 첫 시집부터 인세를 받고 출판할 수 있었다. 등단만 했지 무명이었던 내게는 큰 감사거리였다. 두 번째 시집 ‘아득한 별에 꽃씨 묻으며’는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근무할 때 나왔다. 남편과 함께 쓴 실천신학서 ‘영성수련의 이론과 실제’도 그 무렵 썼다.
자전적 에세이 ‘사랑이 있어도 때로는 눈물겹다’는 남편이 쓴 ‘밥퍼’가 유명해지면서 독자들의 빗발치는 성화에 못 이겨 쓴 책이다. 쉰도 안 돼 자전적 얘기를 쓴다는 게 민망해 출판사의 요청에도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거절했었다.
사실 글을 쓰기 힘든 여건이기도 했다. 원고를 쓰다가 책상 위에 놓고 나오면 젖먹이 막내가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이어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내게 출판사 직원은 “이 기회에 집필실을 하나 마련하세요”라며 부추겼다. ‘집필실’ 말만 들어도 마음이 시원했다. “하나님 서재 한 칸만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책을 썼다.
1997년 여름, 책이 서점에 나오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2달 만에 종합베스트 6위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해 닥쳐온 외환위기의 거센 물결은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경직시켰고 책 판매량도 급감했다. 나중에 인세를 받았는데 딱 서재가 있는 전세집으로 옮길 만큼이었다. 서재 한 칸 대신 문학관 한 채를 달라고 기도할 것을…. 하나님은 기도대로 이뤄주시는 분이다.
그 뒤에도 많은 시와 산문을 썼고,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지만 정말 쓰고 싶은 글은 이제부터인 것 같다. 퇴직하고서 쓰겠다고 미뤘던 책들이 몇 권 있다. 우선 시편기도집을 완성하고 싶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영성수련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기본 구성을 다 짜놓은 책인데 시편을 공부한 다음에 쓰려고 여태껏 미뤄왔다. ‘영성수련의 이론과 실제’ 개정판도 쓰고 싶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멋지고 아름다운 분들의 이야기도 남기고 싶다. 그분들이 내 삶에 남긴 향기를 글에 담아 전하고 싶다.
이제 보니 나는 욕심꾸러기임에 틀림없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무엇보다도 묵안리와 설곡산 다일공동체 마당과 주변을 아름답고 유용한 꽃밭으로 만들고 싶다. 공동체 시작부터 해오던 일이지만, 3년 전부터는 먹는 꽃들을 길러 꽃차와 꽃식초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공동체 가족들도 기쁘게 함께하니 감사하다. 대학시절 시험공부를 하다 쉬는 시간 틈틈이 읽었던 원예와 조경 서적들이 이렇게 쓰이니 감사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역경의 열매] 김연수 (24·끝) 주님께 ‘징집’된 세월… 뒤돌아보니 발자국마다 은총
등 떠밀리듯 걷게 된 길임에도 많은 열매, 후원해준 모든 분께 감사… 주님 나라 예시·실현이길
김연수 사모(왼쪽 두 번째)가 지난해 12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다일천사병원에서 열린 다일복지재단 상임대표 퇴임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나는 다일복지재단 상임대표직을 사임했다. 남편의 부탁에 내 일을 내려놓고 시작했는데 어느새 21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부족한 나를 위해 멋진 퇴임식을 준비해 준 재단 식구들과 순서를 맡아주신 교계 어르신들, 바쁜 시간을 내 참석해준 자녀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에게 무척 고마웠다.
퇴임 소회와 감사 인사를 나누기 위해 단상에 섰을 때, 그간 겪은 많은 일이 고속 재생 필름처럼 지나갔다. 회상의 장면들 사이 내 가슴을 치는 단어가 있었다. ‘징집’이었다. 징집은 국가나 그보다 힘이 센 절대자가 큰 권력으로 누군가를 불러들이고 의무를 부과하는 일이다.
하루에 버스가 두 번밖에 오가지 않는 외진 산골에 살면서 내 꿈은 그저 시골 문화원 원장으로 사는 거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나를 수녀로, 또 개신교 목회자의 아내로 부르셨다. 학교 교사로 살던 나를 크리스챤아카데미 영성수련 담당 간사로 세우셨고, 다시 다일복지재단으로 이끄셨다. 이 모든 건 내 생각이나 계획 밖의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한마디로 내 인생은 하나님께 덜미 잡혀 끌려 온 과정의 연속이었다.
60세도 지난 늦은 나이에 서강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였다. 예언서를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내게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한 발제를 맡겼다. 시골 마을 아나돗에서 하나님께 징집돼 파란만장한 선지자로 살아간 예레미야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른다. 물론 내가 예레미야처럼 고난과 고통으로 점칠 된 삶을 살았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징집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현실적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등 떠밀리듯 걷게 된 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많은 열매를 주셨다. 남편이 밥퍼를 시작할 때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사역들이 불과 30여년 사이에 벌어졌고, 은혜롭게 이어지고 있다. 세계 10개국 18개 분원에서 하루 4000명 넘는 아이들이 다일에 와서 밥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 공부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초창기부터 공동체, 교회, 재단에서 우리와 함께해온 분들,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과 시시때때로 일손을 보탰던 자원봉사자들께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사람의 생명을 표현할 때 흔히 ‘몇 년’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간이 곧 생명이라는 표현도 가능하다.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일이나 시간을 들여 번 돈을 후원해 주는 일 모두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명 일부를 주는 일이다.
우리와 함께하다가 지금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분들도 오늘의 다일공동체를 있게 하는 데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셨던 분들이다. 역경의 열매를 쓰는 동안 고마운 분들이 많았는데 일일이 지면상 성함을 밝히지 못해 안타까웠던 마음을 전한다.
누가 말했던가. 지난 세월 뒤돌아보니 걸어온 발자국마다 하나님의 은총이었노라고. 앞으로 걸어갈 발자국 역시 그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의 꿈을 따라 달려온 다일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예시이며 실현이기를 감히 기도한다. 이제까지 읽어 주신 독자들과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