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대서원 춘 향제에 참여하다(1)====
언 제 ; 갑오(2014)년 삼월 초정일(4월6일)
어디서 ; 영천시 과전동 10
영천향교에서는 여러곳의 우리문화를 장의생활을
하는 모든이에게 익히고 배우게 하기 위하여 전교님 이하
수장의분들이 모여 의논하고 연구하여 관내 서원과 선현이 배향된
사당이나 어떠한 곳이던 참여시켜 향교에서 배우고 익힌 유림의 법도를
시연 겸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하므로 이번에는 창대서원 춘향제에
참여하여 창대공 문중의 문화를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참여하였드니 낮익은 조항,
숙항 어르신분들께서 좋은 지도를 해주셔서 배움이 많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행사의 이모
저모를 어설픈 사진 기술로 담아 카페에 실어봅니다.
****昌臺書院(창대서원)의 역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 유학 昌臺(창대)공 鄭大任(정대임)
선생이 의병을 모집하여 당지,박연,전투를 비롯하여 영천성을 복성(奪還)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움으로서 그 충절을 기려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후손과 도내 유림에서 1777년
영천 녹전동 창녕 두들 그 옛적 창대서사 자리에 書院築造(서원축조)를 시작하여 9년의 세월
을 거처 창대서원을 건립하였다.
※사진에 나오는 날짜는 촬영한 날이 아님니다(카메라날자입력착오)
보름전 보내온 초청 망지
향내 유림이 장계를 올려 나라의 승인으로 위패를 봉안하고 첫 향사를 올림은 1786년이다.
창대공의 5세손 南窓公(남창공) 鄭梯(정제)선생도 같이 봉향하였다. 그러나 高宗 5年(고종5년)
戊辰年(무진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 령에 따라 철거되었다.
멀리서 잡아본 창대서원 전경
그 후 향내 유림과 후손들은 창대공의 闕享(궐향;제사를 지내지 않음)을
아쉬워 하며 서로 힘을 모아 1956년에 현 위치(영천시 과전동10)에 서원을
이건(자리를 옮겨) 복원하였다.
서원 앞에 유유히 흐르는 금호강을 담아 보고~~~
현 서원의 터는 임진왜란 영천복성 전투때 영천성의 남문에 해당하는
곳이며 창대공께서 왜장 법화를 목 벤 곳이기도 하다. 오ㅐ란 후 무사들이 궁술을
연마하던 곳(상무대) 이기에 이곳 강변 언덕은 유서가 깊은 곳이다. 吉(길)일을 택하여
창대공 정대임 선생과 남창공 정제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공의 5세손 鳴皐公(명고공)
정 간 선생의 위패도 추가 봉안하여 향사를 올린다.
금호강에 남북으로 이어지는 역사 깊은 영천교도 담고~~~
경내에 忠賢祠(충현사)는 창대공 위패를 奉安(봉안)한
廟宇(묘우)이며 그 외에 尙義堂(상의당;강당), 동재, 장서고,
포사, 및 遺墟碑(유허비)가 있다.
창대서원을 가까이에서 담아 보고~~~
유허비의 長幅高(장폭고)는 600*400*3050㎜이다.
(비600*400*1730 용각비두900*650*700. 거북座臺2080*1400*620)
그 후 200년 1월 1일(舊正)에 불의의 화재로 강당(상의당)이 전소되고
그 외 건물이 훼손되어 도내의 뜻있는 분과 후손들이 2002년에 강당 재건과
부속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강당 옆 충의문(이곳으로 출입한다)
昌臺公 鄭大任(창대공 정대임;1553~1594<42세>)
공의 자는 重卿(중경)이요 호는 昌臺(창대) 본관은 烏川(오천)(迎日)鄭씨이며
시조는 고려조에 추밀원지주사를 지내신 滎陽公(형양공) 鄭襲明(정습명)이시다.
창대서원 입간판도 담고~~~
쌍협실도 담고~~~
삼성협도~~~
충현사(위패를 모신 묘우) 정삼문
신도비(비석의 글씨를 볼 수 있도록 가까이에서 담았음)
유의재도 담고~~~
원장님 포한 삼헌관님
영천이씨 문중 이재기 원장님
상의당 내 분위기도~~~
서편방 향교 장의분들과~~~
개좌를 알리고~~~
상읍을~~~
원장님 조언 하시고~~~
집사 분정 의논하시고~~~
훈표 조항님 분정표 작성하시고~~~
전체도 담아 보고~~~
집사분정 전체를~~~
집사분정 앞면을~~~
집사분정 후면을~~~
묘우 충현사 정삼문을~~~
충현사의 현판이 들문에 가려 보이지 않고~~~
축관(노창열씨)이 사축하시고~~~
헌관님 관복을 입으시고~~~
(조금 상세하게 담다보니 1~2부로 담게 되었습니다,양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