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 안녕하세요? 한 학기가 훌쩍 지났네요. 다들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독후감은 아니지만 같이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글을 올립니다.)
몇 년 전 시카고 근처 대학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수준을 알아보는 시험을 거쳐 맨 아래 단계 반에 배정됐다. 알파벳만 겨우 뗀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중국, 베트남, 사우디아라비아, 일본과 한국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첫 시간에 자기를 소개하라고 했다. 나는 칠판에 Kim Myung Soon과 金明淳이라고 적고 한국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게 내가 아는 영어의 전부였다. 중국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한국엔 고유 문자가 없나요?”
‘무슨 말인가요? 우리에겐 전 국민이 자랑스러워하고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이 있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버벅거리기만 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글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던 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주차장을 보니 현대와 기아차가 눈에 많이 띄었다. 지나는 학생들 손에는 삼성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같은 기숙사를 쓰는 말레이시아 학생은 삼성 탭으로 밥 먹을 때도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탤런트 이민호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 화장품을 쓰고, 한국 차를 탔다. 근처 중학교를 방문했는데 한 학생이 내게 가수 엑소를 아느냐고 물었다. 호의를 가득 담은 눈빛이었다. 한글을 배우고 있다며 정자체로 쓴 글씨를 보여 주었다. BTS가 유명하기 전이었다. 지금 갔더라면 더 환대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유명한 뉴욕 타임 광장의 커다란 전광판에 엘지와 삼성 기업 광고가 번쩍였다. 어디를 가든 엘지로고가 박힌 티브이가 있었다. 어깨가 으쓱했다. 영어는 하나도 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했다.
교육청은 숨 쉴 새 없이 바삐 돌아갔다. 장학사들이 모여서 아침 회의를 했다.
“교육장님, 교사들 워크숍하러 제주도 가는데 비행기가 딜레이 되었다고 하거든요. 호텔은 저번 갔을 때 뷰가 좋아서 같은 곳으로 픽스했어요. 여행사한테 컨펌할게요.”
“김 장학사, 보도자료 제목이 힙하네. 역시 스마트해. ‘2022 커리큘럼愛 多함께 Talk, Talk!’ 아주 잘 썼어요.”
“고맙습니다. 교육장님, 이번 행사에 퍼실리테이터가 헬퍼로 참여하니까 교사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런데 워크숍보다는 콜로퀴엄이나 브라운백 미팅 방법으로 하면 어때요? 요즘 대학 교수들은 그렇게 하더라고요.”
“회의 방법은 다음에 결정하기로 하고, 우리 지역 학생들의 학력 업 방안에 대해 디스커스해보죠. 도교육청 슬로건도 ‘학습力 키우GO, 스쿨 UP 하GO’이니 만큼 핫한 의견 많이 내 주세요. 블렌디드 러닝을 포함해서 다양한 토픽을 내 주시면 그 중에 원픽하겠습니다.”
“학생들 리터러시가 너무 다운돼서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글쎄 ‘이지적’을 ‘easy적’으로 ‘고지식’을 ‘지식이 높다’라고 생각한다네요. ‘로이어’가 ‘법률가’인건 아는데, 정작 법률가가 무슨 뜻인지는 모른대요. 하이 레벨 클라스 애들이 그렇다니까요. 도대체 국어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참, 오늘 저는 몸이 안 좋아서 닥터 만나기로 했거든요. 클리닉 가봐야 해서 조퇴 상신했습니다. 오늘 미팅은 여기서 끝내죠.”
회의를 마치며 우리나라가 이렇게 빨리 성장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남의 교육자들이 하드캐리하게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믹스해서 쓰고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저 장학사가 아는 콜로퀴엄과 브라운백 미팅이라는 거 나만 모르면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까? 있어 보이려면 나도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야겠다.
이제 더 이상 외국으로 어학연수 안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이렇게 퍼펙트하게 영어를 잘하니 말야. 어떤 도교육청에서는 국어 책임관을 두고 주요업무계획이나 공문에서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시행하던데 글로벌 시대에 뜻만 통하면 되지 올드하게시리 오바하는 거 아닌가?
각종 미디어에서도 ‘제로웨이스트’, ‘로컬푸드’, ‘심리스 착취사회’니 하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이게 시대적 흐름인데 주체성이니 한글 사랑이니 해 봐야 예민하다, 꼰대다라는 소리밖에 더 듣겠어? ‘맘’이라고 하면 ‘엄마’라고 할 때의 풍부한 경험과 울림이 떠오르지 않지만 얼마나 쿨해?
요즘 우리 전남 교육 텐션이 좋으니 THE 앞서 나가도록 모든 공문과 보도 자료에 조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외국어로 쓰도록 정책을 제안해야겠다.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주마가편이라는 말도 있으니. 아, 보도자료 써야지. 제목을 ‘전남 에듀케이션 high 레벨 up으로’라고 하면 어떨까? 아니, 요즘 앞 글자만 따는 트렌드에 맞춰 ‘전에하레업’이 더 나으려나.
※ 교육청에서 한 대화는 사실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첫댓글 와우, 멋져요.
김명순 장학사님이 느끼는 것이 바로 저도 아쉬워하는 부분입니다.
관공서부터 '한글 사랑'을 펼쳐야 하는데 앞서서 이상한 영어와 한자 조합의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실에 어이가 없습니다. 전남 교육 홍보지인 <전남교육통>에만 들어가 봐도 영어나 축약어를 쓰지 않는 제목은 찾기가 어렵고
그래야 또 참신하다는 소리를 들으니 어이없을 뿐입니다.
꼬집고 비트는 말을 정말 재밌게 써 주셔서 소설 한 편 읽은 듯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공감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관공서에서 한글과 우리말을 아껴야 하는데, 이상한 말들을 먼저 만들어내니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얘기해 봐도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많고요. 적어도 교사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부터 반성하자고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