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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5 / 예수님의 정체는? (요10:1-10)
어느 집 저녁 식탁의 풍경입니다. 아버지는 중요한 일이라며 핸드폰으로 주식시세를 보면서 앞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는 자녀에게는 밥 먹을 땐 핸드폰 하는 거 아니라고 훈계를 합니다.
과연 이 부모의 훈계가 자녀에게 먹힐까요?
최근 일어난 몇 가지 사건만 보더라도 아이들의 인성 문제가 대두되면 가장 먼저 부모의 가정교육부터 문제 삼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교육학자는 ‘아이들의 교육은 어른들의 솔선수범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님 밑에서조차 말을 안 듣고 못되게 행동하는 자녀라고 한다면 그런 아이 앞에는 미래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인생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아버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녀 된 우리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솔선수범을 다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행하셨던 솔선수범을 그대로 따라 우리도 예수님께 행하려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인생을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단언컨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께 순종하며 이 땅을 사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잘 되고 잘 사는 비결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살며 세상에서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린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또한 믿고 있는 예수님은 누구실까요?
이걸 알기 위해 오늘 설교의 제목을 ‘예수님의 정체는?’이라고 정해 봤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면 예수님은 2절에서는 ‘양의 목자’로, 7절에서는 ‘양의 문’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계십니다.
그럼, 먼저 예수님이 ‘양의 목자’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나를 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신다’라는 말이 직접 거론된 건 아니지만 3절을 보면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불러내신다’는 말이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마리의 양을 돌보는데 그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고 부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면에 양은 어떨까요? 양이 몇 마리든 한 마리 양의 입장에서는 목자와의 관계가 일 대 일입니다. 따라서 양은 목자가 자기를 알고 돌보는 것을 경험하고 느꼈기에 목자가 부를 때면 따르는 건 쉽습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목자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 양이라면 목자는 양에게 병이 들었거나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즉시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의 건강함은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23편에서도 보면 시편 기자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던 이유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현재까지 인생에 그 어떤 부족함도 없으신지요?
없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아니라면요? 부족함이 있다면요?
그때는 예수님이 나의 목자 되심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유는 양에게 문제가 있게 되면 양이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매에. 매에.’하고 울면 됩니다. 그러면 목자가 듣고 양을 찾아 나서 결국엔 양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게 되면 우리가 할 일도 오직 하나뿐입니다. ‘주여. 주여.’하고 부르며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들으시고 나를 찾아와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문제가 있다고 절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된다고 절대 낙심할 일도, 조급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보시면 본문에서는 목자를 설명하면서 도둑이나 강도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둘의 공통점은 양의 우리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고 도둑이나 강도는 담을 넘어 들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10절에 나와 있듯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도둑은 자기를 위해 양을 죽이기 위해 양에게 오지만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가 죽기 위해 양에게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자가 있기에 양은 낮 동안 편히 활동할 수가 있는 거고, 이런 목자가 계시기에 양은 밤에도 편히 쉬고 잘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목자 되시는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린 세상에서 살지라도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잠깐이나 혹은 당장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형편에 처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신다면 어려운 중에도 예수님이 역사하셔서 이기게 하시기까지 믿음으로 견디고 기다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3절을 보면 “문지기는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자는 누구고 문지기는 또 누굴까요?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가난했기에 소유한 양의 수도 적었을뿐더러 개별적인 우리를 가질 형편도 못됐습니다. 그래서 여러 목자가 공동으로 하나의 양 우리를 사용했는데 저녁이 되면 목자들은 자기 양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안으로 넣고는 쉬고 자게 됩니다. 이때 순번을 정해서 목자 하나가 양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는데 이 문지기는 마치 문처럼 밤새 양의 문 앞을 가로막고 누워서 양들을 지키는 겁니다. 이러니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양이 나올 수도 없고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 안에 들어갈 수도 없기에 도둑이나 강도나 들짐승들로부터 양이 안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으면 목자들이 오고 밤새 뒤섞여 있던 양들 속에서 자기 양들만을 불러 따로 모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누가 문지기인가에 따라서 양들의 생명과 안전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고, 신실한 문지기가 지키는 양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양에게는 최고의 안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목자. 특히 이 문지기가 바로 나를 위해 내 인생의 밤을 지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인생의 밤이 찾아왔을 때라도 여러분은 혼자라 여기지 마세요.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그 밤을 지키시며 그 밤 이후엔 여러분을 다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가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양의 입장에서 보자면 양은 단지 그 밤만 견뎌내면 되는 겁니다. 날이 밝으면서 목자가 올 테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닥쳐온 인생의 밤만 견뎌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보다 밤이 비록 길지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오셔서 나를 위해 역사해 주실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절실할 때는 바로 내 인생의 밤의 때인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만 소망하며 예수님만 더욱 사모하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유로 걱정해야 할 때 걱정하지 않는 것, 분노하고 슬퍼하고 불안해질 때도 화내거나 한숨 쉬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것. 이것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향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으시잖아요.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시잖아요. 그렇다면 이후로는 믿음대로, 기도한 대로 될 것을 염려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마셔야 할 것이, 내 안의 불신을 이기는 것은 오직 내 안에 있는 믿음뿐입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내게 있는 믿음으로 내게 오는 불신을 이기는 것.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기에 바울도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이길 것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의 정체를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의 인생 문을 지켜주신다고 하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제 곧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문지기가 밤에 양들을 지키는 것처럼 목자 되시는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기 위해 십자가에 몸을 던지신 것이고 목숨까지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고난이나 환난이 우리 인생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문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막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121편 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양은 문지기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안전하게 인생의 밤을 넘기고 부족함이 없는 새날을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한 번 더 강조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양의 목자시며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런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이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문이라고 하면 현관문, 출입문과 같이 보이는 문이 있는가 하면 등용문, 취직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문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이 뻔한 질문이겠지만, 문의 기능은 무엇일까요?
문은 안에서 밖으로 통하는 길이고, 또한 밖에서 안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런 용도로 볼 때,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은 세상에서 나를 위한 문이 없을 때입니다.
문의 기능 첫 번째로 안에서 밖으로 나갈 문이 없다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일 것입니다.
탄광의 경우를 봐도 들고 나는 문이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간혹 갱도가 무너져 출구가 막히게 되면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나올 길이 없어 생사를 보장할 수 없게 됩니다.
같은 이치로 감옥에 갇힌 자의 가장 큰 괴로움은 감옥 밖 세상으로 나갈 문이 닫혀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고난의 막장에 갇혔는데 출구가 막혔다면? 가난과 실패와 고생의 창살이 내 인생을 가두었다고 한다면?
나올 길 없는 우린 그 안에서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노력을 안 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만큼 못 해서 못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서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진짜로 못 해서 못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생에서도 해도 해도 안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안 되고 못 하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절실한 것이기에, 그래서 우린 때론 괴롭고, 슬프고, 사는 게 힘이 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린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를 영어로는 지저스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야솨’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구원’이라는 뜻과 함께 ‘해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갇힌 자에게 ‘해방의 문’이 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죄는 물론이고 가난과 질병, 고난과 심지어 죽음에서까지도 예수님은 인생을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단적인 예로 죽어 무덤에 갇혀 돌로 막힌 나사로에게도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여시고는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특성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죽은 자에게도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 즉 ‘해방의 은혜’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돌이켜 보세요. 여러분은 그간 나사로의 다시 산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었나요?
내가 못 하기에 예수님이 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이 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있는한 다시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인생의 문제들에 갇힌 분이 계신다면, 그런 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그러므로 문제에 빠진 양이 목자를 찾으며 울듯이 문제 상황에 처했다면 언제 어디서든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열어 기도의 문이 열리게만 하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축복의 문도 같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문의 기능 두 번째로 문은 들어가기 위해 있는 것이고, 들어간 자를 위해서는 닫히고 잠길 때 효능이 있는 것입니다.
해가 있을 땐 몰라도 해가 지고 어두워지는데 내가 들어갈 문이 없다면 우린 길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것입니다.
강도가 쫓아 오는데 집마다 문이 다 잠겨 있어 어디에도 내가 들어갈 문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한 본문 9절에서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문의 기능은 때론 밖에서 안으로 들어갈 때와 때론 안에서 밖으로 나갈 때를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한다면 양의 입장에서는 내 맘대로 나가고 싶을 때라도 목자가 막으면 나갈 수 없는 때도 있게 되는 것이고, 강도의 입장에서는 맘대로 들어가고 싶어도 목자가 막고 있으니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이 양의 문이시라는 말이 가지는 진정한 교훈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 인생이 막힌 것 같으시다면 막혔다고 한탄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여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박국 2:1절에서도 보면 하박국이 오죽이나 응답이 없고 답답했으면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3절에서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하박국에게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의 때도 반드시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 하나만으로 여직까지 믿어왔는데 한 번 더, 두 번, 아니 응답하실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안에서도 괴롬이 있을 수 있고 밖에서도 괴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괴로운 자리가 교회 안팎일 수도 있고, 집 안팎일 수도 있으며, 직장 안팎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어디든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거기에 솟아날 문이 열리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수 년 하나님을 잘 믿어 온 아브라함이 자기에게서 되어지는 여러 형편들로 인해 도중에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한 때인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약속하신 이삭을 잉태하게 하십니다.
믿음에서는 ‘내 생각’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기게 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약속에 맡기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아예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 생각, 내 계획, 내 소망을 가지세요. 그리고 그걸 내 맘대로 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간구하세요. 구체적으로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내 생각대로, 또는 내 생각에 넘치는 응답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과욕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왕에 믿을 거면 20등으로, 50등으로, 어쩌다 보니 꼴찌로 겨우겨우 믿을 게 아니라, 1등을 목표로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는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여러분을 보시고 가장 먼저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오늘부터는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예수님만이 내 인생이 행복과 성공을 향해 들고 나는 문이신 것을 알아서 예수님 잘 믿을 결단을 새롭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