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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 세계
영혼의환
1. 총론
백석에 대한 평가는 백철의 논의를 시발점으로 한다. 그에 의하면 백석의 시는 “지방적이고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여” “특수한 일경지를 개척하였고 그것으로 성공한 시인”이다. 그의 시 특징은
첫째, 모더니즘 시풍이 문단을 주도하던 당시 상황에서 1930년대 후반 토속적 세계라는 독보적인 시세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의 시에서 뚜렷이 재현되고 있는 식민지 시대 보편적 정서인 ‘고향상실감’의 체험은 당대 민족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셋째, 백석의 독특한 시적 형상화 방법은 극단적 이미지즘의 물질시나 비인간화의 시로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시에 이르는 현대시의 조류에서 더 나아가 인간적인 정서의 복원이라는 서정시로의 방향전환을 꾀하고 있다.
2. 유아기적 화자와 성인기적 화자
시의 화자는 시인의 무의식과 의식을 조정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시 텍스트와 시인의 경험을 융합시켜 미학적으로 완성시키는 존재가 된다. 예컨대 자서전적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화자는 시인 자신과 흡사하게 나아나며, 허구적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화자는 시인과 명백히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화자는 텍스트에서 지금 말하고 있지만 언어는 경험 이후의 산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의 선험성은 화자가 대상과의 어떤 미적 경험이 있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화자가 말을 시작할 때 텍스트의 행간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화자의 모습은 백석의 시에서 유아기적 화자와 성인기적 화자로 나타나고 있다.
유아기적 화자 : 어린이 화자가 나타나는 시에는 사회와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충족된 주거적 공간에서의 화자의 체험들이 나타나고 있다. 주로 주거 공간에 위치하는 화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유년기의 천진한 두려움, 먹는 즐거움, 밉지 않은 심술 등의 정서를 표출한다. 백석은 시에서 자신을 의식적으로 과거 속으로 후퇴시킨 후 그러한 과거 유년기의 체험을 드러내려 하였다. 이것은 과거로의 도피라는 나약한 의미의 퇴행이기보다는 있어야 할 바람직한 세계의 구축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풍요로웠던 선험적 체험으로 몰입함으로써 본래적 고향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민족의 자아 동일성이라는 우회적 항일의지를 재현하고자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민족의 자아 동일성이라는 ‘우회적 항일의지를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인기적 화자 : 자기 자신의 모습을 허구적으로 변용함이 없이 그대로 드러낸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아기적 화자에서 보여지는 주거 공간에서의 충족감, 안은함 등이 사라지고 식민지적 현실과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고향 상실감, 허무함, 슬픔 등의 정조 등이 지배적이다. 성인기적 화자의 시들에서는 유아기적 화자와 달리 현실과의 갈등을 기본 구조로 하여 나타나는데, 이것은 주로 쓸쓸함, 가난, 애처로움이라는 어두운 정서를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성인기적 화자는 자신의 삶의 현실에서 빚어지는 갈등으로 인해 서러움, 아픔의 정조를 지니고 형상화되었다.
3. 공간구조
백석시에 나타나는 공간인식은 현재적 삶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층으로 한 과거로의 지향을 꾀하고 있으며 아울러 민족공동체의 붕괴적 현상으로 인한 그것의 반대급부적 발로인 합일지향적 인식을 보이고 있다.
물리적 공간은 분명히 3차원이나 거기에 문학 향유자의 의식, 곧 시간성이 개입됨으로써 문학이 삼고 있는 세계는 4차원이 되고, 문학은 그러한 4차원 공간을 글쓰는 이가 독특한 비전에 의해 되겪거나 상상력에 기대어 뒤바꿈으로써 재구성, 변용해서 드러낸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가 보여주고 있는 표상공간은 5차원에 속한다. 여기서는 문학 텍스트의 표상공간인 5차원적 공간으로 그것에 드러난 백석의 인식을 살펴보겠다.
백석의 시의 과거지향은 예부터 내려오는 토속적인 음식물들을 통하여 보다 생생하게 인식되고 있다. 먹는 행위와 관련된 공간지향은 프로이트로 말해서 구강기 고착의 복합심리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것이 안은하고 만족스러웠던 어머니의 품, 근본적인 원형의 세계, 행복한 공간이었던 유년기 고향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결부될 때는 자연스럽고도 적절한 시적 장치가 된다. 대체로 이러한 먹거리들은 평안도 지방의 토속적인 것이거나 서민들의 기호품인테, 이것은 지나간 세월 속의 유년을 노래하는 그의 시가 특별히 음식에 대해 흥미를 품는 유아기 화자를 등장시킨 것과 관련된다. 즉 이처럼 음식과 어우러진 과거지향적 공간인식은 백석의 시에서 공동체적 삶의 복원이라는 적극적 의의를 지니고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4. 시의 서사성
“백석은 우리를 충분히 애상적이게 맨들 수 있는 세계를 주무르면서도 그것 속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얼마나 추태라는 것을 가장 절실하게 깨달은 시인이다. 차라리 거의 칠석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조선다. 그 점에 『사슴』은 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 취미에도 불구하고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 김기림이 본 백석의 모더니티는 도시 문명이나 근대인의 내면세계에 대한 모더니티가 아닌 창작방법으로서의 모더니즘이라 볼 수 있다.
백석은 시각적 이미지즘의 창작방법을 통해 감정의 절제에 성공하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 묘사가 지배적인 시들은 「정주성」,「비」,「통영」,「힌밥」,「山비」,「광원」등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대상과 어느 정도의 거릴를 두고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며, 실이가 현격하게 짧다는 점이다. 이들 시에서 공간은 인간적 정서가 지극히 절제된 한폭의 풍경화의 공간으로 구축되고 있지만 언어를 통해 회화성을 구축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백석의 시가 차츰 묘사 중시의 시에서 탈피하여 그것에 서사성을 가미시켜 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타당성을 획득한다. 즉 문학이 인생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할 때 이러한 이미지 위주의 시로 인생사를 깊이 있게 다루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백석은 사건을 끌어들임으로써 한계를 극복하는데 그러한 서사의 기법은 시적 공간을 애상적이게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승」은 이러한 서사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한 묘사의 차원에서는 획득하기 어려운 심오한 인간의 인생사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서사지향은 바로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형성된 것이다.
5. 시의 언어
한국근대시사에서, 30년대의 시가 거두었던 성과의 상당부분은 그 언어의 조탁이라는 측면에 있다. 백석의 경우는 이러한 노력이 주로 <방언의 의도적 사용>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백석 시의 기본 정조가 외로움이었고, 그 외로움은 곧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는 주제 겸 소재와 만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주제와 소재가 <고향의 언어>인 방언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백석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박용철은 백석의 작품들에 일면 낯설고 난해한 평안도 방언들이 직설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의미 전달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현상을 들어, <母語의 위대한 힘>이라는 표현을 한 바 있다.
백석 시의 언어 사용상의 또다른 특색으로는 의성어와 의태어의 빈번한 사용을 지적할 수 있다. 원래 의성어 혹은 의태어의 다양한 사용은 시인의 어휘력의 풍부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특별히 백석은 의성어보다 의태어의 사용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데, 이는 그가 중시했던 시각적 이미지 표현이라는 측면과도 관계가 없지 않다.
또한 백석은 서사적 내용을 바탕으로, 서사문학이 아닌 서정문학의 높은 경지를 이루어냈다. 서사성 짙은 내용을, 산문시형으로 담아내면서 독자적 운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백석 시의 특질이라고 할 때, 그의 독자적 운율의 열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근래 발표된 백석 시의 기교를 전통문학의 엮음의 수법에서 찾아내려는 시도는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 연구는 한국의 전통시가에서 보이는 엮음의 수법을 변용한 것이 백석 시의 기법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백석 시의 독자성을 그 기본 정조는 외로움에서, 내용은 서사성에서 그리고 형식은 반복률의 최대활용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반복의 기교는 단순히 운율적 효과를 높이는 차원을 넘어, 또다른 시적 효과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성을 띤다. 그 효과란 바로 당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감있게, 세부적으로 또한 신뢰성있게 독자에게 전달하게 되는 효과이다. 백석의 시가 일면 모더니즘적 수법의 기초해 있으면서도, 나약한 모더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