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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무소유(無所有) 트럭에 실어 본다고 과연 몇 톤짜리 트럭 몇 대나 필요할까? 누구나 발가숭이에 맨주먹으로 태어나서 수의 한 벌 입고 땅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인데…
소유하지 않는 삶의 즐거움 소유하지 않는 삶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수필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법정 스님은 그러나 불교적 진리의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소유의 고통이다. 가진 자는 자신의 소유물을 잃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마음을 쓰고 고생을 한다. 이러한 소유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법정스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이 바로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料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 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 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 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아 마음에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가정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가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여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지난 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찬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이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와 안타까와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 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 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 산철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 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끈임 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가지려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직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뜯지 못했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관념(所有觀念)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역리(驛吏)이니까. -------------------------------------------------------------------------- 내가 이책을 접한것은 1980년 대초였습니다 몇번을 읽고 읽어도 가슴에 와 닿는 법정스님이 지으신 ( 무소유)의 줄거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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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떡개구리를 손에 쥐고 있는 아기님의 마음이 내가 존경하는 법정스님의 마음이 아닐까? 무소유... 아무리 깨우치려고 해도 평생을 못 깨달을꺼야. 고마워.
개구리가 아니고 아기다람쥐같어......꼬리가있는데!
떡 개구리가 맞을꺼 같은데!앞다리가 나와있고 무뉘가 개구리와 동일한것이...ㅎㅎ
아...맞네...시력좋은걸보니 아직청춘일세!ㅎㅎㅎ
무소유! 갖기 싫어도 가져지는 일이 있는가 하면 갖기 위해 온갓 비리를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법정스님께서 지으신 무소유란 어찌보면 욕심없이 살다보면 얻어 지는 일도 많을 것이다란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지...어느 교리 단체에선 이와 같은 진리로 인생을 아주 편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습니다.인생은 공수레 공수거란 말과같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련만 . 소유욕이 강한 우리네 삶은 모든게 집착에서 오는게 아닐까 싶군여...
배가 고픈사람이 낚시를하는것은 살생이 아니라고봅니다 그러나 나 즐겁자고 취미로 배고픈 물고기를 가짜미끼로유혹하여 입을찟고 소중한 생명을 빼앗는것은 사람들은 취미라고 하지만 엄연히 살생입니다 ..... 무소유의 참뜻을 잘 이해를 하셨네요.....^^*
사람이 살아 있는한 무소유를 강조 한다는건 무리지 싶어 그저 나도 무르게 욕심이 생기거든? 안그러니 친구들은 무소유 그거 무지 힘든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