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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에 목마르고 사랑에 배고파라 >
남미 페루의 마추피추를 여행할 때 들은 한국 여행객들의 불평 이야기입니다.
마추피추를 가기 위해 내려야 하는 쿠스코라는 도시는 해발 3400미터나 됩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어지러움을 느끼고 마치 꿈속에서 구름을 걷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어떤 이들을 바로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잉카인들의 마지막 피신처였던 산 위의 도시 마추피추에 도착하면
고대인들의 돌을 이용한 건축 솜씨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남미 여행을 오기 위해서는 여행 비용만 900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워낙 비행기를 여러 번 타야 해서 호텔에서 자는 시간보다 비행기에서 자는 시간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추피추에 도착하면 구토가 나올 것 같은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이렇게 불평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 돌덩이 보려고 그 많은 돈 내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럼 무얼 보러 온 걸까요?
아마 어느 정도는 남미 여행에 대해 예상을 하고 왔을 텐데 무슨 기대를 하고 온 것일까요?
차라리 그 돈으로 국내 여행하며 즐겼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제대로 물어보지 않고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당에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오나요?
어쩌면 우리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그냥 성당에 다니면 다 채워지기를 희망하지는 않나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팀이 만든 TV 전쟁 시리즈물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최전방에 침투하여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공수부대 ‘이지 중대’에 대한 실화를 그렸습니다.
여기에서 후블러라는 미국 군인은 독일 장교들이 차고 다니는 권총, ‘루거’를 갖기를 소원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전투 속에서 독일군 장교를 죽이고 마침내 루거를 손에 쥐게 됩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전쟁도 끝나가는 판에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것을 바지춤에 끼고 다니다가 총이 발사되어 허벅지를 뚫었고 과다출혈로 죽고 맙니다.
마침내 루거를 손에 넣었으니 기쁘게 죽을 수 있었을까요?
이 경우는 헛된 것을 욕망하며 살다가 그것과 함께 죽는 세상의 많은 이들을 대변해줍니다.
미군들은 독일군이 계속 항복하고 히틀러는 자살하고
그래서 베를린으로 손쉽게 진격해가면서 2년 동안 잃은 수많은 것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수많은 동료를 잃었고 그런 것을 보며 정신이상이 된 이들도 있고
여자와 헤어지거나 전쟁터에서 이혼을 당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묻습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독일에 들어가서 그들은 유태인 수용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들은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그 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후퇴하며 탄약이 부족하여 다 쏴죽이지 못해 살아남은 뼈만 앙상한 유태인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드디어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의 싸움은 의미가 있었구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리 고생을 했더라도
그 고생 덕분으로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모든 희생들은 다 보상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 내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혹은 명예나 돈이나 쾌락과 같은 채워지지 않는 허무한 것들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야만 자신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다면 이태석 신부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행복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결코 후회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죽음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의미 있게 보았던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마침을 작은 죽음으로 본다면
잘 죽는 방법은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토를 ‘행복’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받고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블러가 루거를 갖기를 원했던 것은 왜일까요?
그것으로 미국 돌아가서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자랑할까요?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봐주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큰 차를 타고 큰 아파트에 살고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부러움은 질투로, 질투는 미움으로 옮겨갑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 줄 알지만 그 반대입니다.
어떤 누구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이 높여지고 사랑받고 싶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남을 사랑해주는 일은 없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원초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삶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등장하는 강동원은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하지도 않은 것을 했다고 해서 일부러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나영은 사촌에게 폭행당하고 엄마에게 뺨을 맞고 계속 자살 시도를 하는 여자였습니다.
이 둘이 사랑하게 되었을 때 강동원은 죽고 싶지 않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인간은 진정 ‘사랑’을 원하고 그 사랑만이 삶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음료와 양식이라고 표현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음료는 당신 피요 양식은 당신 살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데도 우리는 성체를 영하면서 가정의 안녕이나 자녀들의 건강을 청합니다.
참 ‘사랑 자체’를 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허기지고 목마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것이 사랑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유투브에 고3 여학생이 벤치에 앉아 우는 연기를 하며 사람들에게 한 번만 안아달라고 청하는 동영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학생을 안아주고 밥도 사주려고 하고 자신도 고3 딸이 있다며 힘을 내라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녹화를 마치고 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안아줄 때 진짜 눈물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기를 하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진짜 위로해주니 그 사랑받는 느낌 때문에 연기가 아닌 진짜 눈물이 나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사랑’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찾을 수 없습니다.
처음엔 연기로라도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주님께 안겨봅시다.
그러면 조금씩 마음이 녹고 따듯해지고 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목마름의 해갈이고 배고픔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의 심장 살을 오늘도 우리에게 내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성체와 성혈이 곧 사랑입니다.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그 사랑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참 ‘사랑’임을 인정하는 이에게는
그래서 ‘성체와 성혈’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극 부국장
* 박영식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빌 게이츠처럼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
현재 세계 최고 부호인 빌 게이츠의 부모는 가족의 유대를 중시하는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을 꾸몄다.
부모는 아들 하나, 딸 둘이 가족들의 우애를 배우게 꼭 저녁식사를 다 함께 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습관이 몸에 배게 가르쳤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아들을 가족을 사랑할 줄 알고 주변사람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키우려 애썼다.
그런데 이 아들은 방에 틀어박혀 책 읽는 것을 좋아한 조용한 어린이였다.
그는 사춘기 무렵 종종 부모와 말다툼을 벌이곤 했다.
한번은 그가 열두 살 때 저녁식사 자리에서 엄마에게 크게 대들었다.
아버지는 그를 지켜보다가 성이 나서 들고 있던 물잔을 아들의 얼굴에 확 뿌렸다.
아들은 “목욕을 시켜줘 고맙네요.”라고 비아냥거렸다.
막내딸 리비는 “오빠가 성질이 못됐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재검토하고 전문 상담사와 상의한 뒤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공부를 많이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구석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친구들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빌은 이 학교에서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부모는 스스로 열정을 가지고 뭔가 하려 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 2학년(1975년)에 자퇴하고 MS를 설립하고 삼년 뒤에는 사무실을 부모가 살고 있는 시애틀로 옮겼다.
이때에만 부모가 빌게이츠에게 조금 도움을 줬는데, 돈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을 도맡아했고,
아버지는 변호사 경력을 바탕으로 마이크로소프트(MS) 이사회에서 일할 사람들을 찾는 데 도움을 줬다.
그 뒤에는 가족들이 절대로 MS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게이츠가 1986년 MS 주식 상장 후 억만장자에 등극한 이후에도 그의 가족은 각자의 길을 갔다.
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가 1994년 죽고 6개월 뒤 빌은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늘 아들에게 자선사업을 권유했지만, 빌은 사업에 바빠 자선사업에 선뜻 뛰어들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간 뒤 어머니의 권유를 빨리 시작하지 않는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랜 변호사 생활을 마무리한 뒤에야 비로소 아들의 일을 돕고 있다.
아들이 세운 ‘빌앤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자선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90살이 가까운 고령인데도 몇 해 전까지 자선사업을 위해 자주 아프리카로 가곤 했다.
아버지처럼 딸 둘, 아들 하나를 둔 빌 게이츠는 자기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인지 자식들에게는 1000만달러(한화 약 110억원)씩만 상속하고 자신의 자산 803억달러(약 86조 8천억원) 중 95퍼센트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좋은 인간 관계가 성공, 기쁨, 행복, 장수의 비결이다.
인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잣대는 인간 관계다.
인간 관계는 중심축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나 돈을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맺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초라해지고 인색해져 더럽고 썩는 냄새가 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이기주의가 강해진다.
노욕(老慾)이 생기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폭군노릇을 하고, 자기 도취에 몰입하는 공주병이나 왕자병에 빠질 수 있다.
또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의 대인 관계는 결국 초라하게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을 중심으로 인간 관계를 맺는 사람은 자기가 남을 위해 존재하고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오거나 따르게 된다.
풍부한 체험과 지식과 지혜를 축적한 사람들이 가장 값진 자산이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사랑으로 한 마음이 되면 불가능이 없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한 사람의 성공이 15퍼센트 전문 기술과 85퍼센트 인간 관계로 좌우된다고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이 인간 관계 속에 생명, 사랑, 기쁨, 행복이 태동하고 자라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이웃을 만나지 않고서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외롭게 하고 내 삶을 괴롭게 만든다고 해서 그를 피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곧 생명, 사랑, 기쁨, 행복을 멀리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
마음속에 사랑을 품으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인간 관계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예수님과 하나 되는 사람은
친구든 원수든 모든 사람을 영원히 사랑할 힘을 얻는다.
그는 정신 연령과 영적 연령이 더욱더 젊어지고 인간 관계에 따라오는 모든 시련과 난관을 이겨낼 힘을 받는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시다(요한 6,27).
“단단한 우정, 또는 영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선량할 뿐만 아니라 굳건한 정신력을 가진,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조건을 겸비했다는 좋은 증거다.”
(윌리암 해즐릿)
성공한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훌륭한 인격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거의 품위 있고 예의가 바르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남을 칭찬할 줄 안다.
이는 남을 자기와 동등한 인격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성공의 비결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이른바 황금률에 있다.”
(존 코맥넬)
이는 빌 게이츠처럼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생활지침이다.
그의 좌우명을 몇 가지 인용해보자.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 해주길 바라지도 말라.
항상 먼저 다가가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 이해하라.”
“주는 만큼 받아야 된다고 생각지 말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라.”
“가는 말을 곱게 했다고 오는 말도 곱기를 바라지 말라.”
“인생이란 결코 공평하지 않다.
이 사실에 익숙해져라.”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건 죄가 아니지만
당신의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건 당신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는 어머니의 부탁대로 자기의 막대한 재산을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그들을 위해 쓰고 있다.
많은 억만장자들이 제 재산을 아낌없이 퍼주는 빌 게이츠를 본받고 있다.
그가 세계 최고 부자로만 남아 있었다면 돈벌이의 귀재로는 인정받아도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는 자선사업을 하는 빌 게이츠를 사랑하고 귀감으로 삼는다.
이처럼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을 닮는 데서 나온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고, 제2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방법은 대인 관계를 훌륭하게 잘 하는 데 있다.
“자기와 남의 인격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
(임마누엘 칸트)
- 가톨릭대학교 총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 할 때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누가 주지 않고 하느님께서 빵을 주신다는,
하느님께서 전갈을 주지 않으시고 빵을 주신다는,
내가 달래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라는 면을 보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게 될 때,
하느님께서 주셔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얻어서 가지게 되었거나, 우연히 운이 좋아서 가지게 되었거나, 다른 사람이 주어서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것 이외의 모든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십니다.
무전 순례를 하면 이런 경험을 뼈저리게 합니다.
몇 끼 굶을 때까지는 누구에게 밥 달라는 말을 못합니다.
대 여섯 끼 굶고 나서야 밥을 구걸하는데,
처음에는 그나마 밥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밥 달라고 하려다 사람이 나오면 겨우 물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더 굶어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밥을 구걸하는데,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도 여간해서 얻어먹지 못하고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가 청해도 주지 않습니다.
모든 시도가 다 실패하고 그래서 포기하였을 때,
그 때 전혀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을 통하여 밥을 얻어먹습니다.
이런 것이 반복될 때 깨닫게 되는 것이
밥 한 끼도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구나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두 번째로 하느님은 전갈을 주시지 않고 빵을 주십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보듯 고기타령을 하니까 뱀이나 전갈이 아니라 메추라기를 보내시는 하느님입니다.
나중에 불 뱀을 보내신 적이 있으나 이 또한 깨우치시기 위함이지 역심에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무엇을 주시든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세 번째로 하느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안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무도 인색하여 우리가 떼를 쓰거나 졸라대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고자 하시는 당신의 본성대로 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시고 흘러넘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실은 오늘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수님께 “그 빵을 달라”고 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달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청하는 이유는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청함으로써 갈망을 절실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 작은 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영성체를 갈망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더운 날 한 수행자가 절의 큰 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스님께서 말했습니다.
“추울 때에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십시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더위도 추위도 없습니다.
쇠가 녹는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더위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으로 성장하는 또 다른 생명,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명을 먹여 살리는 육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열매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주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을 갈망하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를 차지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숨, 얼이 우선 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신명 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참례를 하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기 일에 급급해서 주일을 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권을 가지느냐에 나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근본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겨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할 지를 알려 줍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웰빙식품을 먹으려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좋은 음식을 찾는 만큼이라도 영성체를 갈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과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성체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젊은이 알도 마르코치는 “어머니,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요?
성 필립보는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던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감실로부터 풍겨 나오는 천국의 향기를 어떻게 네가 느낄 수 있겠느냐?”
성체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각적인 만족은 서로 상치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갈라 5,17)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매이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생명의 빵>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양식이 글자 그대로 '썩어서 없어질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썩어서 없어지게 될 허무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버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약속이고, "나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 라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경제 활동을 부정하시는 말씀도 아니고, 지상에서의 인생을 부정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선(善)입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신자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고생하는 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또 지상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 학문, 예술, 스포츠 등... 그런 일들도 다 선(善)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모두 부정하고 하늘나라만 강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라는 말은
이 세상을 모두 부정하는 허무주의나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또 인간의 노동과 학문과 예술 등은 허무한 일이 아닙니다.)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사탄을 쫓아내실 때 하신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
이 말씀은, '빵'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빵으로' 라고 표현하지 않으시고 '빵만으로' 라고 표현하신 것은 빵도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빵으로 유지하는 '생명'은 지상에서 끝나는 '유한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마태 16,26)
이 말씀의 '온 세상'이라는 말을 '온 세상의 빵'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온 세상의 빵을 혼자서 독점한다면 평생 배고픔과 굶주림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죽음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지금 말하는 내용과 잘 연결되는 비유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았고,
라자로는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루카 16,19-21).
두 사람의 처지는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서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루카 16,22-23).
부자가 지상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던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고 힘쓴 사람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지금 라자로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고,
지금 그 부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살지 마라." 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자기가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
영혼은 생각하지 않고 육체의 쾌락만 찾는 것,
옆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고 자기만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욕망만 채우는 것,
그런 것은 모두 '죄'입니다.
사실 지상에서 라자로처럼 사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고, 옳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혼자 힘으로는 안 될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에 비유 속의 부자가 라자로에게 사랑을 제대로 실천했다면,
두 사람은 이승에서도 함께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고, 저승에서도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썩어 없어질 양식'은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이기심'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은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는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1코린 13,8)
'지금 여기에서' 함께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만이
'나중에 저쪽에 갔을 때' 함께 행복하게 사는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생명의 빵>
저에겐 독특하면서도(?) 거룩한 취미가 있습니다.
면담성사를 보는 분들에게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제 자작시를 가능한 큰 소리로 읽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 영성생활의 수행에 좋은 글이나 시를 소리내어 읽거나 노래 부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를 함께 마음을 다해 낭송하고 또 노래하는 여기 요셉수도형제들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어제도 언젠가 강론에 인용했던 ‘사랑은 저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시를 낭송케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사실 요즘 수도원 뜨락에 밤마다 아침마다 청초하게 피어나는 무수한 달맞이꽃들을 보면 저절로 나오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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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 축제다/달맞이꽃 사랑이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버려진 빈 터
누가 봐준들 봐주지 않은 들/무슨 상관이랴
하늘 임만/보신다면야
사랑은 저렇게 하는 것이다
삶의 스승이다
날마다/밤마다/아침마다
새롭게 하늘 사랑/꽃 피어내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연노랑 청초한/달맞이꽃 사랑
주변이 환하다
매일이 새날이요 사랑이요 영원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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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사랑을 하며는 예뻐집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갈수록 저절로 이런 사랑에 주변이 환해집니다.
날마다 새날이요 사랑이요 영원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어제 저녁에 이은 아침성무일도 즈카리야 후렴도 신명나게 불렀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방금 또 우리는 미사중 화답송 후렴을 흥겹게 부르며 하늘의 빵을 주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하늘의 빵’을 우리에게 주시니라."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있는 나(I AM)’입니다.
구체적으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통해 하느님의 이름이 환히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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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
나는 문이다(I AM the Gate)
나는 착한 목자이다(I AM the Good Shepherd)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나는 포도나무다(I AM the Vine)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th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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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에서의 위 일곱 개의 말씀이 우리 예수님의 신적 기원을 가리킵니다.
아,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바로 이것이 우리 하느님에 대한 정의입니다.
위 일곱 개 하느님의 이름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의 정의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배고프고 목마른 인간’
이것이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영육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마음의 허기는 바로 영혼이 배고프고 목마르다는 신호입니다.
육신의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영혼은 생명의 빵인 주님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영육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분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한분 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궁극적 배고픔과 목마름이 일거에 해결되는 참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은총이 참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저는 세 측면에 걸쳐 그 효능을 소개합니다.
첫째, 불평과 불만을 찬미와 감사로 바꿔 줍니다.
불평과 불만보다 사람을 망가뜨리고 오그라 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불평과 불만의 양 날개를 달면 추락이지만,
감사와 찬미의 양 날개를 달면 하느님 창공을 훨훨 자유로이 납니다.
불평과 불만이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을 만든다면,
찬미와 감사는 긍정적 낙관적 축복의 인생관으로 만들어 줍니다.
불평과 불만은 공동체를 분열시키지만
찬미와 감사는 공동체를 일치시키고 업그레이도 시킵니다.
찬미와 감사의 망각이,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의 부족이 참 큰 병입니다.
바로 오늘 이집트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믿음 부족으로 불평하는 모습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이 또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불평은 그대로 하느님에 대한 불평과 직결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 하느님은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만 기분은 영 유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사부인 성 베네닉도 역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수도형제들이 투덜거리며 불평하는 것이 었습니다.
놀랍고도 신비롭게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은총이,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를 찬미와 감사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둘째,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삶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삶으로 바꿔 줍니다.
인간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둘입니다.
바로 하느님과 밥입니다.
왜관수도원이나 우리 수도원만 봐도 연로한 수도자일수록 성당의 기도소에 일찍 나오며 밥상에도 일찍 자리 잡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으로 영혼을 먹여주고 밥으로 육신을 먹여줘야 균형잡힌 전인적 건강한 삶입니다.
하느님과 기도는 없고 밥과 일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의 영양실조에 그 인생 품위도 잃어 참으로 추하고 황량할 것입니다.
계속 썩어 없어질 양식만 구하다가 그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불행하겠는지요.
주님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고자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주님을 찾다보면 적절량의 필요한 썩어 없어질 양식도 저절로 따르기 마련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무조건 썩어 없어질 양식이 부정이 아니라 우선순위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추구할 바가 영원한 생명의 주님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 분도수도회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이를 분명히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삶,
바로 이것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생명의 빵인 주님의 은총이 이런 분별의 지혜를 선사하시며
영원한 생명의 빵인 당신을 우선적으로 찾게 하십니다.
셋째,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의 옷으로 바꿔 줍니다.
세례성사로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의 옷으로 바꿔입은 우리들인데
다시 옛 인간을 입고 사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세속적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점을 잘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다른 불신자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
참 적절허고 아름다운 훈계 말씀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시간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했습니다.
하루만 지나면 옛 인간입니다.
날마다 어제의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오늘 새 인간을 입는 것입니다.
영어 'present' 단어 뜻이 신기합니다.
발음은 다소 틀리지만 철자는 똑같은데 뜻은 둘입니다.
하나는 ‘현재(발음preznt)’이고 하나는 ‘선물(발음prizent)’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의 ‘현재’가 최상, 최고의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입고 지내야 할 새 인간의 옷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거룩한 미사 시간입니다.
새 인간은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요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사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믿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하느님의 일은 없습니다.
“주님,
천상 양식으로 새로운 힘을 주시니,
언제나 주님의 사랑으로 저희를 보호하시어,
저희가 영원한 구원을 받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이집트에서 눈물에 젖은 빵을 얻어먹던 시절이 이스라엘에게 과연 행복했을까요?
갈대 바다를 무사히 건너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렇게 기뻐 환호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던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안 가서 그 감격을 잊어버리고 이집트의 빵을 그리워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고통에 울부짖으면서 종살이하던 시절(탈출 3,7 참조)에 이스라엘이 바라던 것은 빵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이었지만,
지금 당장 황량한 광야에 맞닥뜨리게 되자 갈팡질팡하면서 마치 노예 생활은 상관없고 빵이 인생의 전부인 양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빵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에게도 빵이 인생의 전부였던 모양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그들도 빵의 기적이라는 표징이 드러내는 본디의 의미, 곧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만을 채워 주시는 빵이 아니라 생명이요 진리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요즈음 논리로 표현한다면,
경제를 발전시키고 소득을 늘려 준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쫓아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 사랑의 부족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음의 땅 이집트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을 구출해 주신 주님,
갈대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하신 다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그 여정에 늘 함께해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망각하고
하찮은 먹거리 걱정을 하였습니다.
영원을 향하여 지상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썩어 없어질 빵은 인간의 일차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겠지만,
세상에 생명을 주거나 인간을 온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로지 빵을 얻으려는 욕구 때문에 자유, 생명, 진리 같은 더 큰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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