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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의 최후
삿 16:23-31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삿 16:23-31 / [블레셋에 앙갚음하는 삼손] 블레셋 왕들은 함께 모여 자기네 신인 다곤에게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또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우리의 신은 고마우셔라. 우리 원수를 잡아주셨네. 우리의 신은 고마우셔라. 삼손을 우리에게 넘겨 주셨네' 24-25)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신이 나서 소리 질렀다. `삼손을 끌어내라. 그 녀석을 데리고 실컷 놀려 대며 웃어나보자!' 그래서 사람들은 삼손을 감옥에서 끌어내다가 그를 데리고 장난치며 재미있어 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도록 두 기둥 사이에 삼손을 묶어 놓았다. 사람들은 또 이런 노래를 부르며 자기들의 신에게 찬양하였다. `그토록 우리 농사를 다 망쳐 놓고 그토록 우리 겨레를 수도 없이 쳐죽이던 원수, 그 원수를 잡아주신 우리의 신은 고마우신 분. 삼손을 넘겨 주신 우리의 신, 고마우신 분' 26) 삼손은 자기 손을 붙들고 다니는 길잡이 젊은이에게 부탁하였다. `이보게, 잠깐 동안만 나를 좀 풀어 주게. 이 집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더듬어 봐야겠네. 거기에 몸을 좀 기대고 싶네!' 27) 잔치가 벌어진 그 집에는 삼손이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하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 집 지붕에 올라가 있던 사람만도 3천 명이나 되었다. 물론 블레셋 왕들도 그 자리에 참석하였다.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주 여호와여, 이번만 저를 돌보아주십시오. 한번만 더 제게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주께 빕니다. 멀쩡한 제 눈을 빼어 버린 블레셋 놈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해주십시오.' 29) 그러고는 지붕을 버티고 있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30) `내가 오늘 블레셋 놈들과 함께 죽으련다!' 하고 소리 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굽혀 기둥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집이 무너져 내리면서 집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과 왕들을 내리덮쳤다. 이렇게 하여 삼손도 장렬한 최후를 마쳤는데, 이때 죽인 블레셋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31) 삼손의 형제들과 온 집안 식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내려가 삼손의 시신을 거두어다가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곁에 장사 지냈다. 마노아의 무덤은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었다. 삼손은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였다.
삼손이 나실인의 헌신을 회복하고 마지막 죽음으로써 대승을 거둡니다.
조롱거리가 된 삼손(23-25) 고대인들은 나라 사이의 전쟁을 각 나라의 신들의 힘겨루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는 블레셋 사람들의 말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블렛세 사람들은 신전에 모여 승리의 축제를 열고 그들의 신 다곤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곤은 반인반어(half man and half fish)의 우상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다가 다곤 신 앞에서 재롱을 부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의 죄는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까지도 훼손하였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다곤 신보다 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놀라운 반격을 준비하십니다.
죽음으로 승리한 삼손(26-30) 마지막 승리를 위해 하나님은 삼손을 영적으로 회복시키십니다. 회복의 증거는 그의 부르짖음입니다. 삼손은 소년의 도움을 받아 신전의 중심을 받치고 있던 두 기둥을 찾아 껴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세 이름을 “여호와, 주, 하나님이여...”(28) 목이 말라 동시에 부릅니다. 레히에서 부르짖은 이후 삼손이 다시금 부르짖은 것입니다(삿 15:18-19).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신전에 모인 블레셋 사람들도 함께 죽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지붕에만 삼천 명 가량이었으니 전부 10,000명은 넘었을 것이며, 배신자 들릴라도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 승리만이 두 눈을 잃은 사사 삼손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었습니다. 다곤 신전의 붕괴는 삼손의 육체의 힘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응답의 결과였습니다.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고, 이로써 사사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고 명예의 전당인 히브리서에 그의 이름이 등록되었습니다(히 11:32). 우리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고향에 장사된 삼손(31) 삼손의 가족이 그의 시체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였습니다. 전사한 사울 왕의 시체가 심하게 훼손된 반면(삼상 31:9-10)삼손의 시체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삼손이 블레셋에게 가한 타격은 엄청났습니다. 이로써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념했을 것입니다. 삼손, 그는 분명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실인의 헌신을 회복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대한 사사로 사용하셨습니다.
적용: 두 눈이 뽑힌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깊이 생각해 보세요.
축구 국가대표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의 아버지인 손웅정(62)씨는 자신의 아들을 월드 클래스로 키워냈지만 항상 손흥민 선수에 대해서는 야박한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춘천에서 ‘SON축구아카데미’의 감독으로 있는 그는 아카데미를 통해 만나는 요즘 부모들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요즘 부모들이 아이 재능보다는 부나 성공 쪽으로 유도하는 ‘앞바라지’를 많이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개발해 그것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뒷바라지 해 주는 역할이 학교 공부보다 우선입니다.” 우리의 등 뒤에는 우리를 뒷바라지 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 설 교 >
집 착
강문호목사 / 삿 16:23-31
지난 주간 김 옥례 전도사님을 모신 집회가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목사도 아닌 전도사가 그렇게 은혜를 끼칠 줄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원에 성공하였습니다. 본당을 그득 메웠습니다. 은혜에 성공하였습니다. 모두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질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감사헌금 1억 1천만원, 작정헌금 2억 6천만원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마쳤는데 목요일 제게 통장 5개가 쥐어졌습니다. 모두 7천만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감사헌금이 많이 나온 부흥회를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집착하면 보통 때와 다른 행동을 합니다. 이를 <집착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예를 들어 봅니다. 날씨가 잔뜩 흐린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려는 데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퇴근하고 돌아 올 때 우산 5개만 사오세요. 우리 둘, 아들 그리고 딸의 것 그리고 한 개는 여분이예요.> 남편은 그렇게 하겠다고 집을 나섰습니다. 전철 옆에 남자가 우산을 옆에 두고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산에 집착하여 우산만 생각하던 그는 옆 사람 우산을 집어 들고 내리려고 하였습니다. 옆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보세요. 내 우산인 데요.> 그는 미안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해요. 우산에 집착하여 착각하였습니다.> 돌아 오는 길에 우산을 5개 사가지고 전철에 앉았습니다. 우연이었습니다. 아침에 옆에 있었던 사람이 옆에 앉았습니다. 그는 우산 5개를 들고 있는 그를 보면서 자만히 말했습니다. <오늘 수입이 좋으시군요.>
아내가 우산 사오라는 말을 안 했으면 우산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산을 사오라고 하였기에 우산에 집착하였고, 그랬기에 옆 사람의 우산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집착행동>이라고 합니다.
한가지 <집착 행동> 이야기 더 드리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아이가 주먹을 쥐고 펴지 않습니다. 누가 어떤 방법으로 피려고 하여도 실패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손을 펴지 못 하고 주먹만 쥐고 있는 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이제 주먹을 필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궁금하여 손을 펴 보았습니다. 돌아가신 엄마 사진이었습니다.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 엄마 사진에 그렇게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진을 누가 빼앗아 갈가 두려워 주먹을 결사적으로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착은 <집착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가장 힘이 있는 장수 사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맨 손으로 사자를 찢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삿 14;5-6)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군대 1,000명을 죽였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 명을 죽이고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였도다>(삿 15;15-16)
삼손이 가사에 있었습니다. 그 성에서 자고난 삼손은 성문 짝과 두 문설주와 빗장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산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삿 16;3)
이렇게 삼손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 힘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 누구도 당할 수 없는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은 머리칼에 있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머리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기생 들릴라에게 속아서 머리를 깎이고 말았습니다. 독주를 마시고 들릴라 무릎을 베고 자다가 머리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쇠줄로 묶은 후 연자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머리털이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 다곤신당에 모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그렇게 괴롭히던 삼손을 다곤신이 잡히게 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즐기려는 모임이었습니다. 감사예배를 드리려는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삼손을 끌어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며 승리를 자축하며 즐겼습니다. 다곤신당안에 사람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붕에만 3,000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정부 고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10,000명 이상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삼손을 다곤 신당 두 기둥 사이에 세웠습니다. 삼손은 두 기둥 사이에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28)
삼손은 오른 손으로 한 쪽 기둥을 다른 손으로 다른 기둥을 붙들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삼손은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넘어뜨렸습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삼손이 지금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집착하는 이유는 <한>(恨)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1. 집착은 방법입니다.
집착하면 방법이 생기게 됩니다. 삼손은 자기 두 눈을 뺀 원수를 갚으려고 집착하였습니다. 생명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연자 맷돌은 돌면서 원수 갚는 데 집착합니다. 집착하면 방법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곤 신당에 수천명이 모여 있을 때 가운 데 두 기둥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단번에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방법을 생각하여 냈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집착은 방법입니다.
2. 집착은 능력입니다.
집착하면 놀라운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삼손은 원수 갚는 것에 집착하였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28)
두 손으로 그 큰 다곤 신당을 밀어 넘어뜨렸습니다. 수 천명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나는 네델란드에 갔을 때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보잉 747 비행기가 뜨다가 추락하면서 아파트 한 건물을 받았습니다. 아파트 한 채가 고스란히 그대로 쓰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혼자 그렇게 하였습니다. 강하게 집착하니까 그런 놀라운 능력이 생겼습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한(恨)이 있으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恨)은 능력이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칼럼버스는 직물공장 직공이었습니다. 이것이 평생 한이 되어 무엇인가 하고 죽겠다고 결심한 것이 큰 일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파는 나무꾼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극장앞에서 말을 지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한이 되어 그 유명한 연극 희곡을 그렇게 많이 쓴 것입니다.
백화점 왕 죤 워나메이커는 너무나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어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한은 힘입니다.
상록수로 활동한 최 용신 묘가 안산 천곡교회 내에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최 용신 묘를 보았습니다. 묘지에 적혀 있는 말입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네 가지 요소가 여기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농촌 계몽가 최 용신 선생님이 남긴 말씀>
가난에 뼈저린 한이 맺힌 이들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이 충격적이면 그 사람은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노벨 이야기입니다. 노벨이 나이가 많이 든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호텔에서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
대문짝만한 제목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리고 기사에 <다이나마이트의 왕이 죽다>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기자가 동명이인의 죽음을 자기인 줄 알고 그렇게 보도한 것이었습니다. 노벨은 자기 별명이 그렇게 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털어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한은 능력입니다. 한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입니다.
삼손도 한에서 그런 능력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한을 부정적으로 풀면 파괴분자가 됩니다. 자살하게 됩니다. 남을 못 살게 하기도 합니다. 한을 긍정적으로 풀면 능력이 됩니다. 큰 한에서 나온 힘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힘이 됩니다.
■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점심식사가 끝나면 속회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어떤 남자 집사님이 어찌나 설거지를 깔끔하게 잘 하는지 여 집사님들이 감탄을 하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집사님은 설거지를 깔끔하게 잘하세요. 남자들 설거지하는 걸 보면 더러워서 여자들이 다시 하는데...>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예. 제가 고등학교 때 수련회를 갔습니다. 선생님들이 간식시간에 먹을 토스트를 준비해 놓은 것을 우연히 보았어요.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그 중에 토스트 하나를 들어서 계란을 몰래 살짝 빼먹어버렸답니다. 드디어 간식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계란이 하나 없어진 줄을 모르고 토스트를 나누어주셨지요. 그런데 그 계란 없는 토스트가 정확하게 제 앞에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내가 저지른 행동은 내게 돌아온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지요.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하기로 집착하였지요. 만약에 지금 제가 이 그릇 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닦지 않으면 분명히 다음 주에 제 밥이 그 밥그릇에 담길 것입니다. 나는 성실하게 살기로 집착하고 살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3. 집착은 성취입니다.
강하게 집착하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삼손이 원수 갚는 것에 강하게 집착하니까 드디어 그 일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멋진 결론이 있습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집착하면 반드시 이루게 됩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 수진의 발이 매스컴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정말 흉측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 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입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발끝으로 서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발 150켤레를 닳게 하였습니다. 공연을 앞두고 맹연습할 때에는 그의 발은 부르트고, 갈라지고, 물집이 잡힙니다. 그리고 곪아 터지게 됩니다. 그는 발이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발에 수분을 공급하기 위하여 2L짜리 물병을 들고 다닐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발레에 집착한 그는 그 무엇도 다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나는 미국에서 걸레 박물관도 보았습니다. 고대 걸래, 현대 걸레, 각국의 걸레들을 모으니까 훌륭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오직 걸레만 모았습니다. 평생 걸레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모든 돈을 걸레 모으는 데에만 사용하였습니다. 드디어 유명한 걸레 박물관 하나를 완성하였습니다. 집착하면 됩니다. 집착은 창조입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집착은 완성입니다.
집착의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막 1;35-39)
예수님은 오직 전도에 집착하셨기에 전도만 생각하셨습니다. 집착은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전도에 집착하셨기에 전도만 위하여 기도하고 일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언도 전도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최초의 관심사로 가져야 합니다.
성탄절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작년 1225명 전도 운동을 하며 성탄절을 맞았습니다. 금년 이 성전에서 두 번째 1225명 전도 운동에 들어 갑니다. 두 달 동안 우리는 여기에 집착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집착은 방법입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집착은 성취입니다.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 600만명을 학살할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젊고 유능한 외과 의사가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천명씩 가스실과 인체실험실로 끌려가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멀지 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란 것을 마음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오면 교도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이 수용소를 나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어서 시체가 되어 나가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독가스실에서 죽어 불에 타서 연기로 굴뚝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 외에는 길이 없다. 탈출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그러나 죽일 때까지 끌려 나가 노동으로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밖으로 작업에 들어 갈 때마다 한 것이 있습니다. 흙 속에 몰래 파묻어 둔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멘트에 갈았습니다. 그리고 면도를 하며 얼굴을 단정히 하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가 집착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살아 나가야 한다.> 대단한 집착이었습니다. 동료들은 비웃었습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면서 수염을 깎아서 무엇하나?> 그러나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네. 단지 조금 늦을 뿐이라네.>
그리고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면도를 하고 얼굴을 말끔히 단장하였습니다. 나치군인들은 면도질로 말끔한 절망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끌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죽일 차례를 자꾸만 뒤로 미루었습니다. 드디어 나치가 패망하는 날을 맞았습니다. 그는 그날까지 살아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를 떠나던 날 그가 소중하게 지니고 울면서 나선 귀중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깨진 푸른 유리 한 조각.> 그 외과의사는 후에 스웨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유월절이 오면 자기가 작사한 노래를 늘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늦는 법이 없다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이라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프랭크린입니다.
그렇습니다. 집착은 방법입니다. 집착은 능력입니다. 집착은 성취입니다.
마지막 기회
박재선목사 / 삿 16장23-31
우리는 오늘 한 해를 마감하는 송년주일로 모였습니다. 이번 주일로 우리는 한 해를 끝내고 다음에는 새 해를 맞이하게 되는데 한 해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한 세기, 더 나아가서는 한 천년을 마감하는 의미 있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서 천년의 시대에 꼭 한번 있는 그때를 맞아서 태어났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천년을 사는 샘이 됩니다. 앞으로 맞이할 2천년은 3천년과 함께 가는 뜻 깊은 해이기 때문에 우리는 중대한 사명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삼손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공을 통해서 교훈을 주는 사람도 있고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서 성서에 기록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악한 자는 그 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므로 말미암아 실패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남다른 용모와 탁월한 지혜와 힘, 이런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실패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삼손의 출생
하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서 괴로워하던 삼손의 어머니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삿 13:3-5)라고 말합니다.
삼손의 어머니는 너무 좋아서 남편에게 가서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남편이 그 얘기를 듣고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더니 또 그 천사가 나타나서 그대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네가 낳을 아들은 나실인이다. 너희들은 그 아이를 잉태하고 태중에 있을 때 포도주나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삼손은 이런 감동을 받고 태어나게 됩니다.
'나실인'은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별한 자녀인데 날 때부터 머리를 깍지 아니하고, 독한 술을 마시지 않고, 죽은 시체를 만지지 않는 특별하게 성별된 사람입니다.
삼손은 자라면서부터 얼마나 힘이 센지 아무도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자를 잡아 찢는 것을 염소 새끼를 잡아 찢는 것처럼 했습니다. 이렇게 힘이 센 장사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이 세던 삼손이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삼손이 딤나에 내려갔는데 거기에 아름다운 블레셋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 여인을 보고 첫 눈에 반해서 부모에게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 중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취하여 내 아내를 삼게 하소서" 하고 말합니다. 그 때 삼손의 부모는 "네 형제들의 딸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취하려 하느냐" 하고 꾸중을 합니다. 그래도 삼손은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블레셋 여인을 그의 아내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여인의 아버지는 삼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삼손이 사랑하는 딸을 삼손의 친구에게 출가시키고 둘째 딸을 주려고 합니다. 그때 삼손이 화가 나서 여우 삼백 마리를 잡아 꼬리를 묶어서 그 가운데 불을 질러 블레셋 곡식밭을 전부 불태웁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삼손이 유대 땅으로 들어가 굴속에 숨어 있는데 블레셋 군대가 유대 땅을 점령해서 그들을 침략하니까
유대 사람들이 삼손을 굴에서 잡아다가 꽁꽁 묶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줍니다. 그런데 삼손이 힘을 한번 쓰니까 묶였던 줄이 동아줄이 끊어지듯 끊어졌습니다. 또 삼손이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천명을 죽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삼손은 힘이 세긴 센데 그 힘을 다 쓸데없는 곳에 낭비합니다. 하나님이 시키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 나가라 고 해서 나간 것도 아니고 순전한 자기감정과 분노에 의해서 힘을 씁니다. 결국은 나중에 블레셋 한 여인에게 포로가 됩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례를 범하고 이방 여인과 불륜에 빠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힘이 어디에서 솟아나는가에 대한 비밀을 폭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삼손을 죽일까 하고 드릴라를 내세워서 계략을 찾아내는데 삼손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힘의 비밀을 공개합니다. 드디어 삼손이 드릴라의 무릎에 잠들어 있을 때 삼손의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와서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 왔다'고 외쳐도 삼손은 더이상 싸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미 떠났기에 삼손의 힘이 다 빠진 것입니다.
2. 삼손의 타락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21절)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잡아서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그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삼손의 말로였습니다. 삼손이 힘없이 잡히자 저들은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붙였다" 하고 다 모여서 그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어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이 나타날 때 수많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칩니다. 그리고 "저 자가 정말 사자를 찢던 자인가 여우 삼백 마리에 꼬리를 묶어서 불을 지른 자인가, 나귀 턱뼈로 천명을 물리친 자인가" 하면서 삼손을 비웃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온갖 재주를 부리게 해서 희희락락 거리고 즐거워할 때 삼손은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조롱거리가 되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하면서 슬퍼 탄식하고 한 소년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나로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그리고 그가 기둥 곁에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잡고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고 기둥을 밀어젖힐 때 그 집이 무너져서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이 삼손과 함께 일시에 죽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삼손은 마지막 그의 죽음으로 지난날의 모든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를 청산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삼손의 비극은 우리들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가 떠난 삼손은 눈이 빠집니다.
눈이 빠졌다는 말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할 때 앞이 보이지 않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은혜를 상실하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미래의 환상을 보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모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으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눈으로 똑똑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시야가 상실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의 비극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은혜를 상실하고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 눈은 떴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섭리를 보지 못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2) 놋줄로 묶임을 당합니다.
이것은 세상 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습의 노예가 되고, 허탄한 생각의 노예가 되고, 세속의 줄에 매여서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 마치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니까 나오기는 나왔는데 손도, 얼굴도, 발도 묶여서 걷지 못하는 것과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세속의 줄에 묶여서 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포로 된 자들이 많습니다. 혹시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3) 연자 맷돌을 돌립니다.
연자 맷돌은 원래 나귀나 소가 돌리는 것입니다. 삼손이 건장한 몸으로 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떠난 자가 날마다 맷돌을 돌리듯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항상 세속의 쳇바퀴 돌듯이 먹고 사는 인생으로 끝나버리는 비극을 삼손이 친히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내가 일생을 산 것이 맷돌을 돌리는 동물적 존재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끝나버린 존재인지 아니면 내가 날마다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슨 일이 성취되고 있는지 반성해야 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남편이 날마다 맷돌을 돌리는 것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면 안 믿는 남편을 향해서 믿는 아내가 똑똑하게 말할 수 있는 지성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을 향해서 "여보, 당신이 일상적으로 맷돌을 가는 존재로 쳇바퀴 돌듯이 날마다 출근하고 해지면 돌아오는 것으로 끝낼 것입니까? 당신과 내가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이 이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자식이 교회에도 나오지 아니하고 밤늦도록 술 취하고 세상을 살고 있다면 그 아들을 향해서 "아들아, 무릎을 꿇어라 인생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일생을 사는 어머니는 자식을 낳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4) 노리개 감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 사람들의 노리개 감이 되었습니다. 멸시를 받고 있습니다. 옛날 삼손은 전 국민으로부터 두려움의 존재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보면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경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 능력 있는 성도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면 비난과 비웃음과 조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을지언정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당당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권세를 가질 때는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놀라지만 그 은혜를 상실하면 바로 조롱거리가 됩니다.
과연 내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남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는 삼손처럼 되어버린 사람이 아닌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힘이 있습니다. 재능도, 건강도, 물질도, 학식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지 못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탕진하고 소모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는 않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됩니다.
한 천년을 마감하면서 우리는 분명히 새해를 맞기 위하여 나 자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삼손은 수천 년 전의 삼손이 아니라 바로 내가 아닌가 우리는 한번 돌아보아야 됩니다.
3 삼손의 회복
"그의 머리털이 밀리 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 하니라."(22절)
이러한 실패와, 부끄러움과, 수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다시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 운 후에'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다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나실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기 위해서 머리를 깍지 아니하고 계속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방 여인 드릴라에 의해서 다 깎였습니다. 은혜가 완전히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삼손에게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은혜가 다시 소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1) 삼손은 다시 기도를 시작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삼손이 이제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실패는 기도하지 않는데 있었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을 망친 것입니다.
이제 삼손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소생하는 비밀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상실하면 삼손처럼 완전히 폐인이 됩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에서 얻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목사는 이미 힘을 잃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가대는 찬양이 죽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장로는 이름만 있지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머리 깍인 삼손처럼 세상에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와서 은혜 받을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우리는 모두 다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됩니다. 눈 빠진 자가 누구 입니까 사슬에 묶인 자가 누구입니까 맷돌 가는 자가 누구입니까? 조롱거리 된 자가 누구입니까? 기도를 하지 않는 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새 천년을 맞기 위해서 모두 다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자기 과거에 대한 회개
삼손에게 두 번째 은혜가 소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여기 삼손이 '이번만'이라고 말합니다. '한번만'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삼손이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야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그는 깨닫고 그의 비참한 실패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을 깊이 느끼면서 '오 주여, 지나온 날을 후회합니다. 회개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지나온 날의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인생을 다 낭비해 왔습니까? 나에게 준 그토록 많은 은혜를 세상에 다 탕진했습니다. 쓸데없는데 써 버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렸습니다. 대체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할 말이 있다면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실수로 하나님께서 멸시 당하는 처지가 된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나실인으로 태어나 부모님의 기도에 어긋나게 눈 빠지고, 맷돌 가는 노예가 되어 이방 신전의 조롱거리가 되었으니 오 주여 용서하소서.' 이렇게 그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죄인에게는 한번의 기회를 다시 주십니다. 하나님은 제2의 기회를 우리에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면서 회개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3), 삼손의 희생적 각오
삼손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것에 노예가 되어 살았기에 이제는 내가 죽음으로 자유 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손의 위대한 승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살았다면,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육신의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일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제2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을 각오해야 됩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면 얻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우리는 일 사각오의 정신으로 내가 죽어서라도 주님의 영광을 돌려야 되겠다. 이 각오가 서시기 바랍니다.
4), 이방 신전을 무너뜨렸다.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삼손에게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 보다 더욱 많았더라."(29-30절)
삼손이 지금 있는 그 자리는 이방 신전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성전 삼아야 할 몸입니다. 그런데 성전 된 몸이 타락해서 눈 빠지고, 사슬에 매이고, 맷돌을 갈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비웃고, 조롱하는 이방의 무리들을 보면서 중심으로 회개하면서 '오,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에게 힘을 주사 나로 하여금 마지막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을 심판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은 나에 대한 심판이 아니요, 하나님에 대한 저 들의 잘못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전능하신 것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주시옵소서.' 그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힘을 다하여 밀어젖힐 때 기둥이 뽑아지고 밀리면서 지붕이 무너졌습니다.
나를 버티고 있는 기둥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기둥이 무엇입니까? 돈과, 권력과, 세상의 모든 허탄한 것들을 기둥 삼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노예의 사슬로 묶어놓는 기둥들을 뽑아버리시기 바랍니다. 무슨 기둥이 나를 얽어매고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것들의 기둥과 이 세상의 모든 돈의 기둥과, 물질의 기둥을 세워놓고 살려는 우리의 잘못을 뽑아버려야만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비웃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누구로부터 비웃음을 받고 있습니까? 눈이 빠지고, 머리가 깍이고, 사슬에 묶인 채 이방 신전에 들어온 줄도 모르고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된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삼손을 향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삼손을 향해서 부르짖는 소리가 아니라 교회를 향해서 나를 향해서 부르짖는 소리라 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정말로 주님의 종답게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세워야 합니다. 뽑아져야 할 것 다 뽑아버리고, 무너져야 할 것 다 무너져버리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 있는 때가 많습니다. 우상의 집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내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이 되도록 세우시기 바랍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안홍기목사 / 사사기 16:23-31
성경에는 태어나기 전에 예언돼서 태어난 사람들이 몇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 주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주님은 태어나는 것만 예언되어 진 게 아니라, 삶 전체 즉 태어나서 나중에 무엇을 어떻게 하시리라는 것까지 예언되어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미리 예언되어 태어나신 분들은 구약에서 이삭과 삼손이 그런 인물이고, 신약의 세례요한이 그런 분입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삼손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삼손의 태어남을 특별히 예고하여 주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에겐 특별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사사기 13장 5절 말씀입니다,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 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삼손이 태어나기까지 이스라엘은 한 번도 블레셋과 전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서쪽 지역 이스라엘 지파들은 블레셋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싸워볼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블레셋은 강한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블레셋을 정복하지 않고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 평안하게 살 수 없었습니다. 이들을 물리치는 것은 이스라엘에겐 영원한 숙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이제 블레셋 정복의 특별한 사명을 맡기기 위하여 그를 이 땅에 특별한 방법을 통하여 보내신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 족속은 실제로 존재했는가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조나 대학교의 윌리엄 데버 교수가 이스라엘에서 블레셋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해서 블레셋 족의 역사는 물론이요 그들의 생활 습관까지 밝혀냈습니다. 놀랍게도 그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똑 같았습니다.
성경에서 블레셋 민족은 갑돌(Caphtor) 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갑돌은 크레타(그레데) 섬을 말합니다. 또 성경에는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철(鐵)을 다루지 못했고, 만일 필요하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번 발굴에 의하면 블레셋 인들은 고대 근동에서 최상의 금속장인들이었고, 특히 칼을 만드는 산업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유대민족들은 청동기 문명이었으나 블레셋 족속은 이미 철기문명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블레셋 족속들은 한 템포(tempo) 빠른 강한 민족들이었던 것입니다.
삼손은 이처럼 강한 민족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에 출생부터가 남달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신적인 힘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3장 24절부터 2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가 자랄 때 그에게 복을 주셨고, 자란 후에는 여호와의 신이 그를 감동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처럼 출생부터 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몇 사람 되지 않는 것을 볼 때, 삼손은 놀라운 축복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이 너의 보증이 되신다.”고 하셨는데, 그야말로 삼손의 일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장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보면 그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큰 능력과 함께 태어난 그가, 마지막을 보면 안타깝게도 이 땅에 태어났던 그 누구보다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이 어떻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아다가 두 눈을 빼고, “우리 동족들을 죽인 힘 좋은 그를 불러 다가 우리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하면서, 그를 끌어다가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힘이 이제는 대적들을 기쁘게 하는 노리갯감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특별한 사명을 받고 태어난 그가 이제는 눈을 뺀 채,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남녀 귀족들 삼 천 명이 그 모습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에서는 “그 사람들이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굉장한 은사를 목에 메고 도리어 비참하게 죽어 가는 비극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이야기는 듣는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어찌하여 삼손이 그렇게 한심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까?
물론 삼손 같은 경우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엇인가 강하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삼손의 비극은 훈련되지 않은 위대한 힘에 있었습니다.
삼손이 지닌 힘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이 찢을 수 있었고, 장정 30명을 맨 주먹으로 죽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르지 않은 푸른 칡 일곱 줄을 썩은 동아줄처럼 끊어버리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몰랐던 사람입니다. 도리어 그런 힘을 졸렬하게 여자들을 쫓아다니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그것이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지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지요. 삼손은 힘을 가지고 한 번도 값지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어린애들처럼 어리석은 일에 힘을 소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힘자랑하다가 그 힘 때문에 더욱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지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위대한 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만이라고 생각해 보았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갈까 생각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철저하게 훈련받았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삼손에게 국한 된 이야기입니까? 모두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려지십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지식을, 어떤 이에겐 물질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를, 어떤 이에게는 재능을,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믿음과 성령의 은사를 각각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것 때문에 도리어 비극적인 인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추기가 되면 위기가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추기는 축복의 시기입니다.
가정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때입니다. 자녀들을 잘 자랐고, 부부 사이도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될 만큼 사랑으로 무르익었고, 물질적으로도 이제는 여유가 좀 생기기도 한 때, 그래서 “아, 이제는 좀 평안을 누려도 되겠구나.”하는 축복 받은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바르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들의 평안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할 때, 마음 한구석으로부터 유혹이 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뭐 재미있는 게 없는지 두리번거리게도 되고, 별것도 아닌 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록펠러의 아버지는 록펠러를 어려서부터 훈련시켰습니다.
6살이 되었을 때, 록펠러를 불러서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20불을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20불이라면 큰돈이었는데, 그 돈을 받고 즐거워하는 록펠러에게 아버지는 “잠깐 그 중에 10%는 누구 것이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용돈에서 10%를 떼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면 언제나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부가 되어 교회를 다닐 때에도 그는 늘 30분 전에 교회에 나왔습니다. 앞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서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거부가 되었을 때에는 십일조를 관리하는 직원만 40명이 되었고, 그가 창설한 종합대학이 12개, 그가 세운 교회가 삼천 개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에 십일조가 성서적이냐는 문제로 토론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최소한(minimum)이다, 가능하면 십의 이조, 더 가능한 사람은 십의 오조도 바쳐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가를 배우시고, 결단하시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사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내서 이웃들을 위해 힘닿는 데까지 봉사하시고, 교회를 위하여도 맡은 일 말고도 찾아서 충성하기를 진정으로 기도합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부탁하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서 일해야 합니다. 그렇게 일하면 할수록 영적으로 부유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삼쁘’가 생긴다고 합니다.
첫째는 미쁘고, 신실해진다는 말이지요,
둘째는 기쁘고, 항상 즐겁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바쁘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 생활에만 바쁘면 인간 영혼은 말라 죽습니다.
내 영적인 삶에도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삼손은 자기를 돌아보는 일은 무시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딤나로 내려가서 블레셋 딸 중에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서 사랑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합시다. 사실은 그 구절은 다른 성경에는 괄호가 쳐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성경과 동등한 구절이라고는 볼 수 없는 곳입니다. 여하튼 결혼식을 치르면서 그 옆에는 30명의 블레셋 군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또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 여자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돌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녀가 보고 싶어서 염소 새끼를 가지고 달랑달랑 그녀를 찾아가는 삼손은 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다시 삼손은 블레셋 땅 ‘가사’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기생인 들릴라를 만나서 사랑에 또 빠지게 됩니다. 거기서 삼손은 함정에 빠져 머리를 잘리고 운명적인 시간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뭔가 아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14장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처음에 사자를 죽일 때에는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여 빈손으로 사자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크게 임하시매 삼손이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이고 노략하여 수수께기 푼 자들에게 옷을 주고 심히 노하여 아비 집으로 올라갔고”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일 때에도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릴라에게 내려간 후부터는 그가 칡을 끊을 때에도, 다음 그 다음에도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했다는 말씀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기 시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이미 떠나고 그는 남아 있는 힘을 가지고 그 일들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자기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돌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힘만 믿고 무식하게 밀어 붙이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자기 영혼을 돌아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회개할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삼손은 자기 영혼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할 시기를 놓쳐버렸습니다. 또한 결단해야 할 때를 놓쳤습니다. 결국 두 눈이 빼지고 목에 쇠사슬이 메어지고, 맷돌을 돌리면 서야 비로소 그는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비극입니다. 사람이 결단해야 할 시기가 있고, 회개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그 때를 놓치면 불행이 옵니다.
성경은 실수나 범죄를 두려워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악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There is no one on earth who does what is right all the time and never makes a mistake”
아브라함 링컨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한참 동안 생각하던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고백대로라면 그가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비록 실수도 하고, 실패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섰으므로 미국 대통령 중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존경받은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기를 지켜나갔기 때문에 그런 인격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항상 햇볕만 나면 사막을 이룬다.”
땅에는 가끔 비도 와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 때문에 의외로 우리의 거친 성품과 기질이 다듬어지고 가꾸어진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품격(연단)을 낳고, 품격(연단)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압니다.”
작곡가 죠셉 하이든은 일생 동안 8백 개의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작곡한 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천치창조’라는 오라토리오입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그가 66세가 되어서야 완성되었는데 무려 8백 번이나 반복하여 작품을 써본 후에야 마침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도 8년 동안 무려 2천 번이나 스케치해본 결과를 통해서 얻은 명작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얼마나 실수했느냐가 아니고, 그가 실수할 때마다 얼마나 적절한 시기에 바르게 회개하고 돌아섰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유난히 실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다윗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삼손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고는 성경의 위인 어느 누구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실수 후, 회개의 기회에 하나님께 바르게 돌아와서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거나, 시기적절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뒤늦게 맷돌을 돌리면서 울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죽음으로, 내 생명으로 갚고 죽게 해달라는 외칩니다.
성경 저자는 그래도 불쌍한 삼손을 생각해서 “살아서 죽인 자보다 죽음으로 죽인 자가 더 많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축복을 받고 태어나든, 저주를 받고 태어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 인생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고난 운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야베스'를 보십시오. '입다'를 보십시오. 타고난 팔자를 슬퍼하면서 거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그리고 타고난 은혜에만 만족해서 머물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타고난 축복이 도리어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를 소멸하지 마십시오. 은사를 평생토록 지켜나가십시오.
그렇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성령 안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창조적인 곳에 항상 투자하며 사십시오. 그러다가 실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할 기회를 놓쳐서 절망적인 실수로 만들지 마시고, 늘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볼 시간입니다.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십시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낙엽도 바람타면 비상합니다
삿 16장 23~31절 / 김필곤목사
극단적 상황에서 거리에 나와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1년 기준으로 경기도 내 노숙인은 442명이고 전국적으로는 4천 492명이라고 합니다. 직장에 잘 다니다가, 사업을 잘 하다가 어느 날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거리에 뒹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노숙 원인으로는 장기간 실업 19.9%, 가족해체 16.7%, 사업실패 15.8% 등 경제적 요인이 주를 이룬다고 합니다. 아내에게 잘 못 보여도 요즈음은 노숙자가 된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남존여비(男尊女卑)”를 부르짖으면 큰 일 난다는 것입니다. "남존여비란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있다."라는 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존여비는, 남자의 존재 이유는 여자의 비밀(男存女秘)을 지켜주기 위해서고" “남자 존재는 여자에게 비용을 대어 주기 위함이고(男存女費)”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해 쫓겨난 노숙자 남편들이 모여 서로 사연을 이야기 했답니다. 한 참 힘낼 만한 30대인데 노숙자가 되어 물어 보니까 집에서 밥이 질다고 투정한다고 아내에게 쫓겨났다고 했답니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은 40대인데 쫓겨나 물어 보니까 묻는 말에 늦게 대답한다고 쫓겨났다고 했답니다. 아직은 그래도 영이 설 만한 나이인 50대에게 물어 보니까 마누라 화장하고 나가는데 어디 가느냐고 물어본다고 쫓겨났답니다. 후배들의 쫓겨난 사연을 가만히 듣고 있던 60 대가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네들은 났네. 난 외출하는 아내에게 나도 따라 가면 안 되느냐 물어 보다가 쫓겨났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70대 남자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마누라랑 한방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가 쫓겨났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있던 80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이보게 말들 말어 나는 다른 영감들은 다 산에 누워 있는데 왜 집에 있냐고 쫓아 냈어.”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노숙자처럼 추락할 때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공부에서, 부모는 자녀 양육에, 직장인에게는 직업의 현장에서, 사회에서는 인간관계에서, 경제력에서, 건강에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노숙자처럼 거리에서 뒹굴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어떤 사람들은 바람타고 비상하는 가을 낙엽처럼 재기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사람도 있고 재기하지 못하고 비참하게 인생을 끝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보면 “재기를 꿈꾸는 부도 기업인들의 모임”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노숙자에서 재기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습니다. “노숙자에서 유망 벤처 기업인”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7년여의 수배와 노숙자 생활을 딛고 유망 벤처기업인으로 일어선 `더웨이'의 김해일 대표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노숙자에서 연봉 1억 원을 버는 판매 왕이 된 이정훈 씨 이야기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97년 외환위기로 대리점 부도가 나고 노숙으로 떠돌다 대리운전 기사 등을 하면서 '희망의 끈'을 꽉 쥐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비상하지만 마지막은 추락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 추락으로 다시 비상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버린 사람들을 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졸지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인생은 자식과 함께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유다라는 사람입니다. 제자로 선택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신뢰를 받고 재정을 맡았습니다. 처음에는 비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추락하여 예수님을 인신매매하고 결국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사비라 부부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신앙생활 잘 하던 부부였습니다. 초대 교회 멤버가 되어 헌금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러나 욕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다가 아내도 죽고 남편도 죽는 일을 당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추락할 수는 있습니다. 높이 오른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고 결혼생활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추락의 현장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비상하여 하나님의 사람의 사람으로 영광을 드러내며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세상은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어 바람피우다가 어느 여관에서 불이나 어느 이름 모를 여인과 죽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다시 행복한 가정을 만든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인생의 끝이 비참해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 부끄럽겠습니까? 다윗도 한 때 간음하고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비상합니다. 베드로도 한 때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며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지도자로 비상하였습니다. 야곱도 사기꾼으로 한 때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비상하여 12 지파의 아버지로 비상하였습니다. 아브라함도 한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상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도 한 때 살인하고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광야 생활을 거치며 비상하여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오는 삼손도 이성에 약하여 추락하여 블레셋의 노예가 되고, 머리를 깎기 우고,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인생으로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개를 달고 비상하며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봅니다. 때로 우리가 추락하지만 추락한 현장에서 날개를 달고 비상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1. 우리는 추락의 현장에서 외면하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날개를 달아야 비상합니다.
삼손의 인생은 비상하는 인생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특별하게 태어났습니다. 당시 민족의 지도자인 사사가 된 사람입니다. 힘이 장사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힘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인에게 약했습니다. 약점을 관리하지 못해 추락했습니다.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져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삼손을 포로로 잡은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눈을 빼어 버졌습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에 약한 눈이었습니다. 놋줄에 매여 맷돌을 돌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민족 지도자 삼손이 하루아침에 추락하여 장애인이 되고 노예가 되어 블레셋의 조롱거리가 되고 민족의 수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삼손을 조롱하는가를 보십시오. 25절 이하를 보십시오. 블레셋 방백들이 다 모였습니다. 남녀가 3천명쯤 되었습니다. 삼손을 조롱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광경입니까?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어야 할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짓밟히는 것입니다. 조롱당하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추락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 때 추락한 인생에서 어떻게 마지막 삼손이 비상합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옵니다. 추락의 현장에서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추락의 현장에서 비상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본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 회복력(캐런 레이비치, 앤드류 샤테 지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들은 15년 가까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회복력이 개인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연구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성공에 꼭 필요한 것이 회복력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역경에 효과적으로 끈질기게 대응하는 능력, 역경을 극복하는 힘, 내면의 심리적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도구가 바로 회복력이라는 것입니다. 연구를 해 보니까 회복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유전도, 아동기의 경험도, 기회 부족도, 경제적 문제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일차적인 장애물은 인지 양식(Cognitive style)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고 양식(Thinking style)입니다.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어린 시절부터 겪은 사건들을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개인의 사고 양식은 자기의 관점에 색을 칠하고 편견을 부여해서 자기 파멸적인 행동 패턴을 확립하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ABC 확인하기”를 소개합니다. 예를 소개합니다. 회사에서 지친 몸으로 집에 왔는데, 이번에도 배우자는 당신보다 먼저 퇴근하고도 저녁을 차릴 생각조차 안 하고 있습니다. 화가 납니다. 왜 화가 납니까? 배우자가 식사를 준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배우자의 그러한 행위가 당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로 해석하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배우자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분노를 촉발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다보면 크고 작은 역경을 겪는데 역경(Adversity)은 개인의 반응을 촉발하는 사건입니다. 실직, 이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마감 시한 위반, 친구와의 말다툼, 지각 등의 역경은 감정적 결과와 행동적 결과(Consequence, ABC 모형의 'C')에 직결됩니다. 즉, 그 사건에 응해서 느끼는 감정과 하는 행동으로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C'는 분노 또는 실망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감정과 행동은 바로 나의 믿음(Belief, ABC 모형의 'B')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이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행동을 할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을 바꾸어라. 인생이 영원히 바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사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추락한 인생이 되었습니까? 만용을 부린 것입니다. 자기의 지위, 자기의 힘, 자기의 인기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만용을 부립니까? 힘을 얼마나 남용을 합니까? 그러나 삼손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머리카락에 있습니까? 그의 출신 성분에 있습니까? 자신의 능력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16장 20절에 보십시오.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버리면 시체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종속적인 것입니다. 집나간 탕자처럼 추락의 현장에서 마음의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가면 먹을 것이 많고 아버지께 가면 회복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비상한 것은 다윗에게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물매와 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그것이 총알처럼 쓰임받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 추락하였지만 총리가 된 것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 39:2)"라고 말씀합니다(창39:3,23)"
모세가 지팡이를 통하여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는 것은 모세의 힘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락의 현장에서 비상하는 날개를 달려면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다시 한 번 비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삼손은 지금 비참하게 추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던 삼손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리니까 볼 수 있는 눈이 빠져 버렸습니다. 은혜를 상실하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미래의 환상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지 못합니다. 놋줄로 묶임을 당하였습니다. 세상 줄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연자 맷돌을 돌립니다. 소나 나귀가 돌리는 돌을 돌려야 하는 짐승처럼 전락해 버렸습니다. 세속의 쳇바퀴 돌듯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동물적 삶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노리개 감이 되어 버립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거리에 밟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문제가 심각하며 심각할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하나님께서 달아 줍니다. 외아들이 죽은 나인성 과부도, 38년 된 병자도, 12년 동안 질병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여인도 예수님께 나아가 추락한 이생 비상하였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묶여 있어도 노예가 되어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마지막에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2. 우리는 추락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마지막 남은 것(기도)으로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합니다.
사람이 추락하면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에 집착을 합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다 적들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입니다. 한 사람도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비상하는 것은 포기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삼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26절을 읽어 보십시오. 소년이 있습니다. 볼 수 없는 눈을 대신해 줄 소년입니다. 기둥을 찾게 합니다. 다 나를 배신하는 것 같고 다 나를 떠나는 것 같지만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재기를 보십시오. 간신들의 모함으로 옥중에서 온갖 수모 끝에 겨우 목숨만을 건진 이순신이 다시 통제사로 부임한 현지는 실로 참담하였습니다. 왜군의 재침으로 온 산하가 쑥대밭이 된데다 수군들은 거의 전멸되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지리멸렬이었습니다. 통제사인 원균은 후퇴하다가 전사했고 수군사령부인 한산도는 이미 왜군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왜군의 배는 모두 330척이었습니다. 이 때 이순신 장군이 한 말이 “나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상유12척)"이라고 합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이순신은 오히려 이만큼의 배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를 되뇌며 비상한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 하나님께 붙들리면 비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물맷돌과 모세의 지팡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비상할 수 있는 신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손에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삼손은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그의 힘도 다 결박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 입술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입술로 무엇을 합니까? 예전처럼 떠벌리지 않습니다. 자기 힘자랑하지 않습니다. 말씀가지고 놀지 않습니다. 그 입술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어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소서"
그 때 그 신전이 무너집니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이 감기게 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입술이 멈추게 됩니다. 수치가 살아집니다. 조롱의 눈길이 살아집니다. 살았을 때 한 일보다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서 더 많은 일을 합니다. 삼손의 마지막 비상은 기도의 날개를 달고 일어났습니다.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기도하여 비상의 날개를 달았습니다. 삼손의 부모는 기도의 부모입니다. 기도로 아이를 낳았습니다(13:8). 기도로 기른 아들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위기를 당할 때 딱 2번 기도한 장면이 나옵니다. 잘 되니까 기도를 잃은 것입니다. 기도로 깨어있어야 유혹으로부터 이길 수 있고 교만의 늪에 빠지지 않는데 그 기도를 잃은 것입니다. 기도를 정비용으로 쓰지 않고 수리용으로만 사용한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기의 베드로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세 번이나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잠만 잡니다. 결국 시험에 들고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을 받고 베드로는 변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기도로 비상하는 인생이 됩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기도로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 1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된 모습이 무엇이었습니까 제 구시 기도 시간이라는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그 이후부터는 달라졌습니다. 비상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총리로서 그 바쁜 중에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비상하는 인생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밤 10시에 자서 새벽 4시에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약에 10시 넘어서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꼭 이렇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모든 선한 사람이 잠자리에 들 시간에 왜 오셨습니까?'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나는 남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서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한다!'라고 했습니다. 추락하였습니까?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입니까? 네 명의 친구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나가 추락의 현장에서 기도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였습니다. 에스더가 추락의 현장에서 기도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였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마7: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 우리가 추락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변화(회개)의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합니다.
삼손이 추락하고 몰락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추락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추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서히 넘어졌습니다. 그는 유혹 앞에 무릎을 꿇고 추락하였습니다. 그를 추락하게 한 근본적인 것은 죄입니다. 죄는 승승장구하여 항해하는 인생에 구멍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삼손은 무력에 의해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진 것입니다. 추락하는 인생들을 보면 지극히 작은 것에 넘어집니다. 사탄은 우리를 추락시킬 때 죄를 가지고 넘어뜨리는데 죄같이 않게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삼손의 약점입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삼손은 이성에게 약했습니다. 젊은 때 딤나에서 실수를 하였습니다. 한 기생(매춘부)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삼손은 사사입니다. 가사는 삼손의 주요 활동지인 소라에서(13:2) 약 60Km가량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자기 동네에서 바람피우지 않고 사람들이 모르는 먼 나라 여행가서 바람피우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달려드는 들리라에게 넘어집니다(삿16:4; 15; 딤나 여인 삿14:16). 셰익스피어는 유혹을 가리켜 '내 팔꿈치에 있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유혹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술에 약한 것이 약점이고, 에서는 배고픈 것 못 참는 것이 약점입니다. 유다는 돈에 약했습니다. 모세는 분노를 의분을 참지 못하는 것이 약점입니다. 요셉은 경망한 것이 약점입니다. 베드로는 겁이 많은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바울은 건강이 약한 것이 약점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질 욕심이 약점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이성에게 약했습니다. 이것들이 인생을 추락하게 합니다.
비상하려면 이 약점을 보완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변화하고 다시는 그 길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삼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개하였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보면 회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라는 말을 볼 때 과거를 뉘우치는 흔적을 보게 됩니다. 이제야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그는 깨닫고 그의 비참한 추락이 자신의 잘못인 것을 느끼며 '오 주여, 지나 온 날을 후회합니다. 회개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지나온 날 사명을 잃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은혜를 낭비해 버렸습니다. 기회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제 추락한 곳에서 다시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추락의 현장에서 비상의 날개를 달아줍니다. 사울도 추락하였고 다윗도 추락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다른 점은 사울에게는 회개가 없었도 다윗은 회개하고 비상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회개하며 양털같이 희어지고 다 용서해 주십니다. 죄악을 기억치도 않으십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955년부터 에미 워너와 루쓰 스미쓰 교수팀은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하기 그지없는 하와이의 어느 한 섬인 카우아이에서 그 해에 태어난 아이 833명 모두를 30년 넘게 추적 조사를 했습니다.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답니다. 3분의 2 가량의 아이들이 이러한 열악한 환경의 희생자가 되어 일찍부터 학습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부적응자가 되었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아이들이 전과자나 미혼모가 되었답니다.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그중에서도 특히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201명을 추려 성장 과정을 분석했답니다. '고위험군'이라고 불린 아이들 중 3분의 1인 72명이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문제없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속성이 있었는데 바로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워너 교수는 그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회복탄력성이 열악한 가정환경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정신질환의 요인 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장하여 성실하고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회복탄력성은 시련이나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적인 힘이며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그 환경을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는 능력입니다. 물체 마다 탄성이 다르듯이 사람도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삶의 탄력성이 있어다는 것입니다. 이 회복탄력성을 세 가지 요소로 말합니다. 자기조절능력(감정조절력 + 충동통제력 + 원인분석력), 대인관계능력(소통능력 + 공감능력 + 자아확장력), 긍정성(자아낙관성 +생활만족도 + 감사하기)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긍정성입니다. 긍정성을 강화하면 자기조절능력과 대인관계능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긍정성을 습관화하면 누구나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늘 실수 할 수 있고 그 실수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늘 비상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회개하며 다시 살아납니다. 회개하며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회개하면 인간관계가 변합니다. 회개하면 부흥합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고 결국 비상하지 못하고 추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성만찬을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한복음 13장 21절)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회개하고 비상하였습니다. 사울은 회개하지 못하고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하고 비상하였습니다.
불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죄입니다. 믿음이 힘이 있기 때문에 사탄은 계속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을 보니까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이긴다고 합니다. 삼손은 믿음을 주는 사람과 사귄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여인과 사귀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지니까 반항하게 됩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이방여인과 결혼합니다.(14장)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비상하는 하나님의 일을 가장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여인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퍼즐 맞추기 놀이로 취급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 앞에 상대화시켜 버립니다. 하나님께 내어 주어야 할 마음을 드릴라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절제해보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환경에 자신을 던져 버렸습니다. 받은 바 은사를 믿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 버렸습니다. 아나니아 삽비라 추락한 인생에서 비상하려면 회개하였으면 됩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상실해 버립니다. 아간 추락한 인생에서 비상하려면 회개했으면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추락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회개하고 비상하였습니다. 탕자는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니까 비상하는 인생이 됩니다.
회개하면 기도 응답을 받고(대하 7:14) 회개하면 죄 용서를 받고(사 55:7,렘 3:12, 31:9) 회개하면 위로를 받고(마 5:4, 사 57:15, 눅 15:7) 회개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고(행 2:38)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시 51:17)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시 51:12, 13) 회개하면 새로워지고(겔 18:31) 회개하면 부흥이 이루어집니다(욥 22:23-29).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땅을 고칠찌라(대하 7:14)”
추락하였지만 마지막 비상하려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의 날개를 달아야 비상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의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의 날개를 달고 비상해야 합니다.
삼손에게 주신 두 번째 기회
삿 16장 23~31절 / 마경훈목사
좋은 환경이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습니다.
물고기를 운반하는 배 안에 상어를 넣어두면 물고기가 멀미를 하지 않고 운반하려는 목적지까지 싱싱하게 살아서 운반이 된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 2주 동안 다녀온 호주는 너무나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공원이 따로 필요치 않을 정도로 가는 곳마다 자연환경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호주를 지상 낙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해는 갈 정도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특별한 관광지가 아니라도 제가 그 속에 있으면 마치 달력 속의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도 모든 것이 풍요로우니 마냥 행복할 것 같은 호주인들이 세계에서 자살율이 가장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행복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좋은 환경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 그만큼 영혼이 황폐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인물인 삼손도 비슷한 경우라고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부모를 만났고, 남과 다른 능력을 타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아니 실패한 인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자의 예언의 실현으로 삼손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따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나귀 턱뼈로 블레셋 군인 1천명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한 번은 여우 300마리를 잡아서 꼬리를 묶고 불을 붙여서 불레셋 사람들의 밭에 불을 놓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눈이 뽑히게 되고 짐승이나 돌리는 맷돌을 돌리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삼손의 인생이 실패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불경건한 생활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듯이 삼손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삼손의 치명적인 약점은 여색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남자 가운데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적인 부분이나 혹은 육체적인 부분에 이상이 있는 남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삼손도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랑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테두리를 넘어서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경우 여러 번 그 선을 넘어섰고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구별된 나실인의 규례를 어겨가면서 까지 여색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약점이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가 가진 그 약점을 공격하며 길을 엽니다. 그리고 일단 길이 열리면 그 길을 틈타서 사정없이 우리의 전 인생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그 부분을 올려드리며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 약점이 당신의 경건을 깨지 못하도록 기도하십시오.
둘째, 자기 정체성의 상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일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올바른 목회가 된다고 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택하신 사사입니다. 그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았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에 대해서 다루는 사사기 13장에서 16장까지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삼손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무슨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는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분명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기록한 바울의 서신들을 보십시오, 그는 항상 서신 초두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 것을 알았고, 그것을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정말 자신답게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남의 흉내를 내며 자신답지 못하게 사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사답지 못한 것이나 집사가 집사답지 못한 것,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이 다른 문제이전에 정체성의 문제인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어봅시다. 가데스바네아에서 40일 동안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 중에서 10명의 잘못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민수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스라엘 족속들은 결코 메뚜기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민22:1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22:5-8을 보면 발람이 예언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존귀하며 아름다운 존재들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존귀한 존재들이 왜 그렇게 자신들을 비하시켰던 것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기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도의 결핍
삼손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겨우 한번 찾을 수 있는데 그 때가 언제입니까?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이 뽑혀서 맷돌질하다가 블레셋인들의 잔치에 구경거리로 나오게 되었을 때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사라는 특별한 직임을 맡았기 때문에 남달리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이 일생에 기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삼손과 사무엘을 비교하면서 얻었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드린 한 번의 기도가 탁월한 능력자의 일생의 활동보도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자신의 능력으로 일생동안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며 많은 적들을 죽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그런데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한 번 기도할 때 그보다 더 놀라운 승리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함으로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성령님과 관계가 깨짐
삿 15:14을 보면 삼손이 나귀의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명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이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힐 때를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알지 못하더라"(삿16:20)라고 되어 있습니다. 삼손이 힘을 쓸 때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떠나시자 힘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을 일을 마치거나 죄를 범할 때는 성령께서 떠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중생한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주의 백성들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근심시키거나 소멸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아가며 죄악을 범할 때 성령님은 슬퍼하시며 근심하시며 성령의 능력은 소멸됩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신이 떠나심으로 힘을 쓸수 없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눈이 뽑히고 짐승과 같은 시간을 보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 중에 성령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살다가 가는 신자도 많습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삼손의 일생을 통해서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봅니다.
첫째, 마지막까지 참으시는 하나님
삼손에게는 나실인의 규례가 주어졌습니다. 삿 13장에 보면 그에게 세 가지 금지된 규례가 주어집니다. "1)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 것 2)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 것 3)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포도주를 마셨고, 시체를 만졌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두 가지 금지사항을 어길 때까지도 참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삿 16장에서 들릴라의 꼬임에 넘어가 세 번째 금지사항인 머리에 삭도를 대는 죄를 범하자 하나님의 신이 떠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죄악이 관영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에 분노하셨고 세상을 쓸어버리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결심은 실행되어서 결국 세상은 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해 벧전 3:20에서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120년 동안 참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우리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은 더욱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하찮은 것으로도 놀라운 일이 가능한 신자
신자의 삶에는 성령님의 개입하심이 있기 때문에 하찮은 것으로도 큰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삼손이 삿 15:15에서 블레셋 군대 1천명을 죽일 때 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의 적 1천명을 죽인 것은 칼이나 창이 아닙니다. 나귀 턱뼈입니다. 그가 나귀 턱뼈를 사용할 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발견합니다. 다윗이 3m가 넘는 거인 골리앗을 물리칠 때 사용한 것은 시냇가의 조약돌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보는 눈도 필요하지만 내게 없지만 하나님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가진 것 없는 우리들에게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삼손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고도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범죄하여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던 삼손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기회를 주셨습니다. 16장 뒷부분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구경거리가 된 삼손이 하나님께 다시 한번의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건물의 기둥을 밀자 무너지고 맙니다. 그가 죽으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가 평생 죽인 사람보다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삼손의 명예를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실패한 인생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삼손
삼손은 사사로서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비록 그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가 했던 일 속에서 주님의 모습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한 사람의 사사를 세우셔서 그로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신다
삿 16장 25~30절 / 지용수목사
갓난아이들이 빌딩을 지을 수 있나요? 비행기를 만들 수 있나요? 예쁘고 귀엽긴 해도 젖이나 먹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자동차를 만들 수 있나요? 집을 지을 수 있나요? 모래성이나 짓고 종이비행기나 만들지, 그런 큰 일은 못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은 기술만 배우면 비행기도, 자동차도 만들고, 빌딩을 짓고, 도시를 세우고, 세상을 바꿉니다.
이처럼 작은 사람은 작은 일밖에 못하지만 큰 사람은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큰 일을 하는, 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십니다.
교회가 없었는데 없던 교회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솟아났습니까? 어느 아침에 일어나 보니 청와대가 불쑥 솟아올랐습니까? 청와대를 세워서 청와대가 있는 것이고, 우리 교회도 2년간 지어서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태양과 지구, 달,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천체가 우연히 어느 날 생겼습니까?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셔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으신 모든 삼라만상과 사람을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경을 파괴하려는 인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 후회하고 가슴 치며 죽었습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인간들도 나왔지만 그들도 다 뼈아픈 인생을 살다가 가버렸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교회는 건재하고 성경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일점일획도 변함없습니다. 작은 인간의 머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저 천국까지 지으셨습니다. 해가 져도 갈 집이 없는 사람이나 휴가를 얻어도 갈 집이 없는 군인은 딱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막을 내리고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다음에 갈 곳이 없는 황천길의 나그네는 더 불쌍합니다. 갈 곳 없이 방황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래도 낫겠는데, 사탄이 끌고 가 지옥 불에 던져 넣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면 이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와 견줄 수 없는, 기쁨이 넘치는 저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제가 찬송 열 장을 올려드렸는데, 그 중의 한 장입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하나님 아버지 모시고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저와 여러분은 그곳에 가는 것입니다.
며칠 전, 풀러 신학교 교수 한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제가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구원 받았어.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라는 확신이 있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라고 했더니 “목사님! 핵심을 찔렀습니다. 바로 그런 교회가 ‘교회’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할 때 그 나라에 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도 살 만한데 천국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으로 지으셨습니다. 호랑이들이, 사자들이, 코끼리들이 아무리 힘이 세도 빌딩을 세울 수 없습니다. 원숭이들이, 침팬지들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장난감 비행기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빌딩을 짓고 비행기도, 기차도, 잠수함도 만듭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창의력(creative idea)이 있어서 하려고 마음먹으면 엄청 큰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천리를 쉽게 달릴 수 있는 천리마라도 멈추어 있으면 단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둔마라도 움직여 앞으로 가면 십리도 가고 천리를 가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하겠다.’라고 결단하고 행하는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빌게이츠로 일컬어지는 손정의 사장은 언제나 큰 뜻을 품고 2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 다음 5년, 10년, 15년 단계적인 계획을 세워서 일했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인 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얼마든, 학력이 어떻든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팔십이 넘은 해리 리버맨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노인 클럽에 가서 사랑하는 친구와 바둑을 즐겼는데 친구가 병이 들어 입원하는 바람에 바둑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클럽의 직원이 다른 사람과 짝지어 주었지만 마음이 맞지 않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클럽 직원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그림 한 번 그려보세요.”
“이 사람아, 팔십이 넘은 사람이 어떻게 그림을 그려?”
“그러지 마시고 화실에 가 봅시다. 재미있습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화실에 간 그가 평생 처음으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는데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그래서 1년 내내 그림만 그렸습니다. 그러다 ‘이왕 그림을 그릴 바에야 제대로 그리자.’라며 81세에 미술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친구들이 “아이고, 주책 영감! 나이 팔십 넘어서 어떻게 학교에 입학을 해?”라며 비웃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그 할아버지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림에 전념하고 이렇게 정열을 쏟은 결과 더 젊어져 101세가 되었을 때는 ‘해리 리버맨 101세 기념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미국의 미술품 소장가들이 와서 고액으로 그의 그림을 다 사 가지고 갔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생기와 꿈이 있어 그의 그림을 보면 힘이 났기 때문입니다.
앤이라는 아가씨는 뉴욕의 고급 패션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상류 사회의 우아하고 멋진 여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한평생 청소만 하며 살지는 않겠다. 나도 우아하고 멋진 저 여성들과 어깨를 같이 하는 디자이너가 되겠다.’
그는 청소하면서도 상류 사회 여인들을 보며 그들의 매너와 삶과 화술을 배우고 디자인 공부도 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뉴욕에서 이름 떨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마음먹고 노력하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노력으로는 아무리 올라가도 한계에 부딪힙니다. 사람이 하루 종일 높이뛰기 연습만 한다 해도 3미터를 넘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하나님 같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호주에는 폐수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이 수백만이 넘습니다. 하늘 문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으니 저수지가 마르고 강바닥이 다 터져서 하수구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정화해서 마신다고 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발달해도 하나님께서 비만 내리지 않으셔도 인간은 살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면 그 사람도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영화 ‘삼손’을 보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는 보통 체구를 가진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시고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니 그는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군사 천 명을 삽시간에 죽입니다. 또 군인들이 에워싸 그를 죽이려 하니 성 문짝과 그 문설주까지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에 갖다 버립니다. 그러니 블레셋 군대가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입니다. 사십 년 간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 군대가 삼손이 등장하자 이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니 연약한 삼손이 백만 대군보다 더 강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니 조약돌로 그 역전의 용사 골리앗을 꺾는 것입니다. 모세는 팔십, 구십이 넘은 연약한 노인이고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마른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니 홍해를 가르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청년 시절 몇 년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던 결핵 환자였지만 주님께서 잡아 쓰시니 백 세 가까이 사시면서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디엘 무디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 받으니 미국을 살리고 세계를 일으키는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링컨은 학교라고는 9개월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니 노예를 해방시켜 저 거대한 미국을 자유의 꽃을 피우는 민주주의 나라로 만드는 위대한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이 미국의 국경일이 되었습니다.
이 지용수가 비천하고 비천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쓰시니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이런 교회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면 우리가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잡아 쓰시기를 바랍니다.
효자는 자기 아버지의 집을 지으면 벅차고 기쁩니다. 자기 아버지의 집을 짓는 것이 싫은 사람은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의 성전이 올라갈 때 기쁩니다. 주의 성전이 아름답게 올라갈 때 배 아픈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 짓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는 아닌 것입니다.
울산에 사시는 한 여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시장에서 동태 장사를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집을 사랑해서 교회를 짓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오시더니 “이것은 내 평생에 모은 동전인데 이 동전을 받고 그 동태 한 짝을 줄 수 있겠소?”라고 하셨습니다. 동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 같아서 “할머니, 그러지요.”라며 동태 한 상자를 주었습니다. 집에 가서 동전을 헤아리는데 이상한 골동품 같은 것이 있어서 골동품 가게에 가지고 갔더니 그것은 그 당시 600만 원이나 하는 값진 것이었습니다. 거금 600만 원을 받은 집사님은 너무 감사해서 400만 원을 떼어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200만 원을 가지고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지요?’라며 기도하는데 환상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환상을 보는 것, 예언하는 것을 좋아하면 큰일 납니다. 교회가 신비주의로 흐르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읽어야 합니다. 귀신이 주는 환상은 망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은 복이 됩니다.
집사님의 환상 중에 자갈이 반짝반짝 빛나는 자갈밭이 보였습니다. 그때 집사님에게 ‘자갈밭을 사라.’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이튿날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아주머니, 땅 하나 사시지요.”라고 하여 따라가 보니 환상 중에 본 그 자갈밭이었습니다. 그래서 200만 원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두 신사가 와서 그 자갈밭을 천만 원에 팔라고 했습니다. 천만 원에 팔면 팔백만 원이 남으니 “얼싸 좋구나!”하며 당장 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팔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두 신사가 일억에 팔라고 했습니다. 집사님이 그래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아십니까? 현대 자동차 회사에서 정문으로 내려고 계획한 땅이었습니다. 나중에 집사님이 그 땅을 29억에 팔아서 2억을 헌금하여 그 돈으로 교회를 잘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27억으로 무엇을 할까요?’라고 기도하다 넓은 땅을 사야겠다는 감동이 와서 넓은 땅을 샀더니 그것이 대 아파트 단지가 되어서 수천억 재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시장 거리의 상자 위에 동태를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어떻게 큰 교회를 짓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사립학교 개정법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학교의 이사를 세울 때 그 학교의 건학 이념에 맞는 이사를 학교에서 정해야 하는데 밖에서 이사를 영입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립학교 개정법은 사립학교의 비리를 막기 위함이다.’라고 하지만 사실 비리가 있는 곳은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학교는 깨끗합니다. 그런데 그 비리 때문에 이사를 외부에서 선임하겠다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막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막겠다는 저의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회장님과 백여 명의 목사님께서 삭발을 하셨습니다. 또 이어 삼백여 명의 목사님께서 삭발을 하셨습니다. 어쨌든 지금 목사님들께서 순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한 번만 손보시면 간단하게 일이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사립학교뿐 아니라 공립학교에서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유럽의 교회에 한창 성령의 불이 임할 때 97%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지금도 노르웨이는 국민의 97%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에 은혜를 주시면 전 한국 국민이, 남북한 겨레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될 줄 믿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목사님이든 신학자이든 “GNP가 2만 불, 3만 불, 4만 불, 이렇게 올라갈수록 교회는 약해지고 예수 믿는 사람은 적어진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해서 교회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자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자인데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다윗은 왕인데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요셉과 다니엘은 총리인데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재벌이고 높은 관직의 사람인데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에 가보세요. 부자들도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록펠러 가(家)는 부자이지만 1등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라가 잘 되어도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온 국민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를 썩게 하는 문화, 영화, 드라마, 책들이 많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데 영화 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람피우기 좋은 날- 들키면 어때-’
글귀가 희한해서 다시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불륜 관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것을 보러 오니 비즈니스로 그런 영화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보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보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비참해지고 아이들이 상처를 받고 불행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어야 관객들이 바람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피우기 좋은 날, 들키면 어때’라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영화를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가정을 깨는 영화를 허락해 주는 당국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로마가 무너진 것도 가정이 방탕해져서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성도들이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기도하다가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어 눈을 떠 보니 키가 큰 한 신사가 무릎을 꿇고는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미국 영화 제작자였는데 “목사님, 제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안수해 주세요.”라고 해서 제가 가정을 세우고, 사회를 세우고, 미국을 세우고, 세계를 세우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그분께 달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영화와 드라마 만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가정을 헐고 사람을 썩게 합니다. 가정과 사회를 지키는 것은 교회뿐인 줄 믿습니다. 교회가 가정과 사회를 지켜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얄미운 여자 시리즈’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처녀 때 잘 놀아도 시집 잘 가는 여자, 아무리 맛있는 것을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여자, 매일 골프하고 다녀도 얼굴이 타지 않는 여자, 돈 많이 번 남편이 60세도 안 되어 죽은 여자.’
그리고 그 밑에는 ‘여자가 열 받을 때’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3박 4일 출장 간 남편이 하루 앞당겨 왔을 때, 5박 6일 출장가기로 되어 있는 남편의 출장이 취소되었을 때’
이것은 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남편이 귀찮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돈만 벌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남편은 없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글을 보며 웃지만, 그런 말을 자꾸 만들어 내면 사회 흐름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한 마귀의 흐름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나라를 덮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삼손은 천하무적으로 블레셋 군사들이 그를 보기만 해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삼손이지만 방탕에 빠져 여자 무릎에서 헤어나지 못하니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신전인 다곤 신전에서 축제를 벌이고는 “우리 다곤 신이 삼손을 꺾었다.”라며 삼손을 끌어내어 재주를 부리게 하니 백만 군대보다 강했던 하나님의 사람인 그가 매를 맞으며 곰춤을 춥니다. 곡마단의 곰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듯이 하나님의 사람인 삼손이 다곤 신전에서 매를 맞으며 재주를 부리는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가 타락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장로가 타락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목사 아들이, 장로 아들이 타락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집사가, 권사가 타락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성도가 타락하면 조롱거리가 됩니다.
“저게 장로였대. 저게 집사였대. 저게 ○○교회 목사 아들이래. 저게 ○○○ 장로 아들이었대. 그런데 저 꼴이래.”라며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사기 16장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방탕한 삼손을 떠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가 힘이 없는 것입니다. 방탕하면 능력이 없습니다. 방탕하면 힘이 없습니다. 방탕하면 기쁨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 때는 교인들이 적었지만 능력이 있었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금 더 능력이 약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려면 신앙의 절개를 지켜야 됩니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정직하게 살고, 갈 데와 가지 않을 데를 구별하며 절개를 지켜야 됩니다. 삼손이 절개를 지키지 않고 여자의 품에 빠지니 눈이 뽑히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웃음거리가 된 삼손이 뼈아픈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칩니다. 그리고 자기 곁에 있는 소년에게 말합니다.
“내가 몹시 피곤하구나. 내가 좀 쉬도록 이 집을 바치고 있는 기둥으로 나를 데려다 주렴.”
그 소년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삼손이 불쌍해서 그 기둥 사이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자 삼손이 사자처럼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저를 생각해 주세요. 한 번만 더 제게 힘을 주세요. 제 두 눈을 뽑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해 주세요. 하나님! 한 번만 힘을 주세요.”
이것은 회개입니다.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번만 힘을 주세요. 하나님,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한 번만 힘을 주세요.’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힘이 솟아난 그가 산처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을 끌어안고 힘을 다하여 쓰러뜨리니 그 집이 무너져 그 안에 있던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들이 다 죽습니다. 삼손은 죽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방탕해서, 잘못된 길을 가서 능력과 기쁨을 잃어버리고 허수아비 신앙인이 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한 번 회복시켜주세요. 힘을 주세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힘을 주시기 원합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에게 힘을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 일천 수백만 성도들에게 힘을 주시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나라가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삿 16:28-31 / 김용국목사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미국에 방문하던 날, 많은 기자들이 그를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기까지 발견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칼 바르트가 뜻밖의 대답을 해서 기자들을 굉장히 놀라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제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입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라는 찬송가를 조용히 불렀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발견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공부하고, 깊이 연구해도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66권의 성경을 요약하고 또 요약하고 계속 요약하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8의 말씀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버금가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어떤 조건을 보고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만 골라서 사랑해주시지 않습니다.
롬 5장 6절에도 보시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연약할 때에' 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는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무능력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심히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일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또 5장 10절에도 보시면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였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은혜’라고 말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랑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런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도저히 살릴 방법이 없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롬 5장 6절부터 11절에 보시면 구절들마다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9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10절에서는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잘 표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만 앞세우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일상적으로 값을 매길 때에는 무엇을 얼마나 지불했느냐? 하는 것으로 그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일까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 ‘예수님 짜리’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런 큰 희생이 들어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변하지 않는 사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수시로 변하는 사랑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에로스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에로스 사랑도 보면 아름답다가도 추해지고 뜨겁다가도 금방 식어버리는 사랑입니다.
친구 간의 사랑을 필레오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에게 공통분모가 없으면 금방 변해버리는 사랑입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사랑이 바로 스톨게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사랑 중에서 가장 오래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스톨게 사랑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에로스 사랑, 필레오 사랑, 스톨게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 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 말씀처럼 우리가 연약할 때에도,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도,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셨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2,000년 전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때만 한 번 사랑하고 끝내버린 사랑이 아닙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39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조건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내가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연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우리는 연약하지만 또 매우 강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약한 나를 강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다른 것에 우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그 물질을 의지하지 않게 되고, 물질이 없어도 물질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는 그야 말로 세상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는 후회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을까? 내가 좀 더 잘 할 걸... 좀 더 열심히 살 걸... 지나놓고 나서 보니 후회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생활을 소홀히 하면 결국 후회하게 되는 날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도 보면 미련한 다섯 처녀가 혼인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해 슬피 울게 된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결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그런 후회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살아야 할 사람이... 모두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수들에게 붙잡혀서 쇠사슬에 묶이고 두 눈이 뽑히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입니다.
삼손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쇠사슬에 묶이거나 눈이 뽑히거나 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힘은 거의 초인적인 힘이었습니다. 얼마나 힘이 강했으면 블레셋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던 사람이 바로 삼손입니다. 그런 삼손이 오늘 본문에 보면 너무나도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살다가 결국에는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삼상 15:11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매우 후회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울 왕이 특별히 부도덕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결국에는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바울이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후 7:10에 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한 번만 더 나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삼손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를 삼손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8절 말씀에 보면 몹시 힘들어하는 삼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삼손의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었습니다.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면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삼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힘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이 디모데전서의 말씀처럼 "일만 악의 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의지하고, 어디에서 힘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또 뭐라고 노래했습니까?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면 된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영적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기도생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삼손은 힘이 있을 때에 기도생활을 잘 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힘이 있을 때는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다가 영적인 문제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삼손도 기도생활을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관리하는 사람들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수리를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고장이 나면 그 때 수리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문제에 부딪혀야 부랴부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정비를 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고장날만한 곳을 찾아서 미리 정비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평상시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항상 기도로 미리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선택하기 전에도 먼저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사가 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신 4:7에도 보시면...“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가까이 해주신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때문에 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축복을 제대로 누렸던 사람이 바로 한나입니다. 삼상 2:1에 보시면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기도의 복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시 35:13에 보시면... “나는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즉 기도했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헛된 경우가 절대로 없습니다. 기도해서 기쁘고 응답 받아서 기쁜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기도로 더 강건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영적인 힘은 사명감을 가질 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사명감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서 살다보니까 사사로서의 사명을 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영적인 싸움을 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육신적인 삶을 살다 보면 사명자로서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힘을 잃게 된 삼손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원수들의 손에 붙잡혔습니다. 한 여인에게 몸도, 마음도, 영혼도 다 붙잡혔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삼손에게서 하나님이 떠나 버렸습니다. 마치 사울왕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떠났던 것처럼... 다윗이 죄를 범했을 때 "내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삼손을 조롱하고 놀려댑니다. 자기네들의 신이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떠들어댑니다. 삼손으로 하여금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조롱거리가 되니까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이에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2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내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라고 외치면서 마지막 힘을 다할 때에 집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블레셋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적인 힘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삼손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의 회복도 그렇고, 탕자의 회복도 그렇고, 다윗의 회복도 다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회개했습니까? “하나님이여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회복도 다윗처럼 삼손처럼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우리가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도 이런 회복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하는 순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삼손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은 특별히 구별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한 여인을 지키고 복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 여인만 있으면 행복해질 줄로 알았는데 오히려 삼손을 실패로 몰아가는 덫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어쩌면 삼손과 너무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행복의 조건을 어디에서 찾습니까? 세상에서 찾습니다. 땅에서 찾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행복해질 거라는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덫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적으로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그냥 즐거운 정도가 아니라 즐거워서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삼손이 회개할 때에 그 결과를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0절 하반절에 보시면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삼손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다시 결단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결단은 새롭게 각오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런 결단과 헌신의 모습을 삼손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30절 말씀에 보시면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이제 내가 죽더라도 백성들만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 결단과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지배하에 있을 때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가서 나도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하면 이 세 가지를 꼭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추위에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런 결단과 헌신이 삼손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도 아끼지 않겠다. 라는 고백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쓰임받기를 원하십니까? 삼손처럼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또 성도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좌절하지 마십시오. 내가 약하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요즘 고개를 숙인 남편들이 많습니다. 자녀들과의 관계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어떤 분이 아들이 너무 말을 안들으니까 한 대 쥐어박으려고 하는데 아들이 아버지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아버지! 왜 이래요!" 하는데, 아들의 굵은 목소리와 묵직한 힘에 아버지가 기가 팍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한 말이 "이제 나도 늙었구나!"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더 강건해지십시오. 내 힘으로 강해지려고 하지 말고, 약한 나로 강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강해지십시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광야에 내던져진 엘리야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연약하다는 이유로 낙심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절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부요한 사람입니다. 내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 나를 이기고 / 세상을 이기고 / 사단마귀를 이기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삼손의 마지막 처절한 기도가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서 우리가 육체적으로도 강건해지고 영적으로도 강건해져서 세상 앞에 무릎을 꿇는 성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물리치는 예수님의 강한 군사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옵소서(삼손의 실수와 회복)
이윤재목사 / 삿 16:28-31
아름다운 주일입니다. 이 아름다운 주일에 무엇이 우리 생의 가장 큰 행복인지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생의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 단테가 한번은 영국 왕을 방문했답니다. 둘은 인생에 관한 유쾌한 대화를 나누다가 왕이 불쑥 단테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믿음이 좋은 단테가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행복하시지요”. 왕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단테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가까울수록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어떻게 하든 얼마나 하든 기도에 대하여 빼놓을 수 없는 진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에게나 기도는 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누구에게는 어려운 것입니다. 처음 기도하는 초보자 뿐 아니라 평생 기도해온 사람들까지도 기도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누구나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진실이 있습니다. 누구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숨을 쉬듯 본능적으로 기도합니다. 미국의 갤럽연구소에서 조사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삶이 한 주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90%가 기도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타종교인, 우상섬기는 사람들도 기도하고 심지어 무신론자, 공산주의자들도 기도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이를 보고 기도합니다. 미개한 사람은 미개한 방법으로 기도하고 문명한 사람은 괜찮은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유대인은 유대식으로 기도하고 불교인은 불교식으로 기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기도합니다. 그 많은 기도중에서 어떤 기도가 가장 강력할까요? 절박할 때 드리는 기도가 가장 강력합니다. 사람이 위험을 만나면 누구나 소리칩니다. 골목에서 깡패를 만나면 소리칩니다. 갑자기 큰 병에 걸리면 소리칩니다. 아들, 딸이 갑작히 사고를 당하면 소리칩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기도”를 “프로슈코마이”라고 합니다. “비명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비명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비명소리를 들으실까요? 오늘 말씀의 주인공 삼손이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삼손은 사사기에 나오는 13명의 사사중 마지막 사사입니다. 다른 사사들과 달리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괜찮은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대부분 역기능 가정에서 불행하게 태어났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드보라는 연약한 여성이었습니다. 삼갈, 돌라, 야일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비벨렉은 살인자였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마노아는 삼손을 낳기 전에 오랫동안 작정기도 했습니다. 삿14:12을 보십시오.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아버지가 이렇게 하기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부모는 삼손을 낳은 후에도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포도주도 안마시고 머리도 안 깍고 시체도 안 마지는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런 부모가 흔치 않습니다. 낳기 전에 작정기도 하지요, 낳은 후에 하나님께 드리지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렇게 믿음으로 키웠으면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 할텐데 삼손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착한 부모밑에서 나쁜 자녀가 나오고 나쁜 부모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착한 다윗에게서 아버지를 반역한 나쁜 압살롬이 나왔습니다. 나쁜 사울임금밑에서 다윗을 선대한 착한 요나단이 나왔습니다. 목사 아버지 밑에서 마르크스같은 공산주의자가 나왔습니다. 매춘부 어머니에게서 일본의 “아찌무라 간조”같은 성자가 나왔습니다. 신29:29절 말씀대로 비밀은 하나님께 감추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고 언제나 내 자식이 잘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못났다고 자식이 잘못되라는 법도 없기 때문에 늘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빚나가기 시작한 삼손,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여자문제였습니다. 사람마다 약점이 있는 데 삼손의 약점은 여자였습니다. 여자만 보면 정신을못차립니다. 삿14장에서 딤나에 있는 불레셋 여자를 만나고 쏙 빠집니다. 삿15장에서는 가사에 있는 기생을 만나고 완전히 정신을 잃습니다. 둘 다 삼손이 찾아갔고 삼손이 유혹했고 삼손이 일을 저질렀습니다. 삼손은 아마 자기가 잘나간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삼손이 손내미는 여자치고 삼손을 거절한 여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세상의 여자가 다 자기 것인 것처럼 삼손은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걸리면 법, 16장으로 와서 삼손이 소렉 골짜기에 갔을 때 드디어 삼손은 드디어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삿16:4절을 보시겠습니까? 삿16: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여자의 이름은 들릴라였습니다. 불레셋 족속의 딸이었는 데 놀랍게도 이 여자는 불레셋군대의 스파이였습니다. 삼손은 드디어 불레셋 사람의 미인계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삼손은 일찍 그 일을 그만 두었어야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 실수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 불장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하면 패망의 덫에 걸린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기도했어야 합니다. 일이 일어난 다음에 기도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손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여자가 그를 잔뜩 취하게 한 후 삼손이 잠들자 그의 머리를 짤뚝 자릅니다. 다음 날 아침, “불레셋 군대가 왔다”고 누가 소리치자 황급히 일어났으나 이미 그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힘없이 비틀거리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불레셋 사람들의 신전으로 끌려 갑니다. 그곳은 바로 불레셋 사람들이 숙적인 삼손의 생포를 기념하여 자기들의 신 다곤신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곳이었습니다.
23절부터 25절을 보시겠습니까? 삿16:23-2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의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해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해 재주를 부리니라”.
여러분은 이미 “삼손과 데릴라”라는 영화를 통해 이 장면을 보셨습니까? 수많은 불레셋 사람들이 신전에 모여 삼손이 맷돌굴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삼손의 눈을 자세히 보셨습니까? 눈이 없습니다. 불레셋 사람이 그를 묶고 이미 눈을 뺏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아팟을까요? 이것이 정말 그의 부모가 기도해서 낳은 아들입니까? 삼손은 이러려고 태어난 것입니까?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 포도주를 금하고 시체를 만지지 않고 머리를 깍지 않는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이방신전에서 나귀처럼 맷돌이나 돌리며 우스개거리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기도를 방해하는 덫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는 사고가 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사후수습책 정도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후 수습책이 아닙니다. 사고 예방책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얼마든지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 싫어할까요? 기도하면 사고가 예방되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가 쓴 “스쿠루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덫을 놓습니다. 가장 쉬운 덫이 아예 처음부터 기도할 마음을 갖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처음부터 무관심하게 하고 기도할 생각조차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두 번째 덫이 있습니다. 앵무새처럼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입술만 달싹달싹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피곤을 느껴 자게 만듭니다. 그러면 기도를 실패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마귀의 덫은 점점 교활해집니다. “그래도 기도해야지“ 하고 무릎을 꿇으면 기도하되 아주 추상적으로 기도하게 합니다. 자기 아픈 아내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영혼들만 위하여 기도하게 합니다. 옆 집 사는 불신자는 전도하지 않으면서 한국민족이 어떻고 세계선교가 어떻고 하며 기도하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를 나약한 종교적 미사려구로 만들어 버립니다. 기도의 덫은 또 있습니다. 한번 기도해서 응답받으면 그것이 반드시 기도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니라고 믿게 합니다. ”너는 그것을 기도응답이라고 생각하니? 아이구. 순진하긴. 그것은 기도안해도 일어나는 과학적 현상이야“. ”주여, 기도 응답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면 “아니야, 그것은 응답이 아니라 우연이야”하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이거나 우연의 산물이라고 믿게 합니다. 마귀의 또 하나 덫은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음을 생각나게 해서 기도를 중단시킵니다. 자, 막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하고 기도하는 데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떠오릅니다. “아, 먼저 회의부터 해야지” 하고 기도를 중단하고 회사로 달려갑니다. 모처럼 새벽기도에 왔습니다. 한참 기도하는 데 갑자기 누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기도를 중단하고 컴퓨터 앞으로 달라갑니다. 사실은 지금 안봐도 될 이메일입니다. 마귀의 기도 방해입니다. 마귀의 덫은 또 있습니다. 어느날 기도의 감동을 받고 새벽기도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날 따라 평소에 안 좋아하는 교인이 크게 기도합니다. 평소에 겉다르고 속다른 위선자로 생각하고있던 사람입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흥, 기도만 열심히 하면 뭐해. 진실하게 살아야지. 저렇게 살 바에는 나는 기도 안해”. 그리고 기도를 포기하고 집으로 갑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의 덫입니다. 기도를 방해는 마귀의 덫입니다.
삼손은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가 거룩한 나실인으로 살기 위해 매일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못해서 결국 망했습니다. 삼손은 어떤 기도의 덫에 걸린 것입니까? 아마 이런 기도의 덫에 걸렸는지 모릅니다. “나는 죄인이야, 어릴 때부터 나실인으로 살았어야 하는 데 나는 틀렸어. 이미 나는 나쁜 놈이 되고 말았어”. 처음에 이 생각이 약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의 늪에 점점 빠지면서 그 생각은 점점 더 커졌을 것입니다. “나는 안돼. 아버지의 기대도 저버리고 말씀대로 못살고. 이런 놈이 기도하면 뭐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나아”.
삼손이 나빠진 것은 죄를 범해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아십니까? 물론 죄를 지으면 기도가 막힙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깊은 수렁입니다. 사59:1-2절입니다. “여호아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죄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가 죄짓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있어야 할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삼손이 하나님께 나갈 때 이런 의심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같은 것을 용서할까? 평생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이방인만큼도 못 살았으니 나같은 것을 받아줄까? 나같은 놈이 기도한들 들어줄까?”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기도는 하고 싶은 데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잘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음없슴을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막9장에 한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 아버지에게는 간질병 걸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자들이 지나가길레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 아버지는 괜찮았습니다. 왜냐면 아직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뭘 원하느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예, 제 아들이 간질병 환자인데 제자들에게 부탁했으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만일 주님이 하실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옵소서”. 이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믿어야지”. 이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했는지 들어보시겠습니까? 막9: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슴을 도와 주소서”.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가 믿습니다. 치료도 믿고 응답도 믿고 잘 될 것도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주 믿음이 없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받아줄 것인가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고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인가에 대해서도 믿음이 없고 응답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더욱 믿음이 없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 데 믿음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안하겠다면 그것은 제대로 마귀의 덫에 걸린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신을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슴을 도와 주소서”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도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도 기도하는 기도”입니다. 가장 나쁜 기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잘 몰라도 때가 되면 압니다. 지금은 잘 안믿어져도 때가 되면 믿어집니다. 그런데 지금 안 나아가면 때를 놓치고 맙니다. 한 소년이 공원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나타나 연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길을 지나가던 신사가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꼬마야, 줄을 쥐고 뭐하고 있니?” “연을 날려요.” 신사는 하늘을 보았지만 연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연이 안보이는 데 연이 있다고 어떻게 믿니?” 소년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연은 보이지 않지만, 이따금씩 당겨지거든요.”. 그렇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안 보일 때가 많습니다. 기도응답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연은 하늘에 있습니다.
한번 더 기회를 주옵소서
삼손으로 돌아갈까요? 삼손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감을 잃었습니다. 아버지의 체면과 민족의 자존심도 잃었습니다. 머리카락도 잃고 사랑도 잃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마저 잃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손은 끝난 것일까요? 삼손에게 있는 모든 소망은 사라진 것일까요? 우리는 삼손처럼 평소에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산 것은 결국 그만큼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밖에 기도를 못했으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못산다면 우리는 평생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번 더 기회가 있습니다.
26절부터 28절을 보실까요? 삿16:26-28,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틸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불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명 가량이라. 삼손이 재주부리는 것을 보더라”. 28절입니다. “삼손이 여호아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불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같이 하겠습니다. “여호아여,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소서. 한번만 생각하소서.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여러분, 우리는 삼손이 평소에 기도하지 않아 다시는 기회가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삼손의 기도는 사고 예방책이 아니라 사고 수습책이었습니다. 그가 미리 기도했더라면 그런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못했어도 하나님은 그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크신 은혜는 하나님이 늘 우리가 평소에 기도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는 기도의 기회를 놓쳤어도 한번 더 기회를 주는 은혜입니다. 미리 왔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 왔어도 한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평소에 기도했으면 더 풍성한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또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평소에 기도했으면 더 떳떳하고 당당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늦게 와서 죄송하고 챙피하지만 그래도 한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기도의 은혜입니다.
다시 보시겠습니까? 28절, 삿16:28, “삼손이 여호아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불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다같이 “이번만” “이번만”. 그리고 30절입니다. 삿16:30, “삼손이 이르되 불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이 덮히니 삼손이 죽을 때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많았더라”.“
저는 목회하면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중의 한 분이 김진석집사님입니다. 김진석 집사님은 대형 트럭을 몰고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킬로씩 전국적으로 뛰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늘 늦은 밤이었고 그에게 부족한 것은 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루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습니다. 목회자인 제가 빠져도 집사님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빠지지만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나왔고 가장 늦게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온 몸으로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주여”하고 소리치면 온 교회가 쩌렁 쩌렁 울렸습니다. 집사님의 기도를 보면서 가끔 집사보다도 기도를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던 분이 지난 8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형트럭을 몰고 운전하다 사고가 난 것입니다. 제가 그 소식을 인식월 기간중 유럽에서 들었는 데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이 시대의 의인 하나를 잃은 것입니다. 집사님은 돌아가기 전까지 아내에게 자상하고 친절했습니다. 큰 아들이 결혼하는 것이 너무 좋아 자신이 아들 결혼식날 직접 섹스폰을 부르려고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오면 설교를 메모하여 주보와 함께 은혜받은 내용을 차곡 차곡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름이 왔습니다. 어쩌면 그가 산 하루 하루가 그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는 몰랐으나 그의 영혼을 그것을 알고 하루 하루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하루 하루 위험한 기게를 몰고 다니면서 “주여, 오늘 하루를 지켜 주옵소서. 오늘 한번만 더 강하게 하옵소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매일을 마지막 날같이 기도했던 김진석 집사가 그립습니다. 하루 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기도했던 김진석 집사님, 그는 지금 하늘 나라에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가 김진석 집사의 기도를 이어가겠습니까? 누가 김진석 집사의 빈 자리에 앉아 “주여” 하고 기도 하겠습니까? 김진석 집사를 애도할 수 있으나 누가 그의 기도를 이어가겠습니까? 우리와 김진석 집사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직업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대형트럭을 몰지 않습니다. 그러나 직업은 달라도 삶과 죽음의 법칙은 같습니다. 누구에게도 갑자기 불행이 닥쳐올 수 있고 누구도 매일 매일이 종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기도합니까? “주여, 오늘이 제 생의 마지막날 일 수 있습니다. 주여, 구하옵나니 한번 더 기회를 주옵소서. 오늘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를 붙잡아 주소서”. 삼손처럼 기도합니까?
제가 안식월을 마칠 때 즈음해서 하나님이 어느날 저에게 이런 기도를 시켰습니다. “주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주여, 한번만, 주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처음에는 그 기도가 어디에 나온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삼손의 기도였습니다. 삼손이 기둥뿌리를 붙잡고 마지막으로 기도한 기도,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오늘이 우리 생의 마지막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마지막 일 일수 있습니다. 공부가 힘듭니까? 평생 공부하겠습니까? 언젠가 마칠 때가 옵니다. 그때까지는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업이 힘듭니까? 항상 힘듭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잘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봉사가 힘듭니까? 영원히 봉사하겠습니까? 떄가 되면 못합니다. 지금 하는 봉사를 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좀 안되는 일이 있습니까? 더 많이 기도했다면 더 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했어도 한번 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여 비옵나니, 한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정말 감사한 것은 바로 내일부터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년중 가장 좋은 날씨, 마음껏 나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삼손처럼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지만 한번 더 기회를 주신 주님, 주여, 한번만 더 기회를 주옵소서. 주여,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일부터 시작하는 가을 새벽기도에 기도의 은혜로 임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사사기 16장 28-30절
일본이 낳은 유명한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매우 병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척추 카리에스라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척추에 결핵균이 침입해서 척추가 썩어 들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 앞에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과 연약한 신음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은 영적 의식이었습니다. "나는 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나약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야꼬가 쓴 기도문을 보면 그녀는 자신이 병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고쳐주옵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나를 써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녀는 병약한 현실 속에서도 자의식을 잃지 않고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조건을 채우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써달라"는 간절한 바램으로 가득 찰 때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나를 써 주소서"라고 하는 기도로 가득 찬 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삼손은 블레셋 여인 들릴라에게 속아 두 눈이 뽑힌 포로가 되어 사사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뉘우치고 다시 한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구하게 됩니다.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는 모습을 생각하셔서 다시 한번 힘을 쓸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재도전은 언제나 용기 있는 자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다시 쓰시고자 하시는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첫째,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뚝 떨어지는 벼랑이 아니라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 재미나게 갈 수 있는 길이 약간 내리막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지옥으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담 없고' '편안한 길'에 들어서서 걷다가 실패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주일 하루쯤 예배 안 드려도 별탈은 없더라, 기도 없이 살아도 잘만 살아지더라, 하나님께 드려야할 시간, 물질, 은사 안 드리고 살아도 괜찮더라"며 들어서게 합니다.
우리 교인들의 최대 약점은 '영적 위기감'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편한 것만 좋아하고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면서도 큰일난다는 위기 의식이 없음이 문제입니다. 신앙 생활을 너무 편안하게 하는 것만 좋아하다가는 삼손처럼 두 눈을 뽑히고 맷돌이나 돌리는 노리갯감이 되고 맙니다.
삼손의 신앙은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빈 껍데기 신앙이었습니다. 삼손이 이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 힘을 믿었을 땐 기도가 필요 없던 삼손이었으나 이제 아무것도 없는 중에 기도를 시작합니다. 옳습니다. 실패자라 할지라도 여호와께 부르짖는 기도를 시작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실패자라도 기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닙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이미 힘을 잃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가대는 찬양이 죽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리더들은 이름만 있지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살았으나 죽은 교회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와서 은혜 받을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해야 됩니다.
두 눈이 빠진 자가 누구입니까? 사슬에 묶인 자가 누구입니까? 맷돌 가는 자가 누구입니까? 조롱거리 된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제 다시 쓰임 받기 위해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크게 부르짖읍시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삼손을 다시 쓰셨듯이 다시 기도하는 자들에게 능력으로 역사 하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다시 기회를 붙잡는 모습입니다
한 노인이 송어낚시를 하고 있는 데 청년 하나가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송어를 잘 낚지 못하는데 유독 이 노인만은 쉽사리 많이 낚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청년이 한참을 지켜보다가 "어른께서는 어떻게 낚시질을 그처럼 잘하실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그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송어 낚시를 하는 데는 네 가지 비결이 있다네. 첫째, 한 눈 팔지 말 것. 둘째, 미끼를 잘 사용할 것. 셋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것. 넷째,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는 절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네."
이 방법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한눈 팔지 말고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인내심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산 속에 가면 야맹조라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 되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러면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내일이면 집 지으리" "내일이면 집 지으리"하고 밤새도록 노래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맹조는 아침이 되면 집을 짓지 않으며 밤이 되면 또 운다고 합니다. 평생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기에게 마지막 남은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라면서 단 한번의 기회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의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삼손은 이제야 자신의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고 비참한 실패는 자신의 전적 잘못으로 인한 것을 깊이 느끼면서 '오 주여, 지나온 날을 후회합니다. 회개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라며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기회를 붙잡는 사람은 모두 회복되어집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잡았을 때 눈이 뜨이며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회를 붙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번 한번 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나선다면 실패의 인생은 성공의 인생으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지나온 날의 생애를 돌아보십시오. 인생을 낭비해 왔습니까? 우리에게 준 그토록 많은 은혜를 쓸데없는데 써 버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이제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할 말이 있다면 ‘이번만 다시 기회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삼손에게 한번의 기회를 다시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회개하며 나아가는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다시 주실 때 꼭 붙잡으셔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시 희생을 결단하는 모습입니다
만주의 독립군에 대한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신병들이 독립군에 지원할 때 독립군 선배들은 그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대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첫째, 너는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너는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너는 추위에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단단한 결단을 한 청년만 독립군에 가담시켰다는 것입니다.
삼손은 실패한 자리에서 살기 원하기보다는 죽기를 각오하였습니다.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칠 것을 결심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서는 자가 다시 한번 힘을 쓰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희생을 아끼지 않는 자는 무적의 용사처럼 강해 질 수 있습니다.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희생하는 사람은 가장 약한 존재라 할지라도 위대하고 큰일을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1월 방광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81살의 장경자 할머니가 한국외국어대에 평생 모은 돈 1억 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일찍이 친자식 하나 없이 홀로 된 장 할머니는 3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외대와 이문동 골목길을 누비며 박스, 신문, 구리, 전기줄 등 보이는 것은 다 모았고 폐품을 팔아 집 근처 은행에 1원짜리까지 모두 저금했습니다. 그러다 방광암 판정을 받은 장 할머니는 수술도 곤란하고, 항암제에 대해서도 신체 거부반응이 나타난다는 병원설명을 듣고는 퇴원했다고 합니다. 장 할머니는 "평생 모은 돈을 치료비로 다 쓸 것 같아 퇴원해버렸다"고 말하며 "나는 평생 못 배웠지만 돈 때문에 재능을 피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장 할머니는 남은 것을 베푼 것이 아니요, 그분의 일생 전부를 그리고 당신의 건강까지도 모두 남에게 베푸신 희생적 결단을 한 것입니다. 부자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하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삼손은 자기 목숨을 버려 블레셋을 물리치려 하였을 때,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다고 합니다. 삼손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며"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손의 위대한 승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주저하지 맙시다. 오히려 희생하는 자의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로만 곧바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은 멸망의 길이 아니요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며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살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일하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의 삶이 견디기 어렵습니까? 실패하였다고 느끼고 계십니까? 답답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다시 기도의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다시 주시는 오늘의 영적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강력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주님께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며 부르짖는 삼손의 모습처럼 되어 하나님께서 다시 들어 쓰시는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실패한 삼손이 다시 성공자 삼손으로 쓰임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의 모습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나아지는 축복과 은혜의 삶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지막 한 번의 기회
삿 16장 28~31절 / 이필재목사
온 세상 사람들의 소원이 다 똑같은데도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는 전쟁을 원하는 국민도, 민족도 없습니다. 모두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전쟁을 끊임없이 합니다. 성경에는 인간 역사의 전쟁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우리가 항상 보게 됩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전쟁을 정리하는 신학의 결론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려는 것을 방해할 때 하나님은 전쟁을 통해서 심판을 하셨고, 인간들의 행사가 하나님의 역사성을 떠날 때 그 옳지 않게 가는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심판적 성격의 전쟁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평화이며 인간들도 모두 평화를 원하는데 가인의 후예들은 이 땅에서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켜 왔으며 지금도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필요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사사기라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기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똑같은 성격이 하나 나타나는데 하나는 집안싸움이고 하나는 이웃집과의 싸움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도 남북한 전쟁은 집안싸움이요 일본, 중국과 전쟁한 것은 모두 이웃집과의 싸움입니다. 어느 나라도 똑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싸움도 거의 집안싸움입니다. 가인이라는 형이 동생을 쳐 죽인 것부터가 집안싸움으로 전쟁이 시작 됩니다.
우리는 약 십여 년 전에 유고슬라비아 코소보의 전쟁이 온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전쟁이 잘못 되었다면 온 세계가 혼란에 빠질 뻔 한 전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500년 계속되는 종교와 인종 문제가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계 3대 종교라 함은 역사가에 따라서 좀 다르게 분류하지만 대개는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말합니다. 이 중에서 유대교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고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세계적 분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 세 종교는 뿌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신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로 구약이 경전이며,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고백하는 종교로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합니다. 이슬람교의 코란경은 거의 구약 이야기이며 약간의 신약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몇 가지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유고슬라비아인들은 초기 기독교의 종파인 정교회 계통이요 코소보와 알바니아는 이슬람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이슬람, 회교, 마호메트교는 같은 말로 쓰는 것이며 모슬렘, 혹은 무슬림 이 말은 우리를 가리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됩니다. 아라비아어로 신을 ‘알라’라고 부릅니다. 그때 그 전쟁은 이슬람교도와 기독교 계통 정교회 교인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때 러시아는 흑해에 군함들을 파견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편을 들기 위해서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가 정교회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집안싸움에 속합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보시면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건물이 황금색 지붕으로 예루살렘 성 중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건물은 성전인데 지금은 기독교 계통 건물이 아니고 이슬람 계통의 사원이 됩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의 주인이 10번도 더 바뀌었기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이 점령했을 때 자신들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된 그 자리에 그 성전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 자리가 무슨 자리인가? 그 성전 안에 다른 것이 없고 중앙에 바위 하나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 바위를 ‘아브라함의 바위’라고 합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리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을 그 자리에 그렇게 만든 것인데 다만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경과 다른 부분이 이슬람 코란에 나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던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슬람에서는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코소보 전쟁은 잘못했으면 이슬람교와 동방정교의 전쟁으로 확산될 뻔 했습니다. 정교회 측인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와 그리스와 불가리아가 한 편이 되고 이슬람권의 알바니아와 코소보와 터키와 이란과 이라크가 한 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그때 매우 난처했었는데 교황청의 태도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기 때문에 확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조금 가깝다고 정교회 편을 응원하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이슬람 대 기독교의 싸움이 될 뻔했던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계라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세계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듯이 걸프 전쟁 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온 세계 이슬람권이 이때 일어난다고 얼마나 충동질을 했는지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지역에서 세계 제1차 대전이 생겼기 때문에 20세기를 마감하는 아마겟돈 성격의 전쟁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위험성은 다 없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언제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도가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사사기의 전쟁 기록인데 그중에서 가장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이 삼손 시대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아마 이 삼손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거의 알고 있는 인물이 됩니다. 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세 가지가 있는데 “머리를 깎지 아니한 나실인의 약속이 있는 사람이다”, “그 약속 때문에 하나님께서 상상을 초월한 만큼의 강한 힘을 그에게 부여하셨다”, “들릴라라고 하는 기생을 사랑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성경이야기를 어떻게 보면 너무 동화적이기 때문에 삼손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이 사사기 역사에 나타난 인간 역사를 보면 확실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삽니다. 그러면 타락합니다. 하나님이 견딜 수 없어서 이웃나라의 침략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온갖 고난을 당하게 됨으로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라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 사사라는 사람을 하나 세워서 그에게 특이한 지혜와 힘을 부여하심으로 민족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렇게 되면 평화의 시대가 옵니다. 조금 가다가 평화의 시대는 또 타락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똑같은 방법으로 12바퀴가 돌아가는 역사가 바로 사사기라는 성경입니다. 이 사사들에게 주어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민족을 원수의 압박으로부터 영웅적 구원을 해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왕국 건설을 하지 말고, 왕이 되지 말고 죽기까지 나라를 보호하는 치안장관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삼손도 2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최고의 통치자로 대통령 같은 역할을 담당한 당대 최고 지도인물이 됩니다. 이 삼손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고통은 매우 강인한 호전적 블레셋 민족이 항상 옆에 있어서 이것이 골칫거리가 됩니다. 사실 이것도 집안싸움이 되는데 이 블레셋 족속은 노아의 세 아들 중에 책망을 받은 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셈의 후손과 원수가 되어서 지금은 자손들끼리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이 삼손은 셈의 후손 중에 단 지파 출신입니다. 블레셋 족이 셈의 후손과 원수가 된 것은 계속된 역사로 성경에 나옵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원하는 이야기도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특징을 살펴볼 때 아주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절대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아기를 낳았을 때 그 아기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에 큰 쓰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도 처녀가 출산했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될 수 없는 일이 되어졌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사라가 절대 불가한 나이에 아들을 주셨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자신이 자연 과학적으로 자기를 보았을 때 “나는 아기를 가질 수 없나이다.” 엘리사벳이라는 여자도 성경에 보면 늙어 수태하지 못하는 여자로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더니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한나라고 하는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삼손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모친은 본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는데 삼손을 낳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 속에서 삼손이 그렇게 쓰임을 받게 된 인물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은 삼손이 건재하게 살아있는 한 민족의 평화는 아무 염려가 없었습니다. 삼손의 건전한 생각과 올바른 하나님의 능력에 순종했다면 삼손 때문에 민족 평화는 아주 훌륭하게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삼손 시대는 삼손 때문에 민족 고통이 와버리는 불행이 역사화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먼저, 그의 개인 생활이 민족 패망의 첫 번째 원인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원수의 딸인 블레셋 여인과 결혼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그런대로 잘 살수가 있었을 것인데 블레셋 나라에서는 바로 삼손의 아내가 블레셋 족이기 때문에 그 아내를 이용해서 이 삼손에게 결정적 피해를 입히려고 정치적 음모를 계속했습니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장인이 되는 사람이 자기의 딸을 삼손으로부터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습니다. 이때부터 삼손은 아주 자기 자신의 관리가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막가파로 감정 표현을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선 다른 여자 하나를 마련합니다. 그것이 들릴라라고 하는 기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타는 복수심을 참지 못해서 감정 자제를 하지 못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계속 합니다. 아스글론에 가서 죄도 없는 블레셋 사람 30명을 괜히 때려 죽였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를 무기로 삼아서 레히 골짜기에 가서 몇 천 명의 사람을 그냥 때려죽였다고 했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아내에 대한 불만 때문에 복수심을 참지 못하는 겁니다. 추수 때가 되었는데 블레셋 곡식밭에 불을 질러서 전국적 대 화재로 온 나라를 불태워버리는 장인에 대한 복수 행위가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가 도저히 조절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주신 힘은 그런데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드러내라고 그런 힘을, 나실인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개인의 힘자랑이나 감정 풀이하는데 사용하라고 그 초월적인 힘을 그에게 부여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 은사는 어떤 것이 되었든 하나님이 내게 그것을 주셔야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리라고 하나님이 판단이 되어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옳지 않게 사용할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주신 이 초능력적 에너지는 삼손 개인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며 민족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일 때는 그 힘과 그 능력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해야 된다는 철학은 크리스천으로서는 버려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은사를 자기감정의 노예로 삼아버립니다. 그래서 자기와 민족 고난을 자초하는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영적 은사를 육신의 기회로 사용해서 민족 구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실인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날 때부터 특별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철저한 선악과 계명을 하나 삼손에게 주셨습니다. 그 계명이 무엇입니까? 머리 깎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계획에 대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지켜갈 때 그 능력은 보존됩니다.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을 주셨지 않습니까? “이것만은 하지 마. 이것은 나의 고유 권한이니까!” 그것을 지키지 않고 인간이 파렴치한 손을 내밀었을 때 하나님은 “이것은 안 된다고 너와 나의 계약을 주지 않았느냐?”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리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떤 약속을 하고 계십니까? 저 같은 사람은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경우를 만나도 내가 목회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는 날에는 너는 정녕 죽으리라.” 먹지 말라는 것은 먹지 말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이 성경이 지금 보여줍니다. 힘을 많이 쓰니까 교만해 져서 자기를 당하는 자가 국가에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통쾌감에 황홀함, 자기도취가 하나님의 약속도 잊어버리게 됐지 않습니까? 그리고 필요치 않는 감정 풀이를 이곳, 저곳으로 가서 죄 없는 사람을 때려죽이는 이런 이상한 살인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 절대로 말하면 안 되는 하나님의 비밀을 폭로합니다. “머리 빠지면 힘 빠진다.” 여러분!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게 몇 가지 있다고 합니다. 활을 떠난 화살도 안 돌아오고 내 입을 떠난 말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경제인들은 내 손을 떠난 돈도 안돌아온다고 합니다. 나실인의 축복으로 주은 그 힘을 과신하고 영웅 의식에 사로잡혀서 이 영적인 은사로 육신적 기회로 삼아서 함부로 행동하고 함부로 지껄이고 함부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막가파 건달패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것은 성경에 “굳게 하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고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잘 간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주 훌륭한 사용을 할 때만 그의 능력은 보존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적 은사를 세상적 관심의 집중이나 자기감정의 보복을 위해서 사용할 때 삼손과 같이 버림을 당합니다. 삼손이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눈이 멀었으니 내 눈이 뽑혔도다. 사명을 행치 않은 몸이 결박당함이 마땅하도다. 세상 향락에 갇힌 몸이 세상 감옥에 갇힘이 당연하고 내가 하나님의 신전을 떠났으니 다곤 신전에 묶여 있음이 확실하다. 힘자랑의 교만은 광대노릇 구경거리 피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버렸으니 나도 버림당함을 어찌 하리요? 사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 돌보지 않았으니 나라 망함이 마땅하도다.”
세 번째는 삼손의 실패는 인간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불러온 불행입니다. 아마 영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 관계성에서의 삼손과 들릴라를 평가한다면 아주 휴머니티한 러브스토리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원수의 딸을 죽자 살자 사랑했지 않습니까? 인간관계에서 피차 사랑하는 남녀 그것보다 더 싶은 관계는 사실 없는 것인데 그런 관계의 사람에게는 사실상 못할 말이 없다고 봅니다. 한 나라의 집정관이 되어서 20년 동안이나 통치하는 사람이 절대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삼손이 이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천하가 다 무너진다 하여도 들릴라는 자기를 선택할 줄 알았습니다. 블레셋 나라가 다 멸망하여도 들릴라는 자기 선택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마치 호동왕자를 생각하며 자명고를 찢었던 낙랑공주같이 말입니다. 이런 게 얼마든지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는 들릴라를 어디까지 믿었습니까? 자기 영혼에 가장 깊숙이 간직한 하나님과의 약속인 마지막 카드를 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때 삼손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는 이에게서 가장 좋은 사랑의 깊을 선물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자, 내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카드는 이거야. 이것은 하나님과 약속인데 너에게 주겠다.”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같이 믿었던 인간! 그 사람은 결국 1,200명의 돈 주머니를 받아 채고 삼손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머리카락 자체에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의 파약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의 불행을 말하라 하면 인간관계의 신뢰성의 상실입니다. 도저히 사람을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는 사회입니다. 믿었다가는 나에게 큰 불이익이 찾아오는 사회입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신뢰를 보여주었더니 너무나 행복해서 감격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옛날 문화는 참으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문화가 뭐냐 하면 옳은 일을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희생이 되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그게 정몽주 아닙니까? 일백 번을 내가 죽어도 이 옳은 일의 선택을 나는 가겠다는 겁니다. “이 임금을 위해서 나는 일백 번 죽어도 괜찮다.” 옳은 일에 사람이 사람을 위한 희생의 문화가 분명 있었지 않습니까?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그래서 성삼문이지 않습니까? 그런 시들을 우리가 찬양하고 그런 분들을 우리가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변했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나라 앞으로 어떤 문학작품이 나오고 어떤 예술 작품이 나오든 춘향전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은 절대로 성공하기 힘들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의 문화가 얼마나 변했는지 현대인들은 이몽룡보다는 변 사또를 좋아합니다. 왜 그런지 보십시오. 이몽룡을 기다리기 위해서 춘향이가 온갖 고난을 다 당하면서 일심이라고 하는 두 글자를 적어놓고 가슴에 품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장원급제해서 돌아왔다면 “얼마나 고생했느냐?” 춘향이에게 나타나서 “내가 드디어 장원급제를 했도다. 나 때문에 네가 이렇게 고통당하고 있다.” 빨리 그 소식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그 고통을 받고 있는 춘향이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거지 행세를 하는 게 남자입니까? 차라리 변 사또 같이 화끈하게 나서야지 말입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것을 내놓을 만큼의 믿었던 관계가 이렇게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나라 말에 “불 가원 불가근의 진리”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이 하지 말라. 그가 네 과오를 드러낼까 함이요 멀리 하지 말라. 그가 너를 원망할 것이다.”
이제 삼손과 그의 민족은 다 망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삼손에게 하나님이 다시 힘을 허락하셔서 그가 지금까지 행한 원수에 대한 보복보다도 더 큰 보복의 역사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의 하나의 회복이요 나실인의 영적 회복이며 택한 백성의 구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참혹하게 버렸던 삼손을 회복시키셨는가? 이유가 30절입니다.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이때 삼손이 다시 살고자 했다면 하나님의 기적 역사는 그에게 안 나타났습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회복시켜 주십시오.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기회를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 나는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희생되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복시키려는 그런 자리에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이 그냥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꼭 십자가를 져야 한다면 나는 죽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나타내 주옵소서.” 라고 십자가에 달려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조소를 부끄럽게 받으면서도 끝까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고 희생된 그곳을 통해서 인류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더 이상 없어. 마지막 카드야. 머리 깎으면 나는 힘이 빠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들릴라에게 선물해 주었을 때 그는 고난에 빠졌는데 “하나님! 이로 인해서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성만은 다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내가 죽겠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로 자기를 떨어뜨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받쳐 올렸을 때 하나님은 그 자리에 삼손의 옛날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삼손은 죽고 하나님의 거룩성은 회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적 없습니까? “하나님! 이번 기회만 나에게 다시 한 번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그런 적이 없으십니까? 그런데 인간은 잊어버립니다. 12번 똑같은 바퀴가 돌아가면서 사사기 성경에 쓰인 것이 그겁니다. “너 약속했잖느냐? 내가 너에게 준 것이 얼마인데? 나를 위해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데?” 바로 인간의 끊임없는 배반과 탈옥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이 사사기가 우리에게 증거하면서 인간 구원의 문제란 하나님의 자비성에 의한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힘이 절대로 아니라는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 아버지, 되돌려 주십시오. 단 한 번의 기회만 나에게 남았습니다. 더 이상 나는 살수도 없으며 살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의 거룩성 회복 이 하나로 오늘 이 자리에서 나의 인생을 마감하겠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안 될까요?”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근거 같지만 아닙니다. 참 짧습니다. 주어진 인생의 시간 속에서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성에 쓰임 받지 못하면 그대로 반복해서 수레바퀴 돌아가듯 항상 똑같습니다. 오늘 한 번의 기회라고 이 성경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하고 ‘아! 내가 게을렀다. 정신 차리자. 하나님 아버지! 나의 남아있는 이 인생의 한 토막을 나는 마지막에 주고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를 통해서 이 땅에서 영원히!’ 그런 믿음의 선물이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