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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방견문록을 가슴에 품고 콜롬버스가 1492년 동으로 인도를 찾아 가기 위해서 서쪽으로 간다. 마젤란이 1519년 또한 서쪽으로 간다. 1602년 벤토 데 고에스가 인도를 떠나서 카타이로 가는 육로를 찾아 간다. (중국 북경에 있다는 마테오리치가 카타이 북경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처음으로 카타이가 바로 중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600년대 초반에 딱 한명의 유럽인이 이 사실을 알고 1700년대에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19세기 중반에 인도의 서북방(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현 인도의 서북방)으로 영국의 식민지를 확대하고, 중앙아시아를 러시아가 영유하고도, 유럽인에게는 파미르 너머의 중국은 아직 미지의 세계였다.
바로 이 시점에 그러니까 1898년에 아더 맥아더는 미서전쟁의 쿠바전에서 제3군단의 참모장을 하다가, 필리핀전투로 파견되고, 마닐라를 정복하는 장군이 되고, 1901년에 필리핀 군사총독이 된다. 바로 그 때 이 카스에 영국 영사관과 러시아 영사관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신강지역 탐사대들의 유물약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동방견문록의 내용이 사실이란 것을 학계와 대중들이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도 소수만이.
그리고 1904년에 러일전쟁의 관전관으로서 아들 더글라스와 함께 참전하고 1905년 역시 아들과 함께 아시아대륙 탐험을 한다. 그 여정을 보면, 요코하마, 홍콩, 싱가포르, 랭군, 캘커타, 페샤와르, 케타, 인도북서부와 국경지대, 티베트, 봄베이, 하이데라바드, 뱅갈, 마드라스, 콜롬보, 자바, 태국, 인도차이나, 상해, 그리고 중국에서 몇개월, 최소로 잡아도 1년이 넘게 걸릴 길이다.(맥아더 회고록/일신서적, D.맥아더, 반광식 옮김 P51에서)
이 父子가 이 때 쯤에는 동방견문록을 지니고 다니면서 그 진가를 알게 되었으리라. 1902년 미의회 필리핀 청문회의 발언 중에 나왔던 '아리아인의 요람인 신강지역'도 둘러 보았을까? 이제 그 아들 더글라스도 태평양전쟁과 일본점령과 한국전쟁을 끝으로, 대륙청소의 담당자로서 장개석이 아닌 모택동이 선택된 줄을 그때까지도 모르고, 원폭을 주장하다가 무대의 뒷편으로 쓸쓸히 사라져 갔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의 위협은 했지만, 결국 그 폭로의 위협은 실행되지는 못했다. 벌써 '무서운 아이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 카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의 지리에 대한 텍스트로서 결국은 이 동방견문록 이상은 아직 지구상에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사(조선사와 고려사) 변조를 하는 주체들이, 변조되기 전의 아시아의 실상을 알 수 있는 텍스트가 바로 이 동방견문록뿐이었다는 것이다. - 도둑질도 알아야 하고, 조작도 실상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
1492년 콜롬버스가 가슴에 품었던, 그리고 1905년 맥아더 부자의 아시아 여행의 가이드북이었던 동방견문록은 1938년에 집철 감수된 현재의 동방견문록이 아니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 책을 '콜롬버스 맥아더 동방견문록'이란 이름으로 불러 보자. 영어로 번역된 原대당서역기와 콜롬버스 맥아더 동방견문록이 기본텍스트일 수밖에 없다. 이 텍스트를 놓아두고 조작 계획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현재의 동방견문록을 골조로 하고, 현재의 대당서역기를 서까래로 삼아서 기본 모형을 만들고, 25사와 문화사를 지붕으로 엮어 올렸다. 거기에 바깥채 안채 옆채 별장 들을 대충 얽어 걸었다. 이 만주와 조선과 왜를 동쪽에 걸어 붙이는 작업에 들어 갔는데, 19세기까지의 東과는 다른 東의 개념을 만들어 내어야 했다.
그때까지는 동경이 기껏 감숙성 최서단 돈황까지였는데, (서경은 쿠차, 북경은 트루판, 남경(부도[FUDO],화도, 강화도)은 호탄, 중경[개경, 송도, 중도]은 카라샤르, 얜치) 이 동경을 2만리나 떨어진 현 동경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낸다. 이 호탄에 있는 남경을 현 남경으로 또한 옮기고 1912년 공식명칭이 남경이 된다.
그 이전까지는 江都(일본말로는 에도 - 일본사(에도막부)의 에도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는 생각이 든다. 강화도, 江津,)로 부른다. 동시에 1912년에 북평이 페킹(PEKING-북경)이 된다. -대륙조선사연구회 최두환칼럼 106호 참조.
東이 참으로 동쪽으로 마르코 폴로의 발길 따라 3만리(3년 6개월 걸렸다.)를 옮겼다가 이제 2만리를 옮겼다. 동방예의지국, 동국, 동이, 동경, 동사강목, 동문선도 고려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따라 옮겨졌다. 물론 동학과 동경대전도 반도로 옮겼다. 그것만도 아니다. 조선과 고려에 없어서는 안되는 만주도 옮겨지고, 그 만주에 있는 투르크와 거란과 여진도 이민족 오랑캐로 변조해서 옮기고,
그 만주의 서쪽에 있는 말갈(마갸르>마자르>헝가리)과 몽골도 만주의 서쪽으로 옮기고, 왜는 바다 건너 열도로 옮겨서, 떠억 하니 東京을 심어 놓았다. - 중앙아시아사를 살펴 보면서 깜짝 놀랐는데, 현 만주와 내몽골에 있어야 할 여진과 거란과 말갈과 돌궐이 파미르 너머에 다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현 만주에 있어야할 이민족들을 중앙아시아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아니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민족들을 현 만주로 이동 조작을 했다고 보아야 맞는 말이 된다.
대륙에서 사냥과 살륙을 피해서 살아남은 동학의 지도부는 東學도 天道도 아니고 천도교로 이름을 고치고, 입 다-악치고 이 조작세력에게 협조하는 댓가로 반도에서 세력가로 자리잡았다. (몇년 전에, 천도교의 고명하신 원로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법문을 하시는데, '반도도 괜찮지 않느냐?, 살 만하지 않느냐?' 하시고 돌아가셨다. - 동학사상연구회의 한 후배가 신문에서 보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
자기는 괜찮게 살다가 돌아가셨겠지만, 반도의 남에서 북에서 중국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서 남아시아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유럽과 러시아에서 남북아메리카에서 지옥 유황불에 드글드글 볶이고 살고 있는 이 인류는 살아 지옥을 살고 있어도 자기하고는 상관없다는, 천하는 다 죽어도 자기는 괜찮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의 말씀인데, 그거 웃겨도 너무 웃기는 얘기 아닌가? 대동태평천하를 꿈꾸던 태평천국의 아들이 해도 해도 너무 하는 행태가 아닌가?
물론 우리는 반도를 벗어난 얘기를 하면, 그 위대한 일제와 박정희식의 민족주의에 크게 반항을 하는 것쯤으로, 민족의 이익에 크게 손해를 끼치는 것쯤으로 비난도 받는다. 현실적으로 반도사람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라나! 좋다! 반도도 좋다. 그래, 반도의 입장에서 진정 반도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이 반도의 비극과 그 뿌리와 그 한계와 함께 그 가능성과 그 잠재력을 볼 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 지 구 상 에 서 아직까지 인류의 미래와 천지공심(天地公心)의 정의를 생각할 줄 아는 이 반도인이야말로 참 지구의 대변인이 아닌가? 그렇게 할 때, 진정으로 전 인류 전 세계인을 감동시킬 것 아닌가? 그래야 韓流가 세계적 기적을 만들 것 아닌가? 그래야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태평양의 기적을 만들 것 아닌가?
남을 탓할 게 아니라, 내 생각이 좁은 것을 탓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을 키워야 할 것이다. 참으로 크게 생각해야 한다. 비록 한 작은 벽돌을 놓더라도, 인류적 정의를 위한 홍익인간의 제단을 쌓는 크고 넓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놓는다면, 남이 봐도 보기도 좋고, 자신 또한 얼마나 감동하면서 살 수 있겠는가?
반도에 심어진 동학은 1860~1864 최제우의 대각 득도와 포덕(포교)과 죽음, 1864~1894 최시형의 잠복과 동학란, 1895~1919 손병희의 동학재건과 삼일운동으로 정리되었다. 최제우가 죽은 1864년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보면, 놀라와라! 홍수전이 죽고 태평천국의 천경(남경)이 함락(1864.7.19)된 해가 아닌가?
여기 마르코 폴로의 무대인 신강지역에도, 쿠차(1864.6.4), 야르칸드(1864.6.23), 카스(1864.6.26)를 시작으로 전 지역이 남경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혁명군에 의해 장악되는 때가 1864년이다. 최제우의 본명 혹은 아명이 복술인데, 이름을 濟愚로 고치고, 호를 水雲으로 지어 썼단다.
홍수전은 아명이 禾秀 본명이 仁坤 호를 秀全으로 썼다. 수전의 가계를 살펴보면, 수전의 친형제보다 친하고 1860년의 복건, 절강으로의 대공세 이후 천경을 실제로 지휘했던 10촌 관계인 仁간(王+干)이 있는데, 수전의 할아버지는 國游이고, 인간의 할아버지는 國榮이다.(태평천국의 종교사상/조선대학교출판부,최진규 P139 주9) 이 사람들이 어찌 중국어를 사용한 *청나라 만주 오랑캐 뙤놈일 수 있는지 나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조부의 이름이 홍국영인데, 正祖 시의 그 홍국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대는 그 시대가 확실하다. 보학을 잘 아는 분이면, 그 족보를 확인해 보고 싶다. 족보 말이 나왔으니, 이 홍국영 이후의 풍운아가 정약용인데, 정약용의 장인인 홍화보(洪和輔)가 홍국영의 미움을 받아 운산으로 유배를 떠날 때의 심회를 읊은 送外舅洪節度謫雲山이란 시가 다산시에 남아 있다. 홍화보가 홍수전집안의 어른이지 않을까하는 강한 느낌이 든다.
최찬동선생님이 별세하셨으니, 누구에게 확인하나? 다만 짐작을 할 뿐이지만, 雲山은 雲南을 이르는 말이고, 거기로 귀향한 것이니, 화보는 운남사람이라는 말이고, 다산의 외가가 해남이고, 귀향지가 강진인데, 거기서 *운남의 초의선사(초의는 해남 대흥사의 13대 종사로서 대흥사에 一枝庵을 건립했음)를 제자로 받았으니, 다산도 운남사람이고, 수전도 운남사람일 수밖에 없다.
물론 광동의 화현이 홍수전의 고향이라고 기념탑을 세워 놓긴 했지만, 1840년의 아편전쟁의 무대이고, 그 이후 오히려 영국의 영향권인 광주와 화현(지금 花縣은 花都區라는 광주시의 한 구로 바뀌었다.)에서 살다가 1851년에 기의해서 광서 호남으로 진격했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오히려 운남에서 광서 호남으로 진격한 것이 실상에 맞다.
태평천국에 관한 가장 먼저 나온 단행본의 책으로 나온 출판물인 'HISTORY OF THE INSURRECTION IN CHINA'/J.CALLERY,M.YVAN,1853,PARIS & LONDON를 인용해 보자. P 55 'According to documents which we have ourselves inspected, it appears that the insurgents passed the first months of 1850 in the South-west of Kouang-si, performing some strategic movements of no importance, and approaching the frontiers of the Kouang-Toung.'/'우리 자신이 검사한 서류들에 의하면, 폭도들은 별로 중요치 않은 전략적 활동들을 수행하면서, 1850년의 초기 몇 달을 광서지방의 서남부지역에서 지내고, 광동지방 변경으로 접근해간 것 같다.'
이때 '광서지방의 서남부지역'은 현재의 운남성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그때까지 광동 광서 운남지방이 정식으로 '성'의 명칭으로 불리거나 경계가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글이 보여주는 진격로는 운남에서 광동으로 갔다가 광서를 거쳐 호남지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1864년 이후 태평천국운동의 중요한 한 중심지가 곤명으로 되는데, 이 곤명 주변에 바다같은 호수들이 즐비해 있다. 여기가 운산이고, 해남, 강진일 수밖에 없다.
정약용이 필생의 공력으로 사서삼경을 연구해서 理氣學이 아니고 上帝學(天主學)이 정답이라고 밝혀냈는데, 홍수전이 1836년 전후에 上帝會를 조직하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광동지방에서? 천만에 운남지방이다. 지리적으로 연결되고, 사상적으로도 홍수전의 동학의 상제회는 정약용의 다산학의 상제학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연결정도가 아니다. 상제학은 동학과 100% 동일하다.
동학연구가들은 '동학이 南學에서 나왔다'고들 하는데, 남명 조식선생 이후 조선실학을 남학이라고 하지 않는가? 바로 南人들의 학문과 이론을 이르는 것이다. 이 실학 남학 동학 상제학이야말로 고대 原불교의 부도학이다. 남학 남인이라는 말 자체가 조선의 한양(북경, 연경, 트루판) 周漢의 서경(평양, 장안, 쿠차) 고려의 송도(개성, 개경, 카라샤르 혹은 얜치)에 대해서
남경(호탄) 동경(돈황) 출신의 그리고 원 불교인 부도학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가문들이 자기 전통과 사상과 종교를 굳건히 지키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고대의 철지난 사상에 얽매여 있는 꽁생원집단이라는 의미로, '휴- 아직 남학 남인이냐?'는 조금의 경멸의 의미가 강하게 비치는 용어인 것이다.
*청나라 오랑캐 땐놈(뙤놈) - 북노에 대비되는 남만 즉 남쪽 오랑캐를 ‘蠻州놈’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이 蠻州를 중앙아시아의 滿州와 바꿔치기를 하는 조작을 해냈다. 이 남만을 즉 도이(島夷)인 왜인을 도이놈, 뙤놈, 땐놈이라고 불렀으니, ‘양배추 고려채 서토남’에 나왔던 선친께서 부르던 이름이 정확한 근거에서 정당하게 그렇게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조CENTRAL ASIA의 여진 혹은 요인이라 불리던 구려인 중에 웬 누르하치라는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인간과 종족이 갑자기 튀어 나왔는가 하면 이 바꿔치기를 준비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 중앙아시아의 만주족 청나라가 어떻게 갑자기 1만 5천리나 동쪽으로 옮겨와서 북경에 수도를 정하고 만주족 청인들(이홍장, 원세계, 증국번, 좌종당)이 서쪽으로 동학 태평천국군을 진압을 한다는 말인가?
정말 중앙아시아에서 신강 감숙 섬서 산서 하남을 거쳐 하북의 북경을 점령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게 진짜 만주족 청인들이 맞다면 현 중국은 중앙아시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야 맞는 것이다. (만주족이 다 한화해서 만주어가 사라졌단다. 황실 지배층이 자기 엄마에게 배운 말을 버리고 피지배층의 말을 다 수용해버린다는 말인가?) 보라! 동쪽 해안 지방의 북경어가 현재의 중국의 표준어가 되어 있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 중국의 공식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라오닝성(요녕성)에 누르하치의 탄강 기념비며, 그 온갖 유적과 기념물들은 다 뭐란 말인가? 다 조작일 뿐이다. 청국 오랑캐 뙤 만주는 동쪽 해안 지방의 도이(島夷)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운남의 초의선사 - 토산물로 본 조선/도서출판 경남,최두환 p63~69에 초의집(P88)에 실려있는 '가섭봉에 올라'의 시와 관련해서 그 가섭봉이 운남성 대리시의 북방에 있는 계족산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의가 45세에 茶神傳을 저술하고 정약용의 호가 茶山이다. 이들은 차의 고장 운남과 관계있는 사람인 것이다. 최두환교수님이 '토산물로 본 조선'에서 다 인용하지 않고 남겨 놓은 '가섭봉에 올라'의 나머지 부분을 인용해서 草衣 詩의 향기와 그 여운을 감상해 보자.
環坐陳險艱慰言如相訴 둘러 앉아 털어 놓는 험난한 이야기, 위로하는 말이 오히려 호소하는 말 같구나.
국嘗巖竇泉神석如發悟 바위틈의 샘물을 움켜 마시니, 정신까지 상쾌해 깨우침 일 듯 하다.
摘蔬과簞食靈香通胃腑 나물을 캐다가 주먹밥을 싸니, 신비한 향기 위장에 스며드네.
談論恐非人間意 賦詠疑是天上趣 이야기는 인간세상 뜻 아닐까 두렵고, 읊는 시는 하늘 위의 운치인가 의심되네.
地上神仙眞玆是 何必吸風復飮露 지상신선이 바로 이것이니, 어찌 꼭 바람 마시고 또 이슬 마셔야 하리.
이제 동경대전의 訣을 인용해 보자.
問道今日何所知 意在新元癸亥年 오늘 도를 묻지만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뜻은 내년 계해년(1863년) 정초에 있다.
成功幾時又作時 莫爲恨晩其爲然 공을 이룬지 얼마만에 또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 되는 것이 늦다고 한탄하지 말라.
時有其時恨奈何 新朝唱韻待好風 때는 그 때가 있는 것이니 한탄한들 어찌 하겠는가, 새 아침에 좋은 운의 노래를 불러 좋은 바람을 기다리노라.
去世西北靈友尋 後知吾家此日期 지난해 서북에서 신령한 좋은 벗이 찾아 오더니, 뒤에 우리 도가에서 이날을 기약했음을 알게 되었다.
春來消息應有知 地上神仙聞爲近 봄 오는 소식을 응당히 알 수 있나니, 지상신선의 세상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네.
此日此時靈友會 大道其中不知心 이 날 이 때 신령한 좋은 벗들이 모일 것이니, 큰 길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는 마음이여!
계해년이면 1863년인데, 서북의 섬서 청해 감숙의 기의(회민기의로 조작되었다.)가 1862년에 시작하는데, 위 시의 ‘지난해(1861년) 서북에서 신령한 좋은 벗이 찾아 오더니, 뒤에 우리 도가에서 이날을 기약했음을 알게 되었다.’와 같이 1861년에 서북의 봉기 계획을 듣고 1862년에 봉기하여, 섬서 청해 감숙을 동학천도의 태평군이 장악한 소식을 듣고 이미 공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
1863년에 반만년 중원의 신강지역에서 기의할 것을 계획하는 봄 소식을 듣고서 기꺼워하면서도 과연 그것이 돌파구를 여는 큰 길이 되어 줄까? 큰 길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진다.
‘뜻은 내년 계해년(1863년) 정초에 있다.’ ‘또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 되는 것이 늦다고 한탄하지 말라’ ‘한탄한들 어찌 하겠는가.’ ‘좋은 바람을 기다리노라.’ ‘봄 오는 소식을’ ‘지상신선의 세상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네’. ‘이 날 이 때 신령한 좋은 벗들이 모일 것이니, 큰 길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는 마음이여!’
위 시의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신강지역에서의 기의가 계획보다 1년 6개월쯤 늦어진다. 얼마나 안타까왔으랴? 일각이 여삼추였으리라. 과연 신강의 봉기 소식이 천경(남경)에 당도하기 전에 천경이 함락된다. 진압세력(8개국 연합군과 청군)이 이 상황을 봤을 때는 신강 봉기 소식이 전해진 후에 천경을 함락시킬려면, 얼마나 더 어려워질 건가는 불을 보듯 빤한 상황에서 천경을 봉기 소식 전에 함락시키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리라.
천경(남경)의 중앙 지휘부가 살아 있으면, 자기들(진압군)의 통제권 밖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62년. 이 시국이 얼마나 중요한 상황이었는지 홍수전은 너무나 절실하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862년. 이 때는 절강 복건 강서 호남 호북 하남 안휘는 자신이 장악하고 있고, 두문수는 홍수전이 남경으로 떠난 뒤 1856년부터 운남 귀주 사천을 장악하고 있고,
1862년에 섬서 감숙 청해 산서성에서 기의했고, 반만년의 중원의 센타 신강만 일어나면 전체가 기세가 살아서 서로 호응해가면서 진압군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1862년.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안타깝게도 1864년 7월 19일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이 죽을 때까지 신강의 봉기 소식은 들려 오지 않고....
그러나 실상은 신강 지역에서의 봉기는 이미 시작되었건만. 쿠차(1864년6월4일) 야르칸드(6.23) 카쉬가르(6.26) 우쉬 투르판(7.23) 우룸치(7.26) 악수(7.27) 하미(9.29 ) 바르쿨(10.19) 일리(1864년 11월 10일) - 괄호안은 봉기 일자.
1878년까지 모든 지역의 봉기는 결국 각개격파되고 만다.
굳이 이 시구들을 인용한 것은 두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地上神仙의 시구 때문이다. '가섭산에 올라'의 지상신선과 동경대전에 실려 있는 訣에서의 지상신선의 차이점과 그 동일성을 느껴보자는 의미에서 인용을 해 본 것이다.
언뜻 보더라도, 정약용의 상제학과 홍수전의 상제회 혹은 동학(상제학) 사이에 草衣라는 정약용의 제자가, 아니면, 그 제자 그룹이, 아니면, 남인 그룹 전체가 그 징검다리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지상신선이라는 시구만 보더라도 연결성이 확실하다 하겠다.
앞으로 숙제가 생겼다. 동경대전과 초의집 사이의 또 다른 유사점과 연결성이 있는지를 맹렬히 치열하게 샅샅이 살펴 보아야 하는 숙제다. 이 운남과 상제학과 초의와 홍수전 사이에 뭔가가 있다. 더 생생하고 확실한 증거가 많이 나오리라. 좋~은 소식을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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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과사전 을 따르면 홍수전은 꿈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 우상타파 를 구호로 하며 대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정치지도자 가 된 것이고 최재우의 동학은 개신교(서세) 들이 유일신으로 동양을 식민지배하려 는 것에 ; 사람이 곧 하늘이다 ; 라는 주장으로 맞선 것입니다 홍수전 과 최재우 는 물과 불 의 관계로 절대 오버랩 할 수 없는 관계 입니다
홍수전 괴 뒤에 손문 의 구호는 결국에는 북방 천자국 과 북방호국불교를 없애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고 최재우의 동학은 서학 (로마카토릭) 을 막아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 를 이루는데 그 목적 이 있습니다 동학 천도교 (수운교) 는 동양의 자생천주교로 천진암에서 제석천주 교리를 연구하여 남방소승불교도 같이 견제 햇습니다 이들의 사상이 광복군의 광복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셔서 의견을 말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먼저 선생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읍니다. 홍수전은 꿈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 우상타파를 구호로 대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정치지도자인데, 그 뒤 시대의 손문과 함께 구호는 북방천자국과 북방호국불교를 없애자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제우는 개신교(서세)들이 유일신으로 동양을 지배하려는 것에 대하여 '사람이 하늘이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동학(천도교)는 동양의 자생천주교로서 천진암에서 제석천주교의 교리를 연구하여 남방 소승불교도 견제했는데, 서학(로마카톨릭)을 막아내면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다. 뒤에 광복군의 광복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이제 질문을 몇가지만 드리고자 합니다. 1, 백과사전의 홍수전 지식과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과 최제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역사조작세력의 조작과 주입과 세뇌의 결과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지? 2, 북방호국불교의 기본교리가 무엇인지 밝혀 주실 수 있으신지? 3, 혹시 북방호국불교와 다산의 상제학과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4, 홍수전과 최제우는 각각 어느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생각하시는지? 5, 최제우가 반도에서 남방소승불교를 견제하고, 개신교와 서학(로마카톨릭)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이룰려고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죄송합니다. 너무 급하게 적느라고 너무 간소하게 질문을 해서 예에 어긋나지 않기를 빌 뿐입니다.
참으로 간절하게 최선생님의 답을 간략하게나마 올려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읍니다. 선생님께서 평생을 불학을 하신 것 같이 저는 평생을 동학에 매달려 살아 왔읍니다. 선생님의 구도자로서의 깨달음과 경험이 이 연구회에 늘 도움이 되 듯이 저도 저 나름의 작은 깨침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이렇게 고심을 하고 있읍니다. 제 깨침과 경험이 도움이 되는 길은 광범위한 오해와 주입된 지식을 좀 정리해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이(島夷)인 왜인을 도이놈, 뙤놈, 땐놈>... 그럴 듯 합니다... '떼놈'이나 '왜놈'이나 거의 유사합니다... 그 것이 유사한 것이 신체구조와 생김새이지요.... 거의 유사한 DNA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거의 같은 위치라는 것이죠... 이들은 분명히 일본의 북방계인종과도 대비됩니다.... Chinese들은 한국인이 일본인과 거의 동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시각은 북방계 인종을 보고 지칭하는 것일 겁니다...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1, 'HISTORY OF THE INSURRECTION IN CHINA'에 의하면, 태평천국은 운남에서 시작되었다. 2,' 토산물로 본 조선'에 의하면 초의는 운남 사람이다. 3, 다산은 운남에 귀양 와서 초의를 제자로 받았다. 4, 그래서 태평천국은 정약용과 관계 있다. 5, 다산은 운남에서 상제학을 완성했고, 태평천국은 상제회로 시작되었다. 6,반도의 동학은 상제님의 가르침으로 시작되었다. 7, 반도의 동학은 대륙 동학 천도 태평천국의 짝퉁 동학 즉 조작된 동학이었다.
결국, 동학은 태평천국운동의 복사판이고, 태평천국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된 사람이 '정약용'이 되는 것이네요.... 정신적 지주... 이것이군요....
그리고, 태평천국운동의 주역들은 이슬람교도인 '회회교도'가 되는 것일까요?...이들이 내세운 명분이 '멸청흥한'이 되는 것이구요....
또한, 홍수전이 홍국영의 후예와 관련이 있고, 태평천국운동이 정약용의 가르침으로 시도되었다면, 결국은, '정조개혁'의 완결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신분차별이 없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 정조의 목표가 아니었는지?.... 정조의 후예들이 주도한 역사적 사건들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정조는 과연 죽은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새롭게 생길수도 있습니다...
정조가 죽음으로 위장하여, 여진과 거란족들의 영토로 유유히 사랴졌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1800년이되는데요... 그 이후 정확하게 나폴레옹의 동유럽침략과 러시아침략이 개시되는 데요... 이후부토, 동점의 시대가 시작되어 거의 20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정조를 모셔간 것은 플레이메이슨(성당기사단의 후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세력은 러시아->네델란드->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근거를 옮겨 새로운 제국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참, 김선생님 재주도 비상하십니다. 벌써 머리가 어지러워 감당이 안됩니다. 김선생님이 손을 대면, 조선 최고의 유학자 실학자 정약용과 초의와 홍수전이 무슬림으로 둔갑하고, 죽은 정조를 부활시켜서 '플레이메이슨'ㅎㅎㅎ의 보스로.... 기문둔갑법이 참으로 화려하기도 하십니다. 정신 좀 차리게 좀 놔 두시면 안되겠읍니까?
저는 한선생님의 논리를 알기쉽게 더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 논리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근본적으로 보았을때는 서양의 민주주의가 전세계 사람들의 삶의 질을 엄청나게 증가시킨 부분은 인정해야 합니다... 제가 보는 것은 이 전세계적인 민중의 혁명의 중심에 사라진 조선왕조의 실제적 실세들이 등장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나름대로 역추적을 해 본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진정한 '대인'과 '대왕'의 길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봉건적 행태를 유지하기 보다는 과감히 개혁의 길로 가는 것이 진정한 도인의 길일 것입니다... 그것을 싫어한 지배세력들은 왕이 필요했겠죠... 지배층을 위한 다시말해, 자신들을 위한 왕의 필요하여..... 조선후기의 꼭두각시 왕들처럼요......
저의 화두는 그것이 사실일 수 있는 가? 라는 질문입니다....
맨위의 최남석선생님의 댓글에 나오는 '홍수전은 꿈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의 장면이 동경대전의 포덕문에 잘 나와 있읍니다. 이 구절이 동학과 태평천국의 기본이 되어서 전 대륙의 인민을 벌떡 깨어 일받기는 원형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섬뜩하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그 증세를 알 수 없고 말로 형상할 수도 어려울 때,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 말고 겁먹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부르는데,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참고로 그 원문을 같이 싣습니다. 不意四月 心寒身戰 疾不得執症 言不得難狀之際 有何仙語 忽入耳中 驚起探問卽 曰勿懼勿恐 世人謂我上帝 汝不知上帝耶
한선생님 인사드리겠습니다^^질문하고 싶은 것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고려라는 실체가 마치 로마의 세력과 같이 사상적인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삼지 않을 수가 없을 듯한데여..고려,조선역시 이러한 중앙아를 배경으로하는 통합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러한 종교사상적인 면들이 왜곡,차단되어 있기에 다원론적인 종교성을 삶의 근간으로 하고 있기도 하구여...그렇다면 조선의 통치가 가능케되었던 이유가, 보다 근원적인 중앙아시아의 종교들로 부터 동학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구...동학은 조선 선대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중앙아시아의 종교에 여러모양으로
다른 옷을 입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를 들어서 중앙아를 기반으로 발전된 조로아스트교와 동학혁명 이전에 동간의 냄새가 나는 배화교의 실체들도 실은 동학의 또다른 표현방식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경우에는 오늘날 세상역사를 구분시키고 있는 실체는 종교사상적으로 "이원론과 일원론 논쟁"의 투쟁의 역사로 대변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기독교의 큰 뿌리인 어거스틴은 많이 알려진 서양식 기독교의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이도 이원론의 마니교사상과 일원론의 기독교사상으로 갈팡지팡했던 시기를 겪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결국 마니교(동방사상의 배경)을 포기하고
기독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에 이릅니다. 근데 이러한 논쟁이 서구의 사상적 역사가 아니라 실상은 조선에서 지속적으로 당파간의 사상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선중기의 이황과 이이가 그러하고 조선말기까지의 동서남북학의 모양들이 또한 그러해 보입니다. 이는 분명 동학의 근간이 중앙아와 서구를 통괄하는 사상적 중심이라 사료되어 집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이원론과 일원론의 사상들로 인하여 종교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러한 종교 사상적 대결의 국면이 지금도 우리의 삶가운데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조선이 중앙아로부터 발원하였기에 마니교의 사상적 이원론에 영향을 준 것이고, 이러한 결과로 조로아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중세중앙아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종교와 사상들이 어거스틴을 기점으로 하여 동로마와 서로마로 각기의 사상적 기반을 가지고 대결국면으로 진행되어 지는 것은 아닌지요? 카톨릭의 교황이 조선을 방문했다고하는 내용들과 연관성을 가진다고 보입니다.......언제 기회있으시면 정약용과 조선의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해서 가르침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치열한 문제의식!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의식의 소재가 조작사의 카테고리 내부의 문제의식이라 저는 전혀 관심이 없읍니다. 중조에서 웬 조로, 마니들이,카톨릭 교황까지 활개를 치고 있읍니까? 중조는 원 불교의 상제학이 확호하게 서 있었읍니다. 관련하여 정약용의 사상을 다다음호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한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이원론: 세상의 모든 사물을을 정신과 물질등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것/// 일원론: 근본은 하나로 생각하는 사상))
이원론은 일원론으로부터 나올수 밖에 없는 태생의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요... 다시말해, 일원론의 존재없이 이원론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은 일원론의 부족한 부분을 발전시킨 이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데아 이론아니겠습니까?...
결국은 천부경의 사상입니다... 하나의 근본에서 2가지가 나오는 것이죠... 세상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제! 발! 그 만 좀 합 시 다.
그만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전세계의 종교의 근원은 하나입니다... 겉으로 나오는 모습으로 누구의 것이 진짜냐고 물을 수는 없습니다...
이 공간은 누구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말릴 수도 없고 말려서도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상황에 와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항상 일어나는 우리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지요.
하지만 애정 만큼이나 더 필요한 것은 같이 만들어 가는 동반자로서 좀 더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존중한다는 것은 여기서 댓글을 자재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꼭 필요한 것은 개인적인 쪽지로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이 곳을 깨끗하게 이용합시다. 쓰고보니 공공시설 사용 수칙 홍보 같군요! ㅎㅎ
여기 글을 올리는 많은 분들의 글들에는 여러가 모순점들이 발견됩니다.... 어느 누구의 글이 정답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부분과 다른 논리 또는 다른 접근에는 자신들의 지식과 Research 등을 통해서 얻어진 정보를 통해서 서로의 의견개진이 시도 되어야 합니다... 그럴 경우 댓글이 많아 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토론과 논쟁에서 새로운 결과들 또는 발견들이 더 많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이 자제된다면, 그런 논쟁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또한, 논쟁을 대중에 호소하여 자세시키는 것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라는 의혹을 부풀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논쟁과 토론으로 가는것이 아니라, '제 2의 세뇌'로 가는 것이죠... 대조연카페는 그런 위험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방향과 접근의 요소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견과 증거를 제시할 때, 그것의 객관성의 정도라고 판단됩니다...
제가 가끔씩 이 곳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충분한 근거의 제시없이, 또한, 제시된 근거의 조금의 사색과 이해도 없이, 본인들의 상상속의 내용 또는 특정주제의 글 또는 서적을 인용하여만 말하기 때문이지요.... 이 경우는 오고 가는 것이 없기 때문에...대화가 안되는 것이구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여러가지 주장들에대한 다각도의 접근을 하는 것입니다... 미국과 일본의 부정적 행동과 역사들, 또한, 긍정적 행동과 역사도 함께 고려합니다... ㄷ왜냐하면, 현재 조선에 대하여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동남아 섬 몇개 정도 입니다.. 그 정도가 눈에 보일 뿐이죠...
네 동의합니다. 얕은 지식의 한계를 인정합니다....지속적으로 한선생님의 연구를 통하여 많은 배움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최근 <조작된 역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우베 토퍼>. 번역을 한 분이 역사 전공이 아니어서 그런지 저자에 대한 소개가 좀 미진하나, 저자는 서양사가 조작됐다는 내용의 저서를 몇권 저술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내용은 <<12세기 이전에는 어떤 문헌이나 문학작품의 원본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즉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사본들이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는 것이랍니다. 그러니 그리스문명, 대로마 제국이 다 후대에 만들어진 역사라는 이야기입니다.
몇년전 여기 멤버이면서 별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박연화님이 <대로마 제국이 허구로 보입니다. 유럽의 와인을 추적하다 보니 전부가 르네상스 이후의 역사가 있을 뿐입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고, 시간이 흐르며 서구의 역사도 모두 조작빼기로구나((이건 한헌석 선생께서 잘 쓰시는 말씀,ㅎㅎ)) 하고 느꼈는데, 서양의 학자가 스스로 양심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박연화님의 혜안에도 감탄... 그러니 김유미님이 말씀하시는 어거스틴도 모두 허구라고 생각됩니다.
여기 댓글의 논점이 서양철학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다투었던 논제-이기론 등등의 것을 변조해서 서양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을 까 하는 의문점입니다. 조선의 유학은 물론, 불교, 도교의 것과 제자백가의 것을 재변조하여 중세이전의 서양사의 것으로 만들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서양철학을 좀 공부해보면 초보적인 대승불교를 보게 됩니다. 서양철학의 문제는 이들은 결가부좌를 하여 깊은 명상을 하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했습니다.
16세기, 17세기 이후, 서양의 유명한 사상가들은 조선의 유불선을 베낀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 힌트를 얻어 사상을 전개시킨 흔적이 많습니다. 조선에서는 함부로 사상을 변조하는 것이 계율에 금지되어 있어서 제한을 받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그러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과감한 생각을 해내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등의 사악한 설입니다. 승려들의 공동생활, 무소유 원칙, 승려에게는 사유재산이 없는 점 등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동방에서는 속세와 승려의 생활을 구분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러한 것이 서양에 흘러들어가 괴상한 사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원래 하나의 사상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다르게 표면화된 것으로 해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이동하기 때문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불교도 하나의 표현수단에 불과 한 것입니다....
서양에서 서양철학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현재는 동양의 도교에서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 있는데, 도교는 수련이지 학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서양세력의 한계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동양사상에는 눈에보이지 않는 충, 효, 선, 덕, 정, 이러한 눈에 안보이는 가치에 더 많은 무게를 두기 때문이죠.. 그것이 기업의 운영과 돈을 버는 데, 이제 서서히 적용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동학은 눈에 안보이는 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면, 서학은 눈에 보이는 가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던 차이가 있는 것이죠... 그것이 요즘은 동양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고, 서양은 동양의 것을 받아들여서 서로 조화롭기 시작했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서학이 동학을 접하면서 어려워 진것은 '눈에 안보이는 가치'는 계량화 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객관적, 과학적 방법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앞으로의 방향은 눈에 안보이는 이런 커다란 가치들을 어떻게 계량화 할 것이가?.. 어떠한 방법으로 측정할 것이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국가 또는 집단이 향후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대표적 접근이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평가할 때, 예전에 배재되었었던 환경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물이 얼마나 많은가? 공기가 얼마나 깨끗한가? 이런 요소들이 큰점수가 되어서 의사결정에 반영된다는 것이죠... 약간 동양사상과는 다르지만, 서양의 접근이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에는 인간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유전자 이론입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범죄자 또는 싸이코패스를 일으키는 유전형질 정해져 있다. 이러한 접근이 됩니다.... 눈에 안보이는 도덕을 유전자로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죠... 어떻게 결론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양의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가 데카르트, 칸트, 헤겔인 데... 실상 이들의 주장도 잘 파고들면 새로울 게 없습니다. 이황이나 이이 연구하다가 이들을 보면 과연 누가 수준이 높은지? 실제 유명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 노골적으로 불경, 우파니샤드, 도덕경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말이 나오죠. 그래도 변조라는 것도 능력이 없으면 못하는 거고 자기류라는 점에서 어느정도 인정은 합니다.
참 좋은 소식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류는 생각에 예속된 노예의 철학입니다. 생각을 뛰어 넘은 철학, 철학을 뛰어 넘은 참 철학을 기다립니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 혹은 천인합일 혹은 人乃天의 큰 카테고리가, 큰 철학이 현대세계와 역사를 풀어낼 수 있는 키(KEY)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정선생님의 큰 성취와 활약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경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도덕경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강하게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불경과 도덕경의 서양어 version이 있었느냐? 이것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는, 책이 없더라도, 그것을 전해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는 기록을 본적은 없습니다. 대신, 니체의 철학서에서는 불경과 도덕경보다 오래된 배화교의 창시자인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은 하나의 원류로부터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종교의 명칭은 하나의 표현방법이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것에 가장 큰 원류는 단군이 될 수 있음을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의 유목민적 근거, 스키타이의 주 활동지역, 고대삼국의 위치등으로 그 타당성에 많이 접근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