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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징기즈칸(成吉思汗, 1162년~1227년)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칸이며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땅을 많이 넓힌 군주로,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진, 성이 보르지긴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Borjigin Temüjin),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패아지근 철목진)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鐵人)이라는 뜻이며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투에서 쓰러뜨린 적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여러 가지로 볼 때 현대 국가인 몽골의 시조다.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이라는 사실상의 법률과 문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의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통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몽골인들도 자랑으로 여기는지 수도 울란바토르의 칭기즈 칸 광장과 제 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에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히틀러와 비슷한 잔인한 정복자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살기 위해 벌인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다 보니 태초의 의도와 달리 거물이 되어버린 양반이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유럽이 현대 세계를 만들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이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갈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은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중동이나 러시아처럼 철저히 유린당했던 나라는 싫어하는 편이고, 그루지야, 헝가리,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아낸 업적에 자긍심을 느끼고,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강하다. 의외로 동유럽에서도 이미지가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진 않다. 침략을 당하긴 했지만 러시아와 달리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막아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낸다는 말이 있다. 다만 터키는 중동 지방에서는 좀 독특하게도 무슬림의 원조인 아랍 계통이 아니라 유목민족인 튀르크이기 때문에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족과 통혼한 역사도 있고 해서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에 터키에는 텡기즈(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폴레옹 1세나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 3세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결국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학살하고 약탈을 한 인간들이며,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죄다 그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며 "칭기즈 칸이라고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볼 순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실제 칭기즈 칸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학살과 파괴를 너무 잘했을 뿐이지 다른 독재자/정복자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더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다는 서유럽 학자들도 많다.
칭호인 칭기즈 칸은 위대한 칸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 으로 불렸다고 한다. #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앙'에 가깝다.
'칭기스'(Чингис)는 몽골어로 '위대하다'를 뜻한다.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했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天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칭기즈칸의 부족인 몽골은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의 해체 이후 바이칼 호수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 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다. 칭기즈칸의 생애를 그린 몽골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비사》(원조비사)에 의하면,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와 그의 아내가 될 코아이 마랄이었다고 한다. 보르테 치노의 11대손인 도분 메르겐('명궁')은 알란 코아('미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벨구누테이(벨구누드 씨족의 조상)와 부구누테이(부구누드 씨족의 조상)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고, 도분의 사후, 알란 코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빛을 받아 남편없이 3명의 아들, 즉 부쿠 카타기(카타긴 씨족의 조상), 부카투 살지(살지오드 씨족의 조상), 보돈차르 문카그(보르지긴 씨족의 조상)를 낳았다. 칭기즈 칸의 가계인 보르지긴씨의 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문카그는 알란 코아가 낳은 아들들 중 막내였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을 형성했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7대손 카불 칸(1120년~1149년 재위, 카이두의 증손)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을 건설한 후, 대칸의 칭호를 획득했다. 카불 칸의 후계자는 그의 6촌인 암바가이 칸(1149~1156년 재위)이었다.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로 분화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카불 칸의 4남인 카마그 몽골 제3대 칸, 쿠툴라 칸(1156~1161년 재위)의 조카였다.
어린 소년시절
칭기즈칸은 오늘날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Хэнтий аймаг)에 흐르는 오논 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호엘룬은 콩기라트(온기라트, 옹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원래 메르키트족의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올쿠누드에서 메르키트로 떠나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서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했다.
이후 테무진이 9살 되던 해(1171)에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시라 케헤르('초원')의 변}. 그러자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져 있던 부족민들이 흩어지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를 독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적대하던 타타르를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은 되려 이를 악용해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그를 독살한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부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매정히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엘룬은 예수게이에게 시집간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의 아이일 수는 없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은 없는 시대라도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하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하게 된다. 따라서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임신기간이나 출생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일단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먼 변방으로 밀려나 씁쓸히 병사했다.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행방은 기록마다 다른데,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아버지 사후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손들인 키야트 주르킨 씨족, 암바가이 칸의 후손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으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아홉 명이 돼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고탄 씨족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더불어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까지 풀어버리는 짓을 벌였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아홉 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이복 형제였던 벡테르, 벨구테이가 테무진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같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그를 죽여버린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달다는 간청에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준다.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엘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며 욕을 들었다.(《몽골비사》 2권 76~78장)
테무진의 형제 살인을 두고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엘룬과 결혼해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유교 문화권과 달리 당시 몽골 지역 풍습상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남은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호엘룬과 벡테르가 결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며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엘룬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테무진은 중국의 노예로 잡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진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였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술두스 씨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의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에 성공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때 테무진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는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 라고 되어 있고,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는 자다란(자지라트) 씨족의 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진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진의 노예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 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진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난의 세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에 가족들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한 옹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데이 세첸의 딸이었던 보르테라는 여인과 재회하여 혼인했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를 맺은 적{카라 툰('검은 숲')의 맹약}이 있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출처: 《몽골비사》 2권 96절)
토오릴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었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테무진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말이 아홉 마리여서 메르키트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소치겔,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할 만큼 미약한 세력을 가졌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
테무진은 토오릴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다란 씨족의 수장 자무카 등의 도움을 받아 40,000명의 케레이트-자다란-키야트 연합군으로 메르키트를 보오라 초원(부쿠라 케헤르) 전투(1182년)에서 개발살내고,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 테무진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 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아야 했다. 다만 칭기즈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럼에도 주치의 출신 문제는 두고두고 후계 계승 문제에서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메르키트 콤플렉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의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세력 확장
메르키트족의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었기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 동안 자무카의 자다란 부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로 의형제 테무진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0,000명의 군사를 불러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르킨 씨족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신이 이들을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 없는 아를라트 보오르추와 노예 출신 우량카이 젤메뿐이었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 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는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언했다.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를 떠나는 와중에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다.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할까봐 황급히 떠났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부족이 아닌)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테무진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 의해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다(1189년).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또는 달란 발주트 전투)를 벌였다(1190년).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 친족으로 이루어진 11개 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4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케레이트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토오릴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1194년 테무진 칸은 타이치우드족의 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와 쿠이텐 들판에서 싸워 타르고타이를 격파했다(제1차 쿠이텐 전투). 이에 타이치우드 휘하 베수드 씨족의 지르고가타이도 도망갔다. 후신 보로클이 지르고가타이를 추격했는데 이때 보로클은 테무진 칸의 입술이 백색인 말을 타고 있었다. 도망치던 지르고가타이는 보로클이 탄 말의 경추골을 정확하게 쏘아 맞춰고 달아날 수 있었다. 후에 지르고가타이는 숲에 숨어있다가 결국 투항했는데 테무진 칸은 자신의 말의 경추골을 쏘아 맞춘 자라 하여 '제베'('화살촉')란 이름을 하사했다. 그때 옛 은인이었던 술두스 소르칸 시라의 아들 티라운도 함께 투항했다.
이후 오로오드족과 망고드족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오난(오논) 강 숲속에서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와는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씨족이 행패를 부리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 사차 베키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나지만 이후 앙금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의 황제 장종(1189~1208 재위)이 '왕경 승상', 즉 승상 완안량에게 명령하여 금나라를 배신한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토벌하게 했다. 완안량의 요청을 받아 테무진 칸은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1194년 겨울, 타타르족과의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자오드 코리')의 별 볼 일 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씨족도 델리운 볼닥 전투에서 이겨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고(1194년 겨울~1195년 봄),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는 그 후 추격하여 죽였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