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발가락이 닮았다.
지난 이야기는 곽금주교수의 “마음에 박힌 못 하나(1)”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한 두개 콤플렉스를 갖고 삽니다. 원인을 알고 대처하며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김동인선생님의 단편소설 제목인데 허락없이 무단으로 빌려 왔습니다.
일산에 홀로 사시던 어머님께서 교회친구들이 많이 살고 계시는 홍제동으로 집을 옮기셨다. 24평짜리 아파트이니 혼자 사시기에 적당한 크기였으나 옮기시기에는 짐이 너무 많아 사용하고 계시던 자개장롱, 책상, 식탁등 대부분을 버려야 했는데 아버님께서 보셨던 책들은 눈에 밟히는 것이 왠지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의 유품이라고 해봐야 돈이 되는 물건은 없고 낡은 책과 붓글씨를 쓸 때 사용되는 문방사우뿐이었으나 책의 분량이 너무 많았다. 근년에 발간된 책들은 버리고 색이 누렇게 변하고 묵은 먼지가 캐캐히 내려앉은 책들만 챙기기로 했다.
벽 하나를 내어 책장을 들였다. 4~5십년 지난 책들이 들어오기에는 책장이 너무 신식이었지만 헌책들은 새둥지를 틀었다. 선친은 신문기자, 주간국장(통속잡지라 일컷는 주간지 선데이서울을 만드는 곳이 주간국이다), 논설위원을 하시면서 많은 책들을 읽으셨고 또 많은 글들을 남기셨지만 정작 본인만을 위한 책은 단 한권뿐이다. 유일한 단행본 시집은 당시 영부인이셨던 육영수여사께서 돈 없는 문인들을 위해 책자발간을 도와주셨는데 그때 발간한 책이 유일하다. 당시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있었지만 시인이 흔치 않은 시기였기에 다른 시인들의 시집출간에 동참해서 책을 내셨다.
선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수필을 쓰고 있는 누이와 부지런히 글쓰기를 하는 누이에게 자극받아 글쓰기 연습을 하고 있는 나, 그림을 그리는 동생이 있어 언젠가는 가족 문집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원고들을 모으고, 동생은 표지디자인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누이의 아버님에 대한 추억담이 곁들여진다면 책이 한권 탄생할 것 같았다. 아직 글쓰기가 미숙한 나는 편집을 하고, 형은 문학 쪽과 거리가 있어 발간비를 찬조하면 유고집 하나쯤은 쉽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료를 모으기 시작 했으나 곧 난관에 부딪쳤다.
신문의 칼럼과 사설, 시와 각종 잡지에 글을 쓰셨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글을 수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한두 편 정도의 시가 검색될 뿐 정보추적이 어려워 유고집 발간계획을 잠정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새둥지를 튼 헌책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정리를 하다 보니 책과 같이 딸려온 누르스름한 봉투 안에서 40년이 지난 아버님의 육필 원고가 쏟아져 나왔다. 평소 정리하는데 재주가 있으셨던 선친은 70년대 초반에 작성한 내용들을 봉투에 담아 놓으신 것이다. 70년대 초반, 2~3년간의 글들밖에 스크랩되지 않았으나 색 바랜 누런 봉투는 나에게 보물 같은 꾸러미였다.
꼬부랑거리는 특유의 필체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체취가 흠뻑 느껴진다. 망쳐 구겨버린 원고지는 개구쟁이 4남매의 딱지 접기 재료였는데 어릴 적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원고지에 쓰인 글이라 더욱 감회가 새롭다. 아버님의 육필원고는 40년의 세월을 버티느라 누렇게 변한 원고지가 바스러질 정도여서 모두 비닐 코팅을 해서 보존 하기로 했다. 시간이 흐른 뒤 이 낡은 원고들을 아이들이 거추장스럽다고 처분할지는 모르지만 내 손으로 버리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린 원고들이다. 사남매를 키우시느라 밤을 하얗게 새워 가시며 해외 단행본 번역까지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버릴 수 없는 눈물 나는 원고들이기 때문이다. 작고하신지 13년이 되었지만 낡은 책과 육필원고를 정리하다보니 아버님께서 서재에 계신 듯한 착각이 든다.
평상시에 이상하게도 저에게는 잔소리를 한마디도 안하셔서 나는 주워온 자식인가 의심이 들 정도 였으나 피를 이어 받았는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음주습관과 낚시취미는 아버님을 빼 닮아 주워온 자식이 아니구나 하며 안도를 하곤 했다. 매운 국물 하나 있으면 밤새워 술을 마시는 모습도 선친을 닮았고, 아버님의 釣友 김시철詩人과 서기원小說家 께서는 제가 낚시하는 모습이 아버지와 판박이라고 하신다.
선친과 낚시를 가면 옆에 앉은 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충고를 하셨다. “얘야,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평생 마실 술의 양을 정해 놓으셨다. 젊었을 때 너무 마시면 나이 들어 마실 술이 없단다.” 한창 나이인 20대 때의 충고라 그때는 “에이 그런게 어디 있어요” 했지만 50중반에 들어서부터 주량이 예전같지 않다 보니 새삼 아버님의 충고가 이해된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술을 잘 먹어 버릇없는 남자 아이들을 술자리에서 보낸다는 큰딸아이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큰 아이도 임씨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듯 하다.
오늘은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꼬불꼬불하게 씌여진 육필원고를 정리하면서 아버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다. “둘째야, 글을 쓸 때는 말이다. 미사여구는 필요 없고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좋게 써야 하고 마음으로 읽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하게 연습을 해야 한다.”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궤변같겠지만, 아래의 시는 새로 발견한 아버님의 육필원고 중에서 발췌한 詩로 낚시 좋아하는 제가 주워온 자식이 아니라는 증표중의 하나이다.
休日 千里
새벽에 눈비비고
南行千里
잔잔한 湖水가에 앉으면
찌를 드리운
水草 사이로
아침이 오는
낚시꾼의 休日.
바구니 속의 도시락
아직도 따스한 커피
휴일의 小道具들이
맑은 바람과 푸른 하늘
湖水 위를 오가는 물새들과
하루의 平和를 演出하고나면
疲勞를 풀고
짐을 들고 일어서는
歸路 역시 千里.
소주 한잔에 잠이 든채
天安, 烏山, 平澤을 지나
기지개를 켜는
新葛 인터체인지 부근.
텁텁한 입에
담배를 피워 물면
車는 流星처럼 흘러
또하나 고개를 넘고 있다.
어둠속에 멀리 떠오르는
아, 서울의 불빛
하루의 安堵여
2014.10.06 기술개발실 임순형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