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는 이형상 제주목사가 재임할 당시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 간 걸쳐 순력(巡歷)하고 돌아와서 그간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으로, 채색화이자 기록화이다.
기록화는 특정한 사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그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한 그림을 말한다. 중앙에서는 도화서 화원(畵員)들이 의궤도를 비롯한 기록화를 담당하였다.『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어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교래대렵
1702년(숙종 28) 10월 11일 시행하였다. 교래에서 진상을 위한 산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다. 제주 지역의 경우 산짐승은 주로 노루·사슴·돼지·지달·오소리 등이 서식했고, 날짐승은 꿩·까마귀·솔개·참새 등은 있었으나 황새·까치 등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일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삼읍의 수령과 감목관(監牧官)이며,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마군(馬軍) 200명, 걸어서 짐승을 일정한 장소로 모는 보졸(步卒) 400여 명, 포수 120명이다. 사냥을 통해 얻은 물건은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궝 22수이다.
그림에 의하면 리명(里名)으로 여운영아리(如雲永我里)·구두리(九斗里)의 명칭이 보이며, 산악명으로 대녹산(大鹿山)·판매동산(板埋同山)·흑악(黑岳)·봉라비악(峯羅非岳) 등의 명칭이 보이고 있어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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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을 자세히 보면 기마궁사의 줌손에 들린 활의 현줄이 땅으로 향해 있는 모습임을 알 수있다. 바로 앞에는 사냥물인 노루가 함께 뛰어가고 있는 장면이다. 이처럼 고자눕기(고자채기)는 본능적인 감각에의해서 달리는 마상에서 정확하고 강하게 사냥물을 쓰러 트려야 했기에 기마사법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연궁중시의 깊은 뜻은 바로 고자눕기(고자채기)에 있는데 궁사가 이겨낼수 있는 세기의 활로 하루종일 쏘아도 힘들지 않을 정도의 연한 활로 강하게 보내는 기교술이 바로 고자눕기 또는 고자채기의 기술이라 할 수있다.18세기초 북관유적도첩이 그려진 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그려진 탐라순력도의 교래대렵속 기마궁사의 발시 후 고자눕기(고자채기)가 어떤 이유로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자채기(고자눕기)는 기마궁술에서 비롯된 기교술로써 연궁중시로 강하게 보내는 비결이라 할 것이다.
이를 누군가는 철전사법이라 하는데 철전사법과는 전혀 다른 궁체의 사법이라 할 것이다.
오늘날 앞손이 고정불변의 막줌으로 변한 계기를 추론해 보자면 1894년 갑오개혁의 큰 변혁속에서 양반들의 등용문이던 무과시험이 폐지가 되면서 한량들의 요람이랄수 있는 관설사정들이 페정이되고 점차 궁술문화가 사라져가던 시절,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조선의 마지막임금 고종(광무2년)황제께서 1898년 어명을 내려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이에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을 만들어 민간에 개방하니 이곳이 바로,국궁1번지 황학정으로써 궁술 종가로써의 역활을 해 왔던 것이다.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경희궁 내 건물들이 일반에게 불하될 때 이를 받아 인왕산 자락의 사직공원 북쪽인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 위치에 이건하였다. 황학정이 있는 사직동의 등과정 자리는 구한말까지 궁술 연습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1929년 책 "조선의 궁술"이 나오고 전통궁술 문화가 어느 정도 부흥의 계기가 되었으나 120보 유엽전 사법만 남고 기마궁술을 비롯한 다양한 사거리에 따른 다양한 활쏘기는 부활하지 못한채 사라져 감으로써 기마궁술을 비롯한 본능적 감각에 의한 실전사법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고 서서히 기억속으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하지만 소수의 궁사들을 통해서 희미하게나마 그 모습을 유지해 왔으나 해방이되고 산업화를 통해서 경제 발전이되고 다양한 레져문화가 들어오며 궁술문화에 대한 관심도 점차 작아지며 민중들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궁체상도 사라지고 오로지 시수만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활을 쏘는 시대가 되었으니 전통궁체는 더 이상 배움의 대상이 되질못했다.오로지 승단하여 명궁타이틀을 따야만 활터에서 인정받고 어깨에 힘을 주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올해에도 우리 활쏘기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원해 마지않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요^^;
말 대가리 노루 대가리
말대가리 노루대가리?
뭐가 아니라는건가? 그림 활로 노루 대가리 걸어 당기는 그림이라는건가?
고자 찌르기 혹은 고자 훌치기?
깍지손 그림이 없는것으로 볼 때,
군용활의 칼고자 끝으로 노루(혹은 사슴)목 찌르기
혹은 활을 올가미 삼아 목 감아 훌치기 ?
활을 올가미로 쓴다고?
그림을보면 진짜 활을 노루목에 걸어치는 동작 처럼 보이기도하네요
활로 왜 노루목을 홀치냐구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구요
사슴은 좌,우로 뛰면 달아나기 때문에 고리나 찌르기는 상식에 없는 동작입니다.
그림이 다소 그렇게 보이다 해도 그렇치 무슨 훌치기등등 어이가 없네요.
사냥시 말을타고 활을 쏘면서 잡는 동작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