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비백산(魂飛魄散)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진다는 뜻으로,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름을 이르는 말이다.
魂 : 넋 혼(鬼/3)
飛 : 날 비(飛/0)
魄 : 넋 백(鬼/4)
散 : 흩어질 산(攵/8)
(유의어)
백산(魄散)
혼불부신(魂不附身)
혼불부체(魂不附體)
사람이 기운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기운 중에 양(陽)의 기운을 혼(魂)이라 하고 음(陰)의 기운을 백(魄)이라 한다. 혼은 사람의 정신을 주관하고 백은 육체를 주관한다. 따라서 육체적인 모든 감각은 백의 작용이라 한다.
사람이 힘 있고 분별 있게 행동을 하려면 혼의 기운이 있어야 한다. 즉 양의 기운이 떠야 기운차게 움직이고 정신을 차리는 거다. 양의 기운은 밖으로 발산하려는 경향이 있고 음의 기운은 안으로 모아들려는 성질이 있다.
양의 기운이 약하면 움추려들고 몸과 마음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 정신이 흐리멍텅하고 제 정신이 아니면 혼을 내야 한다. 혼이 나야 정신이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혼을 내다'는 우리말이 얼마나 이치에 딱 들어맞는지 알 수 있다.
혼은 양이고 백은 음이다. 신(神)은 기를 먹고 형(形)은 음식을 먹으므로 기가 맑으면 신이 맑고 형이 지나치게 수고로우면 기가 혼탁해진다.
기를 먹는 사람은 천 명, 백 명 모두 죽지 않고 몸이 하늘을 날게 된다. 곡식을 먹는 사람은 천 명, 백 명 모두 죽어서 형체가 땅으로 돌아가게 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이 하늘로 날아가고 백이 황천에 떨어져서 물과 불로 나뉘어 흩어져서 각각의 본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人之死也 魂飛於天, 魄落於泉 水火分散 各歸本源).
살아 있으면 한 몸이 되고 죽으면 서로를 잃어버려 날아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각각 다른 것은 스스로 그렇게 부여받은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하자면 불로 나무를 태우면 연기는 위로 올라가고 재는 아래에 남는 것이 또한 스스로 그러한 이치이다.
신명(神明)은 태어나고 변화하는 근본이 되고 정기는 만물의 본체이니 그 형체를 온전하게 하면 살고 그 정기를 기르면 생명이 오랫동안 보존된다.
이는 구선의 '활인심법'에 있는 내용으로 '동의보감'에 인용된 것이다.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백은 물과 불이 되어 흩어진다는 뜻이다.
지금은 본래의 뜻보다는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비유한다. 혼비백산할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혼(魂), 백(魄)은 '넋'이라는 뜻이다.
⏹ 혼비백산(魂飛魄散)
혼(魂)과 백(魄)은 우리말로 새기면 '넋'이 된다.
옛말의 정신에서 精(정)에는 '쌀 미(米)' 자가 들어 있다. 곡식을 먹는다는 것은 땅속의 양분을 빨아들인 땅의 기운을 먹는다는 의미이다. 땅의 기운이 내 육체를 기른다. 옛사람들은 이런 쌀의 생명력을 정(精)이라 불렀다. 그래서 精이 들어가는 말은 모두 이런 생명력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
음(陰)과 양(陽)으로 나뉜 기가 합하고 썩기면서 만물이 생긴다. 음을 따로 귀(鬼)라고 하고 양을 신(神)이라고 한다. 음양과 귀신은 같은 말이다. 음양보다 귀신이 더 신령스러울 뿐이다.
만물 가운데는 인간도 포함된다. 인간도 음기와 양기가 절묘하게 합해서 생긴 하나의 기(氣)이다. 그런데 인간의 양기는 따로 혼(魂)이라고 부르고, 음기는 백(魄)이라고 부른다.
음양만으로 충분한데 왜 인간을 귀신이나 혼백(魂魄)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만물로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이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 양기와 음기가
합하여 삶을 산다. 그러다 죽으면 합해 있던 양기와 음기가 다시 나뉜다. 나뉘어서 어디로 갈까? 천지라는 대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돌아간다'는 것은 이름도 모를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 있어야 할 그곳으로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속에는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서 편히 쉰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귀향의 뜻을 살펴보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인간은 기(氣)로 이루어진 다른 생물이나 사물과는 달리,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독특한 존재이다. 인간은 죽은 뒤에야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아 있으면서 그러한 사실을 안다.
이것은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경험으로 안다면 죽어 본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죽음과 동시에 '아는 힘'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는 할 수 없다. 혹 우리 주변에는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으면 음양이 분리되는 것처럼, 혼(魂)과 백(魄)도 떨어져서 제 자리인 대자연의 음양으로 돌아간다. 안타깝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산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다. 죽음은 주변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은 몸과 넋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영혼이라는 말은 본래 혼백(魂魄)에서 가져와 만든 말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영혼을 기를 가지고 말한다면 눈에 보이는 육체는 '탁하고 무거운' 것에 속한다. 그러니까 陰(음)이면서 魄(백)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맑고 가벼운' 것에 속한다. 이는 陽(양)이면서 魂(혼)을 말한다.
살아서 혼백(魂魄)은 늘 붙어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 죽는 과정을 거치면서 삶을 살아간다. 늙는 것은 육체라는 魄(백)이 조금씩 노쇠하여
스러지는 것이다. 그에 따라 魂(혼)도 늙고 약해진다.
예를 들어 생각을 일으키는 혼(魂)은 뇌라는 백(魄)과 떨어질 수 없다. 뇌가 늙으면 생각도 깜빡깜빡하고, 잘못해서 병이 들면 '머리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처럼 기억을 못하게 된다. 이는 백(魄)과 혼(魂)이 하나로 합해 있다는 것을 잘 알려준다.
그래서 건전한 정신(마음, 영혼)과 건강한 육체는 하나이다. 이렇게 살다가 결국 백(魄)이 죽으면 혼(魂)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백(魄)에 깃들 수가 없다. 둘이 이별을 하는 것이다. 바로 죽음이다. 혼(魂)과 백(魄)이 자연의 흐름에 따라 평온하게 분리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교통사고처럼 갑작스런 죽음도
있다. 이 경우 혼(魂)은 펄펄하게 살아 있지만 백(魄)이 갑자기 무너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혼(魂)은 당황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하늘로 떠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잃어버린 백(魄)을 찾아 날뛰면 이것은 정상적인 죽음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을 액귀(厄鬼)라고 부른다. 액귀는 원한에 차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백(魄)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이 된다. 육체가 없는 영혼, 곧 유령이 되어 헤매게 된다.
이 유령들은 자신의 백(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이미 백(魄)은 없으므로 혹시라도 그 원한이 크면 다른 백(魄)에 빙의하기도 한다. 유령에 들린 것이다. 귀신에 쓰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유령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몸이 아프다거나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헛소리를 하는 등 실성한 사람이 된다. 당연한 것이다.
백(魄)은 하나인데 혼(魂)이 둘이 있으니, 명령 계통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산 사람에게 들러붙은 유령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가 있었다.
혼(魂)과 백(魄)을 말하는 동양에서는 백(魄)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면 혼(魂)은 천당이나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지 대자연으로 돌아간다고 본다.
돌아갈 때 살아서 얻은 기억은 모두 이곳에 두고 간다. 육체와 더불어 정신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음양을 말하는 옛 우리의 전통은 어쩌면 냉정하다.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니까.
백(魄)은 썩어서 땅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하늘로 흩어진다. 혼비백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백(魄)과 달리 혼(魂)은 좀 영험하지 않을까? 손톱보다는 생각이 더 영험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혼(魂)은 영험하기 때문에 땅으로 완만하게 돌아가는 백(魄)과는 달리 하늘로 흩어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하지만 결국은 흩어진다. 혼백불멸이나 영혼불멸이 아니다.
그래서 혼(魂)이 잠시 깃들 수 있는 신주를 모신다. 우리는 '신주단지 모신다'는 말을 한다. 신주는 영험한 혼(魂)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략 120년 정도 지속된다고 본다. 120년 동안 제사를 받들면 행복하게 흩어진다. 30년이 1대라고 하면 4대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 전통에서 제사는 사대(四代) 봉사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동양 사람들은 자기 영혼의 지속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죽어서 저 세상에 가거나 영혼이 우주에 둥둥 떠다니다 다른 육체를 통해 삶을 이어간다면 그것은 낳고 죽는 생명의 사실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씨앗은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이 펴 열매를 맺고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은
아니다. 다시 열매 속의 씨앗이 삶을 이어주고 있으니까. 작년의 그 꽃과
올해의 꽃은 다르지만, 꽃을 꽃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이다. 이것이 혼백(魂魄)이다.
꽃은 물론이고 인간은 혼백(魂魄)을 자손에게 물려주면서 자신의 삶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빈자리가 생기고, 새로운 생명이 다시 이 세상에 가득 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죽은 조상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혼백(魂魄)이 오는 것이다. 그 혼백(魂魄)은 조상의 혼백(魂魄)이면서 그 혼백(魂魄)을 물려받은 자손의 혼백(魂魄)과 같은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공경을 다하는 것은 자기 혼백(魂魄)에 공경을 다하는 일이다.
그럼 제사는 내안에 살아 있는 혼백(魂魄)을 공경하는 것이 본래 뜻 아닐까?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곧 내 자신의 혼백(魂魄)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혼백(魂魄), 곧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상은 내 몸 안에 살아 있다. 나는 조상처럼 내 아들과 딸, 후손들에게 혼백(魂魄)을 물려준다. 죽어 없어지는 것은 내가 얻고 가꾸어 왔던 모든 기억과 경험들이다.
혼백(魂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를 버림으로써 삶에 집착하지 않고 이 세상에 빈자리를 내주고, 그 빈자리에서는 새 생명들이 자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오랫동안 살고 싶습니까? 천당에 가고 싶습니까? 다른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까? 혼백(魂魄)을 말하는 옛 지혜는 삶과 죽음을 둘로 보지 않는다. 욕되게 사는 삶은 죽어서 끝나지 않는다. 대를 이어가니까.
선한 삶의 결과는 나만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혼백(魂魄)을 이어받은 자손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빈자리를 두어 새로운 생명들이 자랄 수 있도록 깨끗하게 비우고 가야 한다. 이 자리에서 내가 이제껏 살아온 것도 조상들이 자리를 비워준 덕분이다.
새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 덕에 잘 살았으니까 나도 새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순리 아닌가? 이 우주 어디에 공짜가 있을까? 하나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하나를 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