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바람의 말
김 선 우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유리잔 이전이었던 세계, 바람이 나를 낳고
달빛이 이마를 쓸어주던 단 한줌 모래이던 때
그때 아직 그리움은 배냇누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내게로 온 그녀는
날개 상한 벌을 백일홍 붉은 꽃잎 속에 넣어주던
마음이 다치기 이전의 그녀였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었다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강물을 길어왔고
입을 것이 없었으므로 맨몸인 우리는
상처에 꽃잎을 달아줄 수 있었다 한줌 모래이던
사금파리 별을 잉태했던 우리는,
날이 밝기 전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은 지워져
달빛도 백일홍 꽃잎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찾아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몇마디 욕지거릴 씹어뱉고 독주를 들이키더니
화장을 고치고 나가버렷다
내 가슴엔 선명한 입술자국,
붉은 씨방을 열고 백일홍 꽃잎 떨어져내렸다
-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비 -
〈김선우(金宣佑) 시인〉
1970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났다.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녹턴', '내 따스한 유령들',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 '캔들 플라워', '물의 연인들', '발원: 요석 그리고 원효', 청소년소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청소년시집 '댄스, 푸른푸른',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 '김선우의 사물들',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부상당한 천사에게', '사랑, 어쩌면 그게 전부' 등을 펴냈고, 그외 다수의 시해설서가 있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고정희상, 발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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