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생 기록으로 본 환단고기, 위서(僞書)일까?
입력 2022-03-22 09:10:56
▲ 성헌식 역사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조선인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고 조작된 일제식민사학을 그대로 계승한 강단사학계는 그들의 역사이론과 전혀 다른 내용의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이유는 20세기 초에 나온 책인지라 사료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은데다가 역사서로 보기에는 논리가 약하고 비합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환단고기’ 추종자들을 사이비(似而非) 역사학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반면 재야사학계에서는 ‘환단고기’를 민족의 성서(聖書)로 신봉하고 있다. 과연 어느 사학이 사이비인지 ‘연남생’의 기록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책인 ‘태백일사’고구리국 본기에는 연남생의 아버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 대해 “조대기(朝代記)에서 말하길 개소문은 일명 개금(盖金)이라고 한다. 성은 연씨이고, 그의 선조는 봉성(鳳城)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祚)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었는데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弘武) 14년(603) 5월 10일 태어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기록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찾아보니 “개소문(혹은 개금)은 성이 연씨다. 그는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호방했다. 부친 동부(혹은 서부)대인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마땅히 지위를 이어받아야 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해 미워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상한 기록뿐이었다.
▲ 태백일사에 기록된 연남생의 조상명과 정확히 일치하는 묘지명의 조상명
그런데 1921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된 ‘천남생묘지명’에 “성씨는 천(泉)이며 이름은 남생(男生)이고 자는 원덕(元德)으로 요동군 평양성 출신이다. 증조부는 자유(子遊)이고 조부는 태조(太祚)로 다 막리지를 역임했고 아버지 개금(개소문)은 태대대로였는데, 조부와 부친이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쏘아 군권을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했다”고 새겨져 있어 위 ‘태백일사’의 조상명과 정확히 일치했다.
또한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의 묘지명에는 “군의 이름은 헌성이며 자도 헌성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 사람이다. (중략) 증조부 대조(大祚)는 본국에서 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병권을 장악해 기세가 삼한을 제압하고 명성은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조부인 개금(개소문)은 본국에서 태대대로에 임용되고 병권을 장악했으며, 아버지가 이어주고 아들이 계승해 권력을 잡고 총애 받음이 두드러졌다.
“아버지 남생(男生)은 본국에서 태대막리지에 임용되었으며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귀속하니 당나라는 특진에 임명하고 사지절요동대도독(使持節遼東大都督)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을 겸하게 했다가 이내 장내공봉(仗內供奉)·상주국(上柱國)·변국공(卞國公)에 임명하고 병주(幷州)·익주(益州) 2주(州) 대도독에 추증하니 시호는 양(襄)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렇듯 ‘태백일사’에 기록된 조상들의 이름이 천남생묘지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책을 위서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634년(영류왕 17년) 연개소문의 장자로 태어난 남생은 32세에 부친의 후광으로 태대막리지가 되었다가 이듬해 정변을 일으킨 남건·남산 두 동생들에게 쫓겨 갈 곳이 없어지자 이민족의 나라인 당나라로 투항해버렸다. 당 고조 이연(李淵)을 피휘(避諱)하기 위해 연(淵)씨에서 의미가 비슷한 천(泉)씨로 바꿔야했다.
▲SBS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당군의 선봉에서 조국 고구리를 멸망시킨 연남생
668년 35세에 당나라 군대의 선봉에 서서 천하의 대제국인 조국 고구리를 멸망시켰다. 고구리군의 작전과 산천의 지형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데다가 그와 내통한 간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 후 식읍 3천호와 묘비명에 언급된 벼슬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679년 1월에 병을 얻어 46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아! 고작 10여년을 더 살려고 조국을 멸망시키는 민족반역행위를 했단 말인가!
당나라 조정에서는 사지절대도독, 병(幷)·분(汾)·기(箕)·남(嵐)의 4주제군사(四州諸軍事)와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했으며, 비단 700단과 미속(米粟) 700석을 주었고 장례물품은 모두 관급으로 했으며, 군악대를 묘소까지 보내주었다.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발인 날 5품 이상 관리는 그 집으로 가도록해 애송(哀送)의 성대함이 고금에 다시 없었다고 한다.
만약 두 아우와의 권력싸움에서 패한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조용히 산 속으로 잠적했더라면 아마도 고구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어 빼앗긴 고구려에서의 자기 위치를 되찾으려했던 연남생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다 아니할 수 없다.
배달국과 조선과 북부여의 4천년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한 대제국 고구리의 멸망이었기에 우리민족에게는 그 슬픔과 아쉬움이 더 컸던 것이고 그러기에 그런 고구리를 멸망시킨 남생의 죄악 역시 누구보다 더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우리 역사상 가장 악질 매국노인 동시에 민족반역자로 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