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 단위의 세계
아파트 34평, 금 한돈 왜 못쓰나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세금을 지금처럼 돈으로만 내지 않고
곡식, 옷감, 각 지방의 특산물로 냈다.
탐욕스런 관리들은 도량형(度量衡)을 속여
불법으로 재산을 모았다.
백성들에게는 엉터리 측정기구를 사용해
세금을 많이 거두고 나라에는 정량만 바치는 식이었다.
관리들이 세금을 걷는데 쓰는
자나 되가 국가 표준에 맞는지를 알아보는 도구가
바로 유척이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은
길이(度·도), 부피(量·량), 무게(衡·형),
즉 도량형의 기준을 통일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그래야 공정하게 세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가 6500km나 되는
만리장성을 건설하라고 지시했던 폭군 진시황이 남긴 최대 업적은 도량형을 척관법(尺貫法)으로 통일한 일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다.
척관법은 자나 척(길이), 돈, 근, 관(무게), 되(부피), 평(면적)을 쓰는 단위체계다.
고대 중국문명의 영향을 받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쓰였으며
한국에서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돼왔다.
최근 산업자원부(이하 산자부)는 2007년 7월부터 평, 돈, 근 같은 비(非)법정단위를 쓰면 단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파트 같은 건물이나 토지의 넓이를 표시할 때
평 대신 제곱미터(m2)를 쓰고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 육류, 과일, 곡물의 무게는
돈이나 근 대신
그램(g)이나 킬로그램(kg)을 써야 한다.
산자부는 내년 7월부터 계약서나 광고,
상품에 공식 법정단위 대신
평이나 근을 사용하는 업소나 기업에 50만원의 과태료를 물리기로 했다.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고 있는 단위를 왜 못 쓰게 만들어
혼란스럽게 하는 걸까.
변치 않는 1m를 찾아
요즘에는 국가에서 걷는 세금이 도량형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대신 국가간 무역이나 국내 상거래에서
단위를 통일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각돼 왔다.
무역이나 상거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거래하는 물품의 크기나 양에 대한 인식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자(척), 평, 근, 돈이 중심인 척관법을, 영국이나 미국은 인치, 야드, 파운드가 중심인 야드파운드법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미터, 그램이 중심인 미터법을 사용해왔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은 프랑스에 공산품을 수출할 때
미터와 그램으로 표시해야 하는 반면,
프랑스는 영국에 포도주를 팔기 위해 야드파운드법을 써야 했다. 이런 불편을 없애기 위해
1875년 국제적으로 미터협약이 체결됐고,
미터법이 세계 상거래의 기본단위로 등장했다.
과학자들은 세계 모든 나라가 함께 사용할
보편적인 단위를 찾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미터법이다.
원래 길이의 기본 단위로 2가지가 제안됐다.
하나는 초 단위로 흔들리는 진자의 길이를,
다른 하나는 지구자오선 일부분의 길이를 사용하자는 제안이었다. 진자의 길이는 지구상의 위치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자오선 길이의 1000만분의 1로
1m가 정해졌다.
1889년 백금과 이리듐의 합금으로 제작한 1m
길이표준인 미터원기가 등장해 1960년대까지 쓰였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표준품질팀 최종오 박사는 “지구 크기가 변하고 미터원기도 변할 수 있어 1983년 변치 않는 빛의 속력(2억9979만2458m/s)을 이용해 1m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1m는 빛이 진공에서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경로의 길이로 정의돼 있다.
미터법에는 변치 않는 1m를 찾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숨어 있는 셈이다.
1근, 품목 따라 달라요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3월 제1호 법률로 도량형법을 공포해 미터법을 척관법과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
그뒤 1961년 ‘계량법’을 제정해 국제단위계(SI, 미터법)를 법정단위로 채택하고 평을 제외한 재래단위(척관법) 사용을 금지했다.
당시 토지나 건물의 넓이가 평으로 기재돼 있던 토지대장과 등기부등본은 20여년의 작업 끝에 제곱미터(m2) 단위로 바뀌었다.
1983년 정부는 평 단위까지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동안 학교에서는 미터법을 교육하고 모든 과학기술 분야의 측정에서 미터법을 사용해왔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아직까지 평, 돈, 근이 판을 치고 있다.
1960년대 이래 비법정단위를 쓴다고 처벌받은 사례가 없어서인지 계량에 관한 법은 ‘찬밥’ 신세인 것이다.
지난 6월 1일부터 15일간 산자부가 7개 대도시에서 조사한 결과 부동산중개업체의 88%가 평을,
귀금속판매업체의 71%가 돈을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중·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 141종을 조사한 결과에서는 비법정단위를 사용하거나 표기를 잘못한 사례가 2478건에 달했다.
특히 비법정단위는 지역이나 품목에 따라 기준이 달라 소비자의 혼란이 크다.
논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1마지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일부 경기주민은 150평(495m2)이라고 하지만,
충청지역에선 200평(660m2), 강원지역에서는 300평(990m2)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 1평은 몇 m2일까. 토지는 3.3m2이지만 유리는 0.09m2이다.
1근도 품목에 따라 다르다.
소고기는 600g, 과일은 400g, 야채는 375g, 과자는 150g이다.
인삼은 300~600g을 1근이라고 하고,
음식점에서 고기를 주문할 때는
100~300g을 1인분이라고 부른다.
불확실한 1인분 대신 100g을 기준으로
가격을 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평은 6진법을 근거로 한 단위다.
과거엔 척(30.303cm)으로 표시된 자로
평(6척×6척=1평)을 측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잴 수 있는 도구 자체가 없다.
현재 토지를 측량하고 아파트를 설계한 뒤 건축할 때는
미터법을 사용하며
건물을 매매할 때는 m2로 측정한 값을 평으로 다시 환산한다.
평을 쓰지 않는다면 불필요한 재환산을 피할 수 있다.
또 금괴는 kg 단위로 사오면서 금 장신구를 거래할 때는
돈(1돈=3.75g)으로 나누는 식도 마찬가지 예다.
정부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비법정단위인 평이나 돈을 얼마나 빨리 근절시키느냐에 제도 정착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사실 건설업자들이 면적을 평으로 표기하면서 누려온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법정단위 사용에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 거래면적이 공급자가 제시한 평수보다 적어
주택 구입자가 손실을 입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산자부 표준품질팀 김홍민 사무관은
“아파트의 경우 32평이든 34평이든 등기부등본엔
실제 전용면적이 84.9m2(25.7평)로 올라가 있다”며
“건설업체에서는 놀이터, 주차장 같은 공용면적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당연히 34평의 전용면적이 32평보다 크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아파트의 실제 전용면적이 25.7평이라고 하지만 m2로 엄밀히 재보면 25.6평에 불과하기도 하고,
20평 아파트가 보통 등기부등본에는 66m2이 아니라 65.5m2로 표기돼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면적을 평이 아니라 m2로 표시해야 소비자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돈은 어떨까. 금 1돈이 3.75g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금은방에서 쓰는 저울은 대부분 소수점 첫째자리나 둘째자리까지만 표시할 수 있어 문제다.
1.875g인 반돈은 정확히 잴 수 없다는 얘기다.
김 사무관은 “2005년 금 장신구 소비를 기준으로 할 때 0.005g씩 잴 수 없어 소비자가 본 손실은 30여억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돈 단위를 쓰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소비자가 손해를 많이 입은 셈이다. 정부에서는 금을 2g, 4g, 6g, 8g, 10g 식의 짝수 g단위로 거래하도록 유도하고 현재 g과 돈 단위로 함께 고시하던
금가격도 g 단위로만 알릴 계획이다.
1999년 9월 미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Mars Climate Orbiter)이 286일 우주여행을 마치고
화성 궤도에 진입할 때 사고가 발생했다.
1억2500만달러짜리 탐사선의 사고 원인은 어이없게도
단위 문제였다.
제작을 담당한 록히드마틴이 야드파운드법으로
탐사선의 제원을 작성한 반면,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는 이를 미터법 단위로 착각했다.
NASA가 탐사선의 추진력을 킬로그램이 아닌
파운드로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탐사선은 화성에서
예정보다 100km 아래인 60km 지점의 낮은 궤도에 진입했다.
결국 화성 탐사선은 대기와 마찰을 일으켜 파괴되고 말았다.
미국과 캐나다 국경서 사고 많은 이유
당시 미국 계량협회 로렐 영 회장은 “미터법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나라에 비해 미국은 답답한 위치에 있다”며
“정교함이 중요한 과학에서만이라도 미터법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국제단위계(미터법) 사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후진국이다.
현재 연방정부는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개별기업은 여전히
야드파운드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식료품에 파운드와 킬로그램 단위를 함께 표시하고
자동차 속도계에는 km/h와 mile(마일)/h를 함께 나타내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지대에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도 자동차 속도의 단위 문제 때문이다.
제한속도가 마일로 표시돼 있는 미국 도로를 달리던 운전자가
킬로미터를 쓰는 캐나다 도로에 들어서면서 무심코 과속을 하다가 사고를 낸다는 것이다.
미터법과 야드파운드법의 단위를 혼동하는 일은 항공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중국 민항총국(CAAC)은 1999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생한 대한항공 화물기 추락사고의 원인이 조종사가
고도 1500m를 1500피트(490m)로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은 진시황 이후 오랫동안 척관단위를 써오다가 1985년 국제단위계를 도입해 현재 성공적인 정착단계에 들어선 상태다.
과일이나 국수도 저울에 달아 g단위로 판다.
일본은 1976년 토지와 건물을 거래할 때 평 대신 m2를 사용하도록 했다.
비법정단위를 쓰다가 적발되면 벌금 50만엔(약 400만원)을 낸다고 한다. 유럽연합(EU)은 그동안 야드파운드법을 미터법과 함께 표시하다가 2010년부터 모든 상품에 미터법만 쓰기로 결정했다.
산자부 자료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약 800조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계량에 의한 거래인데,
여기서 1%의 오차만 발생해도
약 2조7000억원의 소비자 손실이 일어날 수 있다.
전통 단위 vs 인간적 1m
전통 단위를 왜 없애려 하느냐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평이나 돈은 엄밀하게 말하면
전통 단위가 아니라 1900년대 초에 도입된 일본식 단위다.
1905년 대한제국이 도량형법을 공포할 때 1척을 30.303cm라고 정했는데, 30.303cm는 일본 곡척(曲尺)의 기준이었다.
1909년엔 일본식 돈과 관 단위를 들여왔다.
사실 돈은 원래 금, 은, 보석에 쓰는 단위가 아니었다.
김 사무관은 “돈은 일본의 진주양식업자들이 쓰던 단위”라고 말했다. 이들이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금은방을 운영하면서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척관단위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거래 단위를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다.
대한제국이 도량형에서조차 일본에 예속되면서
일본이 우리 경제를 수탈하는 길을 열어준 사건의 잔재인 셈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척관법의 원조인 중국과 우리에게 평이나 돈 단위를 정해준 일본에서는 더 이상 척관단위를 쓰지 않는다.
사실 평이나 돈보다
미터나 그램으로 표기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예를 들어 아파트 면적을 30평보다 100m2라고 하면
가로 10m에 세로 10m 정도의 넓이라고 느낄 수 있고,
여의도 면적도 260만평보다 8.4km2(가로 4km×세로 2.1km)로
따지면 대략 짐작이 간다.
전국 국유지 면적은 69억평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인지 알기 힘들지만,
서울에서 전주 정도까지 거리(230km)에 100km를 곱한 넓이라고 생각하면 크기의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최종오 박사는 “평수로도 크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사실 6척이 아니라 1.8m나 30cm를 기준으로
그 크기를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1평은 6척×6척이라고 하지만 1.8m×1.8m로 크기를 알고
2평은 6척×12척, 즉 1.8m×3.6m로 인식하는 식이다.
그렇다면 2.5평은? 가로와 세로를 금방 척으로 따지기 힘들고
m2로 면적을 환산한 뒤에야 크기에 대한 느낌이 생긴다.
1평은 키가 1.8m인 사람이 누울 만한 넓이라고 하지만
1m도 인간 냄새가 묻어나는 단위다.
나무에 매달린 과일을 따는데 씀 직한 막대기의 적당한 길이가 1m고, 무심코 물건을 쌓아도 1m를 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꼭 껴안았을 때 생기는 공간의 둘레도 약 1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