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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징기즈칸(成吉思汗, 1162년~1227년)
타타르 정벌전 이후 1195년 케레이트의 옹 칸은 나이만의 이난차 빌게 칸에게로 도망쳤던 동생 에르케 카라의 공격을 받아 패전하고 서요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요에서도 쫓겨난 옹 칸은 낙타 피를 마시며 겨우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런 그를 테무진 칸은 맞아들이고, 다시 한번 의부로 삼으며 케레이트의 수복을 약속했다. 1196년 테무진 칸은 곧장 케레이트의 에르케 카라를 공격하여 카라 툰('검은 숲')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옹 칸을 복위시켰다.
이후 테무진은 1197년 가을 메르키트족의 톡토아 베키를 공격하여 모나차 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보내며 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해 부쿠라 케헤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동나이만의 타이 부카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 형제를 동시에 공격했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했다. 켐 켐치우트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을 파견했지만 테무진의 전초군대에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혔다.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진 칸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과 대치했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이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했다.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로 도주했다. 다음 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로 철수했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 먼저 옹 칸을 뒤쫒아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빌카과 자카 감부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가축 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벌당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케레이트가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로 삼은 테무진)에게 4마리 준마를 청하노라"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했고, '테무진'도 이에 응해 4명의 장수, 즉 아를라트 보오르추, 잘라이르 무칼리, 후신 보로클, 술두스 티라운을 보냈다. 옹 칸은 홀랄하 산 전투에서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일카 셍굼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위기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승리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바아린 씨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를 공격했다.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를 오논(오난) 강 전투에서 격파했다(1200년 초). 이로써 카마그 몽골 울루스 내에서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과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던 암바가이 칸의 후예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은 큰 타격을 받고 쇠락하게 되었다.
한편 타이치우드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긴 씨족과 살지오드 씨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옹기라트)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알쿠이 볼락('샘')에서 서약하고 연합군을 결성했다. 테무진은 쿵크라트 사람 데이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노르, '호수') 전투(1200년)에서 패퇴시켰다.
1200년에는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킴으로써 테무진 칸은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1201년 옹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두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오드 등의 씨족들이 켐 강에서 회합하고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했다. 구르 칸 자무카는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공격해왔으나 이 첩보를 들은 테무진은 다시 옹 칸과 연합하여 이디 코르칸 전투에서 자무카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자무카는 도망갔고, 옹기라트족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 강의 지류인 실루겔지트 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했다(실루겔지트 전투).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했다.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알탄(카마그 몽골 제3대 칸 쿠툴라의 아들)과 쿠차르(테무진 칸의 사촌 형제로 네쿤 타이시의 아들)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리타이 옷치긴이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하였다.
곧이어 1202년 가을에 테무진 칸에게 박살났던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위시한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살지오드, 오이라트, 두르벤, 카타긴 등이 연합하여 테무진과 옹 칸을 섬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테무진과 옹 칸은 연합하여 금나라가 세운 알란 요새에 들어갔다. 겨울에 알란 요새에서 출격한 테무진은 쿠이텐 들판으로 향했고, 옹 칸은 자무카를 견제하기 위해 출격했다. 부이룩 칸은 무당에게 바람을 부르라고 명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반대로 불어 눈바람에 반 테무진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다. 테무진군은 이틈을 타서 돌격했고 연합군을 대파했다. 한편 옹 칸과 대치중이던 자무카는 퇴각하여 인근의 부족을 약탈했다.
그러나 제2차 쿠이텐 전투(1202년)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의 족장 앙쿠 후쿠추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우량카이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타이치우드족의 앙쿠 후쿠추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통일 전쟁
한편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차오르 베키, 자신의 딸 코진 베키와 옹 칸의 손자이자 셍굼의 아들인 투스 부카(토사카)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이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 결국 옹 칸과 테무진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 테무진을 급습하였다(1203년). 옹 칸 연합은 칼라 칼지드 사막(칼라진 엘레트) 전투(1203년, 발주나 전투 혹은 제3차 쿠이텐 전투)에서 테무진의 군대를 급습했고 수적으로 불리했던 테무진 칸은 사기가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테무진 칸의 '안다'(의형제)였던 망고드 쿠일다르가 선봉장이 되어 케레이트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후방에 있던 쿠이텐 산(또는 굽타 산)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이에 카마그 몽골군은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물론 쿠일다르는 며칠 있다가 부상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쿠일다르와 오로오드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케레이트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발주나 호수에서 19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킨다.
이후 테무진 칸은 발주나에서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무카와 알탄은 옹 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동나이만의 타양 칸에게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리타이 옷치긴을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때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던 중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옹 칸은 이러한 기만책에 단단히 속게 되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제지르 운두르('고지') 산에서 연회를 하던 중인 옹 칸을 밤중에 급습하였다(1203년 가을).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에서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3일 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
이렇게 몽골 중앙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제압한 테무진 칸은 몽골 서부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동나이만의 타양 칸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1204년 가을, 또는 시라 케헤르 전투, 카키드마우드 전투)에서 격파하고, 케레이트에 이어 동나이만도 괴멸시켰다.
이제 카마그 몽골에 의한 통일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테무진 칸은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메르키트족도 1204년 겨울, 재차 공격하여 다이칼 코르간(타이칼 코르가) 전투에서 톡토아 베키의 군대를 격파한 다음, 도망가는 잔당을 쫓아 철저히 붕괴시켰다. 메르키트의 일부 씨족들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고, 톡토아 베키와 그 아들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로 도망쳤다. 테무진 칸은 원한으로 얽혔던 메르키트를 초토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단행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동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 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탄누 산맥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그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1206년). 이렇게 케레이트의 옹 칸, 동나이만의 타양 칸, 자다란의 자무카,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거의 마친 1206년 봄, 오논 강 하류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에케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를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1206년), 칭기즈 칸은 제베를 보내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수자우 강에서 사로잡아 처형시킴으로써 마침내 몽골 초원의 난세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듬해인 1207년부터 칭기즈 칸은 몽골 북쪽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일은 장남 주치가 맡았다. 주치는 먼저 바이칼 호 근처에 살던 키르기스족을 복속시켰다. 1208년, 오이라트족도 몽골 울루스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군, 우르수드, 캉가스, 투바스, 부리야트 등 몽골 외곽의 숲에서 살던 부족민들도 잇따라 주치를 만난 뒤 몽골에 귀순했다. 이들을 전투도 치르지 않은 채 대거 귀순시킴으로써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1209년에는 중국 서부, 오늘날의 신강에 살고 있었던 튀르크계 위구르족이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위구르는 몽골 고원 외부의 세력들 중 칭기즈칸의 세력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통일 전쟁 이후
몽골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부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를 바로잡으며, 무엇보다도 칸의 귄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충하는 데 주력하였다.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을 처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게리가 자신의 동생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만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엘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에 대한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준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은, 텝 텡게리의 여섯 형제들에게 위협적으로 둘러싸였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텝 텡게리 자리에는 온순하고 나이 든 샤먼을 임명했고 그 결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이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당시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하였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힘 싸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몽골 통일 이후 글도 없었던 상태에서 나이만 부족의 재상이었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다. 이 몽골 문자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다.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진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삭》' 이라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야삭》은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 시 처형했다. 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강탈해가지 못하도록 법률로 금지한 반면 지참금 제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않기 위해 이슬람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아홉 마리로 배상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고 한다. 칭기스 칸 자신도 이 《야삭》을 어기지 않았으며, 공통 문자와 법률의 제정은 몽골 내부의 통치를 튼튼히 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하나 서요,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하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다.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세계 정복
칭기즈 칸의 대외 정복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가졌던 쪽은 바로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고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되버렸다는 것. 그래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결론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정말로 '지배' 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이 많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이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밖에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세운 것이다.
서하 원정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본격적인 대외 정복의 신호탄을 쏘았다(1205년). 서역과의 교역로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하에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족의 잔당들이 여전히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3차(1205년 1차, 1207년 2차, 1209년 3차)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서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약탈까지 일삼으면서 서하인들에게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수도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지어서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7대 황제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9년, 칭기즈 칸에게 막대한 공물과 황녀를 바치고 항복을 청하였다.
금나라 원정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 원정을 전격 단행하였다.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즈 칸의 선조들 중 한 명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암바가이 칸을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박아 목숨을 잃게 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제압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에게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는데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이를 경계하고 나섰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몽골군이 금나라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1211년 8월, 몽골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 총사령관 완안승유의 40만 대군과 맞붙어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야호령 전투), 이어 회하보(澮河堡)에서 남은 금군을 수습한 완안승유와 다시 맞붙어 3일간의 포위 끝에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회하보 전투). 이때 칭기즈칸도 자신이 직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돌격해 격렬하게 싸웠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이 두 번의 전투로 금나라의 야전군 주력 절반이 궤멸되었다. 이후 만리장성 부근의 장애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길이 활짝 열리자 장성으로 밀고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한 후,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 유수(요양 태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금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야 했다. 또한 칭기즈 칸을 도와주었던 거란족의 수장 야율유가도 이때 동요를 건국하면서 만주 지역은 이때부터 여러 세력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나라 7대 황제 위소왕은 승상 호사호에게 목숨을 잃었고,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가 8대 선종으로 즉위했다. 금 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암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면서 화의를 청했고,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1214년 5월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천도하자(정우의 남천) 칭기즈 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고, 오랜 포위에 지친 중도는 방어 사령관 완안복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끝내 무너졌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당시 요나라 황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 몽골 제국의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하였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