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4장
1) 14:1-25/ 예언과 방언
. 14:1-4/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음(12:7 남의 덕을 세우는 섬김의 도구, 고전10:33, cf.롬14:7-8). 그런데 고린도 신자들은 이 은사를 자기 유익(자기 자랑, 자기 과시)의 방편으로 삼았음(어린아이들, 3:1-2, 13:11). 자신을 장성한 자임을 입증하는 도구로 방언의 은사를 사용.
. 1절/ 12-13장의 연속. 12:31(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그것이 바로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예언의 은사임. (예언의 정의: 성경에 감추어져 있는 복음의 비밀을 드러내는 일, 행17:2-3)
. 2절/ 이 구절은 그 당시 방언 주장자들이 하는 말(방언이 이렇게 유익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인용한 것에 불과. 이에 대해 그들의 방언은 다른 성도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즉 12:7절의 원칙 밖에서 행해지는 거짓 은사라는 것을 지적하는 사도의 말임. 즉 너희가 하는 방언은 성령의 나타나심이 아니라는 것. => 다른 종교에서 흔히 보여지는 신비주의 현상 중의 하나로서의 방언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이 주장하듯 방언기도가 마귀에게 숨겨진 @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면 왜 통역의 은사가 등장하여 마귀에게 비밀을 폭로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함.
. 3절/ 그러나, 예언은 12:7절의 원칙에 부합. 즉 남의 유익을 위함(덕을 세움 = 집을 견고히 세우다라는 뜻. 교회를 견고히 하는 것은 복음 지식으로 자라게 하는 것 하나뿐임. 롬16:26, 롬1:10-11, 행14:21-22, 딤후4:1-5)
. 4절/ 방언: 자기 덕을 세움, 예언: 교회의 덕을 세움. => 이 구절 역시 너희가 말하는 방언이 12:7절의 원칙에 맞는거니?라는 바울의 풍자적 말임. 자기 덕을 세우려고 방언 하라는 말이 아님.
<공동 번역/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여기서 말하는 방언: 현지어를 못 알아듣는 외국인들을 위한 외국어 방언(행2장의 방언)을 말함. 즉 너희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임.
-> 고린도 교회: 항구 도시. 이방인(외국인) 선원들이 항상 북적이는 도시였음. 고린도 교회의 모임에 이런 이방인들의 참석은 흔한 일이었음.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 성령께서 어느 성도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시고, 동시에 다른 성도에게 통역의 은사를 줘서 그들이 복음을 듣게 하셨음.
. 6-19절/ 깨닫는 일의 중요성. 자기도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을 행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예언의 일이 교회에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는 말임.
- 13절/ 방언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 -> 알아 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뭐하러 하고 있니?라는 풍자적인 말. (오늘날 방언 통역 혹은 예언: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의적으로 뱉어내는 것에 불과함)
- 14절/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 그들이 하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가 아님을 지적하는 말. 영과 마음이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방언 주장자들이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영과 마음을 다른 영역으로 말하며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반박하는 말임. 영과 마음은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님.
- 15절/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라고 말한 것임. 즉 사도 바울은 그러한 방언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임. => 18절/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께 감사하노라? 여기서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즉 외국어 방언을 말함.
- 19-20절/ <결론>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분별을 촉구하는 말.
. 고린도 성도들이 하고 있는 방언 - 누구도 알아 듣지 못함. 즉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없음. 오직 자기가 얼마나 신령한 자인가를 드러내는 자기 과시의 수단으로 전락. 이 모습이 바로 고전12:2절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그들의 모습이라는 것.
. 고전12:2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지금 너희 모습이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이러한 모습이지 않니? 그들의 방언?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방언? 더 이상 미혹되지 말고 그 미혹의 현장에서 나와야 함. 이러한 신비주의가 가져오는 해악은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지식에서 자라가는 길을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사탄의 전략임 (고후4:3-4 / 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 21-22절/ 방언의 기능 –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표적
. 21절 [사28:11절 인용] -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의 말을 거부하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의 심판을 선포. 그 심판은 바로 외국인(앗수르)이 유다를 침공하는 것이었음. 이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라고 표현. 즉 다른 방언(앗수르 사람들의 말)이란 @의 심판을 비유하는 말임.
. 이를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말함. =>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을 때 그 방언을 알아듣는 사람들과 그 방언을 알아 듣지 못하는 자들로 구별이 되어졌음(행2:5-13 / 13절의 이 사람들은 방언으로 선포되는 복음의 내용은 알아들었지만, 그 뜻은 알아 듣지 못했기에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던 것). => 즉 방언을 통해 자연스럽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눠지게 되고, 복음을 거부한 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이 @의 심판을 받을 자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임.
. 이는 성경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아니했던 초대교회 때의 일임. 지금은 @의 모든 계시를 담고 있는 성경이 교회에 주어져 있음. 즉 더 이상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해 표적으로 주어졌던 방언의 은사가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음.
. 오늘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복음’임. 복음이 선포될 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은@의 심판을 받게 될 자들이라는 것이 확증됨(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cf. 요3:17-21). 이것이 22절의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는 말의 의미임.
.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 이들에게 복음은 방언으로 들림, 술 취한 자의 횡설수설이나 정신 나간 미친 자들의 말로 들리게 되어 있음, 행2:13, =>요6: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cf. 행26:24 <베스도 총독>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구원 받을 길이 없음. 그러나 @의 택한 자녀들에겐 이 복음이 진리로 들리는 일이 벌어짐. @께서 그들에게 들을 귀, 보는 눈, 깨닫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임(마13:9-11, 계2-3장 일곱 교회 –교회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주어진 자들임, 2:7,11,17,29절, 3:6,13,22절).
[결론]
- 더 이상 귀신의 방언에 미혹되어 시간 낭비하지 말고, 복음을 알아가는 자리로 돌아와야 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다고 해서 그 길이 진리의 길일 것이다 라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미혹의 자리로 나아가는지 분별 할 수 있어야 함.
- 주님도 생명의 길은 그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음. 신앙은 다수결의 원칙이 부정되는 곳임. 일반적이다 보편적이다 라는 자리가 안전해 보이고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신앙의 길은 그 정반대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제대로 공부하고 @을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좁은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함.
은복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합니다. * 주일 예배: 오전 11시(서울시 강서구 마곡동 774-9 사이언스타 10층 1013호 은복성경연구원) * 담임목사: 김승호 010-3633-8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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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할렐루야~! 아멘~!
오늘 날 마귀방언이 판을 치고 있으니 마귀방언을 관찰자처럼 쫓아 다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거짓 가짜 마귀 방언을 배우겠다고 좇아다니는 자와 매일반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믿을 때에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방언인 <새 방언>을 말하며(막16:17),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적인 비밀을 아뢰는 말로 마음(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며(고전14:2),
영적인 언어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이니(고후12:4),
가짜만 찾아 다니는 관찰자로서는 이 진짜 방언을 찾기 어려울 수 밖에 없으니,
관찰자 칠뜩이 처럼 가짜 방언만 보고 진짜 방언을 부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런 관찰자 칠뜩이에게 이사야 선지자님이 방언을 하십니다.
음~! 차브라차브차브라차브카브라카브카브라카브제에르샴제에르샴관찰자칠득이모지리샴~!^^
그러데 방언을 한다는 자들이 사도행전의 외국어 방언은 한마디도 못하지?
벙어리나 마찬가지라서
벙어리가 어버버버 하는 것을
방언이라 우겨대지?
@관찰자 뭔 사도행전에 외국어 방언이 나오나요? 관찰자 칠득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