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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도입된 외국인 선수제도가 올해로 12년째를 맞는다. 올 시즌까지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 선수는 총 300명. 미국, 중남미 출신 일색이던 외국인 선수 대열에 일본인 선수가 뛰어든 건 2003년 투수 이리키 사토시가 두산에 입단했을 때부터다. 그 후 2006년 SK에 타자 시오타니 가즈히코가 입단했고, 2008년엔 투수 다카쓰 신고가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었다. 지난해엔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출신의 투수 가도쿠라 켄이 SK와 계약하며 '코리아 드림'을 꿈꿨다. 올 시즌엔 LG가 전 세이부 라이온즈 투수 오카모토 신야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많은 야구전문가는 앞으로 더 많은 일본인 선수들이 한국에서 뛸 것으로 예상한다. 그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스포츠춘추>가 가도쿠라와 오카모토 두 투수에게서 한·일 야구의 차이점을 물었다. 두 투수가 어째서 한국프로야구에서 성공을 거두는지도 자세히 살펴봤다. 무엇보다 두 선수의 성공이 국적을 넘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집중했다.
# 2009년. 남자는 이름을 바꿨다. 이름 끝 자의 ‘야(或)’를 같은 발음의 ‘야(也)’로 바꾼 것이다. 개명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하면 행운이 따르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에게 ‘행운’이란 무엇이었을까. 야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이 필요할 때까지 마운드에 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길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불안했다. 구위는 예전 같지 않았다. 체력은 조금씩 달렸다.
불행은 그때 찾아왔다. 2009년 시즌 도중 스트레칭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것이다. 통증은 머지않아 왼팔로 전달됐다. 웬일인지 팔이 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괜찮겠지.’ 했다. 그러나 팔 저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시즌 중반 2군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남자는 프로 통산 9시즌 동안 32승19패 92홀드 평균자책 3.21을 기록한 특급 불펜이었다. 게다가 2007년에는 무려 38홀드를 올리며 주니치 드래건스를, 이듬해인 2008년에는 18홀드를 거두며 세이부 라이온즈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우승 청부사’였다. 남자는 조만간 1군에 오를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남자는 1군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10월 2일 소속팀 세이부는 남자를 방출했다. 남자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1달 후 열린 12개 구단의 트라이아웃에 응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남자의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쓸쓸히 돌아서는 남자를 한국야구 관계자가 불렀다. “혹시 오카모토 신야 씨 아닙니까?”
12개 구단의 트라이아웃에서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현역 생활이 막을 내리는가 싶을 때 LG에서 영입제의가 온 것으로 안다.
2009년 목이 아픈 통에 왼쪽 팔 저림 현상이 심했다. 그 때문에 투구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재활로 상태가 호전되고 있던 터라 재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어디 사람 마음이 다 똑같나. 세이부는 재기 가능성을 의심한 것 같다. 다른 구단도 비슷하게 본 것 같고…. 그때 LG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이전까지 한국야구를 얼마나 경험했나.
2년 전 세이부 시절 코나미컵에서 SK와 맞붙은 적이 있다. 당시 지금은 동료인 이진영에게 대형 홈런을 맞았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경험 아닌가(웃음). 평소 일본야구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대표팀끼리 싸울 때면 되레 일본보다 낫다는 느낌도 받았다.
한국야구에 대한 연구는 어떻게 진행했나.
한국야구를 잘 아는 주변 야구인들에게 조언을 많이 구했다.
주로 뭐라고 조언하던가.
선수 개개인의 정보보다는 한국 타자들은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해 힘이 좋으니 속구로 가볍게 승부를 겨루다간 홈런 맞을 확률이 높다고 했다. 특히나 한국 타자들은 선구안이 좋아 단조로운 투구패턴을 가져가면 바로 배트가 나오므로 공 배합에 특히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살짝 웃으며) 그 밖에도 몇 개가 더 있긴 한데.
?
한국야구를 잘 아는 지인들이 그러더라. “한국에선 견제를 많이 하면 좋지 않은 소릴 들을 수 있다”고. 그거 있지 않나. (어렴풋한 한국말로) “마!”라고(웃음).
# 2008년 겨울. 사내는 미국행 항공권을 샀다. 주변에선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낼 예정이냐?”라고 물었다. 속 모르는 소리였다. 사내는 살려고 미국행을 선택했던 참이었다. 순간,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5년 신인 드래프트 2위로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사내는 긴테쓰 버펄로스(현 오릭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를 거치는 동안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2005년엔 개인 최다승인 11승과 역시 개인 최다 탈삼진(177개)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탈삼진왕에 올랐다.
다음 해에도 10승을 거두며 2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한 사내는 요코하마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요코하마는 잡을 생각이 없었다. 2007시즌 정든 요코하마를 떠난 사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둥지를 틀었다. 사내는 요코하마에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악수(惡手)였다.
2007, 2008시즌 동안 사내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2008시즌이 끝나고 요미우리는 사내에게 연봉 감액 제한 25%를 훨씬 넘는 금액을 깎겠다고 나섰다. 사내에게 연봉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운드에 서는 기회가 많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요미우리는 난색을 나타냈다. 그러다 결국.
요미우리와의 재계약은 결렬됐다. 사내는 고민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내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기로 한다. 미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2009년 1월 사내는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시범경기에서 6경기 동안 3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기회는 낯선 단어였다. 메이저리그 개막 직전 컵스로부터 방출을 통보받았다. 세상의 끝에 선 그에게 그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도쿠라 켄 군, 한국에서 뛸 생각 없나."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고 당신에게 손을 내민 이가 누구였나.
(담담한 목소리로) 김성근 SK 감독님이었다.
김 감독이 직접 SK 입단 제안을 했나.
(고개를 끄덕이며) 2008년 12월, 컵스에 입단 테스트를 하러 가기 전이었다. 김 감독님이 SK 우승여행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내 도쿄로 오셔서 나를 찾으셨다. 그때 감독님을 처음 뵙다. 당시 감독님께서 한국 야구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일본야구와 많이 닮은 게 많았다. 솔직히 이전까지는 한국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혼잣말을 하듯) 어떻게 해서든 메이저리그에 가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제안을 받아들였나.
그렇지 않다. 당시 감독님께 “메이저리그 진출에 도전하기 때문에 죄송합니다”하고 정중히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미국 진출은 좌절됐다. 김 감독의 제안이 아쉬웠을 법도 하다.
(엄숙한 표정으로) 실의에 빠졌을 즈음, 김 감독님이 다시 입단 제의를 하셨다. ‘아직도 부족한 내가 필요한 분이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흔쾌히 감독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막상 한국에 간다니 고민이 많았을 듯싶다.
고민? 글쎄. 우선 감독님을 믿었고, 한국에서 야구를 배우자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야구를 배우겠다라, 여느 외국인 선수에게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어쨌거나 한국프로야구는 일본프로야구와는 스타일이 다르다. 따라서 당신 같은 외국인 선수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리그에 대한 정보 입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국야구에 대한 정보는 어느 정도였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이용규(KIA)가 일본전에서 외야 플라이를 잡고 무릎을 꿇으며 기뻐하던 걸 봤다. 야구에 임하는 자세가 대단히 정열적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솔직히 한국 대표팀 선수 정도만 알았다. 대표팀 선수를 제외하곤 다소 실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예상했다. 자신도 ‘한국은 어떤 야구를 할까?’ 궁금한 마음으로 한국에 왔다.
# 가도쿠라가 중학생 시절부터 190cm의 큰 키로 두각을 나타냈다면 오카모토는 반대다. 오카모토는 학생 시절에도 무명이었으며, 사회인야구에 진출한 이후에도 평범했다. 스스로 “무명이 익숙했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다. 그러나 오카모토는 한 번도 꿈을 잃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기회를 거머쥐려고 서른 살까지 기다렸다.
유소년 야구선수 출신으로 알고 있다.
야구를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지역엔 유소년 야구팀이 없었다. 운 좋게도 나중에 기업체가 이전해오면서 마을에 유소년 야구팀을 만들어줬다. 누가 알았나. 그때 오른손에 쥔 야구공을 지금까지 쥐고 있었을지.
교토 미네야마 고교시절까지 무명이었던 것으로 안다.
(씁쓸한 표정으로) 모교 실력이 그저 그랬다. 운도 별로 없었고.
운?
고 3때 야구부에 투수가 나를 포함해 2명밖에 없었다. 나는 (프로지명을) 못 받았고, 다른 친구는 받았다.
당신 말대로 고교 졸업반 때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당신을 찾지 않았고. 웬만한 사회인야구팀도 외면했다. 그러다 유일하게 합격한 팀이.
‘사토 공무점’이라는 사회인야구팀이었다. 그러나 역시 운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왜 붙자마자 해체라도 했나.
다음 해 바로 해체했다.
(난처한 표정으로) 아, 그런가. 하지만, 곧바로 다른 팀으로 가지 않았나.
‘아베 기업’이란 팀이었다. 하지만, 1년 정도 있다가 퇴단했다. 그러다 3번째 팀으로 ‘야오한 재팬’에 입단했다.
(조심스럽게) 그 팀은 괜찮았나.
3년간 열심히 뛰었다. 전일본도시대항야구대회에 나가 좋은 투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환하게 웃으며) 좋은 팀이었나 보다. 왜 오래 뛰지 그랬나.
부도가 나서 회사 자체가 사라졌다.
음.
‘야오한 재팬’ 이후 클럽팀에 잠시 있었다. 그때 야구를 아예 그만두려 했다. 실력도 늘지 않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등판한 경기에서 7회까지 0점으로 막는 호투를 펼쳤다. 그때는 타자들이 나무배트가 아니라 알루미늄 배트를 썼기에 7이닝 무실점은 드물었다. 그날은 운이 좋았는지 잘 던졌고, 공교롭게도 사회인야구 명문팀인 야마하의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야마하’에 입단했다.
‘야마하’까지 사회인야구팀만 4팀을 거쳤다.
점점 더 좋은 팀으로 갔기에 아쉬움은 없다. 특히나 ‘야마하’ 시절은 내게 무척 좋은 기회였다. 야구단 후원도 좋았고,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어서 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여담이다. 일본 사회인야구는 오전엔 일하고, 밤에만 연습하나.
(손을 흔들며) 그렇지 않다. 아침에 회사로 출근하지만, 일은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다(웃음). 연습은 낮부터 한다. 사회인야구도 3월부터 시즌이 시작하므로 대회가 있을 때는 10여 일 전부터 출근도 하지 않고 연습에만 열중한다.
‘야마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27살의 늦은 나이로 주니치에 입단했다.
처음엔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지명할 줄 알았다. 만약 오릭스가 지명하지 않으면 한신 타이거스가 스카우트할 거란 소문도 들었다. 그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신인 드래프트를 2주 앞두고 목 수술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드래프트 1주일 전에 주니치 스카우트가 ‘야마하’ 감독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갔단다. 결국, 생각지도 못한 주니치 유니폼을 입었다.
일본 야구선수 가운데 사회인야구팀을 4개 팀이나 거친 뒤 프로로 진출한 선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2, 3개 팀을 거친 선수는 있어도 4개 팀은 거의 내가 처음이 아닐까(웃음).
늦깎이 프로행인 만큼 감격도 대단했겠다.
누가 아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프로 입문을 꿈꾸면서 야구에 전념했다. 부모님께 가장 먼저 지명사실을 알려 드렸다. (기억에 선한 듯) 정말 즐겁고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는 그때가 처음인 것 같다.
남보다 늦은 프로 데뷔였다. 그러나 입단 3년 차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정말이지 입단 3년 차까지 성적을 내지 못하면 ‘프로생활은 끝이다’라고 다짐했다. 그래 스프링캠프 때 엄청나게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투구폼이 안정되고 속구 구속도 만족스럽게 나왔다. 그즈음 팀 선배인 야마모토 마사시 씨가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봐, 오카모토. 네가 하체 쓰는 게 많이 달라졌어”라고.
속구 구속이 어느 정도 오른 건가.
이전보다 5~8km가량 올랐다. 그때 내 나이 29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나이에 갑자기 구속이 올랐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중요한 건 서른이 가까울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지난해 가도쿠라는 23경기에 등판해 28경기 가운데 23경기에 선발등판해 8승4패 1세이브 평균자책 5.00을 기록했다. SK 김성근 감독이 바란 성적과는 거리가 있었다. 야구전문가들도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쏟아냈다. 한때는 일본인 선수로써는 거의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가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시즌 중반 김 감독으로부터 2군행을 통보받은 적이 있다.
김 감독님은 처음에 거절했음에도 상관하지 않고 2번이나 영입 제의를 하셨던 분이다. 시즌 초반 불안한 투구를 할 때도 날 믿고 기용하셨다. 광주 KIA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투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게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마운드에서 발길질했다.
김 감독은 마운드 위에서의 발길질을 용납하지 않는 야구인이다. 그것을 마운드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끼니까.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2군에 내려가고서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마운드 위에서의 발길질에서 보듯 한국과 일본야구는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실제로 한국 타자들과 상대했을 때도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었을지 싶다.
하나같이 대단한 선수들이었다. 무엇보다 타자들은 힘이 장사였다. 세밀한 야구를 지향하는 일본에 반해 한국은 확실히 미국과 가까웠다.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가장 대단했던 선수가 누군가.
올 시즌부터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뛰는 김태균이다. 정말로 훌륭한 타자였다. 속으로 ‘이 선수가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하면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낼까’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야구장 풍경도 한국과 일본은 무척 다르다.
내야 관중석에서 치어리더가 춤추는 걸 처음 봤다(웃음). 응원문화도 정말 정열적이다. 관중의 열띤 응원을 보다 보면 3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것 같다.
더러의 외국인 선수들은 야구장 밖에서의 부적응으로 고전하기도 한다.
올해부터 운전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운전이 좀 거친 편이다. 경적도 잘 울리고(웃음). 동료 보면 식사도 금방 해치운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았지만, 요즘은 차이를 즐기는 중이다(웃음).
지난 시즌 고전했다.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하기까지 했다. 가장 큰 부진의 이유는 무엇이었나.
지난해는 한국야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마운드에 서면 늘 불안했다. 불안하니 생각도 많아지고. 음, 몸도 정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나를 다시 또 잡아준 이가 바로 김 감독님이었다.
# 실패를 ‘적’이 아닌 ‘친구’로 삼았던 오카모토는 한국프로야구에 데뷔하고서도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실 많은 야구전문가가 오카모토의 성공을 의심했다. 스프링캠프에서 속구 구속이 시속 140km 초반에 그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범경기까지 구속이 오르지 않으면서 ‘LG가 이번에도 용병농사에 실패할 것’이란 성급한 예상까지 나왔다. 그러나 올 시즌 오카모토는 5월 13일 현재 2승1패 7세이브 평균자책 0.63을 기록 중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실제로 계약하고 나서 한국야구를 접하니 어떻던가.
구단에서 제공한 비디오를 보며 선수들을 파악할 때도 참 타격을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맞붙어보니 느낌이 맞았다는 생각이다. 주변에서 조언했던 내용도 거의 들어맞는 것 같고. 실제로 “마!”라고도 하더라(웃음).
성적만 보면 당신이 더 대단하다. 5월13일 현재 12경기에 출전해 2승1패 7세이브 평균자책 0.63을 기록 중이다. 시즌 초반이지만, 페이스가 무척 좋다.
(고개를 갸웃하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적이다. 아직 시즌 초반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 성적이 계속 유지될지는 나로서도 의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의 성공을 반신반의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외면한 베테랑 투수가, 웬만한 메이저리그 출신 투수도 견디기 어렵다는 한국프로야구에 얼마나 적응하겠느냐는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올 시즌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했나.
글쎄. 특별히 준비한 건 없다. 일본과 있을 때와 비교해 변한 것도 거의 없다. 다만, 사이판 스프링캠프 때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했다.
일본 투수들은 웨이트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만 해도 그랬다. 과거엔 거의 하지 않았다. 일본 투수들은 대개 고무공을 이용한 밸런스 훈련이나 러닝에 집중한다. 베테랑이면 모를까 젊은 선수들은 근육을 단련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하지만, 한국은 웨이트트레이닝 시간을 충분하게 주고 투수들도 열심히 한다. 그 덕을 본 것 같다.
당신은 마무리 투수지만, 구속은 높지 않다. 시속 140km 초중반 대다. 그런데도 당신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심판 다수는 ‘당신의 공 끝이 좋아 실제 구속보다 빠르게 보인다’고 하더라.
젊었을 땐 나도 힘으로 던졌다. 그러나 경험을 쌓으면서 투구는 힘보다는 공 끝의 싸움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국 투수들은 속구 구속도 빠르고, 좋은 변화구도 갖고 있다. 그러나 투수의 기본은 속구의 공 끝을 어떻게 살리느냐는 것이다. 한국 젊은 투수들이 그 점을 다소 간과하는 것 같다.
자세히 설명해달라. 공 끝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 끝을 살리려면 캐치볼 할 때부터 훈련해야 한다. 한국 투수들의 캐치볼을 보면 거리도 짧고 공이 휘어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 끝을 살리려면 캐치볼 할 때도 절대 공이 휘어선 안 된다. 휘지 않도록 손끝의 감각을 익히는 게 중요하다. 무엇보다 손끝으로 공에 스핀을 넣도록 노력해야 한다.
손끝으로 스핀을 넣은 다라.
투구동작 시 릴리스포인트 때까진 여유 있게 팔을 뻗다가도 마지막 공을 넣을 때 손가락 끝으로 강하게 힘을 줘 공에 스핀을 걸어야 한다.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건 손가락 끝에 공을 걸어 강하게 밀어준다는 감각으로 투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투수들은 손가락 끝을 굉장히 중시하는 듯싶다.
나 같은 경우도 고교 때부터 사회인야구팀에 있을 때까지 항상 자기 전에 누워서 손가락 끝으로 공을 머리 위로 던지고 받길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서 공을 휘지 않고 똑바로 던지는 법을 몸으로 체득했다. 물론 공이 떨어져 숱하게 맞긴 했지만(웃음).
당신을 가리켜 어느 투수코치는 ‘일본인 투수답게 하체 이동이 이상적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그 때문에 공 끝이 살고, 제구도 좋다고 하던데.
투구의 기본은 ‘하나, 둘, 셋’이다. ‘하나’에서 다리를 올리고, ‘둘’에서 올린 다리를 앞으로 끌고 가면서 뒷다리의 체중을 효과적으로 앞다리까지 전달하고 ‘셋’에 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체의 체중 이동을 잘하려면 ‘하나, 두~울, 셋’이 돼야 한다.
왜 ‘두~울’인가.
‘두~울’이 돼지만 뒷다리의 체중을 효과적으로 앞다리까지 전달할 수 있다. 그냥 ‘둘’하면 체중이동을 충분히 할 수 없다. ‘둘’보다 한 박자 느린 ‘두~울’을 하려면 상체를 지탱할 수 있는 튼튼한 하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투수들이 러닝과 복근운동으로 하체 단련에 신경 쓰는 거다. 어렵지만, ‘두~울’에 능숙해지면 공 끝도 살고, 제구도 훨씬 좋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을 낮게 던질 수 있다.
지금까지 본 한국 타자들은 어떤가.
일본 타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 좋은 선구안을 갖고 있다.
# 지난 시즌이 끝나고 가도쿠라는 SK와 재계약에 성공했다. 김성근 감독의 믿음이 컸다. 김 감독은 시즌 전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2010시즌의 가도쿠라는 전혀 새로운 투수가 돼 있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주변에선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웬만한 메이저리그 출신의 투수도 살아남지 못하는 한국프로야구에서 ‘퇴물’ 일본인 투수가 부활할 리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김 감독이 옳았다. 가도쿠라는 완전히 새로운 투수로 거듭났다. 그가 새로운 투수로 거듭난 배경은 무엇일까.
5월 13일까지 8경기에 출전해 7승1패 평균자책 2.02를 기록 중이다. 과연 올 시즌 가도쿠라가 지난 시즌 우리가 봤던 가도쿠라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동계캠프 때부터 훈련을 충실히 했다. 특히나 내 투구의 부정적인 면을 지배했던 불안요소들을 각종 데이터를 통해 제거할 수 있었다.
데이터를 통해?
구단이 준비한 데이터를 소중하게 활용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지난 시즌 한국야구를 경험하면서 머릿속에 저장해둔 데이터가 가장 유용하지 싶다. 한국 타자들은 저마다 특징이 극명해서 머릿속에 경험으로 터득한 데이터를 활용하면 예상대로 되는 경우가 많다.
SK는 데이터 분석과 가공을 가장 잘하는 구단으로 알려졌다. 당신이 뛰었던 주니치도 ‘데이터 야구’로 유명한 구단이다. SK와 주니치의 데이터만 놓고 본다면 어떤 차이가 있나.
한국에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주니치뿐만 아니라 일본구단은 데이터 활용을 굉장히 많이 한다. 그만큼 데이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두 나라의 데이터의 활용 폭이나 깊이는 거의 차이가 없다. (뭔가 생각난 듯) 사실 투수는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그날의 컨디션이 더 중요하다. 내 경우는 팀에 일본인 투수코치와 배터리 코치가 있기 때문에 컨디션에 관해 자유롭게 상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찌 보면 다른 외국인 선수보다 훨씬 유리한 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팀 선수들이 하나같이 당신의 포크볼이 지난해보다 훨씬 예리해졌다고 한다. KIA 김원섭은 “지난해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각이 커졌다”고 하던데.
지난 시즌 부진은 결정구였던 포크볼이 밋밋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은 내가 봐도 확실히 포크볼이 좋아졌다. 일단 김 감독님께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고.
김 감독이 새로운 포크볼 그립을 알려준 것으로 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이다. 현재 두 가지 포크볼을 던진다. 원래 내가 잡던 그립의 포크볼과 김 감독님이 알려주신 그립으로 던지는 포크볼을 섞어 던진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도 포크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나.
김 감독님이 알려준 그립으로 포크볼을 던지면 확실히 홈런을 맞지 않는다. 왜냐? 공이 낮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정구로 활용을 많이 한다. 내가 원래부터 던지던 포크볼은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할 때 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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