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녀(美女) 초선(貂蟬) 하편 -
"초선(貂蟬)이! 말을 안 하기로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리오? 너무 슬퍼 말고 나를 기다리오."
"첩(妾)이 무슨 면목(面目)으로 장군(將軍) 같은 영웅(英雄)을 모실 수 있사오리까."
"나는 그대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으니 염려(念慮) 말고 조금만 기다리오."
"정말 그러시다면 저를 하루속히 구해 주소서."
"내가 이승에서 그대를 구해주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面目)으로 영웅(英雄)이라 불리 리오. 그러나 오늘은 늙은 도둑의 의심(疑心)을 샀다가는 안 되겠으니 다시 돌아가 봐야겠소. 내가 불원간(不遠間) 그대를 구해낼 것이니 당분간(當分間) 기다려 주시오."
"그건 안 되옵니다. 장군(將軍)께서 태사(太師)를 그렇게나 무서워하신다면 무슨 방도(方道)로 첩(妾)을 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차리리 연못에 뛰어들게 그냥 놓아두시옵소서." 초선(貂蟬)은 여포(呂布)의 손을 뿌리치고 또다시 연못으로 뛰어 들려 하였다.
"염려 말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니까... 내 반드시 그대를 구해 준다니까 ..." 여포(呂布)는 그러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초선(貂蟬)은 원한(怨恨)이 가득 찬 시선(視線)으로 여포(呂布)를 바라보며 이렇게 원망(怨望)하는 것이었다.
"첩(妾)은 장군(將軍)을 이 세상(世上)에 둘도 없는 영웅(英雄)으로 믿었더니 늙은 도둑을 이처럼 무서워하시는 줄은 정녕(丁寧)코 몰랐습니다."
초선(貂蟬)
말을 마치자 그대로 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다.
여포(呂布)는 적(的)이 민망(憫惘)하고 무안(無顔)하여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동탁(董卓)이 정자(亭子)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여포(呂布)가 별안간(瞥眼間) 없어진대 의심(疑心)을 품고 초선(貂蟬)을 찾아온 것이었다.
동탁(董卓)은 여포(呂布)가 초선(貂蟬)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에서 불이 일어날 것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죽일 놈아! 네놈은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느냐!"
동탁(董卓)은 고함을 지르며 정자(亭子) 난간(欄干)에 세워 놓은 화극(畫戟)을 들어 여포(呂布)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포(呂布)는 나는 듯이 정자(亭子)를 벗어났다.
동탁(董卓)은 여포(呂布)의 뒤를 쫓아가며 화극(畫戟)을 냅다 던져버렸다.
화극(畫戟)
그러자 여포(呂布)는 날아오는 화극(畫戟)을 손으로 쳐버리고 쏜살같이 후원(後園)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동탁(董卓)이 다시 화극(畫戟)을 집어 들고 여포(呂布)의 뒤를 쫓으려는데 모사(謀士) 이유(李儒)가 후원으로 들어서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태사(太師)!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여포(呂布)란 놈이 내 애희(愛姬)를 희롱(戲弄)하니 그놈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다!"
"태사님! 진정(鎭靜)하시옵소서. 그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옵니다. 여포(呂布)의 목을 자르는 것은 태사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불의(不義)의 짓을 하는 놈을 그냥 두고 보란 말이냐?"
"안 됩니다. 태사(太師)께서는 지금 당신(當身) 한 분의 감정(感情)으로 분노(憤怒)하시고 계시지만 저는 지금 태사의 장래(將來)를 위해 간언(諫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옛날에 이런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동탁(董卓)과 이유(李儒)
이유(李儒)는 흥분(興奮)한 동탁(董卓)의 노기를 가라앉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그 옛날 초(楚) 나라 시절 장왕(莊王)은 어느 날 국가의 공로가 많은 무장(武將)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연회를 크게 베푼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연회의 흥취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에 별안간(瞥眼間) 바람이 불면서 등불이 모두 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장왕(莊王)은 빨리 불을 켜라고 말했으나 무장(武將)들은 불이 없는 것이 오리려 흥취(興趣)가 있다고 떠들어대었다.
그 자리에는 장왕이 총애(莊王)하는 궁녀(宮女) 하나가 무장(武將)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르느라고 특별히 나와 있었는데 어느 장(將帥) 하나가 불이 꺼진 어두운 틈을 타서 장난삼아 그 궁녀(宮女)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瞬間) 크게 놀란 궁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 장수의 갓(笠) 끈을 낚아채 가지고 장왕(莊王)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해 바쳤다.
그리고 장왕(莊王)의 무릎 위에 엎드려 울면서 말하였다.
"지금 저에게 욕을 보인 사람은 바로 이 갓끈의 주인공이옵니다. 그러니 어서 불을 밝히시고 그 사람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옵니다." 궁녀(宮女)는 잔신(自身)의 절개(節槪)가 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영명(英明)한 장왕(莊王)은 노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둠 속에서 무장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나의 총희(寵姬)가 나에게 부질없는 부탁을 하고 있으나 오늘 밤 연회는 여러 무장들을 위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오. 지금 한 장난은 취중에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처럼 유쾌한 장난을 해 준 것이 오히려 나는 기쁘다는 말이오. 그러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기보다는 지금 연회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러 무장(武將)들은 지금부터 다 같이 갓끈을 끊어 버리고 오늘 밤을 마음껏 즐기도록 합시다." 장왕(莊王)의 이 같은 지혜(智慧)로운 처사 덕분(德分)에 범인(犯人)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해 뒤에 장왕(莊王)은 진(秦) 나라의 대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멀리서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장왕(莊王)을 호위해 가며 전신(全身)에 상처(傷處)를 입으면서 적(敵)과 결사적(決死的)으로 싸워서 장왕(莊王)을 구출(救出)한 뒤에 땅에 쓰러져 버렸다. 그는 장웅(蔣雄)이라는 장수(將帥)였다.
"나는 장군의 덕택으로 극적(劇的)으로 죽음을 면하였소. 그런데 어떤 까닭으로 이처럼 목숨을 걸고 멀리서 달려와 주었소?"
그러자 장웅(蔣雄)은 죽음을 눈앞에 맞으면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전날 대왕(大王)께서 베풀어 주신 연회(宴會)에서 대왕의 총희(寵姬)에게 입을 맞추었던 사람이옵니다. 그날 밤 대왕께서 지혜(智慧)로운 총명(聰明)으로 저를 용서(容恕)해 주셨으니 제가 성군(聖君)을 위해 목숨을 바친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장웅(蔣雄)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 후에 세상에서는 그 일을 절영 지회(絶纓 之會)라고 부르옵니다. 바라옵건대 태사께서도 여포(呂布) 장군(將軍)에게 장왕(莊王)과 같은 관용(寬容)을 베푸시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동탁(董卓)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닫는 바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네. 그러면 나도 여포(呂布)를 용서하고 다시 노하지 않겠네."
동탁(董卓)은 그 길로 내실로 들어와 초선(貂蟬)을 불렀다.
"너는 어찌하여 여포(呂布)와 사통(私通)을 하였느냐?"
초선(貂蟬)은 울면서 대답한다.
"여포(呂布) 장군으로 말하면 태사님의 양자(養子)이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줄 알고 여장군을 무심히 대해사옵는데 여장군이 오늘은 화극을 들고 와 저를 억지로 봉의정(鳳儀亭)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설마 태사님의 양자인 여장군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음... 이미 사태(事態)가 이에 이르렀으니 나는 너를 여포(呂布)에게 돌려줄까 하는데 네 생각을 어떠냐?"
그러자 초선(貂蟬)은 동탁(董卓)의 무릎 위에 쓰러지며 목을 놓아 운다.
"첩이 이미 귀인을 섬기게 되었는데 이제 종놈의 첩이 되라 하오시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욕은 못 보겠습니다."
초선(貂蟬)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벽에 걸려 있는 보검(寶劒)을 떼내어 목을 찔러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동탁(董卓)은 크게 놀라 초선(貂蟬)의 손에서 검(劍)을 빼앗았다.
초선(貂蟬)은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지며 통곡한다.
"첩이 이제야 모든 사정을 죄다 알았습니다. 이유(李儒)라는 자가 여포(呂布)의 부탁을 받고 태사님께 그런 진언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유와 여포는 태사님이 안 계실 때에는 언제나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그러실 것입니다. 태사님은 저 같은 계집보다는 역시 이유와 여포가 소중하실 것이니까요. 첩은 이런 농간에 한가운데로 저를 몰아넣은 이유와 여포란 놈을 생으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사옵니다."
"음 .... 염려 마라! 그런 말은 농담에 불과하였고 내가 너를 설마 버릴 수야 있겠느냐."
"아무리 태사님이 그런 생각을 품고 계시더라도 제가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 여포(呂布)의 손에 목숨을 뺏기고 말 것이 분명하옵니다."
"염려 마라! 내가 내일은 너를 데리고 미오성(郿塢城) 으로 가기로 하겠다. 그리로 거처(居處)를 옮겨가서 내 뜻대로 되면 너를 황제(皇帝)의 귀비(貴妃)로 만들어 줄 것이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에게 한평생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
초선(貂蟬)은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고 동탁(董卓)의 품에 안겨 회심(會心)의 미소(微笑)를 지었다.
삼국지 - 54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