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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시 간 |
일 정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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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
서봉마트(버스 37번) |
현수막 및 베너 게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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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09:20 (20분) |
어등산 서봉약수터까지 집결 안내(명찰배부)및 간식제공 |
광산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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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09:25 (5분) |
어등산 의병체험일정소개 -내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어등산의병이야기 리플렛배부 -의병체험 세부일정배부 |
광산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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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09:30 (5분) |
어등산에서 안전교육 (상비약준비) |
광산구문화유산해설가 김광병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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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0~09:50 (20분) |
어등산의병이야기 |
광산구문화유산해설가 문대식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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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0~10:00 (10분) |
마당바위로 이동 |
현수막 게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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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11:00 (1시간) |
“나는 의병이다” 과제물을 수행하라 의병발자취코스(마당바위-김태원, 김율 의병장전장터) ①.목적지까지 조별로 이동 및 해설 ②.김태원, 김율 의병전장터 도착시 묵념 ③.김태원, 김율 의병전장터 해설 |
광산문화유산해설가 어등산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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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11:10 (10분) |
“의병의 숨결을 만나다” 최종목적지-‘충의격문낭독’ ‘청소년의 고함’ 퍼포먼스 어등산의병이야기 리플릿-전해산 격문참고 |
광산구문화유산해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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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11:30 (20분) |
의병 전장터에서 마당바위로 이동 ①.목적지까지 조별로 이동및 해설 ②.압록강 행진곡9다함께 부르기) |
카세트 및 압록강행진곡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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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12:00 (30분) |
점심 (의병들의 먹거리 체험) |
주먹밥, 고구마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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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13:30 (1시간 30분) |
“숲속산골문화체험” -태워서 연기가 나지 않는 나무, 의 병들의 무기가 되었던 나무 종류 -태극기 만들기 (나뭇잎 이용) A4용지, 목공풀 준비 |
광산문화유산해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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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0 |
마무리 및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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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8.의병체험 행사 진행)
첫 행사
2008년 9월 28일 오전 9시 역사적인 첫 행사를 시작한다. -이 행사 준비를 위해 광산구문화원사무국장님과 문화유산해설가들의 4차례의 사전 답사가 있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나온 아이들의 얼굴에 아직 잠이 덜 깬 듯 정체되어 있는 시간이 한 가족 당 하나의 태극기를 나누어주자 눈빛을 반짝이며 태극기 힘차게 흔들어 오늘의 의병장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태극기(太極旗)는 1883년 (고종 20년) 조선의 국기로 채택되고, 1948년부터 대한민국 국기로 주권과 국가를 나타내는 표지로서 나라를 상징한다.
태극기 높이 들고 시작된 행렬은 활짝 문을 연 어등산으로 들어가고 100여년전 한말 의병이 되어 우렁찬 목소리로 ‘나도 의병이다 ’를 외치며 행사가 진행됨에 따라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한다. 고백하건데 의병체험행사 준비 전까진 그분들을 애써 생각해 본적이 없다. 삼일절, 현충일의 묵념, 광복절행사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학창시절 국사책에서 배운 한웅큼도 안되는 지식으로 문화유산해설가로서 체험행사에 어찌 앞장 설 수 있을까?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했다. 광복회 부회장과 광산구 문화유산회장직 맡고 있는 문대식 선생님의 많은 조언을 받으며 한말의병에 대한 책을 보고 자료를 찾아 공부를 시작했다.
늦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이었지만 중순을 지나면서 계절은 가을로 접어든다. 약간 서늘한 아침 날씨는 힘찬 걸음을 내딛으니 의병장들의 기운이 다시 솟아나고 홍팀과 청팀 이열로 열 지어 어등을 타오르는 우리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약수터 앞에서 압록강행진곡이 울려 퍼진 가운데 진행을 맡은 오덕미 광산문화원 국장님의 진행으로 참가한 아이들의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첫 행사의 운을 떼었다. 김광병(광산문화유산해설가)선생님의 안전교육 시간엔 가을 철 독이 있는 뱀과 벌들을 조심하고 팀에서 절대 멀어져선 안된다고 강조하신다.
열정적이고 눈높이에 맞춘 문대식 선생님의 의병장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역사의 현주소를 알려주고 계신다. 한말 호남의병의 역사적 근원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당시 의병봉기에서 사상적 뿌리를 같이하며, 이곳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 나주, 함평, 담양, 영광 등지를 잇는 지리적으로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한다. 물건을 구입하고 정보를 교환하기 쉬운 선암역(조선말에 없어졌다)과 선암 장터가 있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어등산은 의병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본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기 용이했다. 을사조약 늑결 후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약 3년간 한말 호남의병들의 근거지로 호남을 대표하는 의병장과 그 부대들이 일제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역사의 현장인 어등산이다. 한말 호남 의병의 격전지인 어등산에서 문대식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모두가 숙연해지고, 어등산의 새들도 잠시 지저귐을 멈추었다.
( ‘나는 의병이다’. 앞으로 돌격~ )
이제 마당바위를 향해 오르기를 하는데, 비가 내린 후 계곡의 물소리는 한층 소리를 높여 한말 역사의 날을 기억하려는 ‘의병체험’에 힘을 돋아준다. 스스로 의지에 따라 일어선다는 의병의 의(義)자는 한자로는 羊(양 양)과 我(나 아)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 나를 바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단다.
넓은 바위위에 의자와 평상이 놓여있고 팔각정이 세워져있어, 여기까지 오를 때의 등에 배인 땀이 바람에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마당바위 쉼터이다. 비어있는 마른의자에 나뭇잎이 뒹굴고, 비탈길 정금나무가 새카맣게 익어가는 열매를 구슬처럼 매달고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정금나무는 진달래과의 낙엽이 지는 관목으로, 1~2m의 키에 까만 구슬 한 개를 입에 넣으니 달큼하고 신기하게 갈증이 가신다. 의병체험에 참가한 이들에게 머루와 정금 열매를 한 알씩 나누어 주니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자연을 배워가는 모습이 무척
소중하다.
태워서 연기가 나지 않는 나무
화승총은 의병전쟁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무기였다. 울퉁불퉁 돌부리에 발을 맞닿으며 오르는 산길마다 화승총을 장전할 때 불을 붙여주던 부싯돌이 시간위에 시간이 쌓여 묵은 때 낀 채 세대를 달리하는 지금 산화되어 드러내는 누렇게 산화되어 슬픔을 지니게 한다.
오솔길 사이로 잘 말라 있을 때 연기가 나지 않는 때죽 나무가 보인다. 때죽 나무라는 이름은 가을에 땅을 향하여 매달리는 수많은 열매의 머리(종자껍질)가 약간 회색으로 반질반질해서 마치 스님이 떼로 몰려있는 것 같은 모습에서, 처음에 ‘떼중나무’로 부르다가 때죽 나무가 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높은 산 위에서 자라는 새싹은 눈을 녹이고 나오려고 아주 뜨거운 열을 내뿜기도 한다. 동학 혁명 때 무기가 부족하자 농민들이 총알을 직접 만들어 쓰면서 때죽나무 열매를 빻아 화약과 섞어 썼다고도 한다.
일찍부터 충절과 의리를 소중하게 지켜온 호남인들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빈사상태에 빠진 나라와 민족을 구출했고 의병대열에 앞장섰으며, 1894년 나라의 자주독립과 봉건질서타파를 위해 일어섰던 동학혁명이 전개됐던 고장이다. 항일의병활동의 전기 의병이라 할 수 있는 을미의병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세력을 기반으로 1895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나는데 명성황후가 낭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과 단발령의 시행에 항거하여 발생하였다. 이때 의병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농민까지 구성이 다양하며 이때 호남지방은 기삼연, 고광순, 기우만등 유학자를 중심으로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하자는 의논이 일기 시작하였고, 기우만이 광주 향교로 나아가 의사들을 모으고 규칙을 정한 뒤 전력을 논의하자 사방에서 의병이 모여들었으며 관리들은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성에서 기삼연이 의병 300명을 이끌고 와서 군무를 지원하였고 지방 주요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중기 의병활동은 1905년 일본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 을사늑약 파기와 친일정부들의 관료들의 축출을 주장하였고, 을미의병에 비해 더욱 거센 의병장이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실패하고 말았으며 최익현은 대마도로 유배되어 단식 순국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났던 때에는 호남지역의 의병봉기가 활발하지 못했으나, 1907년 후반에 이르러서 의병의 중심지역이 되었고 경술국치 이전의 의병 운동은 호남지방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청팀, 홍팀으로 나뉘어 석굴로 이동하는 도중도중 해설가 선생님들의 설명이 있고 석굴 앞 작은 공간에 모여 묵념을 하였다. 전해산 ‘충의격문낭독’을 한 목소리로 외쳤으며, 후손 대대로 이어가야 할 정신문화를 강조하며 의병장 이름 외우기 게임에선 두 팀을 대결시킨다. 이긴 팀에게는 두 가지의 점심- 꽁보리밥 의병식과 햄과 야채를 가미한 현대 의병식 중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석굴 앞을 지키는 엄나무
석굴과 토굴로 오르는 길은 잡목과 신이대로 둘러싸여 길이 보이지 않았고, 표지판 하나 없는 의병전적지를 찾아간다. 석굴 앞 나무에 한 가닥 끈으로 묶인 태극기가 홀로 외롭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석굴)
후기 의병시기인 1907년 9월 24일 기삼연이 김용구와 더불어 ‘호남창의회명소’를 결성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병운동의 중심지역이 된 호남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에는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파급력이 거대했다. 장성의 기삼연이 이끄는 호남창의회맹소는 반일 투쟁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일진회와 자위단을 비롯한 친일파 제거, 납세거부투쟁, 수입품 불매운동을 전개하여 맹위를 떨치자 1907년1월부터 2월까지 일제가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펼쳤다. 기삼연 의병장은 김태원을 만남으로써 대어를 얻었고 김태원도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된 셈이었다. 문수사 야간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김태원은 그 기세를 몰아 고창, 법성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 등지를 차례로 점령하여 의병 항쟁의 맹장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선봉장(先鋒將)에 조경환, 도포장(都砲將)에 최동학, 후군장(後軍將)에 김옥현, 참모장(參謀將)에 유병기를 임명하였다. 이후로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부대는 독자로, 때로는 연합 작전으로 막강 일군 토벌대와 맹렬히 맞섰다. 무신(1908)년 설날을 앞두고 김태원 의병장은 부하 장병들이 설이라도 편히 쉬게 하려고 그믐날 밤 무등산 뒤편 첩첩산중인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새해 첫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파수를 보던 초병에게서 일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바로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광주 수비대 요시다(吉田勝三郞) 부대가 추격해 온 것이었다. 김태원은 번개 같이 즉각 전략을 짰다. 무동촌은 집집마다 돌담인 바, 그것을 방벽으로 이용, 적을 유인한 뒤 일제 사격으로 제압하자는 작전이었다. 돌담은 총알을 막는 방벽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김태원은 부하들을 분산시켜 각 골목에 배치한 다음, 사격술이 좋은 두 의병(姜吉煥, 趙德寬)을 당신 뒤에다 복병으로 엄폐(掩蔽)시켰다.
“너희들은 내가 총으로 적장 요시다를 말에서 떨어뜨리거든 그때 일제 사격하라!”
“네, 대장님! 알겠습니다.”
청일, 노일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바 있는 요시다 수비대장(소좌)은 조선 의병을 ‘오합지졸’로 매우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는 말 위에서 일본도를 치켜든 채 의기 당당하게 무동촌으로 들어왔다. 그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 김태원 의병장은 침착하게 돌담에 숨어 적장 요시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방의 총격전이 벌어져도 요시다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배짱 좋게 진두지휘하면서 돌진해 왔다. 마침내 요시다가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김태원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요시다는 김태원 의병장 총소리에 흠칫 놀랐다. 순간 두 의병의 천보총에서 불을 뿜었다. 다른 의병들의 총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었다.
역전의 노장(老將) 요시다는 우리 의병들의 총탄에 보기 좋게 꼬꾸라졌다. 일군들은 자기네 대장이 꼬꾸라지자 허겁지겁 도망가기 바빴다. 김태원은 장검으로 길바닥에 떨어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그가 소지한 만리경(쌍안경), 일본도, 육혈포 등도 노획했다. 김태원 의병 부대는 재빠르게 뒷수습을 한 뒤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급히 무동촌을 떠났다. 무동촌 전투는 한말 호남 의병사에 빛나는 승전이었다. 일제 군경들이 일당백을 자랑하면서 우리 의병을 무시하던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준 쾌거였다. 김태원 의병장은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요시다 광주수비대를 격파한 기쁨도 잠시였다. 1908년 1월 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담양의 금성산성에 머무는 중, 일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삼연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에 은신하다가 일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1908년 3월 26일의 토물(土泉)전투에서는 토물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적을 유인하여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 30여명을 살상케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 형제 의병부대에 철저히 농락당한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였을 뿐 아니라,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하는 대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에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는 도포장(都砲將) 최동학(崔東鶴)을 잃었고, 대곡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3월 29일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되었다. 형 태원은 아우의 탈옥 작전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허리를 다쳐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가 잠시 신병을 치료하려다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의 제보로 1908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발각되었다.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가 김태원 의병부대를 포위하였다
마을주민들이 전하는 김준의병부대 이야기는 1908년 일본 경무국이 편찬해,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제2특설순사대에 관한 편책’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908년 4월 24일 제2특설순사대는 김준 의병장의 비서 김규철을 붙잡아 의병부대의 주둔지를 파악한 후, 다음 날 붙잡힌 전령사 이문경을 통해 밝혀진 어등산 박산동에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1908년 4월 25일 어등산 박산동을 기동대와 합세해 포위해 올라간 일본 군경은 이날 오후 1시부터 6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과 부하 김해도 등 의병 13명(혹은 23명이라고 함)이 토굴과 바위굴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제2특설순사대에 관한 편책’은 시신 중 “은색 두루마기와 흰색 비단저고리를 착용하고 쌍안경 1개, 조선도 1개, 자석 1개, 화약통 1개, 서류 약간을 소지”한 전사자가 바로 김태원 의병장이라고 기록했다. 그의 나이 38세 였고, 동생 김율 역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키려는 일본 군경에 의해 어등산에 끌려가다 시신 확인 후 총살되었으며 나이 27세였다.
아- 바람에 서걱이는 산죽 소리.
빽빽히 자란 신이대의 숲에서 산이 운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일제 군경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전국 각지에서 전선 없는 전쟁을 줄기차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에서 나타난 것이다. 의병들의 최후는 처참하게 버려졌지만, 그 의로운 혼은 시대를 따라 의병 정신으로 살아있으며, 석굴 앞 엄나무는 두릅나무 과의 낙엽교목으로, 날카롭고 험상궂은 가시를 빽빽이 몸에 붙인 채 저승사자의 도포자락을 새벽닭이 울 때까지 꼼짝없이 잡는다. 엄나무가 제 할 일을 다 못하고 되돌아가는 귀신 쫒는 나무라는 별명으로 파수꾼이 되어 의병전적지 앞에 세월을 지키고 서있다.
(석굴 앞에서 행사 진행)
의병들은 대체로 지역주민들로부터 군량미를 조달받아 해결하였다. 행군 중에는 각지 촌락에서 식사를 하거나 각자 소지한 예비식량이나 주먹밥, 미숫가루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형태였고, 계절 따라 죽순, 취, 두릅, 등 어린 순이나 잎, 산딸기와 더덕, 익어가는 열매 등으로 허기를 때웠다. 그리고 친일파의 창고를 털어 군량미를 비축하기도 했다.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던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에는 전 국민이 의병 전선에 동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민들이 점점 의병화 되어갔다.
의병들은 몸의 고단함도 배고픔도 두려운 건 없다. 한말의 구국 운동인 의병전쟁은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민초들이 맨 주먹으로 일으킨 것이다. 그것의 승패는 처음부터 불을 보듯 뻔 했으며 그 점은 의병 자신들도 알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강인한 정신이 살아있음이요, 삶 자체이니 그 정신은 시대를 달리하고 모습을 달리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호남의병장
창평 출신의 고광순 의병장 역시 호남의병의 불씨를 되살린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호남을 지킨 고경명의병장의 후손이다. 지리산 피아골을 중심으로 60노구의 몸으로 10여년 고군분투하였으나 1907년 10월 일본군경의 기습을 받아 고광순을 비롯한 30여명의 의병들이 장렬히 순절하고 말았다.
그 후 새로이 등장한 의병장으로 김원국, 김원범 형제, 양진여, 양상기 부자, 김동신, 전해산, 심남일(호남의 제일), 안규홍(안담살이), 이기손, 조경환, 오성술등이 있다. 호남 의병 중에는 부자 또는 형제 의병들이 많았는데, 김준, 김율 형제와 양진여, 양상기 부자는 1907년 후반부에 1908년 광주-나주 지역을 무대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이끌었던 의병부대는 많게는 2-300명에서 수십명 규모로 활동하였다. 유격전술의 ‘치고 빠지기’를 자유롭게 구사했지만 전투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여려운 상황이었고, 의병활동이 거세어지자 일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
1909년 1월 10일 김준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도 어등산 자락의 雲水洞에서 순국하였으며, 9월 26일 의병장 양동환 의병부대 80여명이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10여명이 전사하였고 전해산 의병부대에서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 역시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두 달간에 걸쳐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자행하여 이때 호남의병의 500여명이 전사했고, 피체 혹은 자수자가 1500명을 웃돌았다. 후기 의병 당시 가장 강성했던 호남의병은 일제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에 의해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종식되었다.
주먹밥을 먹다
압록강 행진곡을 들으며 주먹밥과 고구마를 먹는 시간이다.
의자에 걸터 앉아 점심을 먹는 아이들 누구하나 푸념이 없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뜻이 되어 마주보며 먹는 주먹밥과 숲속에서의 한나절이 감동으로 몰려든다. 100여년전 나라를 위해 싸운 그 분들의 행적을 좆아 작은 발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큰 북이 한번 울리고 난 뒤의 진한 여운이랄까..... 백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의병으로 나라를 지켜 온 숨결이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이 다음 세대로 이어가야 할 소중한 정신문화였다. 독립군가와 압록강 행진곡의 슬픔이 목을 타고 넘어와 보리밥에 소금 간을 한 주먹밥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숲속 산골 문화 체험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나오는 압록강 행진곡을 따라 부르며 숲속 산골문화체험을 하는 시간이다. 잘 말랐을 때 태우면 연기가 나지 않는 나무로는 어떤 나무가 있을까?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홍자색의 꽃을 가지며 빗자루를 만들 수 있고 사립문의 재료가 되는 싸리나무와, 앞에 설명이 있는 때죽 나무, 그리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맹감나무(청미래덩굴), 등을 리플릿을 참조하며 설명하였다.
만들기 체험에는 자연에 있는 흙이나 나뭇가지, 껍질, 열매, 풀꽃 등을 이용하여 한 시간여 동안 태극기 만들기를 하였다. 고사리의 푸른 잎, 붉은 물이 든 마삭줄, 가느다란 풀줄기, 물양지꽃, 부러진 소나무가지, 왕고들빼기의 노란 꽃잎등 다양한 재료가 이용된다. 하얀 A4용지에 목공풀 만을 사용하여 만든 각양각색의 태극기가 전시되었다.
( 어등산 의병이야기 행사를 끝내며)
문화원에서 준비한 선물을 나누어 주며 체험행사를 마치고, 어등산을 내려오는 참가자들 손에 작은 태극기 하나씩 들려져 있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그들의 태극기가 휘날린다.
여기에 김태원 의병장이 김율 아우에게 주는 글을 끝으로 체험행사를 마친다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충천한 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겠나? 온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려는 것은 아니라네. 전쟁이란 본시 죽음을 각오하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에 지하에 다는 것이 옳으리라. -1918년2월18일 친형 태원이 쓰다.
나즈막한 어등산을 내려오는 길에 가을 하늘이 오늘따라 무척 파랗다.
<참고문헌>
. 전남 폭도사 (이일룡 譯, 秘錄 韓末全南義兵戰鬪史)
. 廉在業 (蘆月 간 遺稿) ‘從弟在포 行錄’
. 대한매일신보
. 鹿川遺稿(1974)권 하, 행장 및 전 참조
. 義重泰山( 홍영기 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