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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시작은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1915m이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은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 등이라고도 했다. 이들 중 두류산(頭流山)이 제일 마음에 와 닿는다. 해석해 보면 백두산(頭)에서 흘러(流)내린 산이라는 뜻이다. 즉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이 지리산까지의 이음이라는 인식이 고스란히 이 두류산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들 이해했다. 사실 지리산을 “이 산을 타다보면 지루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억지 얘기도 가끔은 등장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보면 ‘두류’는 우리말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에 불과하다. 즉 두류는 옛 우리말 ‘두르’였다. ‘병풍처럼 크게 둘렀다’라는 의미이다. 곧 ‘큰 산줄기’라는 말로 ‘두름/ 둠’의 형태였던 것이다. 이 ‘두르〉두류’로 변천된 것에 적당하고 그럴싸한 한자 頭流를 갖다 붙인 것이다. 또한 ‘지리’는 ‘두르〉드르〉드리〉디리〉지리’의 과정을 거쳐 변하게 된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 ‘지리’에 적당한 한자인 智異를 갖다 붙여 오늘날의 한자어 지리산(智異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즉 구개음화와 전설모음화 과정을 거쳐 결국 오늘의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지루한 산’, ‘지혜로워 지는 산’이라는 말은 삼가자.
이 지리산의 최고봉이자 백두대간의 끝인 천왕봉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는 아무래도 산청군 시천면의 중산리에서 오르는 길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31쪽 이하
사랑하는 후배가 운영하는 '좌충우돌 백두대간' 팀에서 2018년을 맞이하여 큰 행사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이른바 '백두대간 릴레이'가 바로 그것인데 전구간을 33구간으로 나눠 북진으로 진행하되 한 팀 혹은 한 사람이 1일 혹은 1주일 간격으로 바톤을 이어받아 연속으로 진행한다는 겁니다.
그 시작이 2월 첫째 주 토요일인 2018. 2. 3.이니 대간의 종착지인 진부령에는 9월 첫째 주면 떨어지게 되겠군요.
그 백두대간을 이어서 걷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쪽 백두대간이 시작하는 진부령부터 걸어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방법 즉 남진(南進). 그리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지리산 천왕봉을 출발하여 진부령으로 진행하는 방법 즉 북진(北進) 등이 그것들이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이 되는 날 북쪽의 나머지 백두대간 구간을 이어가기 위해 두 번째 방법을 택한다. 즉 북진(北進)이다.
- 졸저 전게서 9쪽
다른 곳도 아닌 백두대간이고 다른 이도 아닌 '경아 대장'과 '코털 싸나이'가 운영하는 곳이며 또 북진이어서 그 시작이 지리산이니 '두류산인'이고자 하는 제가 안 가 볼 수가 없습니다.
지리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게 됩니다.
사실 '지리산'이라는 이름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887년) 고운 최치원 선생이 쓴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는 知異山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 이우성 선생이 교열하고 번역한 '신라 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에는 智異山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독자들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지금의 한자어를 사용한 것이고 어디까지나 원문은 知異山입니다.
참고도 #1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 대동탑비
그후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에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는 기사가 최초입니다.
이를 보면 삼국사기나 기타 문서의 기사에도 한자어는 地理山으로 되어 있어 발음은 같으나 한자어 표기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 이르러서야 智異山이 오늘날과 같이 표기되게 됩니다.
그러니 지리산이라는 발음만큼은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불려졌으니 그때부터 지리산이라는 지명이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시대 이후에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 개인적인 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많이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영남학파들에 의해서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집중적으로 사용됐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는 주로 '두류산'이 체제 부정적인 이들에 의해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즉 멀리는 노장사상을 주창하는 이들부터 가까이는 동학혁명과 농민항쟁 그리고 빨치산에 이르기까지 기득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거론합니다.
일면 타당하다고도 보여지지만 저는 우리나라 산줄기 즉 백두산(頭)에서 시작한 우리나라의 산맥山脈이 흘러내려와(流) 지리산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되었다는 산줄기 인식이 자리잡게 됨에 따라 그 이름이 정착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인문지리학이 발전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죠.
참고도 #1 죽간竹簡에 쓰인 사마천의 '사기'
한편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인 방장산은 사마천의 사기에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사마천은 방장산을 신선이 산다는 중국 전설 속의 신성한 공간이라고 적었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방장산은 사마천 이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한번은 필히 가봐야할 곳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우리나라 사대부에게 그곳이 어찌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겠습니까?
다행히 그 방장산은 우리나라에 있었습니다.
이 방장산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준 이가 바로 당나라 사람 두보(712~770)였습니다.
필경 그 시작은 두보의 시 봉증태상장경기이십운奉贈太常張卿垍二十韻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 시의 초장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 바다 밖 삼한三韓에 있다 즉 方丈三韓外’라고 읊으면서, 방장산은 조선의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중국에는 삼신산이 없고 대방군은 남원의 이전 이름이니 이 방장산이 두류산임에 틀림없다고 한 남계 신명구(1666~1742)의 말이 이해를 돕습니다.
이쯤 되면 조선의 사대부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이 방장산을 그들의 유식遊息의 길이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향한 배움의 길 그리고 공자나 남명 조식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적을 향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지리산을 개관해 봅니다.
예로부터 지리산하면 천왕봉과 반야봉을 그 중심에 놓았습니다.
하나를 더 꼽는다면 물론 노고단입니다.
조선 최고의 산지山誌라고 할 김선신의 두류전지의 두류자손록을 보면, "살펴보건대, 두류산에서 흘러내린 산들은 모두 반야봉과 천왕봉을 조종祖宗으로 삼는다. 천왕봉의 줄기는 북쪽으로 함양과 산청에서 흐름을 다하고 동쪽으로는 단계(산청의 옛 이름)와 진양에서 흐름을 다한다. 오직 반야봉의 줄기만이 서쪽으로 남원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구례에 이른다."고 하였숩니다.
- 두류전지, 김선신 저, 전병철 역56쪽
그러나 아무래도 산줄기를 볼 때에는 먼저 물줄기를 봐야합니다.
그래야 물줄기 안에 있는 산줄기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리산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펴보건대, 두류산 동쪽의 물은 운봉에서 발원하여 함양·산청·단성을 지나 안의의 여러 하천과 합류하여 진주의 ①남강이 된다. 두류산 서쪽의 물은 장수의 수분치에서 발원하여 남원과 구례를 지나 두류산 서쪽의 여러 하찬과 합류하여 하동의 ②섬진강이 되어 남해로 들어간다. 두류산 남쪽의 물은 모두 천왕봉에서 발원하여 ③청천이 되었다가 남강에 합류한다. 에두르고 굽어지며 구불하고 곧은 형세를 상세하게 서술할 겨를이 없어 대략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세 줄기를 열거하여 쉽게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 김선신 전게서 68쪽
물론 남강의 발원지는 운봉이 아니고 남덕유산의 참샘입니다.
하지만 지리산만 놓고 봤을 때 가장 북쪽이 운봉이니 그렇게 본 것 같습니다.
우선 가까운 것부터 보죠.
먼저 ③번을 보면 청천인데 이는지금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왕봉에서 발원하는 물은 살천薩川(지금은 시천천矢川川이라 부름)이라 불렀습니다.
선조들은 그 살천의 한 줄기는 ①향적사 앞에서 나오고 다른 한 줄기는 ②법계사 아래에서 나와 살천촌을 경유하여 두제봉 아래에 이르며 동북쪽으로 흘러 살천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 남쪽이 아니고 북쪽을 향하게 된 이유는 낙남정맥이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리산을 크게 싸고 있는 물줄기를 남강과 섬진강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우리 선조들이 산줄기를 볼 때 반드시 물줄기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지리산을 보려면 남강과 섬진강을 보라!
이는 곧 이 둘을 가르는 백두대간을 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지리산은 종교와 떠나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찰도 많고 암자도 많으며 여기저기 기도처가 산재해 있고 이를 무시하던 유교적 신념으로 가득찬 조선의 사대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서론은 이쯤하고 이제 지리에 듭니다.
개인적으로 "지리산에 든다."고 하는 것보다 "지리에 든다."고 하는 것이 더 지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지리산국립공원관리공단 입산통제소를 지나 중산리 사하촌 식당가에 들어서면 좌측 관광버스 주차장으로 오르는 길옆에 남명 조식 선생의 시조 ‘두류산가(頭流山歌)’가 새겨진 지리산국립공원 표석이 산객들을 맞이한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뇨 나난 옌가 하노라.
- 졸저 전게서 34쪽
남명 조식(1501~1572) 선생.
지리산을 이야기할 때 남명 선생을 빠뜨린다는 것은 지리에 얽힌 인문지리人文地理를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단 남명하면 대비되는 이가 바로 남명과는 갑장인 퇴계 이황(1501~1570)입니다.
학창시절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인물은 물론 남명보다는 퇴계입니다.
벼슬을 할 만큼 했고 도산서원까지도 세웠으며 온건하기도 한 인물이기도 했으며 더욱이 우리가 쓰고 있는 1,000원 권 지폐의 인물이기도 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제도권 안의 재조在朝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리로 오면 모든 게 달라집니다.
퇴계 뿐만 아니라 율곡이 온다고 해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지리하면 남명입니다.
남명은 처사적 생활로 현실을 비판하며 수기修己의 방법으로 '경의敬義'를 중시하여 '실천'을 강조하였습니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서 비판자적인 위치에서 현실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실천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이죠.
반면 퇴계는 평생 관직 생활을 통하여 수하의 많은 문인들을 정계에 포진시켜 놓았던 만큼 현실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현실생활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게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경상우도를 기반으로 한 남명의 이러한 사상은 '남명학파'로 불리게 됐으며ㅡ 이러한 자세는 임진왜란 당시 손주 사위인 곽재우, 김면, 정인홍, 박경신 등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런 그의 개방적인 사고는 불교에 대해서도 그러하여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과도 교분을 가져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입장을 가졌습니다.
이는 자칫하면 성리학 일변도에서 획일화 될 수 있는 위험성을 탈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남명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산꾼들의 관점에서 볼 때 두 분의 차이점은?
그렇죠.
퇴계는 소백산에 묻혀살면서 소백을 그리워 했고 소백을 찾았는데 그런 그의 심경은 '유소백산록'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퇴계의 소백에 대한 그리움은 위 '유소백산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필자는 지금은 길도 없어진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올랐던 소백산을 따라가 보았고, 그 경로는 제 블로그(http://blog.daum.net/1kthlg2/1215)에 담겨져 있습니다.
반면 남명은 일찍이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세우고 문인들 양성에 힘을 기울이던 남명은 12차례에 걸친 지리산행을 통하여 스스로 '방장산인'이라 부를 만큼 지리산을 경외하며 지리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런 남명의 지리산에 대한 경외심의 일부가 위 시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도화나 무릉 같은 시어詩語는 굳이 노장사상을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당시의 유학자들에게는 만연한 풍조였을 것이니 우리는 산꾼의 입장에서만 파악하면 됩니다.
당시 관인官人 즉 벼슬아치들 또한 도연명(365~427)의 귀거래를 '물러남'의 가장 모범적인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니 이 정도면 그들의 탈속의지脫俗意志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두류산은 지리산의 다른 말이며 양단수는 남강과 섬진강을 이르는 시어로 이해합니다.
'자연에 귀의한 은둔자니 세속과의 완전한 단절' 같은 참고서적參考書的 풀이'는 '실천'을 중시한 남명에게는 사치스러운 단어의 나열이며 사실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런 시어는 지리에 대한 경외심의 다른 표현이라 이해합니다.
세속과 부처님 나라의 경계인 법계교(法界橋)를 건너면서 속세를 벗어나 선계로 들어선다.
- 졸저 전게서 34쪽
그 통천길로 올라가는 좌측 모서리에 비碑 하나가 보입니다.
우천 허만수 선생 추모비입니다.
지리에 들어와 살다가 흔적도 없이 지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우천 허만수 선생.
진주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유학까지 갔다온 분이라고 합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친일파로 가도 무방했을 분위기였는데 일본 유학 시절 산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후 지리산이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 전 지리에 들어와 등로 개척이나 조난자 구조 등 선구자적 일을 하며 지리에 묻혀 살다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홀연히 지리 어디론가 사라진 분으로 그 분의 주 무대는 세석이었다고 합니다.
이따 한 번 더 거론하기로 하죠.
좌틀하면서 중산리 계곡을 따라 오릅니다.
현수교를 건너면서 직진하여 깊은골을 따라 장터목으로 오르는 등로와 우틀하여 돌계단으로 올라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이곳이 살천 즉 법계사에서 내려오는 물과 장터목 자세히는 향적사에서 내려오는 물이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틀하여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의 품안으로 들어가게 되는군요.
망바위를 지나고.....
천왕봉에서 내려다 본 세존봉
이 정도 올라왔으면 탁영 김일손(1464~1498)을 떠올리는 것도 그다지 사치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1489. 4. 이 법계사1450m를 오르면서 "우뚝한 산봉우리를 하나 만났는데 세존암"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존암은 매우 가파르고 높았으나 사다리가 있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올라가 천왕봉을 바라보니 몇 십리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여기서부터 길이 조금 완만해졌다. 5리 정도 더 가서 법계사에 다다랐다. 절에는 승려 한 사람만 있었다."고 했는데 이 세존봉에 있는 대臺가 바로 문창대입니다.
위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1379.3봉으로 지금은 '구舊 문창대'로 불리는 곳이죠.
김일손은 세존대만 보았지 부근에 있는 문창대는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 위 지도의 문창대로 표기된 곳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오기한 것임.
우측으로 세존봉1368m의 문창대가 ‘지리10대(臺)’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며 오르는 것도 의미 있다. 지리10대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기도발이 좀 먹힌다는 수도처다. 대부분 수려한 암벽이 있고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공통점이 있다. 새소리만 들리던 선계에서 갑자기 사람 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다음날 일찍 천왕봉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산객들의 베이스캠프인 로타리 대피소이다.
- 졸저 전게서 34쪽
지리 10대 중 하나인 문창대(구 문창대)가 언급이 됩니다.
문창대라......
참고 사진 구舊 문창대
문창文昌은 고운 최치원의 시호입니다.
사실 지리산 문창대를 세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조선 중기 영남사림의 중심 인물이었던 진주 선비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 1546~1632)입니다.
즉 1489년 탁영 김일손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성여신은 1616년 정확하게 짚으면서 지났던 것이죠.
그는 1617년 중산리 법계사 코스로 천왕봉을 등정한 후 칠언고시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두류산시(遊頭流山詩)’를 남깁니다.
* 부사 성여신은 23세 때 지금은 터만 남은 산청군 단성면의 단속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였는데, 서산대사 휴정이 삼가귀감三家龜鑑 - 선가, 도가, 유가 등 삼가의 교훈 중 귀감을 삼을 만한 글을 모아 정리한 책-을 편찬하면서 유가儒家의 글을 맨 뒤에 둔 것을 발견하고는 이에 분개하여 책판과 단속사에 불을 지를 정도로 호기가 넘치는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 시에서 문창대와 법계사를 소개하는 대목을 보면,
'黃昏走入法界刹 황혼 무렵 겨우 법계사에 이르렀네.
- 중략 -
東蹲世尊峰 石角如人立 동쪽에 걸터앉은 세존봉에는 우뚝한 바위가 사람이 서 있는 듯
西峙文昌臺 孤雲遺舊跡 서쪽에 문창대 솟아 있으니 고운이 옛 자취 남긴 곳이네.
人言石角遺仙筆 路險境絶無由觀 바위에 고운의 필적 새겨 있다 하는데 험하고 가파른 절벽이라 가볼 길이 없네.'
- 하략 -
이렇게 성여신에 의해 문창대가 알려지면서 그 이후 칼바위 ~ 법계사 코스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남긴 여러 선비들의 기행록에 문창대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문창대가 법계사 주변의 명소로 자리 잡혀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창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는 이론이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은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 법계사를 자주 오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곳에 올라 멀리 서편에 위치한 향적대-제석봉 남쪽 방향 바로 아래-의 바위에 과녁을 만들어 놓고 활을 쏘기도 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시궁대矢弓臺 또는 고운대孤雲臺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던 것을 최치원이 사후에 받은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따서 문창대로 개칭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곳(舊 문창대)이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법계사 일주문을 지나서 천왕봉 오르는 등산로를 따라 곧 나타나는 나무계단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비킨 곳에 위치해 있는 바위지대(新 문창대)가 그것인데 어떤 게 진짜 문창대일까요?
참고 사진 新 문창대
사실 이 신 문창대가 발견된 것은 순전히 위에서 언급한 조재영 덕분입니다.
조재영은 1979년 진양지를 근거로 문창대를 찾아나서서 위 위치에 있는 바위의 글씨를 발견하고는 이곳이 문창대라고 발표를 한 것입니다.
신 문창대의 주장 근거가 된 것은 바위의 남쪽 상단에 '고운 최선생 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屨之所'라는 각자刻字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다루기에는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 같으니 소개하는 정도로 끝내죠.
그 이후로 이 문창대가 두 곳으로 나누어 지게 된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로타리 대피소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석간수로 묵을 축이면 법계사 일주문이 근엄하게 정면으로 보인다. 544년에 창건한 법계사는 우리나라 사찰로서는 최고지(最高地)인 해발 1400m에 위치한 절집이다. 새벽에 오를 경우 어두운 고요함 속에서 은은하게 새벽 예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 졸저 전게서 34쪽
법계사는 백제 성왕 22년(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기조사하면 떠오르는 사찰이 사실 이 법계사보다는 아무래도 화엄사죠.
화엄사나 연곡사 모두 이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이른바 544년 설說)고 합니다.
그러니 이 법계사까지 따지면 같은 해에 동시다발적으로 큰 가람 세 개를 창건했다는 겁니다.
물론 당시 사찰의 규모가 지금같지 않은 한 동의 건물에 불과했을 것이긴 합니다.
그러던 것이 중창을 거듭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일 테고....
연기조사에 대해서는 노고단을 지나 코재 부근에서 화엄사를 바라보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한편 이 법계사는 여말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과도 연결(http://blog.daum.net/1kthlg2/1217 참조)이 됩니다.
즉 1380. 9. 운봉의 황산대첩에서 대패한 왜구의 잔당들이 뱀사골 입구인 반선에서 뱀사골 계곡을 따라 화개재에 오른 다음 백두대간 남진 루트를 타고 진행하여 영신봉 아래에 있는 영신사에 이르러 '가섭상迦葉'을 보고는 이 상의 목을 칼로 내리쳐(刃斫亦被島夷兇,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에 나오는 시구詩句 참조) 훼손하였죠.
1472. 8. 17. 영신사를 들른 점필재 김종직은 왜구에 의해 훼손된 가섭상을 보고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噫 倭眞殘寇哉."라며 탄식을 했었습니다.
왜구들은 계속하여 천왕봉까지 도망을 가서는 성모사에 있는 성모상의 목까지 훼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법계사로 내려와서는 이 절에 불을 질렀던 것이죠.
이렇게 1380년에 폐사된 절을 1405년(태종 5)에 중창했으나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또 다시 소실되었고....
그러던 것을 한국전쟁이 끝난 후 폐사가 된 법계사에 초막을 짓고 지리산을 오르는 산객들에게 밥까지 해주며 법계사를 일으킨 분은 다름 아닌 '손보살'이라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많은 공덕을 쌓았는지 손보살 덕분에 불사가 이루어져 법계사는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는 말이 돌았다고 하죠.
참고로 실상사도 같은 설화가 전해지기는 합니다.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면, 조겸은 1623년 작성한 유두류산기에서 “승려는 없고 노파가 있어 밥을 지어줬다."고 하였고, 박래오(1713~1785)는 '유두류록'에서 "법계당은 중봉 밑에 있는 세 칸 건물이었다. 나무를 쪼개 지붕을 덮었는데 기와를 대신하였다. -중략- 법계당을 지키는 자가 마루에서 내려와 엎드려 인사를 하면서 '저는 창녕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처자식을 데리고와 머물 뿐 그 이외에는 머무는자가 없었다."
양란兩亂 즉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법계사는 거의 쇠락된 상태였을 겁니다.
승려도 없는 사찰에 무속인들이 기거를 하면서 법계사는 법계당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법계사는 한때 순수한 사찰이라기 보다는 무속적 기능을 가진 곳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同旨 이종수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보고사 88쪽)
이 법계사는 어사 박문수(1691~1756)와 관련한 설화 하나가 전해집니다.
모친이 주목피의 즙으로 밥을 짓고 즙으로 목욕하며 천일기도를 올리고는 문수보살의 가피로 자식을 얻었다 하여 '문수'로 이름 지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지리산 자체가 문수보살의 가피력을 입은 산이라는 얘기가 되는군요.
이따 반야봉에서 한 마디 더 거들겁니다.
어쨌든 법계사는 태백산 망경사1470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고지에 위치한 절입니다.
암자까지 포함할 경우 반야봉 아래에 있는 노란 지붕의 묘향대1500m에게 자리를 양보하여야 할 것이고....
법계사 좌측으로 나무계단을 올라 신 문창대를 지나면 개선문을 만납니다.
개천문이었던 것이 언젠가 개선문으로 개명을 했더군요.
그러고는 좌측으로 직벽을 만납니다.
그 아래 샘물이 하나 있죠.
좌측 천왕봉 바로 아래 직벽에는 천왕샘(지도 상 ‘다’의 곳)이 있다. 석간수인 이 샘의 물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이 옆의 안내문에는 이 샘이 남강 발원지란다. 거짓말!
“거짓말? 여기가 남강의 발원지가 아니란 말이야? 그럼 남강의 발원지가 어디야?”
국립공원 안의 안내판을 잘못 써놨다니 장감독은 자못 놀란 표정이다.
“남강 들어봤지? 진주 남강.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 로구스케를 안고 떨어져 죽었다는... 그 남강의 발원지가 여기가 아니라는 말이지.”
“무슨 말이야? 여기 이렇게 써놨는데!”
하긴 어디든 안내판에 씌어져 있는 글을 보면 그 내용을 신뢰하기 마련이다. 산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의외로 엉터리 내용이 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남강의 발원지
그렇다. 그럼 남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산경도(山經圖)를 보자. 백두산을 떠난 백두대간은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 ~ 속리산을 지나 약1528.7km 지점에 이르러 남덕유산1507.3m을 만난다. 대간은 거기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육십령으로 향하면서 좌측으로 산줄기 하나를 내어 놓는다. 그러면 대간과 그 줄기 사이에 물줄기를 하나가 생기게 되는데 이게 바로 남강이다.
즉 남덕유산이 남강의 시원(始原) 곧 발원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지 줄기는 대한산경표에 의하면 남강기맥이라는 도상거리 약 139.3km의 산줄기가 된다.
“무슨 얘기하는 거야? 갑자기. 대한산경표가 뭐고 남강기맥은 또 뭐야? 그리고 산경도는 또 뭐고? 산자분수령? 합수점? 가지 줄기? 갑자기 형 무슨 얘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는 거야?”
용어의 혼란이 오는가 보다. 하긴 장감독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산을 가면 그냥 산이면 되는데 갑자기 생소한 단어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니 혼란스러운 거 같다. 하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지리시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용어들이니까.
“그래 하나씩 보자. 우선 산경도는 말 그대로 산줄기 지도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어. 장감독도 우선 그냥 슬쩍 넘어가듯이 보기만 하면 돼. 앞으로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얘기들이니까. 이 지도를 잠깐 봐. 우리나라 산경도는 백두산에서 나온 백두대간이 지리산 천왕봉까지 큰 줄기(굵은 선)로 뻗어있고 그 옆으로 정맥이라는 조금 더 가는 줄기들이 나와 있지? 이번에는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자. 그러고 백두산을 나무의 밑동이라고 보자. 그러면 백두대간이 나무의 큰 줄기같이 보이지? 거기서 옆으로 무수히 가지를 치는 작은 줄기들. 이 산경도에서는 그 작은 가지를 정맥이라고 부른 거야. 그러니까 가지 줄기니 뭐니 하는 얘기들은 우리나라의 산줄기들을 나무에 빗대어 본 거야. 그래서 우리나라 산줄기 체계를 나무 수(樹)를 써서 수체계이론(樹體系理論)이라고도 하는 거지.”
말이 길어지고 자신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조금은 헷갈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궁금증이라면 참지를 못하는 장감독이 벌써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니 별 부담은 없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그리고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자. 아까 한 얘기 반복해서 얘기할 게.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봐. 하나의 산줄기(A)에서 다른 산줄기(a)가 가지를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분명 물줄기(b)가 나오고 그건 분명 계곡을 형성하게 돼. 크든지 작든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 산줄기가 분수령이 되는 건 확실하고 그 산줄기에서 내려 온 물들은 다 계곡으로 모이잖아? 그 개울이 모여서 천(川)이 되고 그 천(川)이 모여 조금 더 큰 천(川)이 되고 그러고는 그게 모여서 다시 강(江)이 되고, 그 강(江)들이 모여 바다로 흘러가고... 이게 자연의 이치 아니겠어?”
“그건 알지. 그런데 또 합수점이라는 건 또 뭐야? 산줄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고?”
“합수점(合水點). 말 그대로 물이 모이는 지점이지. 양수리에 가면 ‘두물머리’ 있지? 합수점의 우리말이 두물머리 아니겠어? 양수리의 양수(兩水)가 곧 두물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한 개의 물줄기 가령 남한강과 다른 하나의 물줄기 가령 북한강이 만나는 곳. 그곳이 두물머리라는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두물머리가 무수히 많은 셈이지. 그 두물머리를 한자로 쓰면 합수점이고.”
자전거를 타는 장감독이니 두물머리 얘기를 꺼내니 귀가 번쩍 열리는 것 같다.
“양수리. 나도 잘 알지. 자전거 타고 가봤던 곳이니. 그런데 그 합수점이 산줄기와 무슨 상관이야?”
“그럴 줄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야. 조금 전 얘기했어. 이 합수점은 산줄기를 얘기할 때 아주 중요한 개념이야.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산경표라는 책은 이 ‘합수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론이야. 그 핵심은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고.”
“정말 머리 아프게 만드네. 산자분수령은 또 뭐야!”
장감독이 짜증을 낼만도 하다. 사실 천왕봉에 아직 오르지도 못했다. 즉 대간길에 아직 한 발도 내딛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무슨 복잡한 얘기를 많이 하는가 하는 불평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그래. 간단하게 산자분수령을 보자. 앞으로 계속 나올 얘기니까 미리 간 좀 보자는 거야. 지도 좌측을 보면 가장 굵은 선이 백두대간이야. 그리고 좌측 위로 남덕유산이 보이지? 남강기맥도 보이고. 이게 백두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가지를 쳤다는 걸 보여주는 개념도야. 앞으로 자꾸 애기할 거지만 우리나라 산줄기에는 반드시 계급이 존재해. 위계질서가 명백하다는 것이지. 같은 급이라도 서열이 있게 마련이고. 즉 군대에서 병장이라고 다 같은 병장이 아니잖아? 이게 아주 재미있는 많은 것을 보여주게 돼. 그러니까 그 계급 개념들의 한 가지인 기맥(岐脈)이니 지맥(枝脈)이니 하는 것들은 나중에 보기로 하자. 우선 백두대간(A)에서 남강기맥(a)이 가지를 쳤다는 것만 생각하자고. 자, 봐. 대간에서 남강기맥이 갈리는 그 사이로 남강(b)이 흘러나오지? 아까 얘기했잖아. 한 가지에서 다른 한 가지를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물줄기가 하나 흐르게 된다는.... 바로 그 원리야.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이를 영어로 표현해보면 'Ridgeline is genuine in that it never crosses water,' 정도가 되겠지. 이따 자세히 볼 거니까 우선 개념만 알아둬.”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문법적인 해석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산 곧 산줄기는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고 해석하자. 이를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이라고 한다. 여기서 ‘自’를 스스로란 ‘부사(副詞)’로 본 거다. 고로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못하니까 물을 만나면 그 산줄기는 맥을 다하게 된다. 그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두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합수점도 그냥 합수점이 아닌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와 만나는 합수점에서!
- 졸저 전게서 37쪽
남강지맥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드리고 싶지만 여기는 지맥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제 블로그(http://blog.daum.net/1kthlg2/1230)를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산줄기에 대해 아주 자세히 나와 있고 곧 출간 될 '대한산경표'의 모체가 될 내용들입니다.
0.3km 이정표를 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낮이었으면 쉬엄쉬엄 뒤를 돌아보면서 올라도 무방한 곳이기도 합니다.
뒤를 돌아보면 바로 낙남정백의이 삼신봉 일대가 보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몽인(1559~1623)에 따르면 저 삼신봉은 영신사靈神寺, 의신사義神寺, 신흥사神興寺 등 세 사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세본봉을 좀 더 가까이서 보게 되고.....
정상도 바로 보이고....
그러고는 천왕봉입니다.
지리의 최고봉 아니 남한의 최고봉인 천왕봉입니다.
바위로 이루어진 천왕봉에서도 가장 높은 바위.
일월대입니다.
여기서 해나 달이 떠오르거나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천왕봉이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이라고 하여 이런 글자도 음각되어 있습니다.
예전에는 성모사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성모상이 올라올 경우를 대비해서 이렇게 보호 장치를 하려고 했는데 천왕사에서 거부하여 결국 이 구조물도 철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국 전쟁 이후에는 반지하 비트(비밀 아지트)가 있어서 김순용이라는 분이 무속인과 등산객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고도 합니다.
무속인?
승도僧都 지리산에 무속인?
지리산은 산까마귀도 염송念誦할 줄 안다고 합니다.
그럴 정도로 거의 방사선형으로 흘러진 이 골짜기의 구석구석마다 산자수려山紫秀麗한 명당지를 가려 역사상 수 많은 명승名僧이 배출된 거찰이 깃들이고 있는 이 지리산에 무속이라뇨?.
아까 모두에서 말씀드렸죠?
지리산은 종교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곳이라고.
선인들의 산행기를 보면 불교와 유학 뿐만 아니라 무속 즉 우리 토속신앙과 관련된 얘기도 참 많이 나옵니다.
아까 법계사도 무속인과 관련된 듯한 법계당이란 이름을 가졌었다고 했죠?
우선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에서 관련된 내용을 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천왕봉에는 볼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왜구와 광신도 때문에 사라진 성모상이 그것이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이 성모상은 천왕봉을 지키다 14세기 말에 왜구에 의해 훼손당한 적이 있었다. 간신히 복원하여 놓은 그것을 1970년대 몰지각한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하면서 또 훼손하였었다. 그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이 어렵사리 찾아서 지금은 이 성모상을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응. 나도 들어 봤어. 14세기말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연관된 얘기지. 그 전쟁이 화포를 이용한 해전으로서는 세계 최초였었다고 하잖아. 서양의 레판토 해전보다 191년이나 앞섰었고.”
“인물로는 천왕봉의 이 성모상과 고토 분지로, 최무선, 이성계 등과 그리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진포대첩, 황산대첩을 연결시켜 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형. 근데 진포대첩이나 황산대첩 때 왜구 그 잔당들이 여기까지 와서 여기 있던 성모석상의 목을 쳤다? 이게 무슨 얘기야?”
“그게 참 재미있어. 나중에 해당되는 대목에서 또 얘기하자. 그리고 성모상 얘기는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보면 자세히 나와. 나아가 후세 사람들이 그걸 다시 붙여놓았다는 말도.”
조금은 의아스러운 모양이다.
“그럼 그 성모는 누구야?”
“기록에 의하면 15세기 정도에 이 천왕봉에는 성모묘(聖母廟)라고 하여 세 칸짜리 작은 사당이 있었어. 거기에 이 성모석상이 모셔져 있었고. 여기서 맑은 날을 보지 못할 경우 이 석상에 기도를 하면 날이 갠다고 했데. 속설에는 이 성모는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고 하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라고 나와 있고.”
- 졸저 전게서 34쪽
이번에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을 보죠.
점필재가 이 천왕봉에 오른 때가 1472. 8. 15.이었습니다.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 공자)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과 한자(韓子, 당나라 사람 한유)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 높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劃)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 해공과 법종은 이른바 지로승指路僧으로 당시 지리산에 있는 사찰에 속한 승려로서 지리산 유람객들의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음.
* 여기서 국사는 엄천사를 창건한 법우화상을 가리킴.
당시 유학자들은 이 성모묘 혹은 성모사를 음사淫祠라 하여 질시疾視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남학파의 종조이자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인 점필재의 경우도 그 당시 유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군요.
1489. 4. 22. 김일손은 정여창과 같이 천왕봉에 올라 이 성묘사를 보고는,
"저희들은 도를 지키고 악을 미워합니다. 음사를 지나가게 되면 반드시 모멸하고 헐어버렷습니다. -중략- 신을 마야부인이라고하는 말은 거짓입니다. 점필재 김공은 널리 통달한 큰 유학자인데 신을 위숙황후라고 했으니 진실입니다."고 제문을 지어 노모의 장수를 위해 기도를 했다.
1611. 4. 4. 천왕봉 등정에 성공한 유몽인의 기록을 보면,
드디어 지팡이를 내저으며 천왕봉에 올랐다.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었는데 바로 성모사였다. 사당 안에 석상 한 구가 안치되어 있었는데 흰옷을 입힌 여인상이었다. 이 성모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말하기를 “고려 태조대왕의 어머니가 어진 왕을 낳아 길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기 때문에 높여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영남과 호남에 사는 사람들 중에 복을 비는 자들이 이곳에 와서 떠받들고 음사(淫祠)로 삼았다. 그래서 옛날 초나라∙월나라에서 귀신을 숭상하던 풍습이 생겨났다. 원근의 무당들이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 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 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
봉우리 밑에 벌집蜂房 같은 판잣집을 빙 둘러 지어놓았는데, 이는 기도하러 오는 자들을 맞이하여 묵게 하려는 것이다. 짐승을 잡는 것은 불가에서 금하는 것이라 핑계하여,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소나 가축을 산 밑의 사당에 매어놓고 가는데, 무당들이 그것을 취하여 생계의 밑천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모사 ∙ 백모당 ∙ 용유담은 무당들의 3대 소굴이 되었으니, 참으로 분개할 만한 일이다.
한편 천왕봉을 상봉으로도 불렀듯이 무속인들은 이 성모묘를 다른 말로 상당上堂이라고도 불렀습니다.
* 백모당은 지금의 백무동을 가리키고, 용유담은 지금은 폐사가 되어 없어진 용유당을 가리킴.
참고로 '홍씨'의 유두류산록을 보면 당시 이 신당에는 '당지기'라는 직함職銜의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무당들은 이곳에 상주하는 게 아니고 각 지역에 있다가 손님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용유당에 관한 글들을 잠깐 인용해 보면,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정경운, 고대일록, 1604) / 용유담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용왕당(龍王堂)이 있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외나무다리를 설치해 왕래하는데…(박여량 1610) / 외나무다리를 건너 허물어진 사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기다렸다.(유몽인 1611) / 못의 서쪽 비탈에는 옛날 사당이 있었는데, 무당들이 신령스러운 용에게 기도하던 곳이었다… 삼남의 무당들이 봄과 가을이면 반드시 산에 들어와서, 먼저 용유담의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그 다음에 백무당과 제석당에서 차례로 기도하였다.(이동항 1790) / 용유당(龍遊堂)(박장원 1643) / 용당(龍堂)이 건너편 언덕에 있어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었는데…(조구명 1724)」
이 용유당은 화산12곡 즉 법화산992.9m, 용유담과 연관지어 따로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겁니다.
대단한 곳인데 지리산 댐과도 맞물려 환경단체에서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당시 유학자들의 우리 토속신앙과 불교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모석상을 통하여 지리산의 성모신앙, 산신신앙과 불교와의 관계를 잠깐 들여다볼까요?
"승려 천연天然은 관서지역의 시승詩僧이었다. 용기와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시詩의 음률이 맑고도 높았다. 묘향산에서 와서 두류산 수만 골짜기를 낱낱이 유람하다가 성모묘에 이르러 그곳이 음사淫祠인 것에 분개하여 즉시 신상을 끌어내 부수고 바위 밑으로 던져 버렸다. 밤에 신상이 있던 자리에서 잔 후 휘장을 찢어 신발을 만들어 남쪽의 의신사에 내려갔다. 성여신이 이 일을 기록했다. 그 후에 어리석은 백성이 신상을 다시 만들어 이전처럼 음사를 계속했다. - 진양구지晉陽舊誌
16세기와 17세기를 살던 성여신(1546~1632)이 기록한 진양구지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승려 천연이 성모상을 훼손하였다는 것이죠.
다른 스님들과는 달리 상당히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스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여신의 유두류산시에도 이 대목이 나옵니다.
......... 전략........
昔有浮屠天演者非門突入 옛날 천연이란 중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撞破神軀投絶璧 성모신의 몸통을 깨부수어 절벽에 던졌다네
吾儒只守敬而遠之之訓 단지 '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가르침을 지키며
不爲諂不爲褻 우리 유생들은 아첨도 함부로 하지 말면 그만.
............하략........
그러면 그렇지 혈기왕성하며 분기탱천한 성여신이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죠.
자기가 공부하던 단속사에 불까지 지른 사람인데....
성여신은 1616년에 지리산을 유람했으니 이 성모석상은 여말麗末 태조 이성계에게 대패한 왜구의 잔당들이 훼손한 그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그 토속신앙과 불교를 연관시켜 보면,
무녀巫女가 굿을 할 때면 한 손으로는 금속방울을 흔들고 한 손에는 그림 부채를 가지고, 웅얼웅얼 주문을 외우고 빙글빙글 춤을 추면서, 불타佛陀를 부르고 또 법우화상法祐和尙을 부릅니다. 여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智異山의 엄천사嚴川寺에 법우화상法祐和尙이 있었는데, 불법佛法의 수행修行이 대단했습니다.
하루는 한가로이 있는데, 갑자기 산의 개울이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물이 불어난 것을 보고, 물이 흘러온 곳을 찾아 천왕봉天王峯 꼭대기에 올랐다가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면서 인간세계에 유배流配되어 내려왔는데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의 술법術法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중매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살면서 딸 여덟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습니다. 이들에게 무당의 술법巫術을 가르쳤는데, 금속방울을 흔들고 그림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또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면서 방방곡곡坊坊曲曲을 다니면서 무당의 일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한번 지리산 꼭대기로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하고 접신接神을 한다고 합니다.
- 조선 무속고巫俗考
승려 천연과는 달리 법우화상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불교는 우리 토속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그대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지리산 실상사 앞의 석상이나 장승 등이 다 이렇게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화해 혹은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륙의 유지리산록(1463)을 보면 "산 속에 있는 여러 절에서도 사당을 세우고 성모에게 제사하지 않는 데가 없다."고 쓴 흥미로운 대목 역시 이러한 점을 반증해 주는데 이는 현대 사찰의 삼성각과 같은 기능을 한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어쨌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토속신앙을 수용한 결과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한편 위 법우화상은 먼저 얘기한 엄천사를 창건한 '국사'라고 칭해지는 승려입니다.
엄천사는 조금 전 본 점필재의 글에 나오는 '엄천리'라는 곳에 있었다고 하고, 국토지리정보원 1/50,000 지도를 보면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엄천교 부근 '절터'라는 지명이 나오는 그곳입니다.
이 엄천사라는 이름은 현재의 물줄기 이름인 임천과 엄천 사이에서 재미있는 논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 자세히 보기로 하고....
어쨌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엄천사嚴川寺는 ‘엄천嚴川의 북안北岸’에 있고, 엄천은 ‘함양군의 남쪽 25리에 있으며 용유담의 하류’라 했습니다.
진양지에는 함양 남쪽 30리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군요.
이러니 당시 사람들은 천왕봉이라는 이 이름을 신산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감수재 박여량(1544~1611)은 두류산의 이름이 백두대간의 흐름이라고 파악하여 "하늘에 닿을 듯 높고 웅장하여 온 산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가 온 세상을 다스리는 형상과 같으니 천왕봉이라 일컬어진 것"이라고 갈파喝破한 것은 시사해 주는 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육당 최남선은 천왕은 국사대천왕에서 온 것이어서 천왕 = 천왕 단군이어서 과 연결하여 곧 하느님이라 봤죠.
그러니 고어 '구시'가 구지龜旨, 구시仇時 등 여러 형태가 되어 후세에 국사國師란 이름으로 도 많이 불려지게 된 것이 어느 정도는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 됩니다.
지금 구지봉, 구시봉, 국사봉이라는 이름은 다 천왕봉과 같은 의미를 가진 산이라고 보면 됩니다.
천왕봉에서 가지 치는 불기를 봅니다.
우선 중봉 ~ 하봉.
예전에는 지리동부능선이라 불렀고 지금은 덕천지맥(웅석) 혹은 지리태극종주길이라고 더 많이 불리죠.
천왕봉 주변 줄기 지도
백두대간은 천왕봉에서 마치게 됩니다.
예전에는 동부능선이라고 하여 천왕봉에서 보통 밤머리재나 웅석봉까지 갔습니다.
화대종주 코스는 대원사까지 가면 되니 더 살펴볼 것도 없고....
그리고 태극종주는 'J3 클럽'의 배병만 방장에 의해 그려져 '상급 꾼들'이 즐기는 코스가 되었고.....
어쨌든 능선 개념은 지금은 지맥 개념이 더 우세합니다.
그 지맥도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가 조금 다른 점을 보여줍니다.
즉 천왕봉을 떠난 지맥은 위 개념도의 '가'지점에 이르러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는 그 진행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 루트를 자세히 보면,
위 지도와 같아집니다.
차이점은?
그렇습니다.
대한산경표는 산경표의 대원칙 '산자분수령'에 입각하여 합수점 즉 덕천강과 남강이 만나는 곳에서 맥을 다하지만 신산경표는 산경山經 즉 산줄기가 긴 방향으로 그린 것입니다.
이름도 당연히 달라지겠죠?
대한산경표에서는 '산자분수령'에 따라 물줄기를 중시하므로 물줄기의 이름인 덕천강의 '덕천'을 따 '덕천지맥이라 부르는 반면 신산경표에서는 그 지맥의 최고봉인 웅석봉의 이름을 따 '웅석지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태극종주길은 '산자분수령'과는 다르므로 전혀 다른 코스로 가게 되는 것이고....
천왕봉에서 써리봉1586.7m 너머 희미하게 웅석봉1099.9m을 봅니다.
주위를 좀 둘러봅니다.
바로 앞으로 중봉 그리고 하봉 그 좌측으로 두류봉.
그 뒷라인의 낮은 줄기가 벽송사에서 올라오는 속칭 빨치산 루트.
그 뒤로 법화산992.9m 줄기가 이어지고 그 뒷라인이 남강지맥.
그 뒤가 황강지맥이니 우측 바위봉이 가야산이겠군요.
그 좌측으로 지리 서부능선의 바래봉1186.2m에서 덕두산1151.5m을 거쳐 우측 투구봉1032.5m과 삼봉산1186.7m으로 이어지고....
투구봉과 삼봉산은 백두대간 봉화산 부근에서 가지를 친 줄기가 팔랑재를 넘어온 임천지맥 줄기고.....
그 좌측이 지리 서부능선.
맨 뒷줄 좌측 뾰족한 게 고남산.
그러니까 그 우측으로 백두대간이 흘러가고...
봉화산 우측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연비지맥.
그 뒤로 남덕유도 불뚝 솟아 있고.....
진행방향으로 바로 앞의 제석봉1808m.
그리고 구름에 덮힌 명선봉1583.4m.
그 뒤 엉덩이같이 폭 파인 두 봉우리의 좌측이 반야봉1732.1m이고 그 우측이 중봉1731.8m.
그 바로 왼쪽 뾰족한 봉우리가 노고단1502.9m.
오늘 중으로 저기까지 가야하는군요.
중간 좌측 머리가 벗겨진 봉우리가 세석 바로 옆의 촛대봉1703.1m.
그 뒤 맨 좌측이 왕시루봉1263.2m.
촛대봉에서 우측으로 마루금을 따라가다 보면 뭉툭한 영신봉1651.6m.
이제 그만 천왕봉을 떠나야겠습니다.
이하 2부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지리산과 산경 수경 이야기 풀어 주셨어 자세히 보게 됩니다.
산을 이해하는데 물줄기가 아주 중요한 역활을 하는데 기본에 충실한 글 공감하구요
이번 시산제때 뵙기로 하구요 좋은글 지식이 됩니다.
지태 설명하면 본지의 취지가 흐려지는 거 같아 깊은 거 생략했습니다. 그건 지맥에 가야....오늘 제 제자가 배방장님 나름 평가하더라구요. 깊은 얘기해주니 고개를 못 드는...재미있는 산줄기고 거기에 얽힌 얘깁니다.
잘 보고 공부합니다.대박입니다.
현오님 잘계시지요
여기서 뵙네요
소백산 유량기도 잘보고 지리산 글도 잘보고..
산행에 좋은 정보 고마워요.
올해는 얼굴 한번 뵐 수 있으라나~
이번에 시산제 참석합니다. 그나저나 월악산 시간 한번 맞춰보시죠. 근데 거기 늘상 직언이 대기하고 있다던데요...
@현오 월악산 시간 한번 맞춰 보지요
요즘 워낙 산을 다니지 않아서..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