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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지파의 정탐꾼
삿 18:1-6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2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4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5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6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삿 18:1-6 / [단 지파가 새 보금자리를 찾다] 이때에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다. 단 지파는 아직도 살아갈 땅을 유산으로 분배받지 못하여 어디에 가서 살아야 좋을지 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이때까지도 단 지파는 자기네 몫으로 땅을 분배받지 못해 정착하지 못한 것이다. 2) 그래서 단 지파 사람들은 자기 지파 사람들 가운데에서 용맹스러운 다섯 사람을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뽑아 어디가 좋은지 알아보라고 보냈다. 그들이 에브라임 산악지대를 돌아다니다가 마침 미가의 집에 다다라 거기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3) 그들이 미가의 집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래서 그쪽으로 가보니 그 젊은 레위인이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그래, 여기서는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이런 데서 다 만나게 되다니!' 하고 그들이 반가이 묻자 4) 그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이 집 주인인 미가란 분이 내게 친절히 대해 주셨어요. 그는 내가 레위인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집에서 제사장 일을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일하고 있어요.' 5) `그렇군요. 그럼 우리 부탁을 하나 들어주시오. 우리가 지금 머무를 땅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길인데 일이 잘 될지 어떨지를 하나님께 좀 여쭈어 봐주시오' 하고 그들이 부탁을 하자 6) 그 젊은 제사장은 `아무 걱정들 하지 말고 길을 떠나시오.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지켜 주실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본장은 단 지파의 우상 숭배와 불법적인 이동을 통해 사사 시대 말기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타락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단 지파의 정복 실패(1) 본 단락은 단 지파가 여호수아 시대에 할당받은 기업을 차지하지 못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의 땅과 베냐민 지파의 땅 사이에 기업을 얻었습니다(수 19:40-48). 그러나 이 지역을 정복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아모리인들에게 쫓겨났습니다(삿 1:34). 그뿐만 아니라 기업으로 받은 땅을 포기하고 결국 다른 곳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포기하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단 지파의 운명은 불안해 보이기만 합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표현은 이러한 사사 시대의 정치적, 종교적 혼란과 무질서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단 지파의 정탐꾼 파송(2) 단 지파는 거주할 만한 새로운 땅을 물색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단 지파 중에서도 특히 남부 지역의 주요 성읍인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다섯 명의 용사를 선발하여 임무를 맡깁니다. 이 성읍들은 이스라엘의 영웅 삼손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진 곳입니다(삿 13:2, 25). 정탐꾼으로 파송된 다섯 명은 용맹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단 지파가 정탐 임무를 수행할 만한 역량과 용기를 갖춘 인물들을 선별하여 파송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이 단 지파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기업을 포기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단 지파 정탐꾼들의 미가 방문(3-6) 정탐꾼들은 새로운 거주지를 찾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에 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베들레헴 출신의 한 레위 청년을 만나게 됩니다(삿 17:7-13). 정탐꾼들은 레위 청년에게 정탐 여정의 형통 여부를 점치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가 점을 치는 방식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을 통해 행해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했던 종교적 혼란과 타락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고, 심지어 레위 지파에 속한 청년마저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 사사 시대는 종교적, 도덕적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당신은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분별력을 갖추고 옳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미신과 믿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미신은 나 자신은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신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의 마음을 사서 나에게 유리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 복비를 냅니다. 무리한 부탁이거나 큰 부탁일수록 더 많은 복비를 냅니다. 믿음은 절대자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 내가 나가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나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나의 생각을 돌이켜 바꾸는 것입니다. 잘못된 내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시고 그런 관계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헌금으로 냅니다.
< 설 교 >
영적 무지(無知)와 왜곡된 신앙
삿 18장 1~31절 / 양인국목사
1. 17장이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한 가정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을 말하고 있다면 18장은 동일하게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한 지파에서 일어난 불행한 일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건들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왜곡된 신앙은 영적 무지로부터 온다는 것과 왜곡된 신앙은 개인과 사회를 부패케 하여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2. 본문의 내용은 단지파가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 된 것들이다. 단지파는 그들 가운데 용맹스런 사람 다섯을 택하여 그들이 거주할 땅을 찾아보도록 했다. 그들이 그 땅을 찾는 여정 중에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곳에서 하루를 유숙(留宿)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들은 미가의 집에서 그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미가의 집에 머물게 된 사정과 그 집에 세워진 신상 그리고 그 신상을 숭배하기 위하여 만든 드라빔, 에봇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탐꾼들은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길이 형통한지 물은 후 라이스에 이르러 그 땅을 정탐하고 다시 형제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들이 정탐한 라이스를 치자고 말하고 용사 육백 명을 이끌고 그 땅으로 향한다.
그들은 라이스로 가는 도중 미가의 집에 이르러 그 집의 제사장과 신상과 드러빔과 에봇을 탈취한 후 계속하여 라이스로 향한다. 미가는 뒤늦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이웃들을 모아 단에게 이르러 그들이 탈취해 간 자신의 것들을 돌려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단은 그의 요청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그의 생명을 위협하여 돌려보낸다.
단은 라이스로 올라가서 그 땅을 치고 그 땅을 얻었다. 그리고 그곳에 미가의 집으로부터 탈취해 온 신상을 세운다. 단이 행한 행위가 그들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에 대하여 본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18:30,31)” 이 말씀은 단지파가 미가의 집에서 탈취한 신상을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에 세움으로 인하여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성막)을 멀리하게 되었고, 그들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왜곡된 신앙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영적 무지는 왜곡된 신앙을 낳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문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단지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건도 미가의 집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과 동일하게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17:6, 18:1). 이것은 언급한 것처럼 당시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영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었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 바른 지도란 바른 가르침을 말하므로 당시 이스라엘이 바른 지도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영적무지 가운데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별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여기 언급한 영적무지가 큰 관심이 되는 것은 영적무지는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왜곡된 신앙을 가지고 살게 함으로 부패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7장부터 21장까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가운데 일어난 모든 부패는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다. 물론 여기 왜곡된 신앙이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신앙 행위를 말한다.
실례를 들면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 신상을 만들고 레위인 제사장을 세움으로 자신의 집을 성전화(聖殿化) 했지만 그의 행위는 우상숭배가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었다. 단지파 역시 미가의 집으로부터 탈취한 신상을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에 세우고 그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신앙을 왜곡된 신앙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왜곡된 신앙은 영적 무지로 인하여 온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본문의 내용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이다.
본문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고자 하신 말씀들 가운데 다른 하나는 왜곡된 신앙은 믿음의 사람들로 하여금 총체적인 부패에 빠지게 하여 결국은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미가의 집은 우상숭배에 빠졌고, 미가의 집에 고용된 레위인 역시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레위인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을 버리고 오히려 탐욕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가 레위인으로서 미가의 집에 고용된 것 자체가 불법이고 또한 더 좋은 고용조건을 제시한 단지파의 제안에 따라 미가의 집을 배반하고 단지파와 함께 한 것 역시 레위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없는 일이었다. 단지파도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형제의 것을 탈취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탈취당한 형제가 찾아와서 자신의 것을 돌려달라고 했을 때에도 그의 요청을 거절했고 한 걸음 더 나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형제의 생명을 위협하며 탈취한 것을 지킨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이로 인하여 그들도 결국은 넘어졌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빠져서는 안될 부패에 빠지게 되는 것은 영적무지로부터 오는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이 사람들이 왜곡된 신앙에 빠졌을 때 총체적인 부패함에 빠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많은 사람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총체적인 위기 가운데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 역시 왜곡된 신앙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무지로 인하여 왜곡된 신앙을 갖게 될 때 총체적인 부패에 빠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파를 통하여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빠지게 된 총체적인 부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부패함이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30,3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고자 한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18:30,31)”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key word는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 “하나님의 집”이란 성막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두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성막을 허락해 주셨다. 이것은 그들이 성막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단 지파는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그들이 거주하는 땅에 신상을 세워둠으로 그들이 사로잡힌 날까지 실로를 찾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넘어지는 날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로부터 떠나 있었다는 것을 의미다. 여기 “그 땅의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는 말은 그 땅에 살고 있는 단지파가 외적(外敵)에 의하여 사로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들이 숭배한 신상은 그들을 대적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에 신상을 세워둔 날 동안 영적 무지 가운데 살았고 이로 인하여 결국은 넘어진 것이다. 이처럼 왜곡된 신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어떤 구원의 역사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왜곡된 신앙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곡된 신앙 행위의 결과는 언제나 넘어짐으로 나타난다. 만일 단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으로부터 신상과 제사장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을 탈취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 있는 실로를 찾았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보다 더 확실한 진리의 지식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의 우리로 하여금 탐욕으로 인하여 탈취해서는 안될 것을 탈취하여 우리가 거하는 땅에 세워둔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한다. 우리가 단지파처럼 탐욕으로 인하여 탈취해서는 안될 것을 탈취할 때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가운데 머무르고 있는 한 그것은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믿음의 사람들에게 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무엇보다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힘쓸 것이다. 물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가 힘써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는 경건의 시간이다. 왜냐하면 경건의 시간을 통하여 말씀을 듣고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 할 수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항상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는 권고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건의 시간을 생활화하기 위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매일 한 장씩 읽고 묵상한 후 적용하는 것이다. 특별히 서신은 오래전부터 성경일기표에 따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고 있다. 돌아보면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서신의 가족들 가운데 경건의 시간이 생활화 되었고 또한 이로 인하여 영적 성숙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서신의 가족들이 있다면 오늘을 시점으로 하여 경건의 시간을 시작하고 또한 그것을 생활화하자.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영적 무지와 왜곡된 신앙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주의 말씀에 따라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함으로 진리의 지식에 이르게 해 주시고 이로 인하여 참된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 가운데 경건의 삶이 생활화 되게 해 주옵소서. 아멘!
반복되는 사슬을 끊어라
삿 18:1-6, 21:25 / 조상호목사
어느 유머집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한 방에 가 보니 사람은 없고 귀만 가득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자기를 안내하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여기에는 귀만 있습니까?” 대답이 걸작입니다. “이 귀는 모두 성도들의 귀입니다. 말씀을 들은 귀만 구원받아 온 것입니다. 말씀은 열심히 들었지만 들은 대로 살지 못해 귀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또 다른 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입만 가득히 들어 있었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또 물었습니다. “아니, 여기에는 왜 또 입만 있습니까?” 그러자 천사는 “이 입은 모두 목사들의 입이지요. 말씀은 많이 전했지만, 전한 그 말씀대로 삶을 살지 못해 입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찔리는 곳이 너무 많은 유머입니다. 사실 이 유머처럼 성도나 목사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골방의 책상에서 읽혀지는 말씀이 삶의 현장에서는 실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크리스챤들의 딜레마입니다. 매주일 주일예배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나 경건회 시간에 들려주시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지 못하고 반복되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복하는 실수와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보면, 꼭 사사시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18번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사사기를 살펴보았고 오늘이 마지막 19번째 입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의 문제가 다름 아닌 우리 시대의 문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반복되는 죄악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지만, 사사기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반복되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주시는, 이러한 사이클이 약 340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지금까지 총 12명의 사사가 등장했습니다. 삼손을 끝으로 더 이상 사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사기는 16장에서 끝나야 하는데, 끝나지 않고 21장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반적인 사사 시대의 특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주에 살펴본 17장 말씀부터 오늘 다루게 될 21장까지의 말씀은 삼손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사기 전체 말씀의 요약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3년도 마지막 주일 예배인 오늘 사사기 18장부터 21장까지 말씀을 살펴보면서 사사기의 전체 내용을 마지막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1) 평탄한 길만 추구하는 시대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에브라임 지파출신 미가와 그의 가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실로’에서 제사를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에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편리만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미가의 가정 뿐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 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평탄한 길만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 19장 40절 이하를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 땅은 남쪽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지파는 그 땅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은 철병거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몸집을 지닌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단 지파는 아모리 족속과 싸워보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고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1절에서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 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행동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신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된다‘, ‘앞길이 평탄하게 된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이 어렵다고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을 피했습니다. 그들이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치러야 할 고난과 희생과 피 흘림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배받은 땅을 정복하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들은 점령해야 할 땅에 대한 관심은 없고, 편히 살 곳이 어디에 있나 하는데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섯 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정복하기 좋은 땅을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는 미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신상이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가의 집에서 수종들고 있는 사이비 제사장에게 물었습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자신들의 정탐이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이비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6절)고 대답합니다. 사이비 제사장의 말을 들은 다섯 명의 정탐꾼들은 기분이 좋아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북부지역에 위치한 ’라이스‘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요단강 상류로서 물도 풍부하고 푸른 초원이 있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라이스 사람들은 무기도 없고 변변한 군대도 없이 그저 한가롭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자기 지파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라이스를 치자고 보고했습니다. 결국 단 지파는 라이스를 충분히 정복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오자, 600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라이스로 진격하여 모든 것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 라이스를 자기 지파의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이름을 붙여놓고 그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 지파는 쉬운 길, 평탄한 길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땅을 마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까지 평탄한 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대안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대안을 찾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대안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말씀은 제쳐놓고 손쉬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곧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삶을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자’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아마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만, 빌 게이츠보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록 펠러라는 사람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비교해 보면 빌 게이츠는 약 1,000억 달러로 록 펠러가 가진 재산의 두 배라고 합니다. 그러나 록 펠러가 살아있을 당시의 경제규모와 환율 등을 계산하여 비교해보면, 빌 게이츠의 재산보다 약 13배 정도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된 줄 아십니까? 그의 삶이 바로 영적인 것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10가지의 삶의 지침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섬겨라. 둘째로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셋째로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넷째로 예배시간에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다섯째로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여섯째로 주일 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일곱째로 아침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여덟째로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아홉째로 아침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읽어라. 열 번째로 잠자리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록 펠러씨는 항상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을 중요시했습니다. 손쉬운 길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고자 노력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보시고, 그에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를 세상에 우뚝 서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 지파처럼 자꾸만 대안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평탄한 길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길이 아닌, 세상의 길을 모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대안으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단 지파를 보십시오. 자기들에게 분배해 준 땅은 놓아두고 라이스 땅을 우격다짐으로 정복한 단 지파는 훗날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5절부터 8절까지를 보면 구원받은 자들의 숫자가 나옵니다. 각 지파별로 12,000명씩 총 144,000명이 나오는데, 단 지파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지파는 다 들어갔는데, 단 지파만 빠져 있습니다. 대신에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단 지파는 완전히 버림받은 지파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앞만 보는 단견을 버리고 멀리 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라이스를 얻는 것으로 행복해하는 단 지파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비록 힘이 들고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실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노총각, 노처녀가 될 때까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배우자를 찾지 못했다 할지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후에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독신으로서 결혼한 사람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직장 생활하다가 쫓겨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더 좋은 직장으로 인도해주시든지, 새로운 사업의 문을 열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업을 하다가 망하게 되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업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갈 때,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진 시대
17장과 18장이 평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19장은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진 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9장은 한 레위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에게는 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첩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정식 아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여자가 아주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이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불륜을 저지르고 나서, 자기 친정으로 도망을 쳐 버렸습니다. 레위인은 그 여자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눌러 살고 있는 처갓집까지 찾아가서 설득하여 다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런데 장인은 음란한 자기 딸을 다시 받아주는 레위출신 사위에게 자기 딸을 잘 데리고 있어 달라는 뜻에서 사위를 잘 대접했습니다. 레위출신 사위는 장인의 간청에 따라 하룻밤만 더, 하룻밤만 더, 이렇게 머무르다보니 다섯째 날 오후가 되서야 비로소 처갓집을 떠나오게 되었습니다. 레위인과 그의 아내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다가 날이 어두워질 때쯤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 근처의 기브아라는 마을로 갔지만, 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노인의 도움으로 그 노인의 집에 하룻밤을 머무르게 되어 나귀에게 먹을 것도 주고 또 먹고 마시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19장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대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여기 ‘비류’라는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조폭(조직폭력배)을 의미합니다. 동네에 사는 조폭들이 몰려와서 노인 집에 온 손님들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상관한다’는 말은 성관계를, 좀 더 쉽게 말하면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집 주인인 노인은 자기 집의 손님에게 그렇게 대할 수 없다고 하며 조폭들의 말을 거절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조폭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러가지 않고 계속해서 위협을 하자, 노인은 하는 수 없이 조폭들에게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집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그 노인은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내주겠다는 것입니다. 레위인도 자신의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자, 두 말없이 자기 첩을 조폭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두 여자를 건네받은 조폭들은 밤새도록 욕을 보이다가 새벽녘에 놓아 주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짐승처럼 윤간을 한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레위인이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아내가 집 문 앞에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레위인은 아내에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19:28상) 레위인의 첩은 밤새도록 고통을 당한 뒤에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남자 망신은 다 시키고 있는 레위인을 볼 수 있습니다. 목숨 걸고 싸워야할 남편이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아내를 그 무서운 조폭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또 아내가 밤새도록 거리에서 어려움을 겪는데도 자신은 편안히 누워 잠을 잤습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 문 앞에 쓰러진 아내를 보고 밤새 어떤 일을 당했는지 단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일어나,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든지, 죄책감이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남편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기브아의 조폭들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짓을 행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시대의 두 번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도덕이나 인륜적인 질서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자기 한 목숨 지키겠다고 아내를 사지에 밀어 넣고 자기는 안방에서 잠이나 퍼질러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내에게 일어난 일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그저 “일어나 가자“고 다그치는 남편이나, 자기 딸을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 쉽게 내어준 아버지나,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쾌락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던 기브아 사람들이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는 의지도 노력도 없었던 베냐민지파 사람들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 똑같이 도덕적인 기준이 무너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사시대는 최소한의 도덕적인 기준마저도 지키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꼭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과 유사합니다. 남편이 남편 자리를, 아내가 아내 자리를, 자녀가 자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학생이 학생 자리를, 성도가 성도 자리를, 목사가 목사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탈선(脫線)’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탈선한 기차나 전철이 자유롭게 달릴 수 있습니까? 철길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났을 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탈선하는 순간, 그 기차는 더 이상 달리지 못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볼까요? 물고기가 물속에 사는 것이 싫다고 뭍으로 나오면 어떻게 될까요? 그 물고기가 자유를 누리며 마음껏 살 수 있습니까? 지나가던 나그네에게 잡혀서 횟감으로 도마에 올려지던지, 아니면 뜨거운 햇볕에 말라 죽을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탈선하는 순간,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탈선하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던 시대
사사시대의 세 번째 특징은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던 시대입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나라에 왕이 없었습니다. 18장 1절을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라는 말씀과 19장 1절의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음에 분명합니다.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 왕이 있었던 것에 비해,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왕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통치하시며 자신들을 인도하고 계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멋대로 행하였습니다. 21장 25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씀이 사사기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자기 뜻, 자기 기준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하루밤새 시체가 된 아내를 레위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하나님께 물었습니까? 아닙니다. 레위인은 죽은 아내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연쇄 살인범들이나 할 수 있는 무서운 일을 벌입니다. 아내의 시체를 12토막으로 나눈 다음,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보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슬퍼서가 아니라 기브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온 이스라엘 지파가 경악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은 과거에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이게 되었습니다(19:30~20:1). 각 지파의 지도자들과 백성들 40만 명이 완전무장을 하고 집합을 했습니다. 레위인은 그들에게 그간의 일, 다시 말하면 기브아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아내를 욕보여 죽게 했는지 그리고 자기가 그 죄를 알리기 위해 아내의 시체를 12토막으로 잘라 각 지파에게 보낸 것을 상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일제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홧김에 해서는 안 될 맹세를 해 버렸습니다. 2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 미스바에 모인 11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씨를 말려버리자고 결의를 했습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에게는 딸을 주지 않겠다고 덜컥 결의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브아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베냐민 지파에게 강간과 살인을 저질렀던 범인들을 잡아서 보내주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때 베냐민 지파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범인들을 보내주기만 하면 싸우지 않겠다는 연합군대의 전갈을 받고도 베냐민 지파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연합군과 싸우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나왔습니다. 결국 26,700명의 베냐민군대와 40만의 11지파의 연합군의 동족간의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에는 600명의 베냐민 남자만 남고 베냐민의 모든 남자들과 베냐민 지파가 기르고 있던 가축들도 다 죽고, 온 성읍은 불에 타버리는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제 11개지파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에게 철저하게 복수를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베냐민지파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남아 있는 남자 600명과 혼인할 여자가 필요한데, 여자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11지파는 베냐민지파에게는 절대로 여자를 줄 수 없다는 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방여인들을 데려와서 베냐민 지파에게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습니다. 전에 미스바에서 40만 명이 모였을 때, 혹시 참전하지 않은 종족이 있다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베냐민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종족을 찾아보았더니 야베스 길르앗 종족이 한 사람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지파 연합군은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해서 모든 남자들과 처녀가 아닌 결혼한 여자들은 모두 죽였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 400명을 데리고 와서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잘못된 맹세로 말미암아 발생한 베냐민지파의 생존을 위해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한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야베스 길르앗 여자 400명을 얻고도 나머지 200명의 남자를 위한 여자가 더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11지파는 자신들이 홧김에 행한 맹세 때문에 자신들이 나서서 딸들을 줄 수 없어서 베냐민지파들이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냐민의 남은 200명은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열리는 실로에서 처녀를 훔쳤습니다. 그것을 알고도 이스라엘 11지파는 눈 감아 주었습니다. 자기들이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들은 ‘절대로 자신들의 딸들을 베냐민지파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어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11지파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나 베냐민지파의 지도자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묻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행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사사시대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기 보다는 여러분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뜻을 헤아리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옳은 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움직이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닌, 움직이지 않는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사기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사시대 사람들은 쉬운 길, 평탄한 길만을 추구하였고, 최소한의 도덕적인 기준마저도 지키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까? 무려 340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주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 또 다시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주시는, 이러한 사이클이 약 340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복되는 죄의 사슬을 끊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03년을 뒤로 하고, 새로운 2004년을 출발하기에 앞서 사사시대에 살아가던 사람들처럼 반복되고 있는 사슬이 있지 않습니까? 끊지 못하고 있는 사슬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한국 야사가 많이 있지만, 저는 신라시대의 김유신 장군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천관녀라는 기생에게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가 하루는 그를 불러놓고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이 나라의 기둥이 될 화랑이 이게 무슨 짓인가? 술과 계집에 빠져 가지고 어찌 장수가 되겠으며, 나라에 충성하겠다고 하는가?” 어머니의 꾸중을 들은 김유신은 다시는 기생집에 출입하지 않겠노라고 결심을 했습니다.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몹시 피곤하여 말 잔등에서 잠깐 졸았습니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그가 탄 말이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의 습관대로 기생녀 천관녀의 집에 와 있었습니다. 마침 천관녀가 그를 맞으려고 나오는 순간, 어머니 앞에서 한 맹세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가 타고 다니던 말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말의 목에서 나온 피가 하늘로 치솟았고 천관녀는 새파랗게 질려 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러한 결단이 있었기에 쾌락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고, 전진하여 결국에는 삼국을 통일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2003년을 뒤로 하고, 2004년을 맞이하기에 앞서 끊어야 할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끊으시기 바랍니다. 배는 항구에 매어놓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배를 만듭니까? 배는 망망대해를 항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항구에 매놓은 밧줄을 끊어버리는 결단을 할 때 배는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진정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진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과감하게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결단대로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자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앞에 길이 있다
삿 18장 4~6절 / 이성희목사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은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인 1914년 대원 27명을 데리고 남극대륙의 횡단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극대륙 횡단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남극해에 진입하지말자 얼음 사이에 갇혀 배가 파괴되었습니다. 섭씨 영하 8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2년 뒤, 때로는 얼음산을 오르고, 보트로 거친 남극 바다를 항해한 끝에 탐험대 전원이 생환했습니다. 얼음과 땅과 바다를 2,000 킬로미터나 헤맨 다음이었습니다. 그 때 선장인 섀클턴의 행동지침이 훗날에 알려졌습니다. 그 지침의 첫째가 ‘궁극적인 목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섀클턴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자고 대원을 독려하였던 것입니다.
1909년 세계 최초로 북극점을 발견한 미국의 탐험가 로봇 피어리(Peary)의 묘비에 새겨진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나는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고, 없으면 만들 것이다”(I shall find a way or make one). 길을 찾고 만드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찾으며 성공하는 인물이 됩니다.
똑같은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어떤 배들은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들은 서쪽으로 갑니다.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의 방향입니다.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다 다르게 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방향은 다 달라집니다.
성경에는 광야가 많이 등장하여 익숙한 장소입니다. 광야의 특성을 아시지요? 첫째로 광야는 황량합니다. 생산이 없는 곳입니다. 둘째는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셋째는 위험한 곳입니다. 넷째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보세요.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가운데서 길을 잃은 적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밝히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불과 구름 기둥을 못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만약에 밤에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고, 낮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였다면 아마 잘 보이지 않아서 인도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합니다.
이사야 43:18에서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리라, 사막에 강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광야에 길이 있으면 광야가 아닙니다. 사막에 강이 있으면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길은 모든 사람이 따라 올 수 있을 만큼 확실합니다.
성경에는 ‘길 잃은 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왜 양은 길을 잃었을까요? 어떻게 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왜 양이 주인을 잃었다고 하지 않고, 집을 잃었다고 하지 않고, 길을 잃었다고 할까요? 길을 잃으면 집도 잃고, 주인도 잃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길을 잃는 것은 집을 잃는 것이고, 주인을 잃는 것입니다. 길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길이 없어서 길을 잃습니까? 아닙니다. 길이 있지만 길을 잃습니다. 때로는 너무 길이 많아서 길을 잃습니다. 또 때로는 길을 벗어나서 가기 때문에 길을 잃습니다.
욥기 28:26에는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고 합니다. 욥기 38:25에는 “우레와 번개의 길을 내어 주었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에는 길이 있습니다. 우레도 번개도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에게 길이 없을까요? 인간은 그 길을 찾기 위해 방황합니다. 어떤 이는 출가하여 고행을 합니다. 어떤 이는 책을 파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사물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길이 있지 않습니다. 길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가 가는 길을 물어 보아야 합니다.
5절에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길을 물어보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 옛말에는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고 합니다. 길을 묻는 지혜는 길을 아는 지혜에 버금갑니다. 길을 모르면 물어보면 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태초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옛날 성경에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고 번역했습니다. 태초에 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태초에부터 길이 있었습니다. 태초에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는 말씀과 부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돈하고, 흑암이 가득했습니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바람에게 길이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길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 없는 광야에서 40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길을 알고 길로 다닙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십니다. 이 때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해답을 주십니다. 도마는 길을 물어보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 묘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시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 편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가수 짐 밀러는 “성공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공사 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완성된 길입니다. 확실한 길입니다.
잠언 16:25에는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 있게 갑니다. 어떤 이는 힘차게 갑니다. 어떤 이는 바른 자세로 갑니다. 그런데 이런 길이 하나님 보시기 바르지 않고 그릇된 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가든지 가는 길을 물어보고 바르게 가야 합니다.
시인 윌러스 스티븐스는 “세상 안의 길이 세상 밖의 길보다 찾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의 길을 바르게 찾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며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가이드는 키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을 칼로 자르며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아무리 가도 끝도 없어 보이는 정글입니다. 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말합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 알고나 가는 거요? 길은 어디 있소?” 노련한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길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들은 세르파를 데리고 갑니다. 그 곳의 길과 지형에 익숙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험한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누구도 길은 아닙니다. 길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도 길을 잃습니다. 길을 알지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잘 아는 그들도 자칫 죽기도 합니다. 자기가 길이라고 외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참 길을 물어보세요. 진짜 길을 찾아야 안전합니다. 길을 물어보면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어디가 길이냐? 어디가 길이냐?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내가 곧 길이라. 내가 곧 길이라”. 복음성가에 나오는 가사입니다. “어디가 길이냐?” 물어 보세요. 예수님은 반드시 대답하십니다.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길을 가르치십니다. 마태복음 7:13-14에는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길을 묻는 자에게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길은 길이 아닌 듯이 보일만큼 좁고 불편합니다.
둘째, 여호와 앞에 있는 길은 평안합니다.
6절에는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앞에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평안합니다. 세상에서의 길은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찾기 힘든 길입니다. 가기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길은 넓고 환한 길입니다. 평안한 길입니다. 계시록 21장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를 보세요. 성곽은 온갖 보석으로 지어졌습니다. 열두 문은 진주로 되어 있습니다.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깔려 있습니다.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 이 길을 못 찾을 리가 있습니까? 이 길이 좁을 리가 있습니까? 이 길이 평안치 않을 리가 있습니까?
신명기 1:33에는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하게 인도하십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십니다. 잃지 않게 하십니다.
바울의 여정을 보세요. 평안의 길이었습니까? 2차 전도여행은 원래 그가 계획하고 있던 길이 아니라 반대방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좋은 길이 아니라 가장 좋은 길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의 영이 막은 그 길이 가장 평안한 길이었습니다. 반면 바울이 로마로 가던 항해를 보세요. 백부장이 가장 좋아보이던 때를 선택하여 갔습니다. 가장 좋은 길 같아 보이지만 반입니다. 가장 불편한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혈관은 혈액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사람 몸의 혈액은 몸무게의 약 13분의 1이라고 합니다. 혈액 순환은 심장을 나와 허파를 돌아서 다시 심장으로 들어가는 폐순환이 있습니다. 이것을 소순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허파 이외의 온몸을 도는 체순환이 있습니다. 이것을 대순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혈액은 질서 있게 돕니다. 길이 정확합니다. 하루에 약 27만 킬로미터를 여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너무 정확합니다. 이리 돌았다 저리 돌았다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길로, 한 방향으로 정확하게 여행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명확하게 알고 가는 사람은 평안합니다. 하나님께서 가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길은 평안의 길입니다.
‘윤형방황’(輪刑彷徨)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자리를 맴돌며 방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년 전 중앙아프리카에서 행방불명된 59세 등반가가 13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과일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하루 12시간씩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잃어버린 장소와 발견한 장소는 약 6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12일 동안 12시간씩 걸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약 250킬로미터를 걸은 샘입니다. 길을 모르면 방황합니다. 목표점을 가까이 두고 같은 자리를 맴돌아 다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눈을 감은 채 걸을 경우 20미터 직선거리는 겨우 4미터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100미터를 넘으면 원을 그리며 걷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길이란 정확하지도 못하고 평안하지도 못합니다.
창세기 24:48에는 엘르아살이란 아브라함의 종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그의 길을 바르게 하신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감사의 시인 시편 107:7에는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 인도는 안전합니다. 확실합니다. 어떻게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길을 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닐 때에 광나루 학교 아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루 밤은 얼마나 안개가 많이 끼었는지 정말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들이 아예 가지를 못하고 서 있기도 했습니다. 광진교로 향하는 길은 갓길이 없고 약간 언덕이 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택시가 길이 보이지 않고 아주 천천히 갔는데도 길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깊지 않은 곳이기 때문에 큰 사고는 아니었지만 그 다음날 아침에야 그 차를 끄집어냈습니다. 오래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입니다. 캘리포니아 LA에서 북쪽으로 가는 5번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5번 고속도로 북 캘리포니아 쪽에서 갑자기 모래폭풍이 불어 60대 이상의 차들이 추돌사고를 냈습니다. 차들이 이리저리 뒤엉겨 수습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길이 있지만 보이지 않으면 사고가 납니다. 길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길은 더 위험하고 불편합니다.
지금 세계경제에 길이 안 보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도, 경제도, 안보도, 외교도 길이 안 보입니다. 여러분은 길이 안보여 걱정입니까?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이대통령이 아니면 이보다 더 큰 위기가 닥쳤을 것이고, 많은 대기업도 부도가 났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여호와가 길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길을 여호와께서 아십니다. 여호와가 길이시기에 모든 길은 여호와께로 향합니다. 걱정하기보다 여호와께 의지하고 맡기세요. 그분이 길을 예비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대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입니다. 영광이 빛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시온의 대로가 열려 있습니다. 이 길을 좇아가면 평안입니다. 승리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고백합니다. 골짜기라도 높은 산이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평안합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함께 찬송할 수 있습니다.
시편 37:5에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라고 합니다. 우리 길을 내려놓으면, 맡기면,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평안케 하십니다. ‘맡기라’는 히브리어 ‘갈랄’로서 문자적 뜻은 ‘옮기다’, ‘굴리다’, ‘신뢰하다’라는 말입니다. 맡기면 평안합니다. 안전합니다. 형통합니다.
결론
지난 월요일 아침 논현동 고시원 방화사건 희생자 합동 발인예식에 참석했습니다. 희생자 6명 가운데 3명이 중국교포입니다. 한 희생자의 남편이 장례식 도중 한국교회에 감사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예수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고 공산당원도 있습니다. 그 분은 “인민의 영도는 오직 공산당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하고 하며 기독교는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줄로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자신들을 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밤을 새는 목사님들을 보며 기독교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습니다. 한국교회가 희생자 유족들에게 3천만 원씩의 위로금을 드렸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분명한 길을 가르쳐 준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예레미야 2:36에는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입니다.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길을 바꾸면 수치를 당합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신앙, 우리 교회를 절대로 바꾸지 마세요. 바꾸면 수치를 당합니다. 여호와 앞에 있는 길, 그 길을 찾읍시다. 찾은 그 길을 바꾸지 맙시다.
그 길을 끝까지 잘 가서 하늘나라 문에 도달하는 복된 우리의 여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반드시 멸망당합니다
삿 18:1-10 / 우인택 목사
사사기 18장에는 미가의 신상숭배가 이스라엘 12지파의 하나인 단 지파에게까지 파급된 과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사사기 1:34입니다.
단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받은 기업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토가 협소해져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막강한 아모리 족속과 싸울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분배받은 기업을 포기하고, 대신 방비가 허술한 가나안 땅 북쪽의 라이스를 정복해서 그곳으로 이주해 가게 됩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이주 과정에서 정탐 활동 중에 만난 미가로부터 신상과 레위 청년 제사장을 빼앗아 데려감으로써 마침내 미가의 우상숭배가 단 지파 전체의 우상숭배로 확대되기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단 지파의 라이스 이주와 우상숭배의 확산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 부분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음을 강조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통치권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그로인해 백성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사후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과 삶을 지도하고 이끌어 갈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른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웠고, 개인주의화된 신앙으로 인해 이방 종교의 함정과 올무에 빠지기도 쉬웠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든, 교회든 지도자의 부재는 사회질서를 깨뜨리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각하는 것처럼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그대로 내버려 두더라도 질서와 조화가 유지될 수 있지만 인간은 적절한 통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도덕이나 철학, 종교 등을 만들어 내고 통치자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통제에 의한 통치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 또는 통치자는 불완전하여 언제나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가 되었고, 부정부패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인간 사회의 질서가 바르게 서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과학이나 기술이 덜 발달했기 때문도 아니고 철학이나 법이나 종교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또 뛰어난 지도자가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만왕의 왕으로서 인간의 모든 삶을 완벽하게 조율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부재가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부정부패에 빠질 수가 없고, 다른 약한 나라를 침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나라든, 어디든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분쟁과 부정부패가 그치게 됩니다.
오늘, “내가 선 그곳이 어디 이든지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어서 단 지파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유일하게 그때까지도 기업의 땅을 얻지 못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원래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서쪽 지역을 할당받았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을 쫒아내지 못하고 새로운 정착지를 구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수 19:40-46).
그러나 단 지파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을 정복해야 했으며, 다른 거할 곳을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곳을 정복하고자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포기하고 다른 땅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을 가볍게 여김으로 대적들이 강하다거나 상황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 세상 어떤 것들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귀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귀하고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와 축복들이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도 귀하고, 허락하신 모든 여건과 상황도 다 귀합니다.
받은 분량이 많든 적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지 그 여부가 중요합니다.
더욱이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것을 빼앗아 가기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때문에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포기하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다른 땅을 찾아 나선 단 지파는 라이스 땅을 차지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라이스를 점령한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같이 보였습니다.
라이스 땅은 적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했고 비옥한 토지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끝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단 지파는 라이스로 이주한 후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서 우상 숭배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또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대명사인 단 지파는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인 맞은 자 십사만 사천 명에서도 제외되는 불행을 맞게 됩니다(계 7:4-8).
단 지파는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 중에서도 제외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걷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손쉬운 인간적인 대안을 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포기하고 어둠 속에 거하며 우리가 편한 데로 세상과 어울려 살아간다면 단 지파의 행동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단 지파가 받았던 멸망과 저주를 우리도 똑같이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어려운 난관이 앞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오직 말씀대로만 행함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이어지는 4절에 레위 청년은 단 지파 사람들에게 미가가 자기를 고용하여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언급했었지만, 이는 레위 청년이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성별의식이 없이 단지 제사장직을 생계의 수단으로 사용했음을 나타냅니다.
여러분,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직분입니다(말 2:7).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들의 중보자 역할을 하는 거룩한 직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제사장 직분을 레위인들, 그중에서도 아론의 자손에게만 맡기도록 구별하셨습니다(민 8:5-13).
그러한데도 레위 청년은 이러한 거룩한 제사장 직분을 성별된 사명감 없이 단지 생계수단으로 여겼고, 미가는 제사장을 자기 마음대로 고용할 수 있는 직함으로 여겼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사람들은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목회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일하고자 하기 보다는 자기의 생계를 위해 목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례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교회를 옮기고 큰 교회에서 청빙을 하면 미련없이 양들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삯꾼 목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합니다.
또, 성도들 중 일부는 오늘 본문의 미가처럼 목회자를 대할 때 하나님이 세우신 종으로 대하기보다 교회에 고용된 사람으로 대합니다(5절).
그리고 교회에서 목회자를 청빙할 때 요구하는 서류를 보면 여느 회사에서 고용인을 뽑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성직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성직을 세상의 직업과 동일하게 여기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성직을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 속한 직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성도들을 양육하며 성도들에게 윤리적인 본을 보여야 합니다(요 10:15-16).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성직자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딤전 5:17).
이처럼 목회자와 성도들이 성직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존중할 때 교회는 더욱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단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옳은 줄 알고 기뻐했지만 결국에는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가장 빨리 멸망당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계획은 형통한 듯 보이나 그 길은 필히 멸망의 길임을 오늘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빌라델비아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소유했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