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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 29. 영생의 상속 30. 먼저 될 자
마 19: 29. 영생의 상속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1] 또 내 이름을 위하여
막 10: 29에 의하면 '복음을 위하여'로 또 눅 18: 29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이름에 해당하는 원어 '오노마'(*)는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 즉 계시 또는 복음, 하나님 나라 등으로 대치될 수 있는 용어이다.
2]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예수의 권고는 열두 제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헌신(獻身)하는 모든 제자들에게까지 그 대상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입증하기 위하여 특별히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을 세 가지 차원 - 광의적 의미의 가정(집), 친족(자매, 부모, 자식), 소유(전토) 등으로 구분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구하셨던 3중적 포기와 비교할 만하다.
* 창 12: 1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예수 자신도 복음 전파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그의 모친과 동생을 떠나셨다.
* 마 12: 46-48 –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떠나는 믿음은 축복으로 넉넉히 보상될 것이다.
3] 여러 배를 받고(*, 헤카톤타플라시오나)
문자적으로 '일백 배'를 의미한다.
* 막 10: 30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바티칸 사본 등에는 본문을 '폴라플라시오나'(*), 즉 '여러 배'로 표현하였다.
* 눅 18: 30 -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러한 차이는 본문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의 이 언약의 말씀은 일백 배나 여러 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수를 의미한다.
실로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집, 부모, 형제를 버린 자는 신앙 공동체(信仰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영적 가족이 되어 수많은 신앙의 형제자매를 얻게 될 것이다.
* 마 12: 49-50 –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또한 그는 비록 물질은 상실했지만 물질보다 더 영원하고 가치 있는 참 평안과 사랑과 행복의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될 것이다.
4]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가에 의하면 백배의 축복은 이생에서 핍박과 더불어 받는 것이며 영생의 축복은 내세에서 받는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막 10: 30).
성도가 이 세상에서 자기희생의 대가로 받는 축복은 물질적인 차원의 풍족함이며, 내세에서 받는 축복은 영적인 차원의 풍성함, 즉 영원한 생명이 될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마 5: 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마 21: 38 -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 마 25: 34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분명히 인식할 사실은 영생은 가정과 재산을 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핍박받은 것에 대한 공로의 보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서 구원된 삶을 누리고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마 4: 20, 22). 오늘날도 전도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른 제자들에게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세상이 새롭게 될 때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를 그들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그들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렸다면, ‘백 배’를 받고 확실히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백 배를 받는다는 말씀은 현세와 내세에서 받을 것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씀은 이런 헌신의 대가로 영생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이런 헌신이 영생을 얻는 확실한 표가 된다는 뜻일 뿐이다. 주님께 자신을 드린 자는 확실히 영생에 이를 것이다.
5] 성도의 희생과 보상
부자에 대한 경계에 이어 본문에는 제자들에 대한 축복의 보장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좇지 못한 자의 어두운 면과 좇은 자의 밝은 면이 잘 대조되어 비교되고 있다.
(1) 예수님에게 건 제자들의 기대와 희망
① 제자들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에 비해 보잘것없다.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나이다'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한다. 사실 마태는 세리의 직업을 버렸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부친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버린 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버리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으로서 그 영광과 존귀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의 생명까지 버리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비롯한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에는 절대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② 예수님은 제자들의 희생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버리신 것에 비해 그들이 버린 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모든 것으로서 마치 과부의 두 렙돈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는 많은 재산이나 다름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자신을 따르기 위하여 그들의 소유를 버렸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들을 축복하여 주셨다.
③ 그리스도의 부름은 축복하시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노력에 따른 대가를 기대한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도 그들 자신의 참된 몫을 알아보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영광스런 면류관을 기대하였고,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되 참고 견디면 그것을 취할 수 있도록 우리 앞에 그 몫이 놓여 있다.
* 계 2: 10 -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결국은 최고의 가치를 얻게 되는 것을 말씀해 주심으로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손해를 끼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주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과 보상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29절).
① 성도의 희생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좇으려면 세상의 모든 유익에 대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에서 특별히 가정과 재산을 예로 들었다.
사람을 가장 이기적인 동물로 만드는 요인이 바로 가족과 물질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처럼 현실적으로 중요한 소유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세상의 소유물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값진 성도의 희생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희생은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어야 합한다. 그러므로 이 희생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귀한 희생이 되는 것이다.
② 보상은 이 세상에서도 받는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축복은 영적인 축복으로 현실과는 관계가 먼 축복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영과 육을 조화한 완전한 축복으로 내세는 물론 지금 현실 가운데 주어지는 온전한 축복이다.
예수님도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더한 축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막 10: 30)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신앙의 행위는 이 세상에서도 충분한 보상을 받는 귀한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3) 영생을 보장받는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으로 예수님은 그를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버리고 순종하며 따르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다.
* 요 11: 26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4) 보상은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다.
기독교는 '버려야 얻는' 종교다.
그리스도의 역설적인 진리는 일반적인 과학적 사고를 은총의 세계로 이끄는 신앙의 산실이다.
'죽으면 살고', '버리면 100배를 얻는' 것이 믿음의 세계, 은혜의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진리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이 아닌 경험적인 실제다. 이러한 진리에 의해 보다 축복받아 귀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마 19: 30. 먼저 될 자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주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신약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시작했을지라도 믿음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대한 교훈의 결론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유대의 격언이다. 마 20:1-16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서론으로 사용됨으로써 부자에 대한 교훈과 비유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먼저 된 자, 나중 된 자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다.
(1)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자는 가난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의 주장이 그러한 윤회(輪廻)로서의 역전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 눅 16: 19-31 –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2) 많은 교부(敎父)들은
먼저 된 자는 유대인이며, 나중 된 자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하였다(Clarke).
그러나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본 장에서 그렇게 뚜렷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다.
(3) 어떤 학자는
서로가 먼저 된 자라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주장은 18장에서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4) 카슨(D. A. Carson)에 의하면
이 격언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권세가 있던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역시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낡은 유대식 관념(觀念)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5) 격언이 사용된 막 10: 31과 눅 13: 24-30에 의하면
나중이라는 의미가 천국 안에서의 '나중 된 자'가 아니라 '그 나라 밖에 있는 자'를 가리키며, '먼저 된 자'는 그 나라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킨다.
* 막 10: 31 -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 눅 13: 24-30 –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따라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했다고 믿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마지막 날 그 나라에서 쫓김을 당할 것이요, 세리와 창녀같이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끼고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주를 따른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영적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을 철저히 경계하시고, 대신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온유와 순결한 영혼을 인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시민관이라 할 수 있다.
주께서는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첨가해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이방인들의 다수가 먼저 될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원리가 이방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신자에게는 믿은 연도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어떻게 믿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비록 늦게 믿기 시작한 자라도 믿음생활에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하고 높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지금이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살며 계명들을 지키며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2]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되는 격언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강론하실 때 이 말을 여러 번 사용하셨다. (마 20: 16. 눅 1: 52. 6: 25. 13: 30)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나셨던 젊은 부자 관원이 물질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다시금 돌아간 후에 열두 제자들을 향해 경고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다.
(1)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①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을 가리켜 먼저 믿는 자라고들 말한다.
또한 어떤 주어진 일의 성공 여부를 놓고서 젊은 나이에 일정한 위치에 오르면 성공한 것으로 여긴다.
즉 시간적인 전후를 따져서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판단하는 것으로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방법이다.
②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따른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이고 이방 민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하여 나중 된 자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방법에 따르면 '나중'은 '뒤에 처진'이라는 뜻에서 나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밖의'라고 해야 할 것이며, '먼저'란 말도 역시 '앞선 자','선두에 선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그 나라 안에 있는'이란 말이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기준으로 할 때 본문의 말씀은 먼저 그 나라에 있던 사람이 그곳에서 내쫓길 자가 많고 나라 밖에 있던 자 중에서 그 나라에 들어갈 자가 많다는 말이다.
③ 이것은 이방인을 위한 은혜의 기준이다.
율법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했던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무슨 선행이나 악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따라 된 것이며,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인하여 이방인의 구원을 허락하시고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 롬 9: 11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롬 11: 11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즉 유대인이 더 월등해서 선민이 된 것이 아니듯 이방인이 구원에 이른 것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선택일 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2) 먼저 된 자들을 위한 경고
① 신앙은 목적이지 수단과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자들이 받을 보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셨다. (28-29절)
주를 위한 희생과 봉사는 결코 한 가지도 잊혀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풍성한 보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급과 보상만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팽배해 있는 상업주의 원칙하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② 보상의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뿐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근본이시며, 홀로 공의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 땅 위의 어떤 자보다 합당한 보상으로 상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모든 봉사와 희생 자체는 그분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이 중요한 사역을 위해 부름 받았을지라도 어떤 보상을 위해 희생한다면 가룟 유다처럼 낙담하여 영원히 주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공로를 따라 보상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주권을 좇아 보상받기를 기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3)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에 선 자들이다.
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비밀을 계시할 때 지혜있는 자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보이셨다.
그러므로 아무도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세로 나설 수는 없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 자신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②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인간의 지위를 결정하시는 주께서 붙드시고 계시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안전하지만,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자는 비록 안전한 듯이 보여도 실상은 버림받은 자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③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건만 의롭다 인치시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 주신 것은 무조건적 은혜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의를 이루며 드러내야 한다.
16-30절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뜻이며 어느 시대나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다.
* 레 18: 5 -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신 5: 32-33 –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그의 계명들을 순종하자.
둘째,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온전히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 계명들을 순종치 못한 부족한 죄인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율법은 우리를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 롬 3: 21-24 –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 성도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참으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자라면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끊어 버려야만 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 마 6: 24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자신을 부정해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다.
* 마 10: 24-26 –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모든 소유를 버려야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
* 눅 14: 33 -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의 말씀대로, 재물의 욕심은 영생의 길을 방해하는 가시떨기와 같다(마 13: 22).
* 딤전 6: 10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애착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영생에 이르는 성도의 바른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