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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에서 이어집니다.
천왕봉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제 그만 천왕봉을 떠나야죠.
정면으로 능선을 따라 연하봉 ~ 촛대봉 ~ 영신봉 ~ 묘봉 ~ 연하봉 ~ 노고단 ~ 바래봉이 한 줄로 이어졌습니다.
우측으로 안내 표지판이 보입니다.
천왕골을 따라 칠선 계곡이 형성되어 있음과 예약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는 내용입니다.
좌측으로 칠선계곡, 우측으로 국골을 거느리고 있는 초암능선
칠선계곡 개관
울진의 응봉산999m에서 흘러내린 계곡인 덕풍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장의 길이를 가진 것이 이 지리의 칠선계곡이죠.
지금은 제한 탐방제가 실시되는 곳이라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계곡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꼽으라면 누구든지 천불동 계곡보다 이 칠선계곡을 꼽을 겁니다.
규모 또한 18km에 달하는 험준한 곳이어서 예전에는 인명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참고도 #1
칠선 계곡의 크기는 그를 싸고 있는 줄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천왕봉과 중봉에서 내려오는 작은 줄기를 받은 다음에 초암능선이라는 튼실한 능선을 품고 있고, 좌측으로는 창암산924.9m을 지나는 창암능선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석봉1808m에서 창암산으로 이어지는 창암산능선을 넘으면 백무동이 되고 초암능선을 넘으면 국골이 되어 추성에서 다시 이 칠선계곡의 물과 만나게 됩니다.
이 물은 의탄천이 되어 마천에서 임천이 되어 남강으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 부근에서는 추성楸城이 중요하고 추성은 성안城內과 연결이 되며 이는 다시 국골 너머에 있는 두류능선을 타고 올라와 영랑대 ~ 하봉 ~ 중봉 ~ 천왕봉으로 연결이 됩니다.
추성은 곧 신라의 역사이기도 하고 백제와의 전쟁의 결과물일 겁니다.
그러니 신라 화랑이 노고단에서 무슬을 연마했다는 얘기도 들리며 화랑 장교였던 원효가 이 루트를 이용해 화엄사에서 화엄사상을 접했다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참고도 #2 통신골과 한신계곡
통신골 이야기
천왕봉 다음 봉우리는 제석봉입니다.
좌측으로는 통신골로 내려가는 골짜기를 봅니다.
어느 산악회에서 이 골을 따라 오르던 중, 선행 팀과 무전기로 교신을 하는데 다른 골짜기와는 달리 이 골만큼은 교신이 잘 되었다나요?
그래서 통신골通信谷이랍니다.
믿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다른 견해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이 신神과 통하는 길이기도 하고 또 통천문과도 연결이 되니 通神谷이라고 하는군요.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승려들의 경우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유학자들의 경우는 배움과 유식遊息 그리고 공자부터 남명 에 이르기 까지의 선인들을 닮기 위하여 그리고 토속 신앙의 무속인들의 경우는 천왕봉의 영험한 기를 얻기 위한 여정이었을 것이니 通神谷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천왕봉 ~ 영신봉 구간은 '산경표'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중요한 구간입니다.
백두대간의 끝이면서 바다나 10대강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죠.
합수점이 없다는 겁니다.
신백두대간과 관련하여 이따 자세히 볼 겁니다.
천왕봉을 떠나 제석봉 방향으로 발을 뗍니다.
백두대간을 북진으로 진행하는 분들은 여기서 백두대근의 첫 발을 내딛게 되는 곳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감개가 무량한 곳이죠.
통천문을 지나,
제석봉을 향합니다.
제석봉의 뒷모습입니다.
제석봉 이야기
제석봉이라는 이 봉우리의 이름은 이곳에 있던 제석당帝釋堂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중봉이라고도 했던 곳이죠.
함양이나 산청에서 올라오는 이들이 볼 때에는 천왕봉이 상봉이 되어 지금의 천왕봉 ~ 중봉 ~ 하봉이겠지만 하동이나 백무동에서 올라오는 이들에게는 이 제석봉이 중봉이고 천왕봉이 상봉이라는 것이겠죠.
여기도 '당堂'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니 신당 혹은 제당과 관련이 있겠군요.
박여량의 '두류산일록(1610년)'에 의하면 이 제석당을 '들보가 23 ~24자 (6~7m) 크기의 세 칸인 판잣집'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석봉은 제석을 산봉우리와 동일시하여 일컫는 지명일 것인데.....
제석帝釋은 삼신제석, 천주제석, 제석천이라고도 하는 하늘신이며, 도리천에 살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호법선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제석봉 역시 제석당이 있으니 토속신앙인 천신 혹은 산신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것임을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겠군요.
법계사의 법계당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이쯤에서 이동한의 방장유록(1790년)에 실린 그들의 무속행위를 정리해 보면,
삼남 지역의 무당들이 봄, 가을이 되면 반드시 이 산에 들어와 먼저 용담의 사당에 빌고, 다음으로 백무당에 빌고 또 제석당에서 빌고 그러고는 상당까지 올라가 정성을 바쳐 영엄해지기를 빌었다.
여기서 용담은 지난 편 살펴본 지금의 휴천면 남호리에 있던 용유당이고, 백무당은 백무동이며 제석당은 이곳 그리고 상당은 바로 천왕봉의 성모廟(祠)일 것이니 상-중-하당으로 위계를 이룬 민간신앙소의 면모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제석당이 김종직이 지날 때인 1470년 경이나 김일손이 지날 때인 1489년에는 없었는데, 박여량이 지날 때인 1611년에는 있는 것을 보면 그 사이인 16C 정도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1752년 박래오 등이 지날 때에는 "들보가 무너지고 서까래도 부서졌다."는 대목에서 쇠락해져 가고 있는 제석당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박여량의 두류산일록에도 나오는 것과 같이 "유향소에서 잡으러 온다는 색장色掌의 전갈이 있어 몹시 근심스럽고 괴롭다"는 제석당 주인인 노파의 하소연에 비추어 보면 정부에서는 이 푸닥거리를 하는 이 민간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던 것 같습니다.
혹세무민한다는 유생들의 질타가 있었겠죠.
또 신성한 지리산에 불법 건축물을 임의로 건축하였으니 건축법 위반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
향적사香積寺 소고
제석봉의 안내판이 있는 이곳.
맞은 편 뒤 남쪽으로 희미한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이 바로 향적사로 가는 길입니다.
진양지晉陽誌-1632년 성여신에 의해 편찬된 진주목 읍지-에 따르면 이 향적사는 성모묘 향화香火를 위해 건립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향적대에서 본 천왕봉
한편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의 보면,
문앞의 반석에 나와 멀리 바라보니 살천이 굽이굽이 흐르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이 운무사이로 다 보이기도 하고 반쯤 보이기도 하였다. 꼭대기만 보이는 것은 마치 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투만 보이는 것 같았다. 산의 정상을 보니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어제 내가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성모사 곁에 있는 흰 깃발만이 남쪽을 향해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림을 그리는 승려가 내게 알려준 그곳이었다.
그러니 이 향적사가 지리산 산행을 즐기는 사대부들에게는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베이스 캠프' 역할을 하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유두류록은 계속하여,
"천왕봉에서 비를 만났다. 징검다리가 매우 미끄러워 다른 사람이 부축하게 했지만 찧고 구르면서내려왓다. 몇 리쯤 가자 쇠사슬을 매어놓은 아스라한 길이 있었다. 석굴을 통하여 나가 사력을 다해 걸어서 향적사에 도착했다. 승려가 없은 지 벌써 2년이나 됐다. 시냇물은 여전히 파인 나무통을 따라 졸졸 흘러 물통에 떨어졌다."
라고 이 향적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향적사 다시 말해서 향적대는 지리 10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잠깐 대臺를 살펴볼까요?
아까 문창대도 잠깐 봤고 천왕봉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바위를 일월대라고 하는 것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향적사를 향적대와 함께 썼으니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대臺의 의미는 이와 같이 크고 의미가 있는 바위를 일컫는 것입니다.
삼각산의 백운대, 속리산의 문장대 등이 그러하고 智異에서는 가섭대, 영랑대와 소년대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대臺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큰바위가 있다는 것보다는 향적사 혹은 향적대와 같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수도처의 이름에도 대臺 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살펴보면 옛날에는 수도승들이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양을 했다 합니다.
그래서 토굴土窟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행태가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지어 수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이라 한다고 하는군요
따라서 요즘 말하는 '토굴'의 의미는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분하여 '臺'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한편 '臺'에는 대부분 바위가 있는 데 이는 바위에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를 하게 되면 그 효험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臺)가 많다는 것이지 바위가 대(臺)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 지리 99곡
한편 점필재의 이 나무통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조금 전 살펴본 살천薩川(지금의 矢川川)의 시원이 됨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김종직 때와는 달리 김일손이 갔을 때에는 승려가 거주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의 유두류록을 보면,
"석문을 통과하여 향적사에 도착했다. 절의 승려가 "금년에 다수의 승려와 속인이 상봉에 올랐지만 번번이 먹구름과 비가 시야를 가려졌습니다. 그런데 선비님들이 한 번 올라가자 문득 밝게 갯습니다."라고 측하했다.
그러니 그 후에 쓰인 김선신의 두류전지(1823년)에,
"살펴보건대, 향적사는 지리산 꼭대기에 있었다. 승려들 중 찾아가는 이가 있어도 무시로 머물다가 떠난다. 지금은 폐사됐다."
라고 적혀 있던 것입니다.
결국 19C 초반에 폐사가 되었군요.
지금은 위와 같이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매년 봄, 가을에 마천 사람들과 시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장을 열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터목이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백무동, 좌측으로는 지난 구간 산행을 시작했던 중산리로 내려갈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52쪽
장터목 대피소를 지나,
연하봉을 지납니다.
촛대봉 원경
그러면 만나게 되는 촛대봉입니다.
촛대봉 뒤로 내려가면 거림에 이르게 되죠.
이 촛대봉을 점필재 김종직은 시루봉, 증봉甑峰이라 하였고, 남효온은 계족봉鷄足峰이라 하였으며 유몽인은 사자봉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루봉이라.....
시루봉의 유래를 봅니다.
수리봉 소고(小考)
“형. 이 수리봉이 지난 번 백수리봉의 수리봉과 같은 뜻인가?”
수리봉하면 그 뜻이 무엇인가? 백수리봉을 지나면서 수리봉이란 그 주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이라 했고 그 말의 어원은 고구려 말에서 왔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 '수리'란 말은 우리나라 곳곳의 땅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산림청에 등록된 이름 중 랭킹 1위가 국사봉이고 2위가 바로 이 수리봉인 것이다. '높은 곳', '맨 꼭대기'를 뜻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 지도를 보면 이 수리봉이 한자로 '守理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지나친 억지임을 알 수 있다. 이 예로 단옷날(端午)의 순 우리말이 수릿날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즉 추석이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는 태양의 축제인 바, 태양이 높은 하늘의 한가운데 떠 있는 날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수리가 우리 몸에 들어오면 정수리가 된다. 맨 위에 있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어원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이 녀석이 높은 곳을 날아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봉우리'라는 말을 많이들 쓴다. 이것도 산봉수리에서 'ㅅ'이 탈락하여 산봉우리가 된 것이다. 이 말의 파생어가 '사라', '서리' '수레' '수락' '싸리'등으로 변하게 되었는데 서울에 있는 수락산도 결국 이와 같은 의미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맥을 할 때 많이 나오는 지명이 있다. 바로 '수레너미'고개라는 곳이다. '싸리재'도 마찬가지다. 수레가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고개라거나 싸리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이런 고개들은 우리 옛 선조들이 보기에는 그저 '높은 고개'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걸 지역마다 달리 부른 것이고 그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음운변화가 일어나서 변형이 된 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 졸저 298쪽 이하
이와같이 이 산은 떡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증봉 혹은 시루봉이 아니라, 이 '수리'가 '시루'로 변한 것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이를 차자借字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남효온(1454~1492)이 이곳을 계족봉이라고 부른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계족산이라고 하면 우리가 갑천(식장)지맥을 하면서 지나는 대전의 계족산424m이 대표적입니다.
그 유래를 보면,
대전광역시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 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는 말도 있고, 지네가 많아 이를 퇴치하고자 닭을 풀어놨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뭔가 꺼림칙합니다.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리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존경하는 '도솔산인' 이영규님으로부터 계족산 얘기를 들어봅니다.
계족산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Bihar주에 있는 꿋꾸따빠다산屈屈晫播陁山Kukkutapada-giri을 당나라 현장법사가 대당서역기에서 계족산으로 번역을 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계족산은 마하존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 받은 가사를 미래에 오실 미륵불에 전하기 위해 이 산의 바위 틈에 들어가 선을 행하면서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산이다.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러니 계족산의 닭발 모양을 닮은 것이라는뜻은 원래의 말과 무관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위와 같은 뚯을 알고는 사용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범어梵語로 우리말의 '산'이 giri 즉 '지리'란 발음이라는 것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가야국 시절 칠불사의 허황후의 설화나 범왕리라는 지명이 불교남방전래설과 맞물려 남의 얘기로 들려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왕봉 ~ 영신봉 구간의 특징
바위로 이루어진 촛대봉을 지나면 세석평전이 펼쳐진다. 지금은 다른 산들에게 그 명성을 내줬지만 한때는 소백산 연화봉과 더불어 철쭉축제로 명성을 드높이던 그 세석평전이다. 30만평의 너른 평야 같은 곳에 잔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야영장이었던 자리에는 이젠 제법 나무와 풀도 많이 자랐다. 울긋불긋한 텐트의 현란한 색깔보다는 초목의 다채로움이 훨씬 보기 좋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돌들을 보면 사실 잔돌이라기보다는 작은 바위가 맞는 말일 게다. 봄이면 자생하는 진달래와 철쭉으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예전 대피소는 취사장으로 바뀌었고 현대식 대피소의 모습은 대피소라기보다는 산장 같은 인상을 풍긴다.
대피소 우측으로 영신봉1651.6m이 보인다. 지금은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 있는 곳이다. 여기서 눈길을 좌측으로 돌리면 목책 너머로 시원스럽게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가 보인다. 이 줄기가 낙동강 하구언으로 향하는 낙남정맥이니 이곳이 곧 그 분기점인 셈이다. 낙남정맥! 낙동강의 남쪽을 받치고 있는 산줄기라는 얘기다. 산경표는 그렇게 표기했다. 산경표의 그 점이 여러 문제를 낳는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영신봉 고찰 - 산경표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
지난 구간 얘기했듯이 영신봉은 여러 가지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우선 우리가 산경표를 알기 전, 후로 그 역할이 달라진다. 즉 우리가 산경표를 알기 전에는 영신봉 ~ 삼신봉 ~ 상불재로 이어지는 지리남부종주를 시작하던 곳이었다. 즉 예전에는 단순하게 지리 주릉에서 지리남부능선이 시작되는 곳이라 생각하고 걸었었다는 얘기다. 그것이 산경표를 알고 난 후에는 낙남정맥이 백두대간에서 갈리는 곳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산경표를 몰랐던 예전 산꾼들은 지리산의 많은 능선을 성삼재 ~ 천왕봉을 주릉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능선을 그은 다음 거기에 맞는 이름을 붙여 중거리 종주 산행을 즐겼었다. 그중 이 영신봉이 지리남부종주의 시작점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 지난 번 잠시 이야기하였지만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의 예외 구간이다. 아니 예외 구간이라기보다는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위배되는 구간이다. 산자분수령을 한 번 더 보자. 산자분수령을 관용구로 이해할 때 산줄기는 곧 분수령이 되므로 이 줄기 위로 비가 내리면 그 빗물의 어떤 것은 좌측 또 어떤 것은 우측으로 흐르기 마련임은 이미 얘기했다. 그러니 백두대간이 우리나라를 동서로 구분하는 줄기이므로 백두대간 위로 내리는 빗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물들은 절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백두대간 중 영신봉 ~ 천왕봉 구간에 내리는 빗물은 그렇지가 못하다. 즉 이 구간의 대간길에 내린 빗물은 우측 즉 마천쪽으로 가면 임천을 만들고, 좌측 즉 시천쪽으로 가면 덕천강을 만들기는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이내 남강으로 합쳐져 낙동강으로 흡수된 다음 남해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낙남정맥이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에서 나뉜 물줄기는 절대 만날 수 없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줄기가 남강이라는 작은 강 하나를 가르지 못하다니!
“무슨 얘기냐고? 생각해 봐. 백두대간이 뭐야?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는 줄기잖아. 그러니 동쪽으로 가는 물줄기들은 낙동강이나 동해로 가게 되고 서쪽으로 가는 물줄기들은 서해나 남해로 가게 되잖아. 그런데 이 구간에 내리는 빗방울은 임천과 덕천강으로 각각 흘렀다가 다시 남강에서 만나게 되잖아. 그러고는 낙동강 ~ 남해로 가게 되는 거 아니야? 지난 구간 지도에서 확인해 봐.”
“그러네. 심각한 오류네.”
“산경표가 잘못 됐다고 여기게끔 됐잖아? 그래서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게 박성태 선생의 신산경표야.”
박성태의 신산경표
누구든 쉽게 의심을 품고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명색이 백두대간인데 남강 하나를 가르지 못하다니! 그래서 산경표의 이런 오류를 해결하고자 박성태 선생은 고민 끝에 신산경표를 발표한다. 신산경표는 천왕봉으로 가는 대간 줄기를 이 영신봉에 이르러 우측으로 돌린다. 그러고는 그 줄기를 남해안 노량까지 진행하게 한다. 그렇게 하고 보니 백두산 ~ 노고단 ~ 영신봉 ~ 노량으로 진행하는 줄기가 만들어진다. 박성태 선생은 그 줄기를 ‘신백두대간’이라 이름을 붙인다.
즉 좌측 지도의 백두산에서 내려와 노고단 ~ 영신봉 ~ 천왕봉으로 가던 줄기를 영신봉에서 우회전시켜 삼신봉을 거쳐 금오산 ~ 연대봉 ~ 노량으로 이어지게끔 마루금(빨간선)을 그렸다. 그렇게 한 신산경표에서는 이를 산경표의 백두대간에 대응하여 ‘신백두대간’으로 부르겠다는 것이다. 신산경표에서 신백두대간을 고안해 낸 이유는 무엇일까? 괜히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신산경표는 그 취지를 “대간은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는 줄기이므로 그 정신을 따르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필자는 이 말을,
⓵정맥도 10대강이 바다와 만나는 합수점으로 가는데 하물며 아버지 격인 대간이 바다도 아닌 산에서 맥을 다한다는 게 사리에 맞지 않다는 점.
⓶대간이 바다로 가야 백두대간이 온전하게 동서를 양분한다는 기본정신에 합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
등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신산경표에서는 대간의 끝을 ‘영신봉 ~ 천왕봉’에서 남해 방향으로 틀어 ‘영신봉 ~ 노량’으로 향하게 했고, 그 이름을 ‘신백두대간’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럼 끝난 것일까?
“그게 신백두대간이야? 그 방향으로 걸어보려는 사람들도 많겠네. 신선하군.”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지.
첫째, 산경표 교도(?)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어. 신성불가침으로 여기고 있던 산경표에 감히 손을 댔다는 거지. 산경표는 산경표 대로 그대로 놔두고 정 필요하면 다른 이름을 붙이든지 해야지 왜 대간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만들고 또 산경표의 정맥들을 멋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냐는 거야.
둘째, 그러면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지. 신산경표에서는 천왕봉 ~ 웅석봉 ~ 백운산으로 진행하는 줄기를 ‘웅석지맥’으로 만들어 놓고는 그 분기점을 영신봉이 아닌 천왕봉으로 그대로 놔둔 것을 보고 하는 얘기인 거야. 이 점이 오히려 신산경표의 약점이 된 거지. 즉 이는 신산경표가 북한의 청북정맥이나 청남정맥 그리고 해서정맥이나 임진북예성남정맥에서 중간의 겹침줄기를 없애면서 이를 정맥에 포함시켰던 과감한 시도를 무색케 하는 결과가 돼 버렸어. 곧 천왕봉에 와서는 꼬리를 내렸고 이는 일관성의 결여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돼 버린 것이지.”
처음 듣는 용어에 정맥까지 동원되니 이해가 갈 리 만무할 것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지도를 펴가며 열심히 찾아본다.
“어려운 대목이야. 나중에 다시 살펴 볼 기회가 있을 거야.”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은데... 하지만 형. 이른바 신산경표의 태도는 고육지책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대간이 동서를 구분한다는 얘기는 맞고 산자분수령에 충실하자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런데 사실 문제는 있네. 영신봉 ~ 천왕봉 ~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줄기를 지맥(枝脈)의 한 구간으로 봐야 한다면 결국 ‘천왕봉’이 지맥으로 편입되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걸 동의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더욱이 백두대간에서 천왕봉을 빼놓고 얘기한다는 것도 용서하지 못할 거 같은데. 신산경표는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을 어떻게 했어?”
“그렇지. 어려운 얘기야. 어쨌든 신산경표는 그 구간을 ‘무명줄기’로 남겨뒀어. 사실 산경표에서도 그런 애매한 구간이 있을 때 그 구간을 ‘무명줄기’로 남겨뒀었거든. 청북정맥과 청남정맥 그리고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그랬던 거지. 그런데 그런 걸 해소하겠다고 한 신산경표가 다시 이런 애매한 구간을 ‘무명줄기’로 놔두겠다고 했으니 자승자박(自繩自縛) 모양새가 된 거야. 물론 그렇게 하지 않고 일반적인 신산경표의 편제에 따른다면 이 웅석지맥은 천왕지맥으로 그 이름도 바뀌어야 해. 그렇게 되면 지리산 = 천왕봉이라는 인식도 변해야 할 것이고. 그게 사람들의 동의를 받기가 어려울 거 아니겠어? 그 점이 신산경표는 싫었던 거야.
나아가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이 뭐야? 백두산과 지리산을 잇는 큰 줄기라는 것 아니야? 신백두대간이 굳이 우리나라를 동서로 구분하는 점을 강조하여 영신봉 ~ 삼신봉 ~ 노량 코스로 맥을 돌리겠다면 그 이름에서 ‘백두’라는 말을 빼라는 거지. ‘신(新)’자도 넣을 필요 없이 그냥 백노(白露)대간 혹은 백지(白智)대간‘으로 부르라는 것이지. 그리고 그러지도 못하면서 왜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은 빈 공간으로 놔뒀냐고 비난을 퍼붓는 거야.”
“그럼 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정말 어려운 질문이야. 신산경표의 생각도 참신하고 고려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봐. 하지만 우리가 산경표를 생각할 때에는 우리의 잣대로 산경표를 보는 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봐. 분명 우리 선조는 산줄기를 생각할 때 등산을 하기 위한 능선 산행의 편의성을 위해서 그어 놓은 것이 아니었거든. 10대강을 위주로 생활권을 크게 구분하고 있는 것. 그걸 파악했던 것이지. 그래서 산줄기의 끝이 강의 크기나 길이 등에 관계없이 부, 목, 군, 현의 치소(治所)로 향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 걸 알 수 있어. 그러니 산경표는 그냥 산경표야. 산경표는 산경표 대로 그대로 놔두자고. 그대로 둔 다음에 거기에 우리 현대인의 생각을 가미하고 변형시키자고. 이럴 때 분명히 용어의 정립의 필요할 거야. 신산경표에서 정맥을 합치고, 없애고 대간의 무명줄기도 정맥에 편입시키는 등 변형을 줬거든. 난 이런 점이 불만이야.
가령 이 신백두대간만 해도 그래. 굳이 ‘백두대간’이라는 개념을 포함시킨 다음 ‘백두산 ~ 노량’이라고 구간을 설정해 놓으면 천왕봉이 애매해지잖아. 물론 영신봉이나 천왕봉이 다 지리산이니 ‘백두산 ~ 지리산 ~ 노량’으로 봐야 하고 지리산 안에 천왕봉이 있으니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할 수도 있겠고 우리도 그렇게 인식하고 대간길을 걸을 수도 있어. 하지만 웅석지맥이 문제가 된다니까. 대간 거리의 확정도 문제가 되고. 우리나라 산줄기의 큰 특징이자 자랑이 뭐야? 나라의 산줄기 길이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
한편 산줄기에 관한 한 우리보다 일찍 일제의 잔재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북한은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 이름하였다. 그러고는 그 줄기의 끝을 여기서 우측으로 돌려 삼신봉1289m에 이른 다음 거기서 다시 우측으로 돌려 구재봉773.7m에서 마치게 그렸다.
낙남정맥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다. 이 점에서 이중환의 택리지는 낙남정맥을 몰랐었다. 아니 이런 문제 때문에 낙남정맥을 억지로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중환이 보통 사람인가!
어쨌든 여기서는 그저 간단하게 이곳이 낙남정맥이 갈리는 영신봉이라는 점과 낙남정맥은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인 산경표에 나오는 우리나라 1대간 1정간 13정맥 중 하나의 정맥으로 글자 그대로 낙동강 남쪽을 받쳐주는 정맥이라는 것만 알아두자.
- 졸저 전게서 53쪽 이하
이런 점 때문에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이 중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지리시험에 백두대간 혹은 산경표 관련 문제를 출제한다면 적어도 배점이 30점 정도는 되는 문제가 출제될 만한 분야입니다.
세석평전을 내려다 봅니다.
점필재는 이 세석평전을 저여원沮洳原이라 불렀습니다.
시루봉을 지나 습한 평원(沮洳原)에 다다랐다. 단풍나무가 길을 막고 서 있었는데 줄기는 문설주처럼 서 있고 가지는 문지방처럼 휘어져 있어 그곳을 통해 나오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아도 되었다. 습한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었고 평평하고 광활한 땅이 5~6리쯤 펼쳐져 있었다. 숲이 무성히 우거지고 새주위에 흘러 농사를 지으며 살 만하였다. 물가의 초막 두어 칸을 살펴보니 울타리를 둘러쳤고 흙으로 만든 구들이 있었다. 이 집은 바로 내상內廂에서 매를 잡는 초막이었다.
이 매를 잡는 이들이 머물렀던 초막 부근에 현대에 들어와서 한국전쟁 다음에는 우천 허만수 선생이 기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등로 개척과 조난 산객 구조 그리고 간단한 지도 제작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러고는 지리 어딘가로 숨어버리셨고....
영원한 지리산인이라 할 것입니다.
한편 이 세석평전을 무릉도원이라고도 보는 견해도 많았습니다.
즉 우리 선인들은 지리산에 있는 무릉도원 즉 이상향을 찾기 위하여 무던히도 돌아다녔습니다.
청학동, 별천지, 동천洞天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무릉도원은 사람들에 따라 ①불일암이 있는 쌍계사 일대로 보기도 하고 ②지금의 청학동 혹은 ③이 세석평전을 그곳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리산의 이런 '이상향'은 삼신산 중에서 방장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과 관련하여 고운 최치원(857~ ? ), 쌍명재 이인로(1152~1220)를 거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신라의 최치원 같은 경우에는 유학파인 자신을 정부에서 고위 관료로 등용해주지 않자 아예 짐을 싸들고 지리에 들어와 말년에는 신선이 되어버렸고, 고려의 이인로 역시 자신의 문장 역량을 자부함에도 정부에서 알아주지 않음을 한스러워 하였던 인물인데 어쨌든 이들이 남긴 그 문장들이 후세에 많이 읽혀지면서 조선의 선비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촛대봉에서 영신봉을 바라보면 삼각고지 너머 반야봉이 명백하게 보입니다.
영신봉靈神峰 이야기
한편 영신봉에서 좌측으로 늘어지는 능선.
바로 낙남정맥입니다.
이 영신봉이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이 가지를 치는 분기점인 것이죠.
좌측으로는 세석천 약수가 거림골이 되어 흐르는 물은 내대천이 되어 시천천(살천)으로 합류가 되겠군요.
그러고는 결국 남강 ~ 낙동강으로 합류가 되겠고....
우측으로 흐르는 물은 세석골로 시작하여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다 백무동 계곡이 되어 임천으로 합류가 되겠죠.
그러고는 남강 ~ 낙동강으로 합류가 되니 결국 좌측 세석골 ~ 살천으로 가는 물이나 우측 한신 계곡 ~ 임천으로 흐르는 물이나 다 남강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 조화를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산경표인 것입니다.
영신봉 ~ 천왕봉 구간의 백두대간이 대간으로서의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유!!!
그런데 위의 사진을 보니 영신봉 우측으로 튀어나온 바위며 한신계곡 방향으로 늘어선 바위가 이 영신靈神이라는 봉우리 이름과 맞물려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영신靈神이라.
예로부터 우리나라 무속인들과 민중들 사이에서도 석가나 공자 외에 옛날 중국의 지략과 무공이 출중한 영웅들 즉 관우, 장비, 유비, 제갈, 한신 등을 섬기는 사례는 빈번했다고 한다.
한국민속종교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무속세계에서 중국 신령을 모시는 전래풍습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라고 한다.
명군明軍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崇明)사상이 발생하였고 이후 관우숭배사상으로까지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지리 99골
종교도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군요.
하긴 지하철 동대문역 바로 옆이 동묘역인데 그 동묘가 바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죠.
여기서 잠깐 1924년 육당 최남선이 창간한 신문인 시대일보의 기사를 보기로 합니다.
“청학동을 찾아 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삼백 여 년전 한 도인의 秘書를 보건대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 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卜去)한지 십 리 이내에 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 하고 도승은 없다 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지인 청학동을 찾아 천 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류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데 십년 이내의 車馬 영영문(盈迎門)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 한다.
현금(現今) 세소간(世所間)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이라 하는 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사십리나 되고, 자좌 우향(子坐 于向. 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 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 중략 ------
諸君아!
청학동을 찾아 제갈, 한신(諸葛, 韓信)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을 배워서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대정 14년 5월 24일, 시대일보, 진주 一記者)
대정 14년은 1925년입니다.
기사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청학동은 세석평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비결쟁이들은 오직 비결서에 기록된 ‘삼제갈 팔한신’의 예언을 따라 지리산의 이 세석고원으로 찾아 들어 둥지를 틀었숩니다.
그러고는 세석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영신봉을 한漢나라 관우關羽의 자字를 따서 운장雲長바위, 그 맞은 편에 버티고 있는 바위를 역시 한의 무장이자 초楚나라의 제왕이었던 한신韓信의 이름을 따서 한신바위라 이름 짓고는 그 두 바위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현실을 도피하려는 의식이 더 만연해지자 신문에 까지 이런 기사가 뜨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무속인들에 의해 기도처가 되고 있는 이 바위 이름들도 다 이런 이상향과 관련지어져 생긴 이름들입니다.
그럼 그 바위를 자세히 들여다 볼까요.
'ㅡㅡㅡㅡㅡㅡ'은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한신계곡의 어원이 궁금하셨었죠?
바로 이런 '한신 바위'가 있는 계곡이라 하여 한신계곡이라는 이름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지리산의 지명 하나하나는 다 불교, 유교 그리고 토속신앙과 다 관련되어 지어진 이름인 것입니다.
영신봉靈神峰도 괜히 영신봉이 아닌 것입니다.
이 영신봉이 낙남정맥이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시발점이라고 하였죠?
이왕 산줄기 얘기가 나왔으니 신산경표와 대한산경표를 비교해 볼까요?
신산경표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산경도를 제시하고 있는 '대한산경표'의 그림을 봅니다.
참고도 #1 대한산경표 상 낙남정맥 부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산경표는 우리에게 백두대간과 1정간 13정맥만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 산경표가 조선시대의 인문지리 인식체계를 집대성한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산줄기의 족보였습니다.
그것이 구한말 일제통감부 체계로 들어가자 모든 교육 시스템이 일본식으로 바뀌게 되었고 특히 조선어와 국사 그리고 지리과목이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자원 침탈에 눈이 먼 일본은 독일의 지질학자 고체에 이어 1900년 8월 일본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리울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를 파견하기에 됩니다.
고토분지로의 저서인 조선기행록을 보면 고토는 1901년 1월 3일 군산을 출발하여 1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후(군산 → 부산), 1월 24일 부산을 출발하여 남해안을 거쳐 2월 16일 목포에 도착(부산→ 목포)하고, 2월 20일 목포를 출발해서 내륙을 거쳐 3월 19일 다시 부산에 도착(목포 → 부산)했다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조선근대사의 권위자인 최혜주의 논문에 의하면, 최혜주는 당시 일본의 동방협회회보 86호(1902. 4. 20. 81~82쪽)를 근거로 “고토는 1900년 8월 하순부터 다음해 3월 하순까지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 지역을 조사하고, 1901년 8월 상순 다시 8개월간 두만강, 압록강지역을 조사하였다.”고 게재하였다.
- 졸저 전게서 105쪽 각주
이 탐사 여행의 결과물로 1903년 고토는 '조선산맥론'을 발표하게 되고 그 논문 안에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36개의 산맥이 자리 잡게 됩니다.
- 이 산맥이라는 개념은 우리 선조들이 쓰던 우리 산줄기 개념이었지 고토 분지로이 창작물이 아닙니다. 우리 고유의 산줄기 개념으로서의 산맥을 지질구조선의 다른 이름에 산맥을 갖다 붙임으로서 용어의 혼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그의 제자 야쓰쇼에이는 그 산맥들을 단순화 시켰고 통감부 체제하의 일제는 그것을 학생들이 배우는 지리교과서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지리교과서는 해방이 된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리 교과서에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산맥 체계가 틀리다는 것은 아닙니다.
- 자세한 것은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이나 조석필의 '태백산맥은 없다' 참조
2) 어쨌든 민간지리학자 박성태 선생은 산경표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하면서 신백두대간 + 12정맥 + 12기맥 + 162지맥을 근간으로 한 '신산경표'라는 책을 발간하게 됩니다.
실로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산꾼들의 행보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능선 종주 산행 중심에서 대간 + 정맥으로 움직이더니 이제는 기맥이나 지맥으로도 발길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외연이 확장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산경표는 선생께서 혼자서 작업을 하다보니 오류가 발견되기시작합니다.
즉 선생께서 표방한 '산경표의 정신 계승' 즉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적극적으로 부합되기 보다는 단순하게 긴 줄기 즉 산경山經 위주로만 진행되는 오류가 발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관성의 결여로 비춰지기 충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이 산자분수령의 취지에 입각하여 물줄기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그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3) '산으로' 박흥섭과 J3의 배병만이 그 주창자들인데 이들도 그냥 발원지와 합수점을 위주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물줄기의 세력도 보아야한다는 점에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습니다.
박흥섭의 주장 즉 대한산경표의 입장에서 이 지리산 부근을 보겠습니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마무리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지리인식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맥의 끝이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낙남정맥은 영신봉에서 가지를 치게 됩니다.
그 낙남정맥은 영신봉 ~ 삼신봉 ~ 옥산 삼거리를 지나 무선산 ~ 무학산으로 진행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옥산삼거리에서 남진하는 산줄기는(신백두대간의 일부) 금오산 ~ 용산 ~ 두우산을지나 섬진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섬진동지맥이 되게 됩니다.
그러니 대한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이라는 우리 기본 산줄기를 세분하자면 영신봉 ~ 천왕봉 구간만큼은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예외가 되는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천왕봉에서 연장되는 덕천지맥(신산경표상 웅석지맥)은 신산경표와 같이 그대로 인정이 됩니다.
여기서 끝 부분 즉 합수점으로 가는 부분에 대하여는 지난 편을 참조하시면 될 것입니다.
다만 덕천강이 인공호수인 진양호와 만나는 합수점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기는 합니다.
인공호수를 만들면서 예전의 합수점 위치가 지금의 그것보다 동쪽으로 더 갔을 것 아니냐는 논의입니다.
이럴 경우 신산경표의 종착점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긴 합니다.
논의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영신봉 정상
이제부터 이 낙남정맥 좌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모두 남강으로 합류되어 낙동강에 합류된 다음 남해로 흘러가게 될 것이며 우측으로 흐르는 물들은 섬진강을 만나 남해로 흘러들어 가게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낙남정맥의 역할이죠.
영신봉 이정표에서 낙남정맥으로 진행하는 길은 비탐방구간입니다.
금줄을 넘어서면 바로 아래에 헬기장이 있고 그 우측으로 10여 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영신대가 있고 영신암이 있습니다.
이 영신대가 문창대, 향적대와 더불어 지리 10대 중 하나가 됩니다.
이 루트가 좌고대가 있는 암봉을 피해 대간길을 이어가던 주릉이 있던 길 즉 구등로舊登路였을 겁니다..
영신사 터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덮였는데, 거처하는 승려가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나 거처하는 승려 또한 한둘에 불과하다. - 이륙 지리산기 1463. 8.
점필재도 이곳을 들렀습니다.
영신사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 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 그 목에 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은 아닐까? - 김종직 유두류록 1472. 8. 17.
아까 잠깐 왜구에 대한 얘기는했었죠?
우선 유몽인은 이 영신암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이어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을 내려가 영신암에 이르렀다. 여러 봉우리가 안을 향해 빙 둘러섰는데 마치 서로 마주보고 읍揖을 하는 형상이었다.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좌고대는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아리왕탑은 서쪽에 있고 가섭대는 뒤에 있었다. - 유몽인의 유두류산록
그나저나 가섭상은 어디 있을까요?
제가 들러서 가섭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제 눈에는 제대로 보이질 않더군요.
도솔산인님의 사진을 빌려옵니다.
도솔산인님의 사진을 보니 '刃斫亦被島夷兇' 표기까지 해두셨습니다.
왜구들이 내리친 칼자국 흔적이라는 것이죠.
황준량의 유두류산기행편에 나오는 시구를 참고하여 찾으셨다는군요.
지금 등로를 따르다 보면 이 영신사는 찾을 수 없습니다.
현 백두대간 등로는 이 영신사를 거침이 없이 그저 175계단으로 내려와,
좌고대에 오른 필자
좌고대 옆을 지나면 됩니다.
좌고대坐高臺라......
점필재는,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다. 그 중에 하나는 아래가 반들반들하고 위는 뾰족하며 꼭데기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넓이는 겨우 한 자 정도였다. 승려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 예불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종자 가은데 옥곤과 염정이 그 위에 거뜬이 올라 절을 하였다. 나는 절에서 바라보다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들을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저도 그 반석 위로 올라가보려 했으나 깨달음을 얻기 전에 골로 갈 것 같아 점필재의 설득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점필재가 하산 루트로 잡은 봉우리를 지납니다.
점필재는 곧은재 능선을 타고 가다 샛골과 한신계곡의 합수점으로 내려섰을 겁니다.
칠선봉의 조망은 막힘이 없습니다.
뒤로는 장터목대피소와 제석봉 ~ 천왕봉 ~ 중봉 라인이 뚜렷하고 남동쪽으로는 낙남정맥의 흐름이 힘차고 그리고 이제 호남정맥의 백운산이며 도솔봉이 손에 잡히기 시작합니다.
막연히 보이던 반야봉과 무등산 그리고 만복대도 이제는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한편 영신봉을 넘어 긴 나무계단(175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선비샘을 지나게 된다. 군사도로의 옛 흔적이 사라지고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고 있는 등로를 따르다 보면 이내 벽소령대피소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은 파랗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벽소령(碧宵嶺)에서 하룻밤 쉬어가는 건 어떨까? 물론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을 하고서야 묵을 수 있다.
- 졸저 전게서 61쪽
선비샘의 물들은 선비샘골로 모아져 화개천이 되어 섬진강으로 합류됩니다.
그 지점이 합수점이 되는 것이죠?
그러고는 벽소령입니다.
이 벽소령이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예전 상권商圈과 관련하여서 입니다.
원래 지리산 상권은 남강과 섬진강을 품은 지역을 중심으로 일찍이 장시가 발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강 쪽으로는 함양, 산청의 읍내장 그리고 진주의 주내장 등이, 섬진강 쪽으로는 남원의 부내, 곡성, 광양의 읍내장, 하동의 하두치장 등 무려 50여 개의 장이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 중 지리산 길목에 위치한 화개장은 하동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화개장은 벽소령을 따라 이 삼각고지에 이른 다음 여기서 북부능선을 타고 인월장으로 연결이 됩니다.
팔량치 아래에 있는 인월은 어떻게 보면 산간벽지의 마을일 수도 있을 것이나 남강과 섬진강을 통해 올라온 해산물이나 반대로 산간의 임산물이 거래되는 상권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니 남원의 운봉, 함양의 마천의 중심에 이르는 곳이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내륙을 통한 민초들의 발걸음이 이곳처럼 잦은 루트도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역할을 한 이 길은 자연스럽게 의병이나 동학농민군 그리고 빨치산이 오고가는 길이 되었을 겁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군사정권에 의하여 군사비상도로로 이용되기도 했으니.....
그 길이 지금은 당일치기로 '성중종주'가 어려운 팀들이 구간을 나누는 날머리이자 다음 구간 들머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즉 벽소령 대피소 앞에서 돌계단을 내려가 임도를 따라 마천면 삼정(음정, 양정, 하정)리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벽소령을 빠져 나와 숲으로 들면 이내 형제봉입니다.
이 이정표 뒤의 작은 굴이 예전 비박지였습니다.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이용했었죠?
지금은 남의 나라 얘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 형제봉은 이렇게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 봉우리들을 오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형제봉을 확실하게 보려면 임천강 건너 임천지맥 상의 삼봉산1186.7m이나 투구봉1032.5m으로 가야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지리 주릉부터 북부능선은 물론 서부능선까지 지리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런 이름들 많죠?
형제봉, 삼형제봉, 칠형제봉.....
한편 일개 산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 산에 의지하여 사는 그 주변 마을의 주민일 것입니다.
산 이름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그 산 주위의 주민들이 불러주던 이름이 그 산이름으로 굳어지는 것.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형제봉에 대해서는 이 주민들이 달리 부르는 이름이 있는 거 같습니다.
즉 형제봉 아래 터 잡고 사는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이 두 개의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이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부자암봉父子巖峰이라고 부르는데 지리산 '지도'와 우리 산꾼들만 그 곳을 형제봉兄弟峰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증거와 그 증거를 합리화 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암의 설화 속으로 들어가 보죠.
조선시대에 장市場이 섰다고 정쟁(丁場) 이라고 불렀던 지리산 마천의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에는 전래설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목욕을 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몰래 엿본 나무꾼이 한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써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하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여기까지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거의 대동소이 하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후편에 가서는 조금 각색이 되어 父子巖의 전설을 잉태시켰다.
선녀는 지아비와 두 아들을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三父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다.
선녀의 이름은 “아미”라 하고 “인걸”이라는 이름의 나무꾼은 옛날 하정부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산 아래 하정마을 쪽에서 보이는 부자암의 모습은 꼭 삼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 가는 형상 이라고 하나 속인의 눈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다.
전설은 전설로 막을 내리는 것이 통상적인 예인데 그 전설을 기리고 제사까지 지내는 첨단시대에 보기 드문 전설 같은 실화가 있어 더욱 흥미를 끌면서 그분들이 주장하는 부자암 지명 어원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전설의 주체가 되는 부자암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석문암계”라 친목계를 조직을 해서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속의 나무꾼인 인걸의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석문암계의 총무를 맡고 계시는 하정부락 김종남(72세) 어른께서는 근간 30여년 지간에 갑자기 등산꾼들로부터 형제봉으로 잘못 불리어진 부자바위를 지금이라도 바로 불러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신다.
관습화되고 고착화 되어버린 지명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그 개체가 국민생활에 불편을 주는 사항이 아닐 땐 더욱 힘이 든다. 그러나 고쳐 불러야 하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형제봉만큼은 본래의 이름인 부자암내지 부자바위로 불러야 한다고 본다.
- '지리99' 가객님 글에서 인용
이러한 연유로 부자암에서 발원한 광대골 물길의 상부 골을 지역민들은 “부자바위골”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광대골 아니 부자바위골로 내려온 물은 아까 한신계곡과 백무동에서 내려오는 물들과 만나 덕천천이 되어 마천에서 임천강이 되는 것이죠.
임천은 일정 구간 '엄천'이 되고 그 엄천은 산청에 이르러 일정 구간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고로 산청의 옛 이름은 산음인데 이 경호강이나 산음은 이 지역이 중국의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왕희지의 고향인 중국 절강성 소흥현 산음의 산수와 비견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고는 삼각고지입니다.
지리북부능선
형제봉을 지나면서 부드러운 능선을 계속 따르다 보면 고도가 조금씩 높아진다. 삼각고지1484m다. 그 삼각고지에서 조금 내려오면 우측으로 등로가 하나 보인다. 영원령 ~ 삼정산1156.2m ~ 실상사로 이어지는 지리북부능선 루트다. 일부 구간은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도계가 되기도 한다. 영신봉에서 잠깐 언급한 지리남부능선에 대응하는 능선이다. 예전에 꾼들은 실상사를 출발하여 삼정산 ~ 삼각고지 ~ 지리주릉 ~ 영신봉 ~ 삼신봉 ~ 상제봉을 잇는 지리남북종주를 즐기기도 했다. 당시에는 지리화대종주(화엄사 ~ 코재 ~ 노고단 ~ 지리주릉 ~ 천왕봉 ~ 중봉 ~ 대원사)와 함께 그야말로 꾼들의 로망이었던 코스였다.
- 졸저 전게서 62쪽
참고로 그 삼정리 바로 우측이 백무동이며 좌측이 1년에 단 한 번 문이 열리는 이른바 '지리산 7암자 순례 코스'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팁! 위 구간들은 대부분 비탐방구간이다. 그러다 보니 매년 사월초파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꾼들이 있다. 바로 속칭 ‘지리산 7암자 순례’산행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이날만큼은 신도들을 위해 산행 구간을 일부 개방을 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음정 - 도솔암 - 영원사 - 삼정산 - 상무주암 - 문수암 - 삼불사 - 약수암 - 실상사’ 코스를 변형된 북부능선종주로 즐기고 있다.
- 졸저 전게서 62쪽
유난히 물이 많은 연하천 대피소를 지나면 계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무계단을 편하게 올라 진행하면 묘봉입니다.
묘봉卯峰은 사면치기로 진행합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이동하면 토끼봉이다. 지리산의 정중앙에 있는 반야봉에서 볼 때 가장 정동쪽 즉 묘방(卯方)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졸저 전게서 62쪽
주지하다시피 예전에 지리산의 주봉은 동東으로는 천왕봉 그리고 서西로는 반야봉이었습니다.
두 봉 사이를 걷는 능선이 주릉이었고.....
그러던 것이 1988년 구례 ~ 성삼재 ~ 반선을 잇는 도로가 확, 포장 되면서 내용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순전히 교통의 편의와 접근성의 용이함 때문이었죠.
어쨌든 서부 지리의 중심이었던 반야봉에서 정동쪽 즉 묘방卯方을 바라 볼 때 그곳에 위치한 봉우리가 바로 이 봉우리였습니다.
그 묘방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바로 묘봉입니다.
묘봉을 내려오자마자 좀 너른 곳이 나옵니다.
중앙에 곰 두 마리가 서 있는 곳이 출입금지 팻말입니다.
실은 이곳이 1400.7봉을 통해 칠불사로 진행하는 루트입니다.
벌써 몇 십 년째 막아놓다보니 들어가는 출입구는 잡목으로 꽉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입구만 뚫고 들어서면 이후 좋은 능선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칠불사가 있는 곳의 행정구역의 명칭은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梵旺里입니다.
범왕리는 당연히 범왕마을梵王村이라는 자연 마을에서 나온 이름이겠고....
진양지(1632년)에 까지 기록되어 있는 마을이니 그 유래가 오래 되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유래한이름일까요?
우선 가락국 허황후와 관련하여 인터넷을 뒤져보면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의 설화가 나옵니다.
가야국 김수로왕은 어찌된 영문인지 왕비 맞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던 신하들은 어느 날 아침 조정 회의를 마친 후 왕에게 좋은 배필을 골라 왕비로 모실 것을 권했다.
『경들의 뜻은 고맙소. 그러나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었고 왕후를 삼는 일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경들은 염려치 마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배와 말을 준비하고 바닷가에 나아가 손님이오거든 목련으로 만든 키와 계수나무 노를 저어 맞이하도록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신하들이 바다에 다다르니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해변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20여 명의 신하와 노비 그리고 금은 보석을 잔뜩 싣고 온 배안의 공주는 선뜻 따라나서질 않았다.
이 보고를 받은 왕은 친히 바닷가로 거동, 산기슭에 임시 궁전을 만들어 공주를 맞이했다.
『저는 아유타국(중인도에 있던 고대 왕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지난 5월 저의 부왕과 모후께서는 꿈에 하늘의 상제로부터 가락국왕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저를 보내라는 명을 받고는 즉시 이곳으로 보내셨기에 용안을 뵙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공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소.』
그날로 왕과 공주는 결혼을 했고, 그 해 왕후는 곰을 얻는 꿈을 꾸고는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그 후 왕후는 9명의 왕자를 더 남아 모두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중 큰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김씨의 시조가 됐으며, 둘째 셋째는 어머니 성을 따라 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가야산에 들어가 3년간 수도했다.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 준 스승은 왕후와 함께 인도에서 온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보옥선사)이었다. 왕후가 아들들이 보고 싶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들을 그리는 모정은 길이 멀면 멀수록 더욱 간절했다.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아들들을 찾아갔다.
산문 밖에는 오빠 장유화상이 버티고 서 있었다. 먼 길을 왔으니 이번만은 부드럽게 면회를 허락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가까이 다가갔으나 장유화상은 여전히 냉랭했다.
『아들의 불심을 어지럽혀 성불을 방해해서야 되겠느냐. 어서 돌아가도록 해라.』
왕후는 생각다 못해 산중턱에 임시 궁궐을 짓고 계속 아들을 만나려 했으나 오빠에게 들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일곱 왕자는 누가 찾아와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수행에 전념했다.
궁으로 돌아와 아들들의 도력이 높다는 소문을 들은 허왕후는 아들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달래던 왕후는 다시 지리산으로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월 보름달 빛이 휘영청 밝은 산문 밖에서 장유화상은 전과 달리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네 아들들이 이제 성불했으니 어서 만나 보거라.』
왕후는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들들은 기척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연못을 보면 저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라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교교한 못 속에는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왕후에게는 이것이 아들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김수로왕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들이 공부하던 곳에 대가람을 이루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반야봉에 위치한 칠불사다.
김왕광불(金王光佛), 왕상불(王相佛), 왕행불(王行佛), 왕향불(王香佛), 왕성불(王性佛), 왕공불(王空佛)등 일곱 생불(生佛)이 출현했다하여 칠불사라 불리운 이 절은 한 번 불을 때면 49일간 따뜻했다는 아자방(亞字房, 경남 지방문화재 제144호)으로도 유명하다.
이 허황후와 보옥선사가 인도의 왕족 즉 梵王族이었으므로 허황후가 아들들을 만나기 위히여 기다리던 자연마을이 범왕마을이 된 것이며, 이 마을 이름을 따 범왕리가 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그러고는 화개재입니다.
너른 광장 같은 곳이 나온다. 화개재다. 예전에 하동 사람들은 경남의 해산물과 소금 등을 그리고 전북의 남원 사람들은 삼배와 산나물 등을 가지고 각 연동골과 뱀사골을 따라 이곳에서 만나 장을 열었다고 한다. 가히 화개장터의 효시라 할 만한 곳이다.
여기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뱀사골로 진행하여 반선으로 내려갈 수 있다. 10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뱀사골산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뱀사골은 그 이름만큼이나 길고 구불거리는 계곡이다. 이 화개재에서 반선까지는 9.2km라고 안내판은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 이 루트를 따라 하산하려면 소요되는 시간 이상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지루한 구간이다.
졸저 전게서 63쪽
지루한 나무 계단을 지나면 삼도봉이라는 팻말이 붙은 1501봉입니다.
여기서 좀 더 진행을 하자. 그러면 이름도 재미있는 ‘날라리봉’1501m이다. 어감이 좀 좋지 않았나? 공원관리공단에서는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삼 개 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1990년대 초 삼도봉으로 ‘개명’을 했다. 실은 이 봉우리가 낫의 날같이 뾰족하다고 하여 ‘낫날봉’이었다. 그게 시간이 흐르면서 음운이 변하여 날라리봉으로 되었던 것인데 애꿎게 이름만 나무란 꼴이다.
여기서 팁 하나 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는 세 개의 삼도봉이 있다. 그 셋 중 하나가 이 삼도봉이며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거창군과 전라북도 무주군 그리고 경상북도 김천시 등 세 개의 도가 만나는 초점산1249.1m이라는 이명을 가진 봉우리이고, 마지막 하나가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북도 김천시 그리고 충청북도 영동군 등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가 만나는 민주지산 바로 옆의 삼도봉1177.7m이다.
이 삼도봉에서 남동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원스럽게 뻗은 줄기에 불무장등 능선이 보인다. 우측으로는 반야봉이 지척이므로 수고스럽지만 잠시 반야봉1732.1m으로 오른다. 왕복 2km 정도의 거리이므로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않다. 반야낙조는 또 지리10경 중 하나다. 여기서 지리의 낙조를 바라 본 경험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자랑거리다.
- 졸저 전게서 64쪽
그런데 이 날라리봉 과 관련하여 하동군지를 보면 좀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즉 이 날라리봉이 주변의 지형과 맞물려 살펴보면 이 봉우리가 여자의 성기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하다가 부근에 '지보초'가 군생하므로 '지보봉'으로 하자니 너무 외설적이다 하여 '날라리봉'으로 개명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하동군지는, 이 단맥에 있는 '통꼭지봉909m'을 거론하며 '정유재란(1597년)때 부근의 의병과 승군들이 이곳에 올라 패전의 슬픔으로 통곡을 하였다고 통곡봉으로 부른다.'고 하였으니 일설에 의하면 날라리봉 같이 여자 '젖꼭지'에 해당하므로 '통꼭점'이라 부르는데 너무 나간 게 아닌가 하는생각이 드는군요.
도대체 믿어지기나 하십니까?
이 날라리봉 조형물 우측으로 보면 동물이동 감시카메라가 있고 바위 옆으로 등로가 확연하게 보입니다.
이 능선이 이른바 불무장등 능선이며 이 능선은 날라리봉(삼도봉) ~ 불무장등 ~ 황장산 ~ 촛대봉 ~ 합수점 라인이 되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계로서 약 15.8km의 단맥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불무장등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불무장등이라는 이름은?
산의 모양 가지고 이름과 연결시키는 이들은 대장간의 화로인 '불무(풀무)'와 같은 형상이라고 단정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무장등이라는 겁니다.
아니면 보통은 不無長嶝이라고 써서 '우두머리 봉' 혹은 '높은 산' 정도로 볼 수 있지만 그 의미도 선뜻 와 닿지 않는군요.
산 이름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막 지어지는 것이 아니죠.
살펴봅니다.
지리산 자체가 승도僧都 혹은 불도佛都라고 하였으니 불교 용어와 관련지어 봅니다.
'불무'라는 발음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지리의 서쪽을 책임지는 제1봉이 반야봉입니다.
이 반야봉이 지리산에서 갖는 지위를 느껴보기 위해 반야봉으로 올라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우측으로 곰출현 펼침막이 있는 곳을 지나 - 조금 이따 얘기하겠지만 이 루트가 묘향암으로 가는 길임-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우틀하여 반야봉으로 향합니다.
반야봉에서 본 노고단(우측).
반야봉般若峰이라!
반야는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입니다.
화엄사를 개창하였다는 연기조사鷰起 祖師는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화엄사가 있는 산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따서 智利山이라 부르게 되었고 문수보살은 보살 중에서 상수에 있는 보살이어서 특히 그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부르니 이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량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반야가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참모습을 아는 최고의 지혜을 뜻하니 이 반야봉이 불모佛母 혹은 절집을 뜻하는 불묘佛廟였다는 애기입니다.
그러니 이 반야봉의 기氣를 받아서 내려가는 줄기 즉 이 긴 능선의 이름은 '반야장' 그리고 그 능선 중의 첫 봉우리이니만큼 '반야장등'이라고 써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반야봉'과 '반야장등'의 '반야'가 중복이 되는데 지명에서는 가급적 이런 중복 현상을 피해야 하죠.
그래서 반야의 다른 이름인 '불모'를 썼고 '불모장등'이라 이름하게 된 것입니다.
그 불모장등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켜 '불무장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불모'란 발음이 '불무'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 얘기는 지금도 노고단 아래에 있는 문수암에서 용맹정진하고 계시는 스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지리 99' 클럽의 '꼭대'님도 같은 의견을 피력하셨습니다.
이럴 경우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氣가 ①날라리봉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와 불무장등 ~ 황장산을 지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합수점으로 뻗치는 길고 큰 줄기(長嶝)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따 자세히 보겠지만 AD544년 '연鷰'을 타고 지리산에 도착한-불교 남방전래설- 鷰起 祖師는 지리산을 둘러본 후, 지리산의 기운이 크게 두 갈레 즉 천왕봉과 반야봉으로 나뉨을 봅니다.
그래서 천왕봉의 기운은 법계사에서 받게 하고-법계사 창건- 다시 두 갈레로 나뉜 반야봉의 기운 중, ① 반야봉 - 불무장등으로 흐르는 기운은 연곡사에서 받고, ② 노고단 - 우번암으로 흐르는 기운은 화엄사에서 받게끔 사찰들을 세웁니다.
이렇게 불사를 마무리한 뒤 연기조사는 이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臺라 칭하면서 여기서 수행을 이어 나갔다고 합니다.
이 문수를 한역하면 묘수妙首, 묘향妙香, 묘길상妙吉祥 등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묘향대는 문수대의 다른 이름이라 할 것입니다.
연두색 지붕의 묘향대
鷰起 祖師가 수행을 하였다는 이 묘향대로 가는 길은 세 곳입니다.
그 하나가 반야봉 오르기 전 우측으로 펼침막이 쳐진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는 곳-아까 본 곳-, 다른 하나는 이 반야봉에서 중봉을 지나 직진을 하는 길이며 다른 한 길은 뱀사골 방향에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묘향대는 우리나라 암자 중 최고지에 있는 암자입니다.
지리 10대 중 하나입니다.
창건주 연기조사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 더 자세히 볼 것입니다.
한편 반야봉의 기운을 받는 연곡사는 일제와 관계가 깊은 절입니다.
정유재란 때에는 왜구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한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대한창의대장 김동신에 의하여 조직된 항일의병 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월공스님 같은 경우가 의병과 동학교도들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하고 ....
그러나 일본군의 '연곡사 토벌작전'에 의해 의병장 고광순도 같은 해 9. 11. 이곳에서 순국함으로서 연곡사는 완전히 폐사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한편 '지리산 선비'라고 항다면 남명 조식이 우선입니다.
성호 이익도 "조선에 있어 기개와 절조에 대해서는 최고봉"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인물이니까 말입니다.
세인들은 또 한 명의 지리산 선비를 꼽으라고 하면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을 한 매천 황현을 듭니다.
지리산 동쪽의 남명에 비견해 지리산 서쪽의 매천이라는 것이죠.
위 고광순의 사망 소식을 들은 구례에 살던 매천 황현은 9. 12. 이 연곡사로 달려와 통한의 시를 지어 그를 위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일제에 저항하는 의식을 가졌던 매천이 조선정부와 일본군에 반기를 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동비의 난'이라 하여 용납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인 선비가 갖는 한계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지리 10대 중 하나인 무착대
중요한 것은 연곡사로 내려가는 도중 그 기운의 한 갈레가 불무장등에서 우측으로 흘러내리면서 지리 10대 중의 하나인 무착대無着臺라는 하나의 기도처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그 흔적만 남아 있지만 이 능선이 이만큼 기돗발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불무장등 능선 그리고 우측의 왕시루봉 능선 등 모든 골에서 발원하는 물들은 다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죠?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사이에 섬진강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섬진강蟾津江에 대해서 좀 알아볼까요?
섬진강의 옛 이름은 두치강豆恥江이었다고 하죠?
섬진강의 이전 이름은 두치강豆恥江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들어와 이 강의 나루터에 도착하자 나루터 일대에 수많은 두꺼비가 몰려들어와 울부짖었다. 이 때문에 왜군들이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에 두치강이라 부르던 강이름을 이때부터 섬진강으로 바꾸었다.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전설입니다.
그럴 듯하죠?
그러나 蟾에는 두꺼비란 뜻 말고 달月이라는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달을 섬궁蟾宮이라고도 부르는데 예로부터 달에는 두꺼비가 살았다고 하는 설화에서 유래하는 말입니다.
섬토蟾兎라는 말도 달을 이르는 말인데 이 역시 달나라에 금두꺼비와 옥토끼가 살고 있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섬진이라는 이름은 달月 + 나루津의 조합임을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높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우리말 '달'을 月이나 鷄를 쓰는 대신 蟾을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예전 이름 두치강의 두치도 한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우리말 '머리재' 즉 '높은 고개'에서왔다는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즉 豆恥는 頭峙였다는 것이죠.
지리산의 웅장함에서 이렇게 일반적인 이름이 조금 색다르게 변화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그러니 섬진강을 머리재강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입니다.
반야봉을 내려오면 이정표에 노루목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조금 나아가면 바위 절벽이 하나 나옵니다.
이 길게 튀어나온 이 바위 주위를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보겠죠?
그러니 '늘어진 바위 혹은 땅' 정도로 보아 '늘'에서 '느르' 정도로 변하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그 발음이 비슷한 한자어 '누를 황黃'이 나왔고 또 '노루 장獐'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노루목이 나온 것임에도 노루목같이 생겼다거나 노루들이 자주 나타나는 길목으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하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를 만나는 곳에 ‘노루목’이라는 이정목이 붙어있다. 이는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노루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럴까? 우리나라에는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설악동에서 비선대 올라가는 곳. 포천, 안성, 진주 등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다. 어떤 국어사전에는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이라고까지 친절하게 설명도 해 놓았다. 그런데 어떤 곳 지명을 보면 한자로 노루 장(獐)자에 목 항(項)를 써서 장항(獐項)이라고까지 표기한 곳이 눈에 띈다. 그런 곳의 지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노루가 다닐만한 곳도 아닌 곳 같은데... 사실 여기서 노루의 뜻은 ‘늘어진 땅’ 곧 산에서 들로 길게 뾰족하게 나온 땅의 모양인 ‘늘’에서 발음이 비슷한 훈(訓)을 가진 ‘누를 황(黃)’이 나왔고, 역시 발음이 비슷한 ‘노루 장(獐)’이 나왔다고 한다. 거기에 실제 노루는 목이 긴 짐승이니 너른 들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지역을 일컫기에 노루목만큼 좋은 단어는 없었으리라. 그걸 다시 한자어로 표기하니까 장항(獐項)이 된 것이란다. 이참에 고양시의 장항동이나 고구려부터 내려온 안산의 옛 이름이 ‘장항구(獐項口)였음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이름들이 다 그 생김새와 관련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
- 졸저 전게서 64쪽
노루목을 빠져나오면 이내 임걸령 샘터입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른 적이 없다고 하는 곳입니다.
지리의 물 중 가장 으뜸으로 친다는 물이죠?
그러고는 돼지평전입니다.
돼지평전에서의 조망은 한 마디로 끝내줍니다.
왕시루봉 능선과 호남정맥 상의 백운산을 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돼지라는 말이 나오니 당황스럽습니다.
사실 여기서 돼지는 '멧돼지'를 말합니다.
저연猪淵에서 온 말입니다.
저연은 반야봉에서 흘러내려오는 만수천의 상류가 됩니다.
이 물이 실상사 아래에 이르러 풍천 하류와 합류하게 되는 것이죠.
潭과 淵의 자원字源을 보면 潭은 깊은 연못 深淵을 뜻하고, 淵은 빙빙 도는 깊은 연못이라는 뜻이니 潭과 淵을 엄격하게 구분을 하기는 어려우나 고대에는 구분이 되었다가 후대에 와서 潭과 淵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 도솔산인 님
우리 선조들은 지명을 짓는 데에는 과장이 좀 심했었으니 이 저연은 아마 멧선생들의 공중 목욕탕 정도 되는 곳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진단해 봅니다.
위치는 아마도 골짜기 물이 있는 곳인 이 아래인가 봅니다.
그러니 돼지령이니 돼지평전이니 하는 말들은 다 이 저연때문에 생긴 것이라 이해합니다.
좌측으로 피아골이 보입니다.
그 사이의 대판골은 날나리봉에서 내려오는 용수골과 합쳐져 피아골이 되죠?
그 골짜기의 물은 내서천이 되어 섬진강으로 합류가 되고....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면서 피아골의 유래가 ‘피비린내’ 정도의 뜻이 아니라 직전(稷田) 즉 피농사를 짓는 밭고랑이라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 피아골의 단풍도 지리10경 중 하나다.
졸저 전게서 66쪽
피아골을 지나 왕시루봉 입구를 통과합니다.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지리산에는 외국인 선교사 휴양촌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하나가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에 있는 것이고 두 번째가 왕시루봉1240.2m에 있는 것입니다.
1961년 순천, 전주 등에서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황폐화된 노고단의 휴양촌 대신에 이 왕시루봉에 휴양촌을 건설하게된 것이죠.
풀장과 주거 시설 등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에서 관리하고 있을 겁니다.
왕시루봉은 이렇게 이 루트로 진행하거나 노고단 하부로 진행하는 방법 혹은 왕시루봉 옛길(KBS 송신소 옆)을 통과하여 10대 중 하나인 문수대를 지나 진행하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노고단은 신령스러운 곳입니다.
노고단에 얽힌 이야기
“형. 단(壇)은 제단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다면 노고가 무슨 말이야?”
장감독의 궁금증은 이어진다.
“세 가지 설이 있어. 하나는 신라 시대 얘기니 엄격하게 따지면 아마 통일신라시대 이후 얘기일거야. 이 땅이 원래 백제 땅이었으니까.”
①우리나라 풍습에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 양육 그리고 무병장수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삼신할머니’라고 부르는데 이 삼신(三神)이 마고, 궁희, 소희 등 세 분을 이르는 말이다. 이 노고단이 바로 이 할머니 중 마고 할머니를 모시는 제단이 있는 곳이다. 이는 신라 내물마립간 때 박제상이 쓴 ‘징심록 십오지’ 중 유일하게 남아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얘기라고 한다. 얘기는 6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미르 고원에 마고성이 있었고 이 성의 성주가 마고할머니였다. 마고할머니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궁희, 소희였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민족의 기원을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한검(단군)’으로 계승되었다고 쓰고 있다. 결국 노고단은 우리나라 개국과 맞물려 있다는 얘기 같다.
②그리고 또 하나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이 노고단이 바로 선도성모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는 거다. 제사는 선도성모의 사당인 남악사를 세워서 올렸다. 이 남악사가 지금은 노고단에서 화엄사 앞으로 옮겨져 구례군민들이 해마다 곡우절을 기해 약수제와 함께 산신제를 올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단다. 이처럼 나라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민중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차원에서 흡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 이 삼신을 천신, 지신, 인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어쨌든 이런 것들을 삼신할머니라 인격화해서 부르는 거겠지. 하여간 우리 옛 선조들은 하느님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서 죽을 때는 산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거 같아.”
“그래. 박은식의 한국통사에도 삼신을 환인, 환웅, 단군으로 보고 있지.”
역시 다큐감독이라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장감독이다.
“그렇군. 단군은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었고 신라의 탈해왕도 토함산으로 갔다고 했으니.”
“그런데 또 다른 설(說)은 뭐야?”
“③노고단을 어원으로 풀은 거야. 우리말의 ‘한’이란 말은 우선 ‘크다, 많다’를 뜻하잖아? 그러니 ‘큰 산’일 경우 ‘한뫼/한미/한메’ 등으로 불렸다고 하지. ‘한뫼’가 발음이 바뀌어 ‘할미’가 되자 이를 한자어 노고(老姑)로 표기했고. 산에 단(壇)이 있으니 노고단(老姑壇)이 되었다는 얘기지. 그렇잖아? 우리나라 곳곳에 노고산이 많잖아. 그 이유야!”
대간길은 여기서 직진하여 무넹기 ~ 종석대로 진행을 하여야 하나 공단에서는 ‘휴식년제’로 막아 놨다. 부득이하게 여기서는 노고단 대피소로 진행을 하여 대간길을 이어가야 한다.
졸저 전게서 66쪽 이하
이 '마고 할머니'는 동학농민혁명 때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마고 할머니가 산신으로서 군주사회의 대항마 역할을 하여야 하였으며, 여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위주의 봉건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시천주侍天主의 지향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고단 전망대에서 조망을 합니다.
바로 앞 라인이 형제봉 능선이고, 그 우측 라인이 차일봉 능선입니다.
반야봉에서 내려오는 기운이 저 차일봉 능선을 타고 화엄사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화엄사골 아래로 화엄사가 보입니다.
아까 미뤄뒀던 화엄사 얘기나 하죠.
말씀드린 대로 이 화엄사는 연곡사, 법계사와 같이 연기조사가 544년에 창건한 사찰입니다.
그런데 이 창건연대와 창건주 등과 관련하여 이론異論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544년 경에는 당시 화엄사가 있는 곳이 백제땅 구례현이었으니 관련 사적기에 신라 연호(가령 진흥왕 5년)를 쓸 수가 없다는 점, 백제의 승려보다 신라의 승려 가령 자장, 원효, 의상 등이 더 많이 거론된다는 점, 1978년 발견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 '연기는 황룡사의 승려로서 754년 8월부터 화엄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다.'는 내용 등을 들어 754년 설說(경덕왕13년)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544년 說은 중관대사 해안(1567 ~ ? )이 1636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이나 경암의 화엄사기 등 여러 사적기에 나온 기록에 근거한 사실입니다.
구례속지에도 '544년에 천축국 승려인 緣起祖師가 세웠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논거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국가 시책에 따라 백제연호를 무시하고 모든 걸 신라 연호를 사용토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백제의 화엄사상은 신라의 그것보다 근 100년이나 앞섰으니 그 화엄사상을 흠모하다 백제의 화엄사상을 배우러 온 승려 가령 원효나 의상 등을 굳이 내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사견으로는 여기에 몇 가지 사건을 더 보태봅니다.
즉 원효(617~686)가 화랑 장교 출신으로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의 '추성楸城'이나 '성안城內의 말달린 평전'과 관련시켜야 하고 이는 지리동부능선의 영랑대와 소년대와도 관련이 있게 됩니다.
그러니 원효가 화랑시절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노고단까지 왔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효와는 여닯 살 연하이기는 하나 의상(625~702)은 그에게는 결의형제였습니다.
그런 의상이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우고는 부석사를 창건한 뒤 절친인 원효를 만났으나 유학파도 아닌 그가 이미 화엄에 대해서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원효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강추强推로 의상도 화엄사로 와서는 실상을 파악하고는 장육전을 짓고 그 주위를 석각의 화엄경을 둘렀다고 봉성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상은 화엄사를 중창까지 하였고 이런 인연으로 의상은 연기조사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깊게 들어왔으니 이것도 기회가 되면 다시 보기로 합니다.
* 영랑永郞은 화랑의 우두머리
여기서 좀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연기라는 법명을 가진 조사祖師가 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鷰起와 緣起 그리고 煙起가 그들입니다.
보통 연기조사하면 緣起祖師라는 한자로 표기 됨을 알 수 있습니다.
鷰起 祖師와 緣起 祖師를 혼용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화엄사에 얽힌 설화를 들여다 봅니다.
연기조사는 인도에서 '鷰'을 타고 와서는 비구니가 된 어머니는 연곡사鷰谷寺에 모셔두고 자신은 화엄동천에 화엄사를 개창하였다는 겁니다.
참고 사진 연곡사 연기조사탑(동승탑)비
이때 이 '鷰'은 우리가 읽을 때 보통 '제비 연'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러니까 강희자전에 따르면 "남방에 사는 동물로 흡사 거북같고 이마에 외뿔이 달렸으며 날개가 있어 능히 날기도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서식한다."고 되어 있어 일반적인 제비와는 사뭇 다른 동물.
그러니까 거의 '상상 속의 동물'로 보여집니다.
이 동물은 현재 귀부龜趺만 남겨져 있는 연곡사鷰谷寺의 연기조사탑을 보면 거북과는 다른 즉 위에서 묘사한 생김새의 '鷰'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스님이 천축국에서 '鷰'을 타고 왔다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고 하여 '鷰起 祖師'라 부른다는 겁니다.
이 스님이 화엄사를 창건한 해에 이 법계사를 함께 지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緣起는 의상대사(625~702)를 말하며 煙起는 백두대간 얘기를 할 때 나오는 옥룡기의 도선국사(827~898)의 별호를 말합니다.
그러니 이 화엄사나 법계사의 건립 연대에 비추어 볼 때 의상대사 즉 緣起祖師가 이들 사찰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심지어 緣起祖師를 고집하는 분들은 이러한 연유로 화엄사의 창건 연대를 7세기로 봐야한다고 우기기까지 한다고 하는군요.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우리가 일부러 우리 역사를 폄훼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연기조사煙起祖師'가 창건했다고 씌어져 있기는 하지만 '當更考 즉 '다시 고찰해야 한다.'고 부기하였습니다.
어쨌든 이 鷰起 祖師는 천축국天竺國(인도)인이라는 얘기가 되며 그렇다면 이것이 불교남방전래설의 한 근거가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불교남방전래설은 하동의 칠불사에 얽힌 허황후와 일곱 왕자의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얘기가 길었습니다.
다시 노고단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노고단 정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저 KBS 송신소 좌측으로 나 있는 길이 문수대 옛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노고단 바로 아래로 진행하면 문수암이라는 토굴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지리 10대인 문수대가 있는 곳이죠.
예로부터 지리산 즉 두류산은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라고 하였습니다.
문수보살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하는 곳이라는 얘기죠.
그곳이 바로 노고단이라는 겁니다.
2017. 11. 1.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산행기를 그대로 올립니다.
다른 이들은 문전박대한다고 소문 났던 스님이 저에게는 유달리 친절하시군요.
갈길도 바쁜데...
스님 曰,
"여기서 왕시루봉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이 노고단에서 문수보살이 설법을 하면 그 말씀이 차곡차곡 쌓이는 곳이 바로 저 왕시루봉이라고 합니다.
시루떡을 한 켜 한 켜 쌓듯이 법문이 저 왕시루봉에 쌓인다는 것이죠.
왕시루봉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까닭입니다.
그래서 그 왕시루봉 아래 문수보살님의 말씀을 듣는 문수사가 생긴 이유가 되는 것이고....
실제 그 문수사는 왕시루봉 아래인 마산면 문수리에 실재해 있고......
아! 그러니 산 이름 하나하나가 괜히 생긴 게 아니로군요.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반야봉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이 반야봉의 기氣가 한 줄기는 노고단을 지나 화엄사로 흘러내려가고 다른 한 줄기는 불무장등 즉 불무, 불묘佛廟를 내려와 긴 줄기長嶝을 따라 연곡사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연기조사가 연곡사를 그곳에 불사하게 된 것도 이 반야봉과 무관치 않고 불무장등不無長嶝이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다 반야봉의 기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 이름, 고개 이름 하나하나가 다 괜히 지어진 이름이 아니로군요.
노고단에서 하산하는 길은 두 갈레입니다.
대간길에 충실하느냐 아니면 그냥 일반 등로를 따르냐입니다.
대간길을 따른다면 임도에서 숲길로 들어 무넹기로 바로 ㅈ니행을 하게 되니 노고단 대피소 옆 외국인선교사 휴양촌 흔적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본 종석대입니다.
노고단 대피소 옆의 이 선교사 휴양촌은 1922년 경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질병 치료와 휴양 등의 목적으로 건립한 것으로 1940년대 일본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철수를 하였고 여순 사건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 되어 지금은 한 동만이 흉물스럽게 골조만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대간길로 진행을 하여 무넹기로 들어섭니다.
만수천으로 가는 물이 화엄벌을 적시게 되는 무넹기
노고단 삼거리에서 법정탐방로를 따라 노고단 대피소로 내려오면 좌측으로 틀자마자 다리를 하나 건넌다. 그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은 계절에 상관없이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를 낼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이 물은 어디로 가겠니?”
“글쎄.... 어디로 갈까?”
“지도를 봐도 되지만 대간꾼에겐 이건 상식이야. 우리가 대간을 걷는다고 하면서 가만히 보면 기본도 모르고 걷고 있는 거야. 다시 한 번 얘기 할게. 백두대간의 가장 큰 역할이 뭐야?”
“그런 것쯤이야...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아버지 줄기라며!”
“바로 그거야. 지도를 안 봐도 우린 금방 알 수 있어. 이 물은 낙동강이 되어 부산의 삼각주로 유명한 을숙도로 가는 거야. 즉 이 물은 북진하는 방향으로 보자면 당연히 대간 우측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만수천이 되어 남천에 합류된 다음 임천 – 남강 –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 그거 참 신기하네. 정말 생각해 보니 그렇구먼.”
“왜 그렇겠니? 왜 바로 남해로 안 흘러가겠어?”
머뭇거리는 장감독에게 자꾸 질문을 던져본다.
“형은 다 알고 있고. 나는 초보고...”
“그래 알았다. 미안하다. 아까 우리가 영신봉에서 갈라지는 정맥 하나 있다고 했지?”
“뭐? 낙남정맥이라는 거?”
“그래 그 낙남정맥이 뭐야. 낙동강의 남쪽 울타리가 되는 정맥이라는 말 아니냐. 이 물들은 다 낙남정맥에 막혀서 결국 낙동강을 만나 낙남정맥이 바다를 만나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로 흘러들어가게 된다는 거지. 낙동강과 바닷물이 만나는 합수점. 이게 산자분수령이야.”
그 다리를 건너 대간길에 합류한 다음 코재로 가면서 멀리 종석대를 본다.
무넹기?
그런데 갑자기 장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이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따라 흐르다 왜 우측 만수천 쪽으로 안 가고 화엄사 쪽으로 가는 거야! 거긴 섬진강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그렇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보면 코재 바로 전에 왼쪽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장감독이 지적하듯 만수천으로 가야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이 물은 노고단 물이 맞고 이 수로는 인공수로이다. 예전 화엄사 부근 그러니까 구례의 들에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 이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 쪽으로 넘겨주기 위해 인공 수로 하나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이 수로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물을 넘겨주었다.’고 하여 무넹기이다. 그리고 이 물은 낙동강이 아닌 족보에도 없는 섬진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는 인공수로이므로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 졸저 전게서 69쪽 이하
종석대에서 내려오면서 바라본 노고단
노고단에서 성삼재 방향으로 내려오는 일반 도로와 백두대간 등로가 확연하게 보입니다.
무넹기를 지나 화엄사로 빠지는 삼거리를 지나면,
종석대 입구가 나옵니다.
여기가 그 입구로 우번대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비탐 구간이죠.
종석대와 우번대 즉 우번암이 있으니 그럴 듯한 설화 하나가 있어야겠죠.
신라시대 우번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다. 조용한 상선암이라는 절에서 10년 동안 좌선 수도의 서원을 세우고 정진을 하고 있었다. 우번은 9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수행을 쌓았다고 느낌이 왔다.
그해 봄 어느 날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 미인이 나타나 우번을 홀리는 것이었다.
유혹하는 그녀를 따라 오르다보니 어느덧 종석대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내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하자 그녀는 갑자기 사라지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서 있는게 아닌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뚯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때서야 우번은 자신의 수행이 크게 부족한 것임을 깨닫고 다시 용맹정진하여 득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득도를 하는 순간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石鐘소리가 홀연히 들려왔다.
그런 우번이 상선암으로 내려가는 도중 자리 잡은 곳이 이 우번대이고 관세음보살이 현신한 자리를 관음대 혹은 석종 소리가 난 곳이라 하여 종석대라 불린다.
종석대로 오르는 등로 좌측으로 길이 하나 더 나 있씁니다.
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화엄사로 가는 차일봉 능선을 하나 가지를 치면 직진하는 길에 지리 10대 중 하나인 우번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지나온 10대를 다시 정리해 보면 문창대, 향적대, 영신대, 무착대, 서산대, 묘향대, 문수대, 우번대 등 8개 입니다.
대간길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곳들입니다.
금강대는 위치가 불분명하고 향운대는 두류능선 허방다리골 있는 곳이니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5분 정도 더 들어가면 두 채의 건물이 있습니다.
요사채 겸 법당으로 쓰이는 저 건물과 입구의 돌로 지은 건물인데 특별하게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더군요.
종석대로 올라,
화엄사골을 내려다 봅니다.
무넹기 물이 저 화엄벌을 적시는군요.
종석대에서는 구례나,
광의면이나,
산동면 쪽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다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이죠.
빨치산 투쟁 때 토벌군의 제1차 목표지점은 이 종석대였을 겁니다.
백제나 신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 뒤로는 마한에게도....
산꾼들에게는 작은 고리봉 ~ 만복대 능선도 다 보여주고....
그 종석대에서 작은 종석대로 내려오다 보면 종석대 ~ 노고단 라인이 부드럽습니다.
숲으로 들어 사람 소리를 들으면 성삼재 상가 커피숍 바로 옆입니다.
바로 위로 초소가 보이고.....
여기서 지리 주릉이자 백두대간 1구간 산행을 마감하게 됩니다.
지루하셨죠?
그래도 알고 가면 많은 게 보이기에 너절하게 써봤습니다.
봄이 되면 '지리둘레길'과 지리의 각 지능선을 밟을 계획입니다.
첫댓글 지리길을 이렇게 세세히 풀어서 보니 참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네요..
많이도 궁금해 했던 지리10대 기돗발(臺) 열곳이 많이 해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오님의 또다른 기행이
지리산의 잊혀져가는
역사를- 둘레길을- 대간길을-
산우님들에게 펼쳐놓으셨네요.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현오님 산행기 처음 보는것 같은데
지난번 출간했던 책처럼 산행기도 ㅎ
반갑습니다~ 요즘 유행어.
덕분에 잘읽고 갑니다.
산행기 잘보고 나갑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