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컴퓨터에 저장된 글을 발견했다.
오래 전에 쓴 일기장이다.
안타까운 무덤
(당신도 작은아버지입니까?)
나는 무자년 섣달 스무사흘 생, 양력으로는 1949년 1월 생이다. 한 살이 더 늘어나니 집나이 쉰일곱 살.
구정을 맞이해서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내 가족사에 관한 글을 원고지 140매 썼으나 정작 발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껄끄러운 이야기, 친인척 간에 척질 이야기도 썼으니 아직은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당사자가 죽어야만 말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맛보기 글은 무난하기에 인터넷에 게재한다. 인터넷에서는 가벼운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자기의 치부조차 까발리는 어리석은 자도 있다. 그런 바보가 바로 나. 군소리가 길어졌다.
나는 조선왕조 역사를 배우면서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을 알았다. 열다섯 살 먹은 어린 조카를 노산군으로 강등하였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하였다가 열일곱 살 때 사약을 먹여서 죽였다(사실은 목을 졸라서 살해).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와 장릉에 단종의 포한이 서려 있다는 현지 안내인의 말이 귓전에서 맴돈다. 숙부라는 존재가 무척이나 무섭고 두렵다는 것을 나는 일찍부터 깨달았다.
내 숙부는 풍수지리설을 맹신해하셨다. 고향 보령시 웅천에서도 명당자리를 잡는다고 외지에서 온 지관을 데리고 여러 군데의 산과 꽤나 많은 산능선을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나의 좋은 예가 있다. 서해안 화망마을(花望 곶부래) 뒷산인 신안재에 당신의 소유로 된 산이 있다. 동네 임씨의 말에 따르면 4년 흉년(6·25사변 직후) 당시에 황씨네한테서 샀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이 아직도 황씨네 무덤 여러 기가 남아 있다. 흉년에 굶어죽지 않으려고 산을 팔었다고... 그렇다면 최씨네는 굶지 않았고, 오히려 땅을 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고 본다. 신안재산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같이 샀다는데도 작은아버지 단독소유로 등기되었다. 내 어머니는 이를 아쉬워하셨다.
면적이 2정보(6,000여 평)가 넘는 넓은 산이기에 정상에 이르는 길목에는 긴 능선이 있다. 능선 따라 양지의 남측과 음지의 북측 경계선으로 나누어졌다. 작은아버지는 샘골 황씨네 산의 경계선과 맞닿은 곳에 묫자리 두 군데를 마련했다. 즉 길 한가운데에 가묘를 썼으니 통행길을 막은 셈이다. 임야 측정을 한 결과 황씨네가 경계를 조금 침범했다고 하나 지형상 아주 고약한 위치에 마련한 유택이었다. 양지쪽에 가묘(假墓) 너댓 개를 마련해 두었다. 이 중 두 군데는 상석(床石)까지 썼다. 한 곳에는 비석 2기, 상석 한 벌을 세워두고, 석관 한 벌을 땅 속에 묻었다. 사후를 대비하여 미리 치표(置標)했다.
이 가묘와 조카가 묻힌 무덤과의 간격이 무척이나 가깝다. 조카의 무덤은 능선의 북쪽으로 치우쳐서 산길과는 다소 떨어졌고, 지형상 터가 좁고, 산소 마당도 아주 비좁았다.
가묘의 봉분은 좁은 산줄기 능선의 상단에 있다. 봉분의 상하가 문제였다. 두 봉분의 간격과 폭이 아주 짧고 좁다. 능선의 위쪽에 쓴 가묘의 끝자락(묘역)이 아랫 봉분이 있는 상단부분과 겹쳤다. 가묘와 조카의 봉분은 불과 예닐곱 발걸음의 상관이다. 상단 묘소 앞에서 4남 4녀의 사촌들이 절을 하면 하단 봉분의 유해(상체) 위치를 밟을 수 있는 형국이다. 사촌들의 자손이 더 많이 퍼지면 필연적으로 밟을 수밖에 없을 만큼 아주 비좁은 터(장소)로 변질되었다.
이 사실을 예견하지 못하였을까? 터가 비좁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계셨을 게다. 비좁은 터를 이용하자면 결국 조카의 묘터를 침범한다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생기발복(生氣發福)을 위한 명당자리이기에 조카가 누워 있는 터를 침범한 것일까? 사촌들이 뱀 물려 죽은 사촌형의 무덤가를 밟지 않겠다, 조심하겠다고 말하겠지만 지형의 위치로는 무덤가를 밟을 수밖에 없을 게다.
갯바람(海風)과 갯안개(海霧)을 병풍처럼 가린 산, 신안재에 죽은 동생의 무덤을 쓴 이유가 있었다.
1960년 이른 봄. 어린 나이로 대전으로 전학을 간 쌍둥이 형제는 방학 때마다 고향에 오면 틈이 나는 대로 화망마을 뒷산 신안재에 올라가서 대천해수욕장, 용머리해수욕장, 무챙이(무창포해수욕장), 비인만(동백정해수욕장 - 훗날 춘장대해수욕장으로 교체)을 멀리 내려다보았다. 바다를 향한 소년의 꿈과 기상을 펼쳤다.
작은쌍둥이는 1969년 8월 10일 여름방학 때 시골집에 내려왔다가 울안에서 뱀 물려서 죽었다. 집나이 22살 - 만나이 20살.
용머리(남포면 용두리해수욕장)에 사시는 큰외숙부는 쌍둥이가 자주 올라갔던 마을 뒷산인 신안재가 명당이라면서 아주 비좁은 공간에 묘터를 잡았다. 여성의 음부처럼 두 개의 바위가 좌우로 박혀 있는 공간을 살짝 비킨 바로 위 땅이다. 아쉽게도 묘역은 엎드려서 절할 만한 공간조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숙부가 가묘를 쓴 뒤부터 냉가슴 앓듯 짠한 문제가 내재되었다. 어머니와 내가 우려했던 문제점이 현실로 드러났다.
2004년 1월 16일(섣달 스무닷새) 새벽 5시. 한 분뿐이었던 작은아버지가 향년 83세로 돌아가셨다. 충남 보령시 웅천 화망마을(花望) 자택에서 공주로 치료받으러 가셨고, 감기 초기의 증상인 줄로 여겼으나 폐암 판정을 받은 뒤 십여 일만에 졸지에 작고하셨다.
공주 장례식장은 시내 변두리에 있었다. 대전직할시 방향의 구도로를 끼고 흐르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북향 산자락 하단에 있는 장례식장은 빈소와 주차장 터가 무척이나 넓었다.
삼일장의 마지막 날인 1월 19일(일요일). 아침 8시에 발인제를 지내고는 공주에서 부여 고도(古都)를 거쳐 고향인 서해안으로 향했다.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회관 앞에 운구차가 들어섰다. 내 어머니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상여는 숙부의 집 담벼락을 스쳐 지나가고, 마을 뒷산인 신안재로 올라갔다.
장지(葬地)에 따라온 많은 문상객들 가운데 일부는 봉분이 낮아진 쌍둥이-동생의 무덤 한 자락을 무심하게도 밟았다. 또 무덤을 발길로 툭툭 걷어차기도 했다.
무덤 자락을 밟고, 발길로 툭툭 차는 행위를 보면서도 나는 짐짓 모르는 체 고개를 외로 틀었다. 진눈깨비 휘날리는 날씨때문에 매장(埋葬)을 서둘러서 끝내는 것이 더 시급했고, 하관시간을 앞당기는 판에 이런 문제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남의 봉분 자락을 밟지 마세요'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내가 참으면 그만이었다.
노천리 김기호 내당숙(작은대고모의 큰아들)은 이 눈꼴사나운 현장을 말로 쓸어덮으셨다.
“죽으면 그만이여, 무엇을 알겠어?”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으로 낮아진 봉분, 그 앞에 있는 상석(床石)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는 그게 망인(亡人)의 조카 무덤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내 동생의 봉분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 이장하려면 경비가 많이 난다고 해도 그 시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 이장할 묘터는 죽청리산 아버지의 무덤 아래이다. 9대조, 5대조, 증조부, 할머니 등 선영음택(先瑩陰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또 하나의 선산(先山)이다. 내 명의로 등기되어 있으니 아무 데나 산소를 써도 된다. 자손이 없는 동생을 선영 아래에 무덤을 쓴다면 내 사후라도 내 자식들이, 그 자식들의 후손들이 관리해 줄 것이다.
숙부에 대한 이미지가 흐려졌다. 명부(冥府 지하세계)에 가신 분께 묻고 싶다.
'맨 천지가 땅(山)인데 하필이면 그 구멍(혈穴)으로 들어가야 했습니까, 뱀 물려 죽은 조카의 무덤 터가 욕심났습니까, 구천(九泉)에서 복받으려고 명당자리를 찾았습니까, 유택(幽宅)이 조카의 무덤 바로 위 언저리를 침탈한 겁니까, 당신도 작은아버지입니까?'
2004. 1. 24. 일기장에서.
추가 :
2016년 봄철, 상전산 상단에 있던 최씨네 종산이 일반산업단지로 토지수용되는 바람에 무덤 모두를 내 명의의 죽청리산으로 집결했음.
안타까웠던 동생 무덤도 파묘하여 죽청리산 상단에 있는 아버지(1982년 6월 작고)와 어머니(2015년 2월 작고)의 합장봉분 아래 좌측으로 이장했음. 새로 이장한 가작굴 꼭대기(서낭댕이 앞산)에서도 서해바다가 멀리 보이기에 서해 갯바다를 좋아하였던 쌍둥이의 어린시절, 젊은날의 꿈이 늘 함께 할 것임. 솔바람소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