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락웍 오렌지를 보고>
오늘 학교를 가지 않고 스탠리 큐브릭의 ‘클락웍 오렌지(clockwork orange, 1971)’를 집에서 보았다. 한글로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라고 제목의 번역을 달았지만 몇 년 전 서점에서 슬랭사전을 훔쳐 본 바로는 클락웍 오렌지는 ‘마약’ 또는 ‘여성 동성애자(female homosexual)’를 뜻한다. 이 제목은 영화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변호하는 듯하다.
나는 이 영화를 정확히 1998년에 보았다. 당시 영문과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 근처 사회과학서점인 ‘장백서점’을 자주 다녔었다. 어느 날 철학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자주 사곤 했던 장백 서점의 지하 공간에서 ‘클락웍 오렌지’를 상영한다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읽은 영화 관련 서적을 통해서 큐브릭의 명성과 이 영화의 선정성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던 터라 몹시도 이 소식을 반겼다. 당시에는 인터넷 보급 초창기였고 요즘처럼 영화를 쉽게 다운로드 받던 때가 아니어서 카페나 서점의 문화 공간에서 일본 애니나 유명하지만 구하기 힘든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 이러한 방식은 불법이었지만 젊은이의 호기심과 영감을 만족시키는 영화는 소수 매니아층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늦은 새벽 장백서점에서 상영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콜라 1.5L를 사들고 군대 동기와 함께 밤을 새며 이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당시 이 영화를 본 느낌이 매우 강렬해서 나는 이 영화와 미셀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의 양심수 전향서 처리 문제를 엮어서 레포트를 쓰다만 기억이 새롭다. 다시 그 당시의 영감과 감수성으로 이 영화의 영화평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대의 유일한 마지막 사회과학서점이었던 ‘장백서점’이 문을 닫았듯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영화의 장면은 그 다사다난했던 1998년 늦깎이 신입생의 광기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잊혀졌던 과거의 감수성을 되돌릴 기회는 올 봄에 찾아왔다. 내 주치의인 김성수 선생님께서 이 영화의 DVD를 건네면서 영화평으로 쓸 거리가 많을 거라고 기대 섞인 표정으로 내게 한 번 봐보라고 빌려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티비나 영화를 잘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올 해 봄과 여름에는 책도 거의 안 읽고 티비나 신문도 거의 보지 않았다. 당연히 이 영화의 타이틀도 먼지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늘 마음의 빚처럼 이 영화의 영화평을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러던 터에 학교를 하루 빼먹은 오늘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서 먼지 묻은 이 영화를 본 것이다.
이 영화는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부끄럽게도 나는 원작을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색감과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이 주는 영화의 리듬감은 소설로는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71년 작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등장인물의 패션감각이나 실내 인테리어의 색감은 매우 뛰어나다. 영화의 이미지와 배경음악이 매우 뛰어나게 조화가 잘 되어서 두 시간가량의 러닝 타임 내내 영화 속으로 빠져들 수가 있었다.
주인공인 불량청소년인 알렉스의 독백 형식으로 영화의 줄거리가 전개된다. 밤마다 환각제를 마시며 폭력과 도둑질 그리고 강간을 일삼는 알렉스 패거리는 솔직히 이 영화는 보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환각상태나 대리만족을 주는 듯 하다. 소설과 영화가 아니라면 평범한 소시민이 폭력이나 마약, 섹스를 접할 기회는 적을 것이다. 영화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이 장면은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있는 내면의 어두움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주는 듯하다.
학교나 보호관찰제도를 비웃듯이 악행을 일삼던 알렉스는 패거리의 배신으로 과실치사죄로 살인을 저지르고 14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간다. 당연히 나쁜 짓을 했으니 감옥에 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 영화의 레토릭은 그렇게 단순하지 만은 않다. 알렉스는 감옥에 있던 2년 동안 목사의 신임을 얻으며 성경을 읽는다. 장기 형을 받은 그에게 세상으로 나갈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내무부 장관이 흉악범을 교화하는 프로그램을 지지하면서 알렉스가 그 대상이 되었다. 이 영화는 개인의 폭력성과 반사회성을 사회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대목에서 더 이상 폭력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영국 정부 당국이 선택한 교화프로그램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지속적으로 알렉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반사회적인 싸이코패스였던 알렉스는 이러한 ‘치료’로 그의 성향을 바꾸게 된다. 바로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상황에 대하면 구토와 역겨움에 못 견디게 된 것이다. 목사가 지적했듯이 알렉스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폭력을 거부하게 된다.
이 영화는 당시의 전체주의화 되어 가는 영국사회의 법과 질서를 조롱하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일탈 행위를 일삼는 아웃사이더를 어떻게 사회가 ‘감시하고 처벌’하는지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요법으로 새롭게 태어난 알렉스를 그의 폭력의 희생자들이 얼마나 단세포적으로 앙갚음하는가를 보여주면서 개인의 폭력성과 반사회성이 과연 아웃사이더나 싸이코패스만의 문제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한 사회가 폭력과 반사회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하고, 덧붙여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하려 할 때, 어찌 보면 그 사회가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폭력을 개인에게 강제하는 듯이 보인다. 미셀 푸코의 지적대로 타자를 이성적인 힘으로 이해해온 근대의 역사는 폭력과 반사회성을 합리성이라는 이유로 감시하고 처벌해온 시대였다. 그러나 모든 반이성과 폭력을 아웃사이더와 일탈자들에게 돌려온 역사는 바로 획일화된 전체주의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합리화되고 정당화된 폭력과 억압의 발자취이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들으면서도 역겨움을 느끼게 된 알렉스는 자살 기도를 하는데 그러자 여론은 교화프로그램을 이끈 내무부 장관이나 정권에 대해 악화되어 간다. 그러나 자신의 폭력성과 반사회성을 되찾는 또 다른 교화프로그램을 받은 알렉스는 현 정부의 정치적 술수에 동의하고 함께 한다. 결국 우리 사회의 학교, 감옥, 안락한 가정 속에도 폭력은 있는 것이고, 반사회적인 소설가나 정부편인 정치가들 또한 그러한 폭력을 이용할 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조작하기도 한다.
그럼 잠깐 내 감수성을 1998년으로 돌려서 못다 쓴 레포트의 요지를 쓰려고 한다. 이 영화는 반사회적인 인물의 폭력성과 선정성을 다소 원색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반사회적인 범죄를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악용하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또 다른 폭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타자에 대한 걱정 어린 경계심과 배타적인 폭력성은 학교나 감옥, 군대, 정신병원등의 사회 제도를 통해서 그것의 일관성을 보여줘 왔다. 미셀푸코가 말하는 감시와 처벌이란 바로 이러한 타자의 일탈과 비정상을 근대사회가 계몽주의라는 이름으로 교화시키고 감독하고 훈육하는 또 다른 ‘이성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이성으로 중무장한 유럽 사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1998년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양심수를 상대로 준법서약서를 쓰면 풀어준다고 사상의 자유를 조롱하고 억압한 때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자본주의로 반 토막이 난 남한 사회에서 정치적인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과연 이 땅의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의 지도자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가 의문이었다. 사상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한반도의 수뇌부가 첫 회담을 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굉장히 강한 평화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에 지나지 않았다. 준법서약서라는 작문을 해야 오랜 감옥 생활에서 풀려날 수 있는 현재의 상황도 이 영화를 본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양심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은 나라, 그리고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많은 사상범을 양산하는 나라는 전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분단된 현실을 더욱 공고히 하고 통일을 저해하는 보수층들이 바라는 법과 질서가 이 땅의 민주화를 가로막고 있다. 타자를 울타리를 쳐서 감금하고 그들의 양심의 선택의 자유를 이데올로기의 최면술로 가로막는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 민주국가인지 묻고 싶다.
이 영화를 10년 간격으로 두 번 본 내게, 옛날의 영감과 감수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글이라는 것은 그때그때 글쓴이의 마음가짐과 컨디션에 따라 여러 갈래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큐브릭의 영화와 미셀푸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이미지의 중첩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만큼이나 내 느낌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폭력이나 악이 나쁘다고 교육받고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지만 그러한 폭력과 악에 대한 반대말인 비폭력이나 선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그때그때의 정치적 레토릭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원칙 없는, 아니 너무 원칙이 일방적인 사회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선택의 삶은 힘들어 보인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해 본적이 없는 인사이더들에게는 아웃사이더의 일탈과 반사회성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의 생각이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우리의 폭력과 성에 대한 상상력은 억압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러한 영감과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그늘진 마음의 한구석의 비밀을 오픈시키는 많은 영화나 소설이 나왔으면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글을 언젠가는 쓸 수 있었으면 한다.
첫댓글 늦깍이라 셨지만... 내공은 80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