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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유라시아 횡단기
2013.9.19 박대선 danielp4@naver.com
1. 개요
작년에 남미를 방문하여 남극을 제외한 6대륙을 모두 둘러보게 되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여행의 주제를 지역에서 문화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 첫 여행으로 어릴 때 흥미있게 봤던 닥터 지바고가 탓 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고 4대문명중 인디아문화권, 이슬람문화권, 그리고 동남아문화권을 연차적으로 방문할 생각이다. 우선 올해에는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는데 러시아 인근 국가도 가는 길에 살펴보기 위해 동구5국과 몽골, 중국도 추가하여 8개국의 여행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으로 그동안 방문한 국가는 중복되는 나라를 제외하고 46개국이된다.
2. 준비
2.1 일정계획
이번 여행은 남미보다는 부담이 적다. 우선 남미여행에서 만난 친구와 동행하기로 하였고 여전히 위험은 하겠지만 남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동남아까지 2개월간 총 18국을 돌아보려했으나 동행과의 일정조율에 따라 다소 짧은 5주의 시간상의 제약으로 중간지점인 중국에서 바로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올해 졸업을 하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6월말 부터 가능한데 첫 5주는 몽턴에서 불어연수가 있기때문에 제외하고 가까운 핼리팩스 공항에서 출발하여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도착하고 주요 방문지로 폴란드 크라카우, 러시아 바이칼호수, 그리고 몽골 울랑바타르를 섭렵하고 중국 단동발 페리로 인천항에 도착하여 8주간 체재후 11월초에 토론토공항을 경유하여 1박2일의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출발지인 프레데릭톤에 귀가하는 것을 큰 틀로 계획했다.
2.2 예산계획
5주간의 여행을 위해 일단 500만원의 상한을 정했다. 거기에 일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공요금을 절감하기 위해 몽톤공항은 물론 인근의 대형공항까지 포함하여 조사를 하였고 어학연수가 끝나는 8월2일 이후 요금이 가장 저렴한 8월3일(토) 핼리팩스 출발편을 골랐다.
또한 방문지별 1박후 다음날 밤에는 야간버스나 기차로 이동하여 비용과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도시간 이동비용은 실비, 체재 비용은 론리를 근거하여 1차 계획하고 최종 예산은 호스텔월드와 버스/철도회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여 시간과 비용을 확정했다.
결정한 최단 기간인 20일동안 방문 지역에서의 터미널/역과 가급적 도보이동이 가능한 저렴한 숙소를 선택하였으며 직접 취사용 식료품비로 하루 $2을 산정하고 여기에 비자가 요구되는 러시아방문 전 , 몽골방문전, 중국방문전 각1일씩 총3일을 일정에 예비로 추가하여 23박으로 하고 여기에 도시간의 야간이동 7박과 시베리아열차 4박이 추가되어 총 기간은 36일이 된다. 마지막으로 체재비의 10%를 예비비로 가산하여 총 경비를 2,719불로 결정하였다.
2.3 관광계획
필수적인 방문지를 제외하고 여정에 최소의 변경으로 최대효과를 내도록 이동선상에 있는 우크라이나 키예프/리비우, 폴란드 바르샤바, 리투아니아 빌뉴스, 에스토니아 탈린, 라트비아 리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모스크바, 몽골 자민우드, 중국 얼린/지닝난/단동 등을 포함하여 계획하고 동행의 일정이 있는 센양에서는 추후 유학가능성이 있는 중의대 및 어학원조사를 위해 일주일을 배정하였다.
3. 캐나다
3.1
개요
올해 여행은 전술한바와 같이 문화와 역사위주이므로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보았다. 한국의 약100배의 면적을 가지고 영어와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캐나다의 면적은 유럽전체보다 커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국가이나 인구는 3,500만명에 불과하다. 1867년에 영국의 북미법에 따라 온타리오, 퀘벡, 내가 살고있는 뉴브런즈윅, 그리고 노바스코샤주가 연방 자치령을 형성하였고 그때 영국으로 부터 독립했다고 공식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이후 5개의 주가 차차 연방에 가입하고 마지막으로 1949년에 뉴펀들랜드가 가입하여 현재의 10주가 되었다.
동쪽은 대서양, 서쪽은 태평양, 남쪽 미국, 그리고 북쪽은 북극해와 면하고 있다. 수천년간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에게 15세기에 신대륙을 발견했다며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은 침략자였다. 최초의 유럽 탐사자는 바이킹이지만 그들은 정착하지 않았고 당시 바다를 주름잡고 있던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콜롬부스가 방문한후 식민지화에 착수했는데 해군의 능력에 따라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와 영국이 패권을 주고받아 최종적으로 18세기에 프랑스가 물러났고 미국의 독립전쟁에 따라 왕당파가 이주한후 19세기 미국과의 전쟁에 영국군에 의용군으로 공헌하여 승리하게한 바에 따라 1867년 7월1일 자치연방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캐나다는 1914년의 1차세계대전에는 영연방군으로 참전하였고 1939년의 2차세계대전과 1950년의 한국전쟁에서야 독자적인 캐나다군으로서 참전하였다. 1949년 사법권을 행사하고 입법권은 1982년에 이르러서야 가지게 되었다. 독립이란 주권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입법, 사법, 행정권을 주권이라한다면 캐나다는 완전히 독립한지 겨우 30년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북쪽은 메마른 툰드라지대로 활용도가 낮아 미국과의 국경 약 6천키로미터와 국경으로 부터 300키로미터 이내에 대부분의 인구가 거주한다.
영국계이민이 19%, 프랑스 16%, 스코틀랜드 14%의 순으로 다양하며 원주민은 3%에 불과하다. 아시아계는 9%로 온타이오와 벤쿠버에 집중되어있고 매년 받는 약 30만명 이민의 대부분을 구성하므로 증가하고 있다. 기본 언어로 영어 58%, 불어 22%, 그리고 중국어 3%의 순으로 사용하고 있고 98%가 영어나 불어구사가 가능하다. 한국전에 3만명이 참전하였으며 현재 6만명의 병력이 있다.
3.2 몽톤
올해의 불어연수로 신청한 곳은 원래 빅토리아였다. 그런데 1년차를 우선해서 배정을 해서인지 2년차인 나는 차순위인 몽톤으로 결정이 되어 기존 벤쿠버 방문계획을 다소 수정하게 되었다. 어쨌든 몽톤은 내가 살고 있는 주에 있으므로 교통비용이나 시간측면에서는 훨씬 작은 장점이 있다.
뉴브런즈윅 주에는 다른 주와는 달리 아주 큰 도시가 없다. 내가 살고 있는 프레데릭턴이 주도이기는 하지만 인구 5만으로 3번째 도시이고 가장 큰 도시가 몽톤, 두번째가 센죤으로 2007년에는 세 도시의 규모가 비슷했지만 2011년까지 교통의 중심지인 몽톤의 인구는 7만, 광역 몽톤은 14만으로 크게 증가했다.(그래봐야 한국의 동이나 읍수준이다)
몽톤은 2007년에 방문한 적이 있고 작년에도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면서 잠깐 들린 적이 있을 정도로 동부 캐나다에서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다. 내가 살고있는 주도인 프레데릭톤에는 에어캐나다와 시외버스만 있지만 여기는 추가로 간선 기차와 저가 항공사, 미국적사를 포함하여 5개 항공사가 정규노선도 취항하고 있고 시내에서 역으로는 도보, 공항으로는 버스로 접근이 가능하여 훨씬 편리하다.
7월에 5주간 생활하게된 몽톤은 1733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1766년 팬실베니아에 거주하던 네델란드인의 도착과 함께 본격적인 성장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팬실베니아는 인디언의 땅이었지만 스페인에 “발견”되어 식민지가 되었고 네델란드가 이를 빼았았지만 다시 영국에게 쫓겨나게 되면서 현지에 정착했던 이민자가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그들중 독일 출신 네델란드 8가구가 새로운 이주지로 프랑스령 이었던 몽톤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영국령이었던 노바스코샤와 프랑스령이었던 뉴브런즈윅 사이의 펀디만은 조수 간만의 차가 16미터로 우리나라 서해안의 10미터를 넘는 세계 최대인 곳이다. 그래서 몽톤에서 펀디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페티코디악 강은 평소에는 하류로 흐르지만 만조에는 강이 역류하여 흙탕물이 된다. 그래서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리버와 같이 이 강도 초콜렛 리버라고 불리운다. 이 초콜렛 강이 꺽어지는 초기 네덜란드 인의 정착지 안내판은 그래서 그들의 모국어인 독어, 그 당시 소속국어인 불어, 그리고 결국 이 지역을 빼앗은 나라의 언어인 영어로 제작되어 있다.
몽톤의 불어 원어민 인구는 33%로 영어의 64%보다는 적다. 하지만 48%가 두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 불어권 최대 도시인 몬트리올에 이어 가장 높은 이중언어구사 인구비율을 자랑한다. 광역몽톤을 구성하는 인근 시인 디?은 불어인구가 80%이고 읍인 리버뷰는 영어인구가 95%로 대조적이다.
몽톤의 관광지를 꼽자면 마그네틱 힐이 가장 유명한데 제주도의 도깨비도로 처럼 주위 지형때문에 내리막이 오르막길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곳이다. 나는 2007년에 대략 관광을 마쳤고 그 이후에 생긴 볼거리는 카지노가 유일해서 도서관과 기숙사에서 한국의 문화와 근대 한국사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5주를 보냈다.
이 곳에서 기억나는 곳은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어빙의 고향인 북토시이다. 마지막주에 연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아카디언 문화체험차 당일치기 방문을 했는데 입장료가 $20이나 되었던 사귄국(아카디언 민속촌)보다 무료였던 북토시 둔(모래언덕)이 더 좋았다.
약 12키로를 꼬리처럼 삐저나와 북토시읍과 PEI사이에 있는 노텀랜드해협에서 북토시로 가는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활을 하는 이 언덕은 약 2000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매 순간 파도에 의해 모래가 이동하면서 형상이 바뀐다고 한다.
이 사구는 예전에는 고기잡이 배들을 보호했었으며 지금은 여러 멸종위기에 있는 조류의 보금자리로서 어빙이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해변을 따라 약 1/2마일의 나무 산책로를 만들어서 갈 때는 산책로를 이용하고 올 때는 양말을 벗고 대서양 바닷물에 발을 적셔가면서 해안을 즐겼다.
이 외에도 인구 2500명의 소읍인 북토시에는 캐나다는 물론 미국에도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어빙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만든 수목원 등이 무료로 개방되고 있어 해수욕을 하거나 북미의 기후존 4에 자생하고 있는 식물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4. 우크라이나
4.1
개요
몽톤에서 버스로 5시간 거리의 핼리팩스에서 탑승한 비행기는 아이슬랜드에어로 덕분에 트랜짓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처음으로 레이캬비크에 방문할 수있었다. 여기서 헬싱키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탓는데 입국수속을 했고 헬싱키에서 키예프로 갈 때 출국수속을해서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 랏지만 도장을 보니 유로존에 입출국한 스탬프가 찍혀있어 나중에야 이해를 했다.
우크라이나는 인구 5천만명이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며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폴란드, 남쪽은 흑해, 북쪽은 벨라루스와 접하는 유럽에서 두번째로 큰 국가이다.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족이 최초로 지배했으며 라틴문화권인 마케도니아제국과 로마제국을 거쳐 9세기 동슬라브 문명의 중심지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바이킹이 세운 키예프 공국으로 존재하었으나 다시 기마 민족인 훈제국에 복속되고 12세기에 징키스칸의 아들이 지배하는 몽골제국의 킴차크칸국에 정복되었고 폴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등의 지배를 받았다.
2차대전시 독일치하에서 700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소련군 소속이었던300만명의 우크라이나 군인이 전사했다. 소련에 지배되고 있던 1921년과 1932년에는 큰 기근을 겪어 천만명이 사망했으며 1991년 모스크바의 쿠데타가 실패하자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연방의 해제를 촉진시켰다.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인종차별적인 폭력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4.2
키예프
키예프 국제공항은 동북쪽으로 1시간거리에 위치해 있고 공항안내도 영어소통능력이 없어 고생했다. 하지만 미리 조사한 자료를 가지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여 시내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시민들은 공무원과 달리 무척 친절하다.
우크라이나의 수도로 26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고 드네프르강의 북쪽 중앙에 위치한 키예프는 드네프르강이 남쪽의 흑해로 합류하는 하구로 부터 950키로 떨어져진 학술문화의 중심지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어있기도 하다.
키예프는 동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로 5세기경 동슬라브인들의 무역기지로 역사를 시작했으나 몽골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기도 했다. 그 후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19세기말 러시아 산업혁명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졌을 때 겨우 100키로미터 남쪽에 있었던 키예프는 마침 불어오는 남풍덕에 방사능 오염을 피했고 대신 벨라루스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우크라이나로 독립하고 수도가 되었다. 주민의 82%는 우크라니아 인이나 러시아어가 우크라니아어보다 더 일상적으로 쓰인다.
키예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성 소피아 성당과 동굴 수도원이 그 것인데 이 곳은 4세기경 로마가 이스탐불로 천도를 했을 때 그대로 남았던 로마 카톨릭는 달리 황제를 따라왔던 정교 산하로서 추후 동로마제국의 국교였던 동방정교의 성소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이 곳은 관광명소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국립박물관과 러시아정교 교회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적인 동굴수도원은 신자들이 들고 다니는 촛불때문에 좁고 답답한 느낌이었고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키예프의 아가씨들의 세련된 모습이 보기좋았다. 기존에 사용하던 폰카를 넷북을 새로사면서 발생한 컴퓨터인터페이스 문제로 사용하지 못하여 어렵게 찍은 웹캠이나 동료에게 부탁하여 찍은 사진과 일부 웹써핑한 것으로 대체해본다. 우선 성 소피아 성당을 배경으로 한장 찍었다.
4.3리비우
동료가 탑승했던 키예프로 오는 러시아 항공기의 수화물이 제대로 도착하지않아 예매를 제 때하지 못했다. 따라서 기차표가 매진되어 원래 계획이 아닌 버스로 리비우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곳은 중세에 폴란드왕국이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게 되었고 2차세계대전 전까지는 폴란드인과 유태인이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나치의 유태인 민족청소와 폴란드인 강제이주를 거치면서 주위에 살던 우크라니아인이 시민의 대다수가 되었으며 종전후 소련에 병합되었으나 연방해체후 우크라이나로 분리독립하였다.
리비우의 구시가는 동구의 여러 건축양식과 종교양식이 혼합된 전형적인 예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주요 중세 건물은 성 조지 언덕위에 있는 성 조지 성당, 리비우성, 성 니콜 교회, 바질리안 수도원 등으로 약 5키로의 구시가 워킹투어로 둘러볼 수 있다.
키예프와 비교해보면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이 눈에 띄며 사람들의 분위기도 보다 여유있어보인다. 하지만 이곳도 역시 유네스코에서 등재했다는 구시가를 포함하여 그다지 흥미로운 볼거리는 없었고 대신 늘씬하고 세련된 용모의 아가씨는 물론 할머니까지 볼 수 있었는데 사회는 후진적인데 비해 외모는 엄청나게 투자하는 것 같아 옷, 장신구 혹은 화장품 등을 수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5. 폴스카(영어로 폴란드)
5.1 개요
리비우에서는 야간 버스로 폴란드의 크라카우로 이동했다. 입국수속은 약간 까다로웠는데 그 이유는 유로존으로의 입국수속을 의미하고 한번 유로존에 입국하면 가입국간에는 입출국수속이 면제되기 때문인 것같다.
폴란드는 인구 4천만명으로 한국의 약 3배의 면적이며 폴란드어를 사용하며 국토의 90%가 평야로 유럽 제2위의 곡창지대이다. 서슬라브족 국가중 가장 인구가 많으며 동쪽에는 벨라루스, 서쪽은 독일, 남쪽은 체코, 그리고 북쪽으로는 발트해에 접한다. 원래 게르만족이 살고 있던 이 곳에 훈족의 침입에 의한 게르만족의 대이동후 10세기에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어 번영하기 시작했다.
18세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지배되다가 2차대전으로 소련에 점령되고 1945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으나 경제실정과 부패로 1981년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1990년 민주화가 되어 민선대통령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2크라쿠프(쉰들러리스트로 유명해진 크라코우는 독일식발음이다)
8세기에 형성된 폴란드 왕국의 고도로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17세기에 바르샤바로 천도되기 이전까지 수도였으므로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시가지는 9세기에 축조된 바벨성을 중심으로 비스와 강 상류의 양안에 분포되어 있고 인구 75만명으로 폴란드 제2의 도시이다.
이 성에 있는 황금색 돔으로 덮인 지그문트 예배당은 13세기에 축조되어 원래 뾰족한 지붕으로 특징되는 노트르담성당과 같은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으나 16세기초의 화재후에 당시 유행하던 끝이 둥근 스타일인 짤츠브르크성당과 같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개축되었다고 한다.
도시의 볼거리는 구시가와 바벨성으로 도보로 충분히 볼 수 있으며 아쉬웠던 점은 중앙광장이 넓지만 노천카페와 상점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벨성은 비스와강연안에 높게 솟아있으며 기가 강하기로 유명해서(세계 상위 7위에 해당) 요가 수련자들이 많이 찾고 역대 왕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 등의 무덤도 국민적인 합의를 거쳐 수용한다.
5.3오시비엥침(강제수용소로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는 독일식발음이다)
크라크푸에 도착하자마자 당일치기로 여행한 곳이다. 버스는 터미널에서 출발하지만 가격은 조사한 것보다 많이 올랐고 입장료도 받고있었다. 원래 폴란드군의 병영으로 사용되던 이곳은 나치가 유태인, 포로, 정신질환자, 동성애자, 나치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만든 수용소중 최대 규모로 당시 유럽 유태인 600만명의 80%가 이곳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라크푸에서 서쪽으로 70키로지점에 위치해 있는 28개동의 수용소는 1945년에 소련에 의해 해방되었고 1947년에 희생자 박물관이 세워져서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도착한 수용자들 중 노동능력이 없는 75%의 경우는 즉시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고 샤워를 한다며 옷을 벗게 한 뒤 독가스실로 보내?고 시체는 소각되었으며 나머지 수용자들은 하루 1500칼로리의 낮은 영양상태로 중노동에 시달리며 좁은 숙소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수용소 전체의 절반정도는 주제별로 도착, 노동, 생활, 감옥(감옥내의 감옥으로 탈주미수자 등의 처벌을 위한 시설) 등으로 전시를 하고 있고 국가별로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일부 희생자의 머리카락 등은 사진촬영을 금하고 있다. 좁은 막사내를 많은 사람들이 가이드를 따라 더운 여름에 관람한 것은 약 70년전 그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더위속에 줄을 서고 기다리는 것들이 그러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실감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포로수용소입구에 붙어있는 “Arbeit macht frei.”(아르바이트 마하트 프라이, 노동이 자유롭게 만든다)라는 독일문장은 보편적 진리이다. 원시 경제에서 인간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조달하였지만, 근대에는 분업에 의한 생산성향상으로 보다 많은 자유 시간을 누릴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그 혜택은 중세 노예나 강제수용되어 노동하는 이 곳과 같은 경우에는 그러하지 않다. 그들은 노동을 하지만 연명할 최소한만큼만 제공되고 결코 그 노동에 따른 보다 많은 자유 시간을 누리거나 보다 좋은 자원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기여에 대한 보상이 결여된 사회는 자발적인 기여가 사라지게되며 생산이 소비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사라지게된다. 그런 측면에서 나치의 몰락은 예정된 수순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르겠다.
5.4바르샤바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팔지않아 인터넷으로 구매를 했다. 그런데 버스가 예정보다 2시간이나 늦었고 터미널에서 숙소까지의 거리가 배낭을 맨 도보한계거리인 4키로여서 물리적으로는 제일 고생한 도시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친절했던 시민들이 없었다면 정신적으로도 제일 고생한 곳이 되지않았을까?
이 곳은 폴란드의 수도이자 인구170만의 최대도시로 12세기 귀족이자 어부인 바르슈와 그의 아내 사바의 이름에서 도시명인 바르샤바(바르슈의 소유인)가 기원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도시의 상징도 인어이다.
13세기에 마조비에공국의 수도였던 바르샤바는 폴란드왕국에 편입되어 수도가 되어 북쪽의 파리로 발전하다가 18세기에 프로이센령이 되었다. 이어 19세기에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공국으로 독립하지만 그의 실각에 따라 폴란드왕국이라는 미명하에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가 국왕을 겸임하였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8월1일 나치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지만 외부에서 협공하기로 했던 소련군의 불참으로 63일만에 진압되어 모든 건물이 폭파당했고 4개월후인 1945년 1월이 되어서야 소련군이 진주하여 해방되었다. 이후 시민들에 의해 벽돌 한장까지 충실히 재현되어 구시가지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8월봉기의 내용은 폴란드 영화 카날(하수도)에도 묘사되어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게토와 구시가는 바르샤바의 중심부를 나란히 남북으로 놓여있으나 오늘 방문했던 게토는 현대식 아파트가로 변했고 구시가는 사진과 같이 많은 노천카페와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 대조적이다.
폴란드에 대한 인상도 물질적으로는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무형적인 부분은 여전히 부족함을 버스서비스와 관광객에 대한 태도에서 느낀다. 한국과 같이 강대국인 독일과 러시아에 끼여있는 반도적인 위치를 활용하지 못하고 폐쇠적이 되면 구한말 우리가 당했던, 그리고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서 그들이 당했던 악몽을 다시 겪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첫댓글 우와..정말 멋지네요..
캐나다에 대한 정보도 유익하공..
앞으로 시민권 시험에 도움..감사..간접적으로 횡단한 듯..^^
^^* 대단한 여행을 하셨군요.
여행기 감사합니다.
언제 함께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벌써 뵌지도 6년이 지났네요. 혹시 서울에 계시면 한번 더 뵙고싶기는 한데 지금은 토론토에 계신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현재는 토론토에 있습니다.
그럼 지금 서울에 계시는지요?
11월5일에 인천발 토론토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이번주 발권예정입니다.
그 때 혹시 토론토에 잠시라도 머무시면
제게 연락 주실 수 있으신지요.
얼굴이라도 한번 뵙고싶군요.^^*
아침 9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저녁 4시에 몬트리얼행 그레이하운드버스를 탈 예정이니 시간은 충분합니다만, 짐이 있어서 가급적 공항이나 그레이하운드 터미널 인근에서 뵙고싶습니다.
그날이 화요일이군요.
제가 학교 수업이 오후 1시에 끝나니까
그레이 하운드 터미널에서 잠시 뵈면 되겠군요.
대강 오후 2시 경이 되겠군요.
몬트리올 가는 그레이 하우드 터미널이 어딘지
장소를 미리 알아둬야 겠군요.
그곳의 어디서 만나고 어떻게 연락할지 연구해봐야겠군요.
그때 휴대폰은 갖고 계실 예정인지요.
터미널 주소는 610 BAY ST Toronto, ON M5G 1M5이고 핸폰은 없지만 와이파이는 이용가능하니 이메일 주시면 연락이 가능합니다.
오늘 11월5일 토론토행 항공기 발권했습니다. 향후 연락은 메일 danielp4@naver.com으로 부탁드립니다.
대단하시네요 여행은 이런여행이
평생남는건데 저두이번에 유럽4나라
를 22일동안 다녔는데 이렇게체계적으로 여행기를 올릴수가
없네요 여행은 할땐 힘들어도 두고두고
꺼내서 회상할수 있어서 좋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