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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징기즈칸(成吉思汗, 1162년~1227년)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부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몽골이란 나라가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
누군가는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중세의 히틀러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수식하는 '설령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해도, 거대했던 군주'라는 칭호는 칭기즈 칸에게 좀 더 알맞다는 말이 많다.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vs중세판 스탈린' 같은 양자택일식 이분법은 맞지 않다. 누군가에게 영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살자가 되던 때가 전근대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알렉산드로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대중들이 집착하는 "이 사람은 영웅이냐 학살자냐" 식의 선악 나누기 평가를 21세기 들어서는 잘 하지 않는다.
물론 평가가 갈리는것은 인성, 정치등에 관한 얘기이며,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정복군주중 하나다.
그리고, 칭기즈 칸에 대해 평가할때는 이 인물이 몽골 내부적으로는 씨족과 부족의 틀을 넘어 사회를 개편하고 국가의 기반을 건설한 개혁자이자 입법자이고, 몽골 외부적, 즉 세계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라는 점을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업적은 물론 후자의 업적의 기반이 되었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업적이다. 즉,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이고, 이 정복으로 탄생한 국가(몽골 제국)의 영역 내에서 일어난 방대한 교류가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칭기즈 칸이 그의 제국 전체에서 입법자이자 개혁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흔히 자연공동체에 가까운 부족/씨족과 그 관습적 체제를 탈피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공적인 사회의 기반을 만들고, 그 기반에서 통용될 성문화된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창기즈 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몽골 초원 안에서'나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이었지, 초원 바깥의 세계에서는 빠르면 수천년, 늦어도 수백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다. <테무진 to the 칸> 같은 매체에서는 이 두 영역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다보니 마치 칭기즈 칸이 그가 정복한 제국의 영역 전체에 대해 위대한 입법자이자 정치개혁자였다고 잘못 묘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몽골 제국을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 라는 황당한 서술까지 나왔다.
제1황후(皇后):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장남: 목종 주치(穆宗 朮赤), 추존황제(追尊皇帝)
2남: 바투 칸: 킵차크 칸국의 초대 칸
차남: 성종 차가타이(聖宗 察合台), 추존황제(追尊皇帝)
장남: 무투겐
4남: 카라 훌레구: 차가타이 칸국의 초대 칸
3남: 태종 오고타이(太宗 窩闊台),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
장남: 귀위크 칸: 몽골 제국의 제3대 대칸
4남: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장남: 몽케 칸: 몽골 제국의 제4대 대칸
4남: 쿠빌라이 칸: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
보르지긴 칭김
보르지긴 카말라
계국대장공주: 고려 충선왕의 왕비
순종 다르마발라
위왕(魏王) 아무케(阿木哥)
조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보르지긴 후게치(孛兒只斤忽哥赤)
보르지긴 에센테무르(孛兒只斤也先帖木兒)
복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 고려 충렬왕의 왕비, 충선왕의 모후
6남: 훌라구 칸: 일 칸국의 초대 칸
7남: 아리크부카
장녀: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창충무왕 패독(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下嫁)
차녀: 연안공주 체체 이켄(延安公主 撦撦亦堅), 토랍이길(土拉而吉)에게 하가(下嫁)
3녀: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4녀: 운국공주 투멜룬(鄆國公主 禿滿倫), 적굴(赤窟)에게 하가(下嫁)
5녀: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태출(泰出)에게 하가(下嫁)
황후(皇后):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황후(皇后):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황후(皇后):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황후(皇后):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황후(皇后):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황비(皇妃):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황비(皇妃): 야간 비자(耶干 妃子)
황비(皇妃): 야축 비자(耶逐 妃子)
제2오르도 관리
제2황후(皇后): 홀란 황후 올와사씨(忽蘭 皇后 兀洼思氏)
6남: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황후(皇后):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황후(皇后):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황비(皇妃): 야진 비자(也眞 妃子)
황비(皇妃):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황비(皇妃): 찰진 비자(察眞 妃子)
황비(皇妃):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황비(皇妃):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8남: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요절(夭折)
제3오르도 관리
제3황후(皇后): 야수 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제5황후(皇后):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황후(皇后):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황후(皇后):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황후(皇后):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황후(皇后): 찰합 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황후(皇后):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황후(皇后):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황비(皇妃):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황비(皇妃):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황비(皇妃): 날백 비자(剌伯 妃子)
제4오르도 관리
제4황후(皇后): 공주황후 완안씨(公主皇后 完顔氏)
7남: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요절(夭折)
황후(皇后):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황후(皇后):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황후(皇后):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황후(皇后): 연리 황후(燕里 皇后)
황후(皇后): 독해 황후(禿該 皇后)
황비(皇妃): 완자 비자(完者 妃子)
황비(皇妃): 금련 비자(金蓮 妃子)
황비(皇妃):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황비(皇妃): 노륜 비자(奴倫 妃子)
황비(皇妃): 묘진 비자(卯眞 妃子)
황비(皇妃):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황후(皇后): 모개 황후(謨蓋 皇后)
황비(皇妃):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 고려인(高麗人)
황후(皇后):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황비(皇妃):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황비(皇妃): 탑탑아녀(塔塔兒女)
5남: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황비(皇妃): 불명
9남: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요절(夭折)
6녀: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파이술 아아특 적근(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下嫁)
7녀: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공주(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이 크게 노해 부마를 죽였다.
48명의 황후 및 황비들에게서 총 9남 7녀를 두었다.
해당 명칭들은 원나라에서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이다. 황후는 몽골어로 칸의 여성형인 '카툰'이라고 불렀으며, 내명부인 오르도를 관리했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구트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황후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현재 칭기즈 칸의 자손으로 밝혀진 사람은 직·방계를 통틀어 1,600만 명이 넘는다.
그의 최후에 대해선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거나 말에 떨어져 죽었다거나 심지어 복상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여러 설들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이후 쇠약해졌고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미스터리. 여기에 대해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말들과 기수들도 모두 몰살되었다 카더라. 부르한 산 참고. 물론 전설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칭기즈 칸의 유해를 그의 충복이 '그냥 평범하게 몽골식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야말로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적절하다고도.
일본이 중일전쟁 때 찾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10,000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들의 조상이 칭기즈 칸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다만 이 설은 현재는 부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영국인이면서 이 아저씨 후손인 사람이 나오는데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고.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고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꼽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 50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예를 볼 때 좋은 얘기는 별로 안 썼을 듯하다.
다만 워낙 효과적으로 정복하고 부하들 관리도 잘한지라 비즈니스 계에선 꽤나 호의적으로 보는 듯하다. 칭기즈 칸의 경영을 배우자는 얘기는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얘기다.
칭기즈 칸의 후손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카네기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협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본의 아니게 지구 환경을 급격히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칭기즈 칸이 주도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이 당시 아시아-유럽 구대륙 세계 인구의 1/4을 학살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에 급증하던 이산화 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그 양이 약 7억 톤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9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총량과 맞먹는다. 칭기즈 칸이 세계적인 대학살을 하고 다닌 덕분에 지구 온난화는 무려 200년이나 더 미뤄졌다고 한다. 기사
이 시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토록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상당부분 송나라에 기인하는데, 송나라 자체만으로도 1억에 가까운 인구가 배출하는 이산화 탄소량도 엄청난데다, 이 시대 송나라는 한창 석탄 산업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의 경우에는 석탄을 대량으로 채굴해 작업용, 난방용으로 때기도 했다. 물론 코크스나 증기기관을 쓴 건 아니라서 효율은 창렬이었다.
게다가 송나라가 이후의 영국처럼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고 있는 상황과는 상당히 다른 중세 농경국가에 불과했기에(자세한건 송나라 문서 참조) 무의미하게 지구환경만 파괴하여, 중국은 물론 근처의 한반도의 대기 오존에까지 큰 악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칭기즈칸의 탄생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문명들을 침공하고 파괴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농담으로 칭기즈 칸을 환경전사라 칭하기도 한다.
또는 지구가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칭기즈칸이란 인간을 낳았다는 농담도 존재한다.
"가장 좋은 삶이란 너의 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이 네 발 앞에 쓰러지는 걸 보며 그들의 말과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여자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
페르시안 사서 중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의 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긴 하다. 허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is to vanquish your enemies, to chase them before you, to rob them of their wealth, to see those dear to them bathed in tears, to clasp to your bosom their wives and daughters.”)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진 승리했다고 말하지 마라."(#)
"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이 말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참고로 "집안이 못났다고 실망하지 마라" 식으로 전개되는 칭기즈 칸이 했다는 말은 사실 '김종래' 라는 기자가 그의 일생을 토대로 독자를 격려하는 내용의 가상의 글을 만들어서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이라는 책에 쓴 것인데 어느 샌가 그 얘기가 쏙 빠지고 칭기즈 칸의 어록이 되어버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감동적인 역사 인물의 실제 어록이라면서 인쇄해 들고 온 지인을 보고 멘붕했다고 전해진다.
거기다 덤으로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 붐이 일어나면서 또 이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어록' 이란 게 유포되어 이순신이 역적 가문 출신이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징기스칸 버전과 이순신 버전이 하도 퍼진 나머지 10년 전만 해도 어른들이 한마디씩 언급하거나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서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칭기즈칸이 홧김에 자신의 매를 죽이고 "분노로 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국내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