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은퇴식날 이형택과 한 40분정도 인터뷰한것인데, 올려봅니다.
인터뷰 앞뒤, 중간에 추임새는 제가 쓴 것이지만 인터뷰 전문을 녹취해서 토씨하나 빠트리지 않은 해당 사이트 운영자분에게 무한한 경외를 보내며, 좀 긴 글입니다.
|
Chapter 2. 이형택 그리고 투어 테리: 1999년 11월 요코하마챌린저에서 태국의 파라돈 스리차판을 상대로 6-3, 6-0으로 우승하며(첫 챌린저 우승)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때는 투어선수로서 라기 보다는 당시 실업선수였고 , 어떤 시스템에 의해 투어로 진출한 것이 아닌 순전히 본인의 실력에 의지해 투어로 나갔는데, 여타 다른 실업선수들과 달리 투어로 꼭 진출해야겠 뭐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었나요? 이형택: 아니요~ 저도 그때까지만 해도 같았어요. 왜냐면 저 위에 선배님들이 도전해 분 분들이 없었고, 국가대표하면서 챌린저 몇 개 다니고, 퓨처스 시합 나가고 외국시합 잠시 뛰는 정도로 생각을 했었지, 그전에는 마인드가 바뀐게 없고, 조금 다니면서 그 이후에 생각이 바뀌었죠. 그 전까지만해도 여느 선수들과 생각이 똑 같은 생각이였고 아마 삼성에서 후원해주지 않았다면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거랍니다. 계속 후원을 해주셨기 때문에 외국시합을 다니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퓨처스 다닐때는 술을 마시고 나가서 컨디션이 70%~80%라도 그 선수들을 이길 수 있었어요. 그래서 중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가 상위시합을 다니면서 그 선수들을 공을 쫓아가기 위해서는 좀더 빨리 뛰어야 하고, 세게 쳐야 되고 그에 따른 부상도 왔었고, 그런 것들이 체력적인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런 점을 보강을 해야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큰시합을 다니면서 제가 100%가 되지 않으면 다른 선수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컨디션을 위해서 좀더 일찍 자야하고 시합날 일찍 일어나서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많이 바뀌어져 간거랍니다. 지금의 선수들은 어떻게 보면, 저희가 생각할 때는 아무도 없었던 상황에서 몰랐었는데 지금은 이 선수들이 저의 지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그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 했었던 많은 노력들과 고충을 생각을 하고 했어야 하는데 지금 현재의 모습만을 보는 것 같아요. 지금의 현재의 모습은 사실 그때의 비해서 시합이 많이 있고 그러다 보니까 컨디션 조절하는 위주의 운동이고 시합을 인해서 시합을 뛰는 거기 때문에 사실 그때에 비해서 많이 적어진 상황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다 차려진 상황에서 보는 거니까 그 준비 과정 및 보여지지 않았던 모습을 보지 못하니까 “아~ 시간 지나면 되겠지”라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아쉬워요. 그건 본인들이 직접 느껴야 하는 거고, 그 것을 본인이 빨리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빨리 성공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요. 아무리 옆에서 얘기해도 스스로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나 받아들이느냐 따라 그 차이는 결과로 나올 것이고 가망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좀 헷갈렸다. 그가 스리차판을 이겨 살짝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회가 요코하마인지 후쿠오카인지 나고야 인지... 해서 후쿠오카 챌린저로 물어봤었는데, 이형택이 금새 수정해 주었다. 첫 챌린저 우승이여서 각별했던 것 같다. 당시 파라돈 스리차판이 100위권이였고 투어와 챌린저를 오가며 나름 선전하던 때여서, 이형택이 그를 그렇게 쉽게 이겼다는 사실에 놀랬었다. 더불어 1998년도 상하이던지 싱가포르였는지 가웃거리지만, 그의 첫 투어 승리를 언급하고 싶기도 했다.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서 1승을 거둔, 그런데 8강 진출 좌초는 하필 예선에서도 이겼던 - 럭키루저로 올라왔던 선수였었던 기억도 난다. 뒤에 찾아보니 1999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회였고, 그 럭키루저는 복식 스폐셜 리스트인 토드 우드브리지 였다. 그리고 이형택의 투어 첫승 상대는 당시 랭킹 100위인 파라과이의 레이몬 델가도였다. 이형택: 탑 선수들이 제 기억에 아무래도 많이 남죠. 저는 많은 선수들과 경험을 해봤고 그런 면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안드레 아가시나 피트 샘프라스, 앤디로딕, 앤디로딕의 경우는 제일 많이 시합을 했던 선수이고(11번) 페더러 선수도 그러고 모야 등 잘했던 선수들도 많은데 샘프라스나 아가시 같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나달과 페더러와도 같은 선수도 동시대에 같이 운동을 했었다는게 저로서는 운이 좋았던 것도 있고, 두 전설과 황제라고 칭하는 선수들과 같이 뛰었던 자부심도 있고 영광스럽기도 합니다. 이형택과 소더링은 두번의 프랑스오픈에서 도드라졌다,. 처음만난 프랑스 오픈 1회전에서 세트 스코어 0-2의 불리함을 딛고 대역전승을 일군 다음 3회전까지 진출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해준 선수가 스웨덴의 로빈 소더링이였다. 요즘 너무 잘나가는..... 테리: 톱 선수에 대한 코트에서의 느낌이 다를 것 같은데요? 피트 샘프라스의 경우는 이길뻔도 했었잖아요. 이형택: 그런 선수들에겐 사실 이름만으로 50%이상은 advantage를 안고 간다고 볼 수 있죠. 샘프라스의 경우는 그때는 세트올까지(마스터스 토론토 2회전 6-3,6-7(5),2-6) 간적이 있었죠. 안드레 아가시때도 그렇고 그게 경험인 것 같아요. 제가 투어를 다녀서 좋아졌다고 해도 완벽할 정도로 경험이 쌓였던 건 아니거든요. 그 선수들과 했을 때 이기고 있어도 “아 이러다가 이기는거 아냐? 사고치는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고 서두르고 그랬었는데, 만약 제가 경험이 많았다면 내 플레이를 끝까지 할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들이 조금 아쉽고, 뭐… 다른 선수들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이름 있는 선수들은 상대선수가 갖는 압박감 같은 것이 커요. 안드레 아가시 같은 경우는 처음부터 약한 상대와 붙을 때는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서 웜업할 때 공을 아주 쎄게 쳐요. 일부러 그런 것 들도 어떻게 보면 전략이고 그런 선수들은 다른 것 같아요. 밖에서 봤을 때는 못느끼는 부분이지만 같이 시합을 들어가며 보면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그 누구보다도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니까요. 이 말을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그를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 이형택이 그런 거대한 산 같은 선수와 마주하게 될 때 어쩌다 리드를 잡더라도 정말 이길수 있을까 하는 의문형과 흥분으로 어쩔줄 몰라했던 나의 모습과 100 퍼센트 싱크로였다. 피트샘프라스뿐 아니라 앤드레 애거시도 첫 승부에선 이길수 있던 기회를 잡기도 했다. 이길뻔한 기회를 다 이겼다면 이형택은 얼만큼 컸을까? 죽은 자식 거기 붙잡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상상만으로 괜히 벅차 오른다. 테리: 그럼 특별하게 지목할 선수는 없는건가요? 이형택: 위에서 말씀드린것처럼 안드레 아가시, 피트 샘프라스, 나파엘 나달, 로저 페더러 등 여러 선수들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잘했던 선수들과 함께 한 것이 기억에 많이 남지 않을까요? (웃음) 앤디 로딕 을 말할 줄 알았는데... 참 질기도록 많이 만났고 많이 졌던 선수... 그래서 다시 한번 꼬옥 이겨주길 바랬던 선수. 테리: 기억에 가장 남는 경기를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이형택: US 오픈 16강이죠. 저는 사실 어떻게 보면 2007년도에 US Open에 16강 갔을 때보다(2007년 US Open전에 생애 최고랭킹인 36위를 기록했다.) 2000년 16강에서 피트 샘프라스와 경기할 때가 더 기억에 남고 긴장도 많이 되었던 시합이었고, 그리고 시드니 아디다스 인터내셔널에서 우승했을 때의 기억이지만, 그래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합이 98년 방콕아시아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인데 그 때 금메달을 못 땄다면 2000년 US Open도 16강도 없었을 시기고 2000년도라면 제가 상무에 있었을 시간이 였거든요.(단체전 금메달로 군면제) 제가 지금까지 있게 해준 시합이였고, 그 계기로 인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돌아보면 그 시합이 가장 중요했었던 시합이였던 것 같아요. 2003년 투어우승전에도, 투어에서 우승을 한번 하고 싶다... 이런 기사가 났었고, 2007년도 US 오픈 16강에 두번째로 올라갔던때도 그 전에, 다시한번 그랜드 슬램 16강에 진출하고 싶다라는 기사가 나서 거 참 독특하다...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것 기억하시는지,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된 이유가 뭔가요. 일단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미리 언론에 알렸었나요? 이형택: 예… 기억합니다. 뭐 그리고 그게 그럴수 있다는 자신감 보다는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거죠.(웃음) 16강을 다시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거였어요. US Open은 2000년도의 기억이 남고 늘 기분이 좋고 항상 그때의 기억이 많이 나요. 한인타운에서 저녁을 먹고 비디오를 빌려서 호텔에 들어가서 비디오를 보고, 항상 가면은 공도 잘 맞고, US open때는 아 16강 다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유독 들어요. 호주오픈때는 그런 생각은 잘 안 들었는데 말이죠. 투어우승도 하고 싶었고, US Open 16강을 갈 정도로 랭킹이 높았던 선수들을 4번 정도 이겼으면 투어에서 4번, 5번 이긴것과 마찬가지 이기 때문에 우승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해서 하루에 2게임씩 하는 것이 아니라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했었죠. 테리: 작년에 장기적인 꿈이 내가 만든 아카데미에서 꿈나무가 US Open 4강에 오르는게 희망이라고 말씀하셨었는데... 기억하시는지요? 이형택: 꼭 4강은 아니라도(멋적은 웃음 한번) 결승도 가면 좋겠지만, 어떻게 보면 제가 시합을 다녔었고 거기에 보면 대진표가 있을거잖아요. 제가 지도했던 선수들이 다니면서 “어.. 우리 코치가 여기 시합을 뛰었었네”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시합을 다녔을 때는 드로에 한국 선수들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일본선수에는 마쯔오카 슈조 라는 선수가 있었고, 같은 나라 선수가 왔을 때 자기네 나라 선배들이 드로에 있었다면 굉장히 뿌듯하고 힘도 많이 얻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선수로서 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지도자로서는 또 다른거라 생각합니다. 지도라서도 제가 지도했던 선수들이 잘 가르쳐서 거기서 성적을 낸다면 그 부분에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얘기를 했겠죠. (웃음) 마스오카 슈조. 1996년 윔블던 8강 진출하고, 윔블던의 사나이 샘프라스와 맞짱을 뜬... 국내 유일의 ATP 투어 대회였던 KAL cup 에서 우승을 거머쥔 전설적인 일본의 테니스 스타였다. 최고랭킹이 아마 40위 안팎까지 갔었고, 90년대 딱 우리의 이형택같은 일본의 스타. 지금은 그런데 피겨스케이팅 객원 해설자로 더 많이 보인다. 일본은 이후 게이 니시코리라는 스타가 탄생하기에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우리가 다시 이형택 같은 선수를 보자하면 그 만큼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할 지 모르겠다. 테리: 아무래도 오랫동안 투어를 돌아다니다보면 가장 힘들었을텐가 있을텐데 그런 시기가 언제이고 어떻게 극복을 하셨나요? 그런데 투어를 같이 다니는 선수들도 보니까 탑10에 있는 선수들도 4주 연속 1회전 지고 그러더라구요. 나 이제 갓 100위 정도 되는데 5주 정도 지는 건 당연한 일이였어요. 이 것이 내 일이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똑같이 다음날 나와서 운동하고 그러니까 나중에 기회가 올 때 잡을 수 있겠더라구요. 내가 계속 운동을 해왔고 열심히 해왔으니까 자신감이 있었고 그런 운동을 안 해놓고, 졌다고 운동을 등한시 했다면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잡지 못했을 거죠. 4-5주씩 1회전에 탈락했던 투어 선수들을 보면서 “아.. 저 선수도 계속 연습을 하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다시 치고 올라가는 것들을 목격했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 이건 투어생활을 하는 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슬럼프도 당연히 오는거고 그것도 당연히 극복해야 되는거고 언제인가 좋아지겠지 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또 성적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보니 내가 노력을 했을 때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연습을 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었죠. 테리: 많은 기억중에 재밌거나 황당했던 에피소드가 있었나요? 이형택: 오랫동안 했는데도 얘기해보라 하면 잘 없는 것 같아요. (은퇴식에서는 “작은 에피소드이기도 하지만 주원홍 명예감독과는 US오픈 16강 진출 당시 규정을 어기고 감독께서 코트에 들어와 안아주며 함께 기뻐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라고 밝혔다.) Chapter 3. 이형택 그리고 은퇴 테리: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커리어를 쌓으셨지만, 좋은 학생이 반드시 좋은 선생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지도자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 그리고 특별히 정한 교육 철학이 있으신지요? 또, 많은 지도자를 만나보셨고 외국 코치들도 봐왔을 텐데 롤모델이 될만한 분이 있는지요? 이형택: 저는 제가 지금까지 생각하면 요소 요소마다 좋은 스승님들을 만난 것 같아요. 어렸을때는 (처음 절 가르친 분은)테니스를 하면서 선수출신은 아니였지만 무척 재밌게 테니스를 접할 수 있게 해주셔서 테니스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중.고등학교때는 굉장히 공격적으로 지금 당장 성적보다는 앞으로의 가망성을 보고 지도를 해주셨고, 대학교때는 과감하지만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게 예를 들어 국가대표가 된다던지 할 수 있게끔 지도를 해주셨고, 실업팀에 와서 주원홍 감독님은 외국경험으로 쌓을 수 있게 지원을 해주셨답니다. 전체적으로 선생님들도 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장,단점이 있거든요. 어려서는 재밌게 가르치되 집중력 훈력이 중요하겠고, 나중에 올라가서는 수비위주로는 외국에서 통하지 않기 때문에 중.고등학교때는 성적을 내는 선수로 키우기 보다는 나중에 실업팀정도 가서 실력을 낼 수 있도록 기초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양인이 가장 근육이 완벽하다 던지 힘을 쓸 수 있는 나이는 25살 이후라고 합니다. 근데 그걸 가지고 서양선수들이 20살에 성적을 내고 1위가 되는걸 맞춰야 한다는 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경우만 봐도 임신을 해서 애기를 낳고 바로 하는 행동부터도 다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찬물에 손을 대는 것도 못하게 하는데 외국의 경우는 낳고 나서 쥬스를 마시고 바로 돌아다니고 말이죠. 신체적인 조건이 태어나서부터 다른데 서양사람들에게 맞출 수는 없죠. 그런 부분도 파악을 해서 선수 각각에 맞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릴때는 공만 치다 보니까 시합만 하다 보면 이기거든요. 테니스에 대한 시간만 많이 가진다면 체력은 많이 중요하지 않고, 체력적인 것은 외국선수들도 약하니까 그럴 수 있겠지만 올라가면서 점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이 체력적인 부분들입니다. 시합에서 이기고 그런 것들을 나중에 체력이 되고 성장이 되면 에러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이 저절로 연습을 하면 극복이 되요. 하지만 파워를 키를 수 있는 웨이트를 하지 않으면 파워에서 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앞으로 이 선수들이 지금 당장 우리 아카데미에 있어서 성적은 안 나겠지만 나중에 어디에 가서라도 20대이후 “아 내가 이형택 아카데미에서 운동을 했기 때문에 도움이 되었구나..”라고 말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건 누구나 알 수 있고 선수들이 느낄 수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아카데미에서는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아~ 그런데 질문이 뭐였죠.. 얘기하다 보니까 다른 곳으로 빠진 것 같아요. (웃음) 테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교육철학, 나는 이런 지도자가 되고 싶다...하는 것. 추상적인 것이라도 좋으니 일러주세요. 이형택: 선수들과의 “소통과 믿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지도자가 와서 가르친다고 해도 “저 사람이 가르친다고 해서 내가 늘 것 같은가?”라는 의문이 생긴고 믿음이 없이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존 맥켄로가 와도 소용이 없을 거랍니다. 같이 호흡하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정직한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할려고 하고 있어요.(웃음)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코치님들과 같이 있기도 있지만 믿음이 없으면 서로 안좋은 일이 있을때 한 순간에 깨질 수 있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얘기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거죠. 믿음이 있으면 같이 싸웠다가도 다시 풀려서 갈 수 있죠. 이형택: 어렸을때부터 알고 지냈고, 95년부터 처음 시작해서 대표팀과 삼성도 같이 들어와서 방도 같이 쓰면서 생활했기 때문에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도로 가까웠죠. 시합을 다니면서 편안하게 해주고 마지막쯤에 윤형일코치와 다니면서 마음도 편안했었고 서로간의 믿음이 있고 하기 때문에 그때가 기록도 갱신하고(2007년 8월/최고 랭킹 36위) 성적이 가장 좋았었죠. 이쯤해서 기억할 만한 인물. 윤용일 선수. 이형택처럼 강력한 백핸드를 가지지 못하고 슬라이스로 넘겼지만, 일본의 전설적 테니스 스타인 마스오카슈조를 격파하며 데이비스컵 승리를 이끈. 98년도 방콕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때도 이형택보다 더 큰 활약을 보였던 에이스였다. 이형택처럼 때를 만나지 못해 투어선수로 발돋움 하지 못했지만, 한국 테니스를 이야기 할때 결코 간과할수 없는 선수일 것이다. 테리: 후배들에게 본인이 준비만 된다면 언제든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거네요. 이형택: 네 그렇죠. 그 기회는 항상 와요. 만약에 시합을 다니다 보면 대진표가 좋게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잘 못하는 나라의 와일드카드라던지 예선통과 선수라던지 말이죠. 운동이 안되어 있으면 그렇게 좋게 나와도 못 이기거든요. 하지만 운동이 되어 있다면 그 선수들과 붙었을 때 한번 이기면 보통 선수들이 자신감이 많이 붙는데 그 다음 라운드에 내가 상대하기 좋아하는 선수가 있고 아닌 선수가 있는데 좋아하는 선수가 싫어하는 선수를 이기고 올라 올때가 있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8강가고 4강가고 그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거죠.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기면 그 다음주 시합을 잘할 수 있고 그렇습니다. 테니스는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게 좋은 것 같아요. 테리: 본인은 그 찬스가 언제였던 것 같아요? 이형택: 저는 제일 큰 찬스가 US Open 가기 전에 2000년도에 브롱크스 챌린저(럭키루저에서 우승까지했었다.)였는데 빙핸톤에서 8강에서 지고나서 바로 새벽에 도착해서 새벽에 예선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였어요. 럭키루저였지만 운동을 안하고 나간 상태라면 1회전에 나가서 이길 수 없었거든요. 운동을 해 놓고 제가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짜피 예선에서 진 것 지금 운이 좋게 본선에 올라왔으니 편하게 게임하자 라고 생각했는데 우승을 하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서 US Open 16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시드니에서도(2003 아디다스 인터네셔널) 우승할 때도 제가 도하에서 새벽에 왔었거든요. 굉장히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그런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합을 풀어나갈 수 있었어요. 테리: 2003년 시드에서는 컨디션이 좋아보였거든요... 이형택: 그렇게 되면서 좋아진거죠. 그 전에는 예선을 2게임씩 하고 아침에 가방을 체크인하지 못하고 가방을 맡기고 바로 경기장으로 갔었어요. 그것 까지는 다른 분들은 모르시죠. 시드니는 40위대에서 본선 컷이 되어서 예선을 뛰어야 하는 상황이였죠. 그런 기억들이 오히려 올라가면서 편하고 쉽게 풀려나가게 만들었죠. 테리: 본인의 선수생활을 100점 만점에 점수를 준다면 몇점을 주실 수 있을까요? 이형택: 잘 모르겠는데…(조금 생각후에) 한 70점이요... 테리: 너무 적게 주신 것 아닌가요? 이형택: 만약 80점~90점이면 더 올라갈 수 있었겠죠. 여기까지가 제 한계였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테리: 나에게 있어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이형택: 굉장히 많은 많이 되죠. 제가 시합을 다니고 힘들게 돌아왔을 때 반기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재롱을 떨어주는 나의 자녀들 가족이 있다는 것, 결혼을 해서도 성적을 낼 수 있었는데 제게 많은 의지가 되었던 것 같아요. 이형택: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은 어머님이시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운동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전적으로 저에게 다 맡겨주셨고 저를 믿어주셨기 때문에 제가 잘 못된 길을 갈 수 없었죠. 어머니께서는 항상 제가 말씀하셨던 건 “교만하지 말아라” 였답니다. 테리: 은퇴를 앞두고 있는데 어떤 심정이신지 실감이 나시나요? 이형택: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나라는 존재가 이제 테니스장에 선수로서 설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고 그 반면에 시원한 부분은 시합에 대한 스트레스, 준비를 하기 위한 힘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 나는 것이 조금 편한 부분인 것 같아요. 하지만 앞으로 아카데미를 운영해야 하고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은 더 많은 부분을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할 것 같습니다.(웃음) (그외 은퇴식에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삼성증권 임직원님들과 대한테니스협회 직원님들에게도 감사하다"며 "무엇보다 삼성증권 테니스단 선수로 뛰게 해 주신 주원홍 감독님께 감사하다"라며 15년간 지원해주었던 삼성과 관계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테리: 마지막으로 팬들께 하고 싶은 말씀은? 이형택: 저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었고, 그런 관심과 사랑덕분에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 앞으로도 지도자 길로 가지만 계속해서 관심가져 주시고 성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 은퇴식에서는 "시골에서는 별볼일 없던 꼬마였던 제가 테니스를 하면서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 테니스를 짊어질 우수한 선수들을 키우고 육성해 여러분들이 함박웃음 지을 수 있게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많은 응원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했다.) 은퇴를 앞둔 심정이나 뭐 이런 식상한 질문은 하지 말자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마무리는 식상한 질문으로... 물론 그 식상한 질문에 이형택은 진솔하게 대답해 주었다... 정말 한 10분 정도 형식적인 질의응답이 오갈줄 알았던 자리는 40분 넘게 진행되었다. 자리를 바꿔가며.... 봇물터진다는 표현처럼 , 그의 입에서 봇물처럼 쏟아지던 많은 말들... 그가 달변가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었다. 그가 한참 열변을 쏟아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싱끗 웃음이 났다. 테니스 코트에서 땀에 범벅이 되어, 숨을 고르는 모습만 보다 양복을 입고 달변을 토해내는 모습이 낯설지만 신선했다. 그랜드 슬램(혹은 아무대회라도 좋으니) 8강진출.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 4강 진출. 투어 우승 한번만 더. 로딕을 한번만 더 이겨주기... 2000년, 가을의 전설이 된 US 오픈의 16강 진출 이후 투어에서 경기를 하게 된 이형택 선수의 동선을 스토커처럼 쫓으며 바랬던 소원 4가지.... 하지만 아쉽게 소원은 세가지라야 이뤄지는 전통(?) 때문인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에 대한 아쉬움 보다, 감히 그 소원을 꿈꿀수 있게 해준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 그 꿈을 꿀수 있게 해 준 이 선수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다시 또 테니스라는 종목에서 이런 꿈을 꾸게 될 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첫댓글 한국스포츠가 배출한 최고의 영웅 중 한분이십니다.
레전드
2000년 16강에서 피트 샘프라스와 대결이었던가요? 1세트 초반 흐름이 좋아서 이거 큰사고치나 했는데...중간에 비가와서 경기가 중단되었다 다시 시작했는데...흐름이 깨져버려 패하고 말았죠....그때 샘프라스를 이겼다면 거의 센세이션을 일으킬수있었는데요....정말 아쉬웠습니다...
미국 언론에서도 미스테리 맨이 기적을 일으킬뻔했다고 크게 보도 했죠. 샘프라스도 누군지 모르는 선수인데, 대단했다고 극찬했습니다.
아~정말 오래전일인데 기억하시는분이 계시군요...그당시 첫세트 분위기는 정말좋았는데요...샘프라스도 상당히 컨디션이 안좋아보이구요...하지만 비가온뒤 재개된 경기에선 샘프라스가 완전히 다시살아났더군요....정말 두고두고 아쉽네요..
제가 테니스에대해선 잘모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읽었내요 ... 항상 한국테니스 = 이형택이라는 생각을가지고있었는대 은퇴한다니 .. 아쉽내요 .
잘읽었습니다.
제가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좋아했던 페레로 이겼었죠. 전 아직도 그 경기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테니스 선수!!!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 ㅋㅋ 세계랭킹 1위까지 했떤 선순데..꺽고 우승했죠
우리 나라도 테니스에 투자 좀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러시아나 다른 동구권 나라들처럼 미국에 테니스 유학을 많이 보내면서 유망주들을 많이 키웠으면 좋겠어요. 분명 우리도 그들만큼이나 투자하면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다른 애기지만, 아시아 테니스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태국의 스리차판은 지금 성적이 어떤가요? 반짝 보이던데 요즘은 또 잘 안 보이네요. 마이클 창 이후로 실력있는 아시아계는 참 보기 힘드네요. ㅜㅜ
스리차판은 내용에도 언급했듯, 이형택보다 3살이나 젊고 훨씬 좋은 성적 거두었습니다만, 결혼과 동시에 은퇴상태입니다. 미스 유니버스 출신의 캐나다인과 결혼해서 재기를 노린다는 기사가 뜬 후 지금까지 감감...... 아마 다시 복귀하기는 힘들지 싶네요. 2003년 호주오픈 인터뷰에서 이형택 나이 언급하면서, 좀 늦은감 있는것 아닌가 하는 뉘앙스를 풍기더니 지가 2년 먼저 은퇴해 버린....
일본의 게이 니시코리/대만의 루헨센이 이형택 다음 아시아 테니스 계보를 이을 선수인데 게이 니시코리는 요즘 잠시 주춤한 상태고 루헨센이 태생이 챌린저라.. 한계가 있어 보이고...... 우리나라 전웅선이 러시아의 25위 투르소노프까지 이기며 뭔가 해볼까 하나 싶었는데 얘도 요즘 뭐하는지 모르겠네요. 본인의 맘가짐과 가족의 헌신적 뒷받침대비해서 성적이 안보이는 좀 안타까운 케이스이죠.
테니스의 왕자!!
올해는 레전드 분들이 은퇴를 많이 하네요;; 이형택, 송진우, 정민철;; ㅠ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전 아직도 한국인 처음 US OPEN 16강 올라간 것이 생생히 기억하네요...
이봉주 선수도 올해 은퇴하지 않았나요? 정말 레전드들이 많이 은퇴했네요.
아..그렇군요;;;
아..그렇군요;;;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