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黃眞伊)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가니 옛 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라,
대구 기생은, “그 사람 마음 좋은가?”하고 心性을 상대를 했고. 서울 기생은, “그 사람 돈 제대로 쓸 줄 아나,“ 하며 能力을 중시했고, 평양 기생은, “그 사람 돈 있나?” 하고 財物로 사람을 재는 잣대로 삼았다.
대구 기생이 수더분하고 착하다면 서울 기생은 경중 美人 形이요 평양 기생은 그까짓 돈을 쓸줄 모르고 알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돈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후려낼 재간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평양 기방에 출입했다하면 어떤 꼼쟁이 구두쇄도 거렁뱅이가 되었다.
어느 때 官吏도 선비도 아닌, 남쪽 지방의 닳고 닳은 장사꾼이 배에 생강(生薑)을 한 배 가득 싣고 평양에 왔다가
그만 그곳 기생에게 걸려들어 마침내 지닌 돈을 탕진하고 쫓겨나면서 신세 한탄으로 詩를 한 수 읊었다.
먼데서 보면 말 눈 같고,( 遠春以馬目) 가까이서 보면 농창(濃滄)인데 (近視如濃滄) (농창“깊은 물길”) 이도 없는 작은 입이 어찌 맵다 소리 한 마디 없이(兩頰無一齒) 頰...뺨, 협 한 배의 생강을 모두 먹어 치우나. (能食一船薑) 거지 신세가 되니, 妓房에서 12 폭 병풍을 치고 원앙금침에서 기생의 사랑은 물론이요,
하인들의 우러름을 받던 일은 일장춘몽, 이놈은 안방에서 쫓겨나 부엌의 땔나무 칸에서 새우잠을 자며 또 다른 남자를 끼고 자는 평양기생집 장작을 패고 불을 피우며 찬밥덩이를 얻어먹어야 했으며. 다음 놈이 그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을 보고는 한마디 뱉었다.
“불 땔 놈 또 하나 걸렸구나”
조선의 三大 妓鄕도 아닌 開城 황진이의 잣대는 “그 사람 멋을 아는가”였으니.... 그까짓 돈이나 위인의 잘 나고 못나고 가 문제가 아니었다. 市井 잡배가 천금을 준다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황진이의 마음에 들었다 하면 天下 豪傑英雄도 그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금을 못 펴도록 했으니 참으로 멋진 妓生이었다. 내노라 뽐내는 뭇 사대부 男性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 평생 살다간 통쾌한 人生이었다.
그 잘났다는 사내놈들이란 당대 제일의 멋을 안다는 士大夫들로서 고관대작의 벼슬아치, 고매한 學者, 높은 道學者, 道통한 스님들 비롯해서 영웅호걸, 詩人 墨客이며 풍류가객 등, 名士를 총 망라해서였다.
♥황진이가 좋은 배필을 얻어 一夫從事를 못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웃에 열여섯 살 난 소년이 황진이를 戀慕하여 相思病으로 죽었다. 일러 짝사랑이 死因이었다. 사랑이란 예부터 我戀爾愛라 해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연모한다 하여 戀愛라 했는데, 이웃 총각이 황진이에 대한 戀慕의 정을 불살라 태우지 못하고 상사병이 되어 앓다가 세상을 하직했으니 이것이 어찌 총각의 잘 못이겠는가.
그 少年의 管 위에 황진이의 속적삼을 얹고서야 喪輿가 움직였다. 그것은 황진이의 속살이 닿았던 옷을 통해서 死者와 生者이긴 하나 間接的인 交感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황진이는 총각의 魂靈과 結婚을 한 셈이다
한사나이가 황진이로 해서 세상을 떳다는 것만으로도
만천하의 시선(視線)과 죄책감(罪責感)에서 헤어나기 어려우며 ... 이런 사건 이후 다른 사람을 만나 혼 할 만큼 뻔뻔스럽지가 못했던 것이다.
처음 기생이 되기 전에는 이렇다하는 집안의 자제와 청혼이 있었다. 막상 결정의 단계에 들면 빼어난 미모를 흠잡아 미인박복) 이라 하여 퇴짜 아닌 퇴짜를 맞았다.
아버지 황 진사進士와 어머니 진현금(陳玄琴) 사이의 가계를 까탈로 퇴짜를 맞기도 했다.
그래서 황진이는 기방을 찾게 되었고 스스로 머리를 얹고 妓籍(기적)에 올랐다. 그러나 다른 기생들처럼 마구잡이로 살 수청을 들거나 속사랑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보다는 조물주는 이렇듯 재예才藝와 미모의 황진이를 이승의 어느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 것을 시샘하며 집구석에 들어 앉혀 현모양처로 묻혀 있게 하기에는
심이 차지 않았던가.
훨훨 밖으로 뛰쳐나가 때로는 뭇 사나이들을 농락하고 때로는 내 노라 하는 남정내의 애간장을 태우게 했는지도 모른다..... 옛 고려 서울 송도기생 황진이는 길재의 “ 오 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오니”....
李穡(이색)의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물러라......
원천석의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도滿月臺 수초 水草로다....
와 같은 고려 高麗 유신들의 회고가 懷古歌 무색할 애수(哀愁)의 회고懷古의 시詩를 남겼다.
눈 속에 만호장안 옛 빛이 새롭고 ( 雪中前朝色)
차가운 종소리는 쓸쓸도 하다
(寒鐘古國聲) 시름 겨워 남루에 홀로 기대니 (南樓愁獨立)
흩어진 성곽 위엔 저녁연기만. (殘廓暮煙生)
황진이 “송도를 노래함“ 全部 고려의 유신도 아닌,
또한 고려가 망亡한 지 몇 백년이 흐른 뒤 아무 연관도 없는 황진이가 읊은 심회를 어찌 기녀의 시詩 라고 貶下(폄하)하것노. 눈이 하얗게 내린 겨울, 석양이 내려 앉는 남루에 올라
고려의 옛 서울이었던 송도를 회고(懷古)하며 애수(哀愁) 싸인 황진이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청산리 벽게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말라 일도 창해 하면 돌아오기 어려외라 명월이 만건곤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왕가의 종친宗親인 이창곤(李昌坤)은 벽계 군수를 비롯하여 외직에 있으면서도 평생 외도外道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을 만큼 도도하였다.
그가 사또시절 수청드는 관기의 치마 끝 한번 건드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황진이는 이런 오만한 위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벽계수의 무릎을 꿇리고 싶은 치기가 발동하여 읊은 詩. 청산리 벽계수야... 이다....
은가루를 뿌린 듯 가득한 달빛은 이미 천심天心을 지나 기울고 있는데, 명월明月의 애절한 노래 소리를 듣는 벽계수 사또 이창곤의 구곡간장은 어떻게 녹았을까.
황진이의 띠어난 음색(音色), 월색(月色), 수색(愁色)을 자아내는 데야 벽계수인들 어쩌겠는가.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흘러가니 옛물이 있을 손가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더라.
자연과 흐르는 물을 통하여 인생무상(人生 無常)을 노래했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요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그녀가 교류했던 당대의 이렇다 할 벼슬아치요,
선비며, 풍류객들, 두자미 같은 풍채와
이태백 같은 시재詩才에 소동파의 문재文才를 갖췄다는 저 유명한 부운거사( 浮雲居士) 김경원(金慶元)을 비롯하여
직제학, 청정, 한성漢城 부판윤을 지낸 양곡 소세양,
성리학 태두 서경덕, 30 년 벽면 참선한 지족암 만덕선사(禪師), 벽계군수를 지낸 콧대 높은 벽계수 이창곤, 외 많은 영웅호걸들과 한없는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한 지아비를 섬기지 못하는 원천적 그리움과 서린 한恨으로 가슴은 항상 출렁이었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별의 아픔으로 눈물이 마를 새가없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이 못 견디게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하며, 때로는 독수공방에서 외로움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측은한 여인이기도 했다.
예쁜 아내 둔 남정네, 한 시도 마음 놓을 날 없고,
잘난 남편 둔 여인네,
평생 눈물 마를 날 없다고 했다.
아름답고 화려했던 세월은 간데 없고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올 줄은 미쳐 몰랐다.
지금도 여자 나이 35 살이면 서비스업에서 쫓겨나는 금간 나이인데. 고려 기생이란 원래 21 살이면
노기(老妓)라 하여 퇴기(退妓)되는 법,
급기야 시름시름 앓다가 곡기를 끊으니 우리역사
기계(妓界)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명기도 이렇게 일장춘몽으로 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