遮日
박용래
짓광목 차일
설핏한 햇살
四, 五百坪 추녀 끝 잇던
인내 장터의 바람
멍석깃에 말리고
도르르 장닭 꼬리에
말리고
山그림자 기대
앉은 사람들
황소뿔 비낀 놀
시골 5일장의 파장 모습을 종결어미 하나 쓰지 않고 선명하게 그려냈다. 설핏한 햇살이 장닭 꼬리에 도르르 말리는 평화로운 모습이 그림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시 전편에 박용래 시인의 간결한 성품이 잘 나타나 있다.
1978년 12월 말경의 어느 날이었다. 신경림(1935년생)이 근무 중인 잡지사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이문구(1941년생)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용래(1925년생) 선생이 상경하여 꼭 만나야겠다고 하니 어푼 나오라는 것이었다. 박용래는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고혈압으로 퇴직한 뒤 詩作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 동안 전화나 엽서로 안부를 주고받은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신경림은 박용래를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침 퇴근 무렵인데다 가까운 곳이라 신경림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중국집 뒷방으로 들어가자 박용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신경림의 손을 부여잡으며 울기부터 했다.
“글쎄, 진작부터 불러달랬는데두 문구 저놈이 이제야 전화를 넣은겨.”
박용래와 이문구는 이미 불콰하게 주기가 올라 있었다. 초대면인 10년 연하의 후배를 그 정도로 반길 만큼 박용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창때의 박용래는 남다른 배포도 있었다. 해방 전 박용래가 조선은행 본점에 근무할 때였다. 만주 어느 지점으로 출장을 갔는데, 왜놈들이 항복하고 소련군이 진주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조선은행권을 화물열차에 가득 싣고 상경했다. 박용래의 무용담은 온 신문의 1면을 장식하여 한동안 큰 화재가 됐었다. 술자리는 자정까지 이어졌지만, 박용래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툭하면 우는 바람에 변변히 이야기도 못 나눈 채 끝나버렸다. 그것이 박용래와 신경림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박용래는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 본점과 대전지점에서 근무했다. 해방이 되자 은행을 그만두고 호서중학교‧보문중학교‧철도학교 등에서 상업과 부기를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송악중학교에 근무할 때는 국어를 가르쳤다. 고혈압으로 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 대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이때 이문구가 자주 찾아와 시담을 나눈 일화는 몇 년 전 이문구 편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집안일도 시인에게는 좋은 소재였던지 <오류동의 동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로 재탄생했다.
이문구가 쓴 「박용래 略傳」에 의하면, 박용래가 자주 눈물을 흘린다고 사뭇 나약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한 번은 이문구가 옥천에 사는 한 중견 시인과 논산으로 박용래를 찾아갔다. 워낙 애주가들이라 만나자마자 술집으로 향했다. 술이 몇 순배 돌기를 기다려 이문구가 용건을 꺼냈다. 옥천 사는 이 친구 집에 가는 길인데 별일 없으면 함께 가실 수 있겠느냐고.
“아, 옥천이라면 별일이 있더람두 젖혀놓고 가야재. 정지용 시인 고향 아닌개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옥천의 중견 시인이 촐싹 끼어들었다.
“정지용이가 옥천사람인가유? 난 그것도 몰랐네.”
‘쨍그렁!’
중견 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용래의 술잔이 벽으로 날아가 박살이 났다.
“문구 너, 이런 자식을 친구라고 데리구 다니냐! 정지용 선생이 제 고향 분인 줄도 모르는 이딴 자식이 시인이라구? 뭐? 정지용이가 옥천사람인가유? 정지용 선생이 니 친구냐!”
박용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술집을 나갔다. 이후 이문구는 세 번이나 논산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빈 다음에야 박용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때마다 밤을 새워 술대접을 했음은 불문가지다.
「박용래 略傳」 얘기가 나온 김에 재미없는 신경림의 해설은 젖혀두고 이문구의 구수한 문장 하나만 감상해보자. 논산에 있는 박용래의 생가 주변을 묘사한 글이다.
<허름한 제재소와 물엿 가게가 있어 마차꾼‧손수레꾼‧지게꾼이 온종일 두런두런 해동갑을 하고, 짐꾼들의 요기를 돕는 옴팡간 주막이 하나, 나귀랑 노새랑 황소랑 하품 섞인 투레질이 그치지 않던 곳.>
산문이로되 정지용의 <향수>처럼 운율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멋들어진 문장 아닌가! 마차와 손수레와 지게를 받쳐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꾼들의 담소하는 모습을 ‘온종일 두런두런 해동갑’을 하는 것으로 묘사한 문장을 이문구 말고 누가 구사할 수 있단 말인가!
젊은 시절의 박용래는 강경의 스타였다. 재학 중에는 대대장에다 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강경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자마자 조선인으로서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조선은행에 취직했으니 왜 아니 그러했겠는가.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용래는 바로 손 위인 홍래 누이를 무척 따랐었는데, 시집간 누이가 첫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죽어버렸다. 박용래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박용래는 황산나루를 찾아가 강 건너 홍래 누이가 시집가 살던 마을을 지켜보다 돌아오곤 했었다. 누이를 그리며 지은 시도 많다.
담장
박용래
오동꽃을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쳐진다.
잊었던 무덤 생각난다.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옆 가르마
젊어 죽은 홍래 누이 생각이 난다.
오동꽃 우러르면 담장에 떠는 아슴한 대낮
발등에 지는 더디고 느린 遠雷.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 홍희표 교수는 가장 별난 방법으로 박용래를 기리고 있다. 그가 펴낸 「눈물점 박용래」라는 시집은 박용래를 소재로 삼았거나 그의 시를 패러디한 시로 구성되어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일한 형태의 시집이 아닌가 싶다. 홍희표는 생전의 박용래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으며, 말년에는 가장 자주 만난 사이이기도 했었다.
蛇足. 차를 몰고 어딜 다니다 보면 목원대학교처럼 생경한 이름의 대학교 간판을 마주칠 때가 종종 있다. 10여년 전, 한 ‘문하생’과 함께 해돋이를 보러 정동진을 찾아가던 길이었다. 영동고속도로를 지나는데 도로변에 세워놓은 한 대학교의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대학교가 세계에서 학생 수가 가장 적대여.”
“어머, 그래요? 학생 수가 몇 명인데요?”
“대학교 이름에 학생 수가 씌어 있잖아.”
간판을 살펴보던 ‘문하생’이 손바닥으로 내 오른편 어깨를 찰싹찰싹 때리며 자지러지게 웃어재꼈다. 학교 이름은 세명대학교였다. 내 길동무에게 ‘문하생’이란 이름을 붙여준 건 양평의 박상철 친구였다. 정동진에서 올라오다 찾아가 한잔 걸치는 자리에서였는데, 그 뛰어난 순발력은 그가 천리타향에서 사업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개별적으로.
첫댓글 나도 잘 우는데...
그러면 시심이 떠오를까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