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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 금산사 단풍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과 김제시 금산면 경계에 있는 모악산 아래 위치한 금산사 전경
💗 INFINITE LOVE - Ernesto Cortazar 💗
모악산과 금산사
높이 794m. 노령산맥의 말단부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 선각산·국사봉 등이 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모악(母岳)이라고 했다.
능선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사면이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 사면에서 발원한 계류는
구이 저수지에 흘러든 뒤 삼천천을 이루어 전주시로 흐른다.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는 두월천·원평천은 동진강에 흘러들며,
김제 벽골제의 수원이 되기도 한다.
기반암은 중생대 쥐라기의 편마상화강암·석영반암·대보화강암 등으로 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에 금이 많이 생산되어 금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주변에는 사금광산(砂金鑛山)이 몇 군데 있다.
또한 이 일대는 계룡산의 신도안(新都安),
풍기(豊基)의 금계동(金鷄洞)과 함께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이라 하여 좋은 피난처로 알려져 있다.
한때 수십 개의 신흥종교 집단이 성행했으며,
미륵신앙의 본거지로서 용화교 등이 일어났다.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한국 거찰의 하나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이 있어 호남 4경의 하나로 꼽힌다.
1971년 12월 이 산과 주변지역 일대를 포함한
총면적 42.2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서쪽 기슭에 금산사가 있으며, 그 경내에는
금산사미륵전(국보 제62호)·
노주(露柱 : 보물 제22호)·석련대(石蓮臺 : 보물 제23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
5층석탑(五層石塔 : 보물 제25호)·
석종(石鍾 : 보물 제26호)·
6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 보물 제27호)·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대장전(大藏殿 : 보물 제827호)·
석등(石燈 : 보물 제828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또한 금산사의 출입구이기도 한 홍예석문(虹霓石門)은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절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귀신사(歸信寺)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제826호)·
3층석탑(三層石塔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 등이 있다.
그밖에 대원사·심원암·수왕사 등도 자리하고 있다.
봄 벚꽃, 가을 감나무 숲이 운치를 더해주며,
금산사-심원암-산정-수왕사-원기리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어
관광객과 등산객이 많이 찾아온다.
일대에서는 10월에 민속축제인 김제 벽골문화제가 열리며,
여관을 비롯한 숙박시설과 편익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전주와 김제 중심시가지에서 금산사까지 시내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동쪽 산록으로 전주시와 완주군을 연결하는 국도가 나 있다.
<금산사사적>에 따르면 금산사는 599년 백제 법왕 때 자복선사가 창건한 후,
진표율사가 766년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이어 진표율사는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하고, 금강산 발연사도 개창하였다고 한다.
금산사는 조선후기까지 전라도를 대표하는 절로서의 위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위봉사의 말사로 강제로 배속되는 등 사세가 위축되었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 다시 그 위격을 회복하였다.
조계종 17교구 본사인 금산사는 1,4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많은 국보급 문화재와 전각들이 경내에 즐비하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송광사 다음이라고 한다.
또한 후백제 말기 견훤이 아들에게 유폐된 곳이기도 하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을 후계자로 삼자
장남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검은 물론 견휜도, 후백제도 모두 몰락했다.
견훤을 비롯해 역사에서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한 인물들은 많았다.
그러나 모두 미륵이 아니었다.
57억 년 후에 오신다는 미륵이 그렇게 빨리 오실리 없다.
5천 년도 까마득한데, 57억 년 후라면 가늠조차 안된다.
57억 년은 영원이란 말로 들린다. 영원히 미륵은 오시지 않으니,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부처가 되란 뜻이다.
금산사 들어가는 길의 단풍
개화문
주차장에서 올라가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개화문
금산사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을 차례로 지나면 거대한 보제루에 닿는다.
보제루 아래쪽을 지나면 대적광전이 보인다
금산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
보제루를 지나면 바로 마주치게 되는 풍경
대적광전, 방등계단, 미륵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지나면 우측에 미륵전을 두고
정면으로 금산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을 마주하게 된다
대적광전은 정유재란 후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복원 중창할 때 지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서 보물 476호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986년 화재로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취소되었으며,
현재 이 법당은 1990년에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금산사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다섯 분의 불보살을 모신 대단히 큰 전각이다.
대적광전은 본래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으로
이곳에는 법신비로자나불, 보신노사나불, 화신석가모니불 등 삼신불만을 봉안했으나,
정유재란 후 도량을 재건하면서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모시고 있던
여래(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불)와
보살(대세지보살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을 다시 조성하여
모두 한자리에 봉안하고, 현액을 대적광전으로 바꾼 것이다.
대적광전 앞의 단아한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석련대(보물)는 불상을 올려놓는 연꽃 모양의 받침대이다.
둘레가 10m가 넘으니, 모셔졌던 불상의 크기도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금산사의 상징인 미륵전
거대한 보제루를 지나면 널따란 절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마주 바라다 보이는 정면에는 금산사의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광장 우측 끝에는 금산사 랜드마크 미륵전이 우뚝 솟아있어 시선을 잡아 끈다.
미륵전 왼쪽으로는 방등계단과 오층석탑 그리고 부처님 진신사리탑인 석종 등이 있다
현판 명칭이 층마다 각기 다른데,
1층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으며 모두 미륵 세계를 뜻한다.
▲ 금산사 미륵금불이 봉안된 미륵전(국보 제62호)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미륵을 건립한 이후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와 금강산 발연사(鉢淵寺)에도 미륵을 세웠다.
이렇게 그가 미륵을 세 곳에 모신 이유는,
미륵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지상에 하생(下生)하여
3회의 설법을 한다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 때문이라 한다.
이 세 차례에 걸친 설법 모임을 ‘용화삼회(龍華三會)’라고 부르고,
미륵을 따라 그 설법에 참여하고자 발원(發願)하는 것이 바로 미륵하생신앙이다.
▲ 금산사 미륵전 미륵장륙상
이 미륵불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7년 미륵전을 중건할 때 다시 만들어졌는데,
이때 미륵불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에 도금을 한 것이며
‘山’ 글자 형태의 삼존불로 봉안되었다.
금산사 미륵전은 겉으로는 3층이지만
내부는 위아래가 모두 통하는 1개의 통층(通層)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3회의 설법을 하는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장이 곧 금산사 미륵전임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미륵전 2층에 걸린 현판이 용화지회(龍華之會)인 것도 이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미륵전 내부는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깜짝 놀랄 만큼 웅장한 높이 11.8m의 거대한 미륵장육존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미륵불 좌우의 협시보살인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도
높이가 8.79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보통 미륵불은 보은 법주사 청동미륵대불,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처럼
실외에 입상으로 조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좌상도 아니고
입상을 그것도 이렇게 압도적인 크기를 봉안한 경우는 처음 본다.
아마도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상황을 상정한 것 같다.
진표율사가 미륵하생신앙에 따라 미륵을 봉안하였으므로,
훗날 정유재란 때 소실된 금산사의 미륵전을 재건할 때도
미륵하생신앙의 표상(表象)이 미륵전에 그대로 나타나게 했다고 한다.
현재 금산사에 있는 미륵금불은 1934년 원인모를 화재로 불에 타서
(미륵전과 옆의 두 불상은 타지 않았음) 1938년 당시의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다시 조성되어 새로 모셔진 것이다.
그 후 양 옆으로 두 구의 보살상이 추가로 봉안되어
전체적으로 ‘出’ 글자 형태가 되었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부처에 이어 다음 세상을 구원할 붓다로,
현재는 보살이지만 이미 부처로 내정된 상태다.
하지만 미륵불은 56억 7천만 년 후에 온다고 했다.
'미륵'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믿음이 있다.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를 꿈꾸고 세운 것이 미륵사였고,
신라에서도 진흥왕이 전륜성왕 (이상적인 제왕)이라 칭하며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했는데 이 역시 미륵의 세계를 꿈꾼 것이다.
통일 신라 경덕왕 때 두 개의 해가 뜬 이변이 일어나자
월명사가 도솔가를 지어 불러 물리쳤다. 도솔은 미륵을 뜻한다.
금산사 미륵전(국보)은 국내 유일의 3층 목조 건물로,
건축학적이나 미학적으로 한국 건축사를 대표하는 건물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미륵전 바로 옆 방등계단과 오층석탑
미륵전 북쪽의 높은 대지에는
양산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모습의 방등계단(보물)이 있다.
미륵이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죽은 뒤 도솔천에 태어나 그곳에서 미륵과 함께 56억년을 함께 보내다가
지상에 내려와 설법에 참가하겠다는 신앙도 생겨났는데,
이를 미륵상생신앙(彌勒上生信仰)이라 한다.
금산사 미륵전 바로 옆에는 이것을 나타내는 건축물이 있으니,
바로 방등계단(方等戒壇)이다. 즉 미륵전이 미륵하생신앙에 의거하여
용화삼회의 설법장을 상징하여 건립된 것이라면,
미륵상생신앙에 의거하여 미륵이 하생할 때까지 중생들이 거주할
도솔천궁(兜率天宮)으로 건립된 것이 바로 방등계단이라는 것이다.
미륵상생신앙의 표상답게 미륵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방등계단은
상하 2개의 기단(基壇)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층 기단은 길이 8.5m, 높이 0.6m이고,
하층 기단은 길이 12.5m, 높이 0.8m이다.
방등계단 올라가는 길
방등계단의 중앙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石鐘) 모양의 탑이 세워져 있다.
석종 은 한 장의 판돌 위에 안치되어 있는데,
이 받침 판돌의 네 모퉁이에는 각기 사자가 조각되어 있으며,
석종의 정상에는 아홉마리의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보주 석을 얹어 상륜부를 완성하였다.
석종 정상에 조각된 아홉 마리의 용은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홉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 시켰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석종 앞에는 석동을 세우는데, 이곳에는 오층석탑(보물)을 세워 놓았다.
기단 주변에는 많은 물형(物形)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불보살상이나 신장상이 아니라 천인상(天人像)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금산사 오층석탑(보물)은 고려 초 조성되었으며, 원래 9층이었지만 현재 5층으로 남아있다.
금산사라는 절은 단순히 미륵상만 모셔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도솔천과 용화삼회라는 구체적인 미륵의 표상까지 갖춘 사찰이었다.
상제님께서는 혼란한 세상을 극복하고 중생을 제도할 미륵을
도솔천에서 기다리겠다는 민중들의 소망,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 땅에 출세하여 용화삼회를 열 것이라는 것을 믿는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이 깃든 이곳 금산사에 임어하셨던 것이다.
금산사 적멸보궁
금산사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직접 예불을 드리기 위해 세운 전각이다.
건물 내부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방등계단의 석종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범종각
원통전
원통전은 '주원융통(막힘없이 두루 원만하게 통한다)'의 준말로
11가지 다른 모습의 십일면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
금산사 나한전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수행자인 아라한을 모신 전각으로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불단 가운데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양쪽으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미래불인 미륵보살로 구성된 삼존상을 봉안하였다. 삼존상의 양옆에는 아난과 가섭이 있다.
대장전
금산사 경내의 단풍
금산사 당간지주는 현존하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평가받으며, 진표율사 때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