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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곤란합니다
글쓴이: 우주가람
*스크롤압박 심합니다. 전 분량 빵빵한 여자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었잖아요^.^ㅋ
<16-1>
“조금 기분 나쁜일 있었어요.”
뭔데? 라고 묻는 듯한 수빈의 눈이 느껴졌지만 찬은은 그저 어깨 한번 으쓱여보이는것으로 대답을 끝
냈다. 그냥 그런 일 있었다구요, 라고 결말을 내는 찬은을 보며 수빈은 싱거운 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실 웃음을 흘리며 자신이 풀고 있던 문제로 눈을 돌리는 찬은의 눈은 여느때처럼 부드러운 흑빛 가루
가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흑요석, 어떻게 그 남자는 그렇게 지독하게도 수빈의 눈을 닮아있었을까.
어떻게 그 남자는 그 눈안에 수빈을 담고 있었을까.
마치 자신의 것을 노리는 하이에나 새끼 한마리를 보고 온 듯 하다. 만약 그것이 다가온다면 자신을 망
설이지 않고 그것을 물어뜯을 것이다.
“하나 먹어.”
시큰둥한 말투와 함께 카스테라 하나를 던져주는 저 남자의 미소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생각은 전혀 없
었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내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빼앗기지 않아.’
*
평소와 같은 시간에 학교에서 나왔지만 이젠 완전히 가을이 되어버렸는지 밤공기가 꽤나 차갑다. 추위
를 많이 타 교실에서부터 사내녀석들의 냄새나는 마이라도 뺏어입고 있던 수빈은 뿔뿔히 흩어져야 될
때가 되자 그냥 가지고 내일 갖다주시라는 남자들의 말에도 꿋꿋히 다 나눠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도도하게 옷은 다 돌려준주제에 학교 운동장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수빈을 보며 찬은은 소리없이 웃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왜 이
렇게 귀여운면이 많은건지. 맘같아서는 꽉 안고 걸어가고 싶었다. 수빈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던 찬은
은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를 쳐다보며 피식피식 웃어댔다.
그 시선을 느낀 수빈이 후드에 자신의 턱끝을 묻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뭘 봐.”
“아잉, 그냥 좋아서요.”
“시끄러.”
추워서 입도 많이 열었다 닫았다 하기 싫다는 투가 팍팍 느껴져온다. 그래서 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거지 이 남자. 꼭 비맞아 짜증난, 추운데도 춥지 않은척 하며 걸어가는 도도한 검은
고양이 같았다. 추워보여서 안아주려하면 발톱으로 사납게 긁고 갈것만 같은. 찬은이 계속 웃어대자 후
드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수빈이 죽어도 손은 빼기 싫었는지 어깨로 찬은을 받아버렸다.
졸지에 가슴팍을 맞아버린 찬은은 윽, 하고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그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
다. 수빈이 입술을 빼죽대며 말했다.
“시끄럽다고 했지.”
“추워요?”
“응.”
추운데 어쩌라고, 나 추워하는거 눈에 안보여서 그렇게 묻는거냐, 라는 듯한 대답에도 찬은은 바보같이
웃어대며 수빈 앞으로 다가갔다. 자신보다 키가 큰 찬은이 앞을 가로막자 후드에 얼굴을 파묻어버릴 듯
하며 걸어가고 있던 수빈의 눈썹이 짜증스럽게 꺾였다.
“뭐.”
“에이,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요.”
찬은스러운 분위기에 수빈은 또 말려버렸다. 정말 가만히 있으란다고 서 있는 자신도 웃긴다. 수빈이
그걸 느끼고 찬은에게 꺼지라고 말하려할땐 이미 찬은은 미션을 완수한 후였다.
“짜쟌! 이제 좀 따뜻하죠?”
“...죽고싶은거지?”
가만히 서 있는 수빈의 후드 모자를 뒤집어 씌우고는 줄까지 쫙쫙 땡겨 꼬마가 우비를 입은 것 처럼 묶
어놓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 눈꼬리만 올리는 수빈을 보면서도 찬은은 흡족했다. 노란 후드가 수빈에게
착 달라붙어있는 걸 보자니 왠지 흐뭇해져서 찬은은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그건 절대 비웃음도 혹은
놀리는 웃음도 아니었다. 단지 그냥 좋았을 뿐이다. 그저 새롭게 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저도 모르
게 나오는 웃음이었다.
앞에서 싱글벙글 웃어대는 찬은을 바라보는 수빈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 자식이 죽고싶
나.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살짝 들여올려진 수빈의 다리에 그 침묵은 깨졌다.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지르며 찬은은 자신의 중심부를 감싸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치의 망설임없
이 수빈이 뻗은 발에 정확히 까여진 아랫도리에 눈물이 찔끔날 정도였다. 젠장, 발톱으로 긁히는 것까
진 예상했었지만 이렇게 까버릴줄은 몰랐다. 계속해서 우는 소리하며 주저앉아있는 찬은을 일어나 내
리깔아보고 있던 수빈이 후드 모자를 짜증스럽게 벗어내며 말했다.
“아, 실수. 손으로 끈을 푸른다는게 다리를 뻗어버렸네.”
“시...실수. 아하하, 실수 좋죠. 실수 사랑하죠.”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내 대답하는 찬은의 머리를 성의없이 쓰다듬어주며 수빈이 얄밉게 말했다.
“그건그렇고 나 추우니까 마이 좀.”
그리곤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쭈그려앉아있는 찬은의 상체에서 거침없이 마이를 벗겨내갔다.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찬은이 코맹맹이 소리로 자신을 두고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수빈에게 소리
쳤다.
“난 배고프니까 야참 좀요!”
빽하고 소리친 찬은의 목소리에 잠시 뒤돌아서서 그를 보고 있던 수빈이 피식하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저 자식은 말도 안통하고 주먹도 안통하는구나. 분명 아직까진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을텐데
도 기어코 일어나 자신에게 걸어오는 녀석을 보며 수빈이 대답해주었다.
“10초안에 오면.”
어이구야, 저 놈 뛰는거 봐라.
결국 한대 까이고 마이뺐기고야 찬은은 수빈에게서 야참찬스를 부여받았다. 여느때와같이 수빈의 집
밑쪽에 버스를 타고 와 걸어 올라가는 길에 찬은이 시린 코를 검지로 비비고 있는데 수빈이 넌지시 물
어왔다.
“추워?”
또 어떻게 사나이가 가오가 있지 춥다고 말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머릿속과 다르게 입은 제멋대로 대답
하고 있었다. 이놈의 입, 이놈의 입.
“추워요.”
“응. 계속 추워해. 아, 고요한도 온다니까 걔보고 뭐 따뜻한거 사오라고 할까?”
“에? 요한형은 왜 와요!”
마이 뺐길때고, 거기 까일때고 소리 한번 안치던 녀석이 지금은 죽을상을 하며 물어온다. 요상하게 일
그러지는 그 얼굴이 너무 웃겨서 한번 풉 웃어버린 수빈이 들고 있던 자신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
으면서 대답했다.
“안돼. 둘만있으면 넌 달려들거잖아.”
“에에에! 그런게 어딨어요! 아니 물론 그렇지 않겠다고야 말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닌 말은 못하는 찬은을 보며 수빈은 키득댔다. 어린애다. 얼굴에 표정이 바뀌는게 전부 다 보여. 하지
만 그런 솔직한 투명함이 싫지가 않아서, 도저히 밀어내고싶지가 않아서 옆에 두게된다. 솔직하자면 그
런 이유보다, 이 녀석이 옆에 있으면 남서우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 바보같은 웃음을 지어대는 ‘개’ 같은
녀석과 투닥대다보면 남서우가 생각나지 않아서 좋다. 물론, 이 녀석이 하는 그 어떤 말이 완벽하게 남
서우와 일치될때가 있긴하지만 그건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가다니까. 참을만하다.
“것봐. 그러니까 안돼. 고요한 부르고 들어와서 야참 먹을래 아니면 고요한 가라그러고 너도 갈래?”
수빈의 칼같은 질문에 잠시동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물론 수빈은 그 모습에 ‘안어울려. 그만해‘라
고 말해주었다, 불만을 표시하던 찬은이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요한형 부르고 나도 들어갈래요.”
“응, 좋은 선택이야.”
별로 억양이 섞이지 않은 수빈의 말투와 함께 어김없이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후드
속에 계속 집어넣고 있어서인지 따뜻한 그 손이 머릿속을 헤집자 왠지 방금전 조금 토라졌던 기분도 싹
다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자체가 이 사람이 아직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자리에 만족했다. 게다가 이렇게라도 수빈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게 어디란 말인가.
‘자고로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지.’
절제하는 제 자신을 기특하다는 듯 칭찬해준 찬은은 수빈의 뒤를 따라 2층집인 수빈의 집으로 따라 들
어갔다. 밖에선 참 많이 보던 집이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아니 안에 들어와본건 처음이었다. 왠지 조금
설레기까지 하는 마음이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러 온, 아니 유적발굴하러 거대한 동굴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와, 역시 넓네요.”
찬은의 감탄사에도 수빈은 가타부타 별 말 하지 않고 소파에 던져져있던 리모콘을 찬은에게 던졌다. 가
볍게 리모콘을 받아든 찬은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수빈이 말했다.
“티비 보고있어.”
그러면서 방으로 들어가는 수빈의 뒷모습을 방문이 닫힐때까지 끝까지 바라보았다. 스토커같아. 자기
자신을 스토커같다고 표현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후드를 벗으며 살짝 보인 수빈의 허리선 때문
이었다. 이건 뭐 변태도 아니고 남자 허리 조금 봤다고 정신 못차리다니. 찬은은 리모콘으로 자신의 이
마를 톡톡 쳤다.
“아아, 욕구자제 퀘스트에 발을 들여놓으신걸 환영합니다, 유저님.”
방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찬은은 마른 입술에 혀를 문지르며 말을 정정
해야만 했다. 퀘스트가 아니라 고문실이었구나. 이래뵈도 자신은 피끓는 청소년이 아니었던가. 찬은은
결국 리모콘으로 티비를 켜곤 최대한 방쪽은 보려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참을 인자 세개면 살인도 막는다 하지 않았던가. 참을 인자 세개면 수빈에게 미움을 받지도, 다시 한번
그 곳을 까일일도 없어진다. 참자, 참자, 참자. 찬은이 그렇게 리모콘으로 공중에 참을 인자를 새기고 있
을때 방문이 열리며 수빈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먹을래.”
무심결에 리모콘을 등 뒤로 감추며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본 찬은은 긴장해 삼키고 있던 침이 목
에 걸려버렸다. 켈록대며 얼굴이 붉어지는 찬은을 보며 ‘쟤 또 왜저래.’라는 표정을 망설임없이 지어보
이는 수빈이 보였다. 숨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찬은의 입은 좋아죽겠다는 듯 벌어져있었다.
젠장. 무려 삔이었다! 휴일에 집에 놀러가면 누나가 항상 내리고 있던 앞머리를 하나로 찝어놓던 왕 삔
이었다. 앞머리가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도 이마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훤하게 드러
내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조금 긴 듯한 앞머리를 거슬린다는 듯 불어댔던 수빈이었는데 저렇게 깐 모습을 보니
자기 속이 다 시원했다. 사랑스럽게 까여진 앞머리에 후드안에 입고 있었던 하얀 민자 티에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을 살짝 내려입은 모습이 얼마나 자극적이었던지 입조차 닫지 못하고 보는 찬은에 비해 수
빈은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싶은 눈치였다.
“삐...삔이네요.”
“응. 앞머리가 너무 길었어.”
말하는 도중 흘러나온 한가닥의 애교머리를 손가락으로 집어 다시 삔에 꼽아넣는 모습을 보며 찬은은
코를 부여잡았다. 젠장. 귀엽잖아. 뭐라고 말은 못하고 어버버버거리고 있는 찬은을 보며 수빈이 다가오
며 물었다.
“뭐야. 뭐 먹을거냐고.”
“잠깐! 자자자자잠깐! 스톱!...이라고 했잖아요.”
“응?”
손짓 발짓을 다해가며 수빈이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보려던 찬은의 눈물어린 노력은 단
번에 뭉개져버리고 말았다. 휘적휘적 걸어온 수빈은 찬은의 옆쪽에 앉아 그가 들고있던 리모콘으로 채
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뉴스는 왜 보고있냐.”
차마 그 앞에서 ‘자제심을 높이기 위해 그랬습니다.’라곤 말 못한다. 찬은은 아직도 조금 붉은 얼굴을 손
으로 식히며 대답했다.
“...구, 구술 면접 준비해야죠.”
“수시 면접들 다 끝나지 않았어?”
정말 악의없이 툭 던지는 수빈의 말에 찬은은 할말을 찾지 못했다. 젠장, 그냥 사회성을 높이기 위해서
라고 대답할껄. 찬은이 대답하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바보같이 앉아있자 쇼프로그램 하나를 찾
아 튼 수빈이 고개를 돌리며 픽 웃어보였다.
“둘러대려면 좀 제대로 둘러대.”
...알고 있었구나. 어쩔수 없이 찬은은 낑낑대며 수빈의 옆으로 더 다가와 애교작전으로 무마하기로 했
다. 옆에 있는 수빈의 하얀 팔을 덥썩 잡아 팔짱을 끼며 찬은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수빈의 표정이 황당
하다는 듯 일그러졌지만 그 표정하나로 애교를 멈출 찬은은 아니었다.
“아잉... 저 오믈렛 먹고싶은데요.”
“내가 분명히 애교 한번만 더 부려대면 그 입을 찢어버린댔지.”
수빈은 자신이 한말은 꼭 지켜야한다는 듯 손가락으로 찬은의 양 볼을 죽 늘어뜨렸다. 보기좋게 그을려
진 녀석의 커피빛 피부가 끝을 모르고 늘어난다. 사실 조금만 땡기고 말 생각이었는데 죽죽 잘 늘어나
는걸 보니 왠지 재미있어져서 수빈은 조금 더 늘려보려했다.
“아하어(아파요.)”
징징대던 찬은도 수빈의 얼굴에 뜬 장난스러운 웃음에 징징거림을 멈췄다. 그리곤 제 두손을 올려 수빈
의 손목을 잡고 억지로 끌어내렸다. 아아, 볼이 아프지만 그것보다 더한 문제는 아랫도리에 있었다. 제
손이 끌려 내려오자 쯧, 하고 혀를 차는 수빈이 보인다. 찬은은 왠지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워서 ‘자제’를
외치고 있던 이성을 놓아버릴뻔 했다.
“이렇게 둘만 있는데 왜 이렇게 무방비해요.”
아차, 하는 표정이 보이는 수빈에게 찬은은 킥킥웃으며 입술을 들이댔다. 두 손 모두가 잡혀있는지라
그 짧은 순간 어떻게 반항조차 못 하던 수빈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본다. 맘 같아서야 여기서 그대
로 자빠트리고 싶었지만 참겠다. 원하는대로 뽀뽀를 한뒤 스르륵 손을 놔주는 찬은을 보며 수빈은 뭔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찬은도 별말 하지 않고 수빈의 침묵에 동참했다. 눈 안에 찬은의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저 말
끔한 눈동자안에 담긴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 입술로 시선이 내려간다. 방금 마음만 먹었더라면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않았던 저 입술을 본다. 아아, 미쳤지 윤수빈. 미쳤다고 그
짧은 입맞춤에 아쉬워해?
이 아이는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선을 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그런 아이를 내칠 자신 없었다. 이제
야 알겠다. 자신은 이 자식을 절대 밀어내지 못한다.
“...우유나 사와.”
“한번 나가면 문 안열어줄것 같아서 못 나가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쿠션이 찬은의 머리에 강타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끝까지 가기 싫다는 불쌍한 표정을 짓는 찬은의 눈 앞에서 문을 닫은 수빈은 그대로 문에 기대섰다. 머
리끝에 불이 난것 같다. 얼굴이 뜨거웠다. 끌린다. 이상하게 끌려댄다. 정말 돌아버릴 노릇이야. 저 아이
의 바보스러운 직선이 사랑스럽다.
“미쳤군, 윤수빈.”
나가기 싫다며 종알거리는 입술에 짧게 입맞추고 싶었다. 그래, 미친게 분명하다. 젠장.
<16-2>
우유를 사가지고 수빈의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길에서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집 앞에서 들어가지 못했는데 지금 이렇게 들어가도 되는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어쩔
줄 몰랐다. 위험 수준이었다. 저 사람 무방비한 것도 위험수준이고, 자신도 위험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과 수빈의 미묘한 관계에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론적으로는 납득이 가는 그 생각에 몸은 따르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찬은은 입술을 살짝
검지로 매만졌다. 수빈의 습관이었다.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검지로 항상 입술 끝을 매만지고 있었
다. 그 모습조차도 너무 예뻐서 그 손가락을 내리고 짧은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
정말 미쳤다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그냥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
나온 놈이 숨 쉴틈도 없이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 같아요, 보고싶어요. 하면서 달려드니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씁쓸해져오는 입맛에 찬은은 성의 없이 혀로 입술을 핥아보았다. 그것만은
진심이었으면 한다. 가끔가다 정말 예쁘게 입꼬릴 들어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웃음만큼은 그가
진심으로 즐거워 나오는 웃음이었으면 한다. 그 웃음만 진심이라면, 그렇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볼 때만
이라도 진심으로 즐거운 거라면 자신은 언제까지고 그 옆에서 바보짓을 할 자신 있었다. 그 웃음이, 그
손이, 그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그에 따르는 리스크가 무엇이건 관계없이 갖겠다.
“뭐하고 있으려나.”
계단 난간에 삐딱하게 서 닫겨있는 문을 보고 있었다. 수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흘러나온다.
찬은은 자기 자신에게 작게 ‘바보’라고 중얼거린 뒤 한 손등으로 이마를 간지럽히는 앞머리를 밀어냈다.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 싶진 않다. 물론 강요해서 넘어올 사람이었으면 진작했지. 하지만 그
사람은 아니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얼굴과 다르게 딱부러지는 말투를 가진 사람이었다. 보드
라운 볼과 다르게 굉장히 단단한 갈빛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감정을 강요한다는 것은 쇠로 만들어진 스프를 떠 먹겠다고 플라스틱 스푼으로 쑤셔대
는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시에 약한 사람이었다. 틱틱대고 싫다, 말하면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자신에게 공부를 가르치러 저녁 7시만 되면 학교에 오는것도 그리고 내 감정을 다 알면서도 밀어내지
않는것도. 약한 사람이었다.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못 주는 형이다. 타인에게 상처를 내기전
에 자신곁에 오는 것을 아예 가로막아 버릴 사람이다.
“춥다.”
입김을 불면 하얗게 공중에 뜬다. 손등이 시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찬은은 우유 얼겠네, 라고 중
얼거리며 어쩔 수 없이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짝사랑이 힘들다 힘들다, 누군가가 칭얼거렸지만 그 빌
어먹을 걸 자신이 하게 될 줄이야. 찬은은 픽 웃으며 하늘을 노려보았다. 저놈의 하늘이 날 미친놈이라
놀려댈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찬은이 노려보자 하늘은 더 활짝 웃어보이는 듯 했다. 아아, 이젠
하늘까지 날 긁어대는구나. 찬은은 킥킥거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열려버리는 문에 찬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남자 정말, 무방
비하다 무방비하다했더니 이건 좀 너무한거 아닌가. 내가 나간사이 누가 들어오면 어쩌려고. 찬은은 그
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걱정이 되었는지 빠르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두리번거렸다.
채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에 수빈의 모습이 보여 그나마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오길 기다리며 TV를 이것저것 돌리다 피곤했는지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수빈
이 보였다. 여전히 곱게 나와있는 이마가 찬은의 눈에 들어왔다. 짧은 신음성을 흘리며 찬은이 눈을 감
으며 몸에 성호를 그었다.
“...퀘스트 난이도 업인겁니까.”
혀를 쯧 하고 차며 눈을 다시 뜬 찬은이 우유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수빈이 누워있는 소파 앞으로 걸어
왔다. 수빈의 옅은 숨이 느껴지는 그 앞에 주저 앉은 찬은은 살짝 볼멘소리를 해본다.
“정말 뭘 믿고 이렇게 무방비할까. 그것도 이렇게 묘한 자세로.”
선잠이었던지 찬은의 그 말에 수빈이 눈을 찡그리며 손을 뻗었다. 수빈의 뻗어진 손이 찬은의 얼굴을
밀어내는 바람에 한걸음정도 뒤로 물러 앉은 찬은이 그래도 좋다고 웃어댔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
이는 게 그 바보같은 웃음이었던지라 수빈 또한 웃어버렸다. 왜 자꾸 저놈이 웃으면 따라웃게되는거지.
수빈이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높낮이 없고 억양없는 단조로운 톤의 목소리로 틱틱거렸다.
“뭐야, 우유 사오랬더니 목장까지 갔다온거야?”
“아잉, 어떤 우유 사올까 고민하다가 그랬어요. 맛있는 우유가 맛있을까 전통있는 서울우유가 맛있을까
하고 고민하다보니까 시간이 훅 가버렸...”
영양가 없는 찬은의 말은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 생각된 수빈이 옆에 끼고 있던 쿠션을 정확히 찬은
의 얼굴 중앙에 집어 던졌다. 시끄러. 변명따윈 필요없다, 라고 말하며 주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수
빈을 따라 찬은 또한 쫄래쫄래 따라갔다.
“뭐 도와드릴까요?”
“일없다.”
“에이, 그래도 나 좀 부러웠단 말이예요. 요한 형이랑 주방에서 둘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거 보고 얼마
나 질투 났는지 알아요?”
입술을 귀엽게 내밀고 찡찡거리는 찬은을 보며 수빈은 무감동한 표정으로 앞치마를 둘러맸다. 뭐랄까,
요리를 시작할 때면 꼭 앞치마부터 맨다. 입고 있는 옷에 요리하던 것이 튀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요리 냄새가 배는 것도 싫은데 기름이 튄다거나 하면 뒤처리가 더 귀찮다. 그래서 앞치마를 매는 것뿐
인데 그 사실을 처음 알아차렸던 세훈형은 미친 듯이 웃어댔었다. 이 녀석도 웃으면 주먹부터 내질러버
려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찬은은 의외로 평소 같은 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뒤에 끈 매줄까요?”
의외의 물음에 수빈은 순순히 응이라고 답했다. 가끔 가다보면, 아니 항상인것도 같지만 예상을 깨는
행동만 해대는 녀석이다. 철없이 생각없고 어린 놈인줄만 알았는데 가끔 과외를 해주다 보면 예상외로
진지하게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바보인줄만 알았는데 가끔은 자신도 아리까리한 문제를 너
무 쉽게 풀어내서 놀랄때도 있었다. 두 줄을 손에 잡은 찬은이 뜸을 들이자 수빈이 악의없이 물었다.
“뭐해, 묶어준다며.”
“생각하고 있어요.”
“뭘.”
“이대로 뒤에서 확 안아버리면 과연 맞을까, 하고.”
수빈은 찬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 훽 뒤돌아 그의 손에 들려있던 앞치마 끈을 빼앗았다. 익숙한 손놀림
으로 끈을 묶은 수빈이 눈 꼬리를 치켜뜨며 웃으며 서 있는 찬은의 이마를 검지로 쿡 찔렀다.
“까불지 마.”
“이럴 거면 그냥 안아버릴걸 그랬다. 알았어요, 그만 까불고 갈게요.”
장난스럽게 돌아서려는 찬은의 팔을 잡은 수빈이 무심하게 말했다.
“냉장고 문 열면 맨 위에 계란 있어. 6개 가져다 놓고 가.”
“와, 내가 계란보다 못하데.”
찬은이 입술을 또 빼죽이자 수빈이 미끈하게 뻗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안 어울린다고 면박을 주었다.
하지만 찬은은 언제나 그렇듯이 꿋꿋하게 귀여운 표정을 지어대며 냉장고 문을 열고 계란을 한 품 가득
꺼내왔다. 적어도 열 두개는 되어 보이는 듯 한 계란에 수빈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게 6개구나?”
“이 계란 다 먹어버리면 나보다 좋은 계란은 없어지는 거니까요.”
자신의 생각이 기발하기라도 한다는 듯 어깨까지 으쓱이며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찬은이 어이가 없었다.
수빈은 자랑스러워하는 찬은의 표정이 왠지 얄미워 찬은의 품에서 딱 6개만 집어 들곤 말을 툭 던졌다.
“네가 계란인줄 아나본데, 넌 계란이 아니야.”
“그럼 계란보다 내가 낫다는 거죠?”
바보같이 웃으며 되물어오는 찬은에게 수빈이 시큰둥하니 계란을 까며 답해주었다.
“시끄러, 닭.”
그 말에 찬은이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말을 뱉은 수빈이 민망해 계란을 다 풀고 난 뒤 거품기를
집어던지고 난 뒤에야 웃음을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진 수빈의 모습에 찬은이 수빈에
게 달려들어 으스러질 듯 끌어안았다.
“야, 안놔?”
“왜 이렇게 귀여워요.”
“...죽여버린다.”
그와 동시에 옆구리를 박살낼 듯 찌르고 들어오는 주먹에 찬은은 헛바람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구를 수
밖에 없었다. 아프다. 이런식으로 역시 남자라는 걸 확인해줄 필요는 없잖아. 찬은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것 같은 눈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바보같이 올라가있는 찬은의 입술 끝에 씩씩대며
찬은을 바라보던 수빈이 더 이상 보고있다간 무슨 말이라도 뱉을 것 같았는지 뒤돌아 프라이팬에 계란
과 우유를 섞은 것을 들이 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던 찬은이 기 죽지도 않고 또 일어나서 수빈에게 고개를 숙이며 뭐, 도와드릴
까요? 라고 물어온다. 녀석이 키가 큰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내려다보는게 심술궂게 느껴져서 틱하
고 말을 내뱉었다.
“그 옆에서 토막난 토마토랑 같이 네 손가락이나 다지고 있어.”
“우와! 박력 있어!! 아유, 요 이쁜 입에서 어쩜 그렇게 거친 말들만 나오는 건지.”
“아니다. 손가락 말고 그 입을 다져.”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수빈의 붉은 얼굴을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쿡쿡 찌르며 찬은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반지, 요리할 때는 빼놓네요?”
수빈이 빼놓은 낡은 반지를 언뜻 본 뒤 자꾸만 시선이 그쪽으로 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냥 묻기로
했다. 찬은의 그 말에 수빈은 부산스레 찬은에게서 토마토와 적은 양의 양파를 받아 프라이팬에 넣곤
살짝 익은 계란에 부었다. 무심하게 수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제 수빈의 행동에 익숙해진 찬
은은 그걸 알아서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이 반지 항상 끼고 다니던 거 맞죠?”
묻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항상 저 낡고 굵은 검은 반지는 수빈의 왼손 그것도 네 번째 손가락에 걸려있
었다. 처음만난 날부터 매번 얼굴을 볼때마다, 그가 습관적으로 손을 올려 입술을 매만질 때마다 보였
던 반지다. 저것 때문에 수빈에게 결혼했냐는 엉뚱한 질문까지 한 것 아닌가.
“응.”
“되게 낡았네요?”
“응.”
무감동한 대답을 해대는 수빈을 잠시 바라보던 찬은이 다른 질문 하나를 더 던져왔다.
“소중한 거예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길 바랬지만 수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 소중
한거야. 수빈이 빼놓은 반지로 손을 뻗고 있던 찬은은 조용히 그 손을 거뒀다. 투명한 벽이 지금 보인다.
방금 전 자신의 질문으로 그 투명하던 벽에 검은 페인트가 부어진 것 같다. 벽이 보인다. 지금도 앞으로
도 자신이 절대 뚫지 못할 그 벽이 보인다.
찬은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질문에 대답할 땐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던 수빈이 고개를
돌려 찬은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수빈의 물음에 찬은은 그저 웃었다.
“아뇨, 뒤태가 예뻐서 보고있……. 설마 그거 진짜 던지게요?!”
“응.”
찬은이 식겁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빈의 손이 지금 들려있는 건 다 만들어진 오믈렛이 담긴 프라이팬
이었던 것이다. 결국엔 난감하단 표정을 짓고 서 있던 찬은이 거실로 도망쳐나가는 것으로 일단락되긴
했다. 그런 찬은의 뒤꽁무니를 보며 웃고 있던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릇 세 개에 계란을 나
눠담았다.
알고 있다. 어째서 조잘조잘 질문해대던 녀석의 행동이, 반지로 뻗어지던 녀석의 손이 아무말 없이 접
혀진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았던 건 그 반지 하나가 자신에게 의미하는 것을 적나라
하게 토해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엔 자신이 이기적이었다.
반지를 한번 바라본다. 반지를 쥐어든 수빈의 눈빛이 조금 미묘했다. 모르겠다. 버릴 수 없다. 이상하게
버리려할때마다, 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낼때마다 버려야 한다고 그래야한다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
언제나 버리지 못한다.
한심해.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수빈은 그 손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빌어먹을, 역시 버릴 수가 없다. 버
리려고만 하면 이걸 만들었다고 처음으로 그렇게 밝게 웃으며 자랑해대던 남서우 녀석이 생각나버려서
도저히 버릴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은 이번에도 역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소파에 피신해 있던 녀석
을 부르고 만다.
“와서 밥 먹어.”
“후라이팬으로 안 때릴거죠?”
“셋 셀때까지 와라?”
수빈이 딱딱하게 대꾸하자 찬은은 그제야 살았다는 듯 전과 다름 없는 웃음을 베실베실 흘리며 쪼르르
달려왔다. 말 잘듯는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수빈은 또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어버릴 뻔 했다. 왼
손을 녀석의 머리 위에 올리려 든 순간 네번째 손가락에서 걸려있던 검은 반지가 눈을 가득 메어왔다.
수빈은 공중에서 손을 천천히 접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찬
은의 앞에서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남서우와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서,
그 부분의 손가락은 하얗게 될 때까지 끼고 있으면서 눈 앞에 이 커다란 강아지 같은 녀석에게 이끌리
고 있었다.
그래, 이끌리고 있었다. 아차 하고 조금만 긴장을 풀면 어느새 무장해제가 되어있었고 그 앞에서 멋대
로 입꼬리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젠장, 이끌린다. 그 자리에 서 있으려 아무리 노력을 해대도 저 바보같
은 웃음을 실실 흘리며 꼬셔대는 저 자식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물 떠올게.”
어색하게 접어진 팔에 수빈은 물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서는 수빈의 뒤를 바라보며 찬은은
아무 소리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알고있다. 저 남자가 어째서 뻗었던 손을 접었는지. 저 검은 반지가 조여
매는 사슬에 아직까지도 걸려있는것이 분명했다.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의식한거겠지. 지금까지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을거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찬은은 씁쓸한 웃음을 흘려버렸다.
눈이 조금 따끔거린다. 생각같아선 저 반지를 빼앗아 불에 녹여 완전히 없애버리던가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수빈 또한 식탁에 와 앉았고 차갑게 김이 서린 물 두 컵도 탁자에 놓여졌다.
잘 먹겠습니다, 라고 우렁차게 말한 뒤 오믈렛을 떠 먹으려 숟가락을 들었을때 앞에서 심드렁하니 턱을
괴고 있던 수빈의 물음이 들려왔다.
“넌 대체 내 어디가 좋은 거야?”
찬은이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다요.”
“불합격.”
그런 대답을 원하던 것이 아니고 정말이지 진심으로 궁금했던지 수빈의 표정은 조금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수빈의 살짝 찡그려지는 눈썹에 왠지 웃음이 터져나와 오믈렛 한 숟가락을 퍼먹으며 쌕 웃어보였
다. 약올랐다는 표정이 눈에 선히 보인다. 언제나 무심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수빈의 이런 모습을 보
는건 몇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자신이라 생각하니 왠지 더 기분이 좋아졌다. 찬은이
뜨거운 오믈렛을 꿀떡 삼키며 숟가락을 흔들며 뻐기듯 말했다.
“진짜 뿅갈만한 대답,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수빈은 같이 웃으며 ‘해봐’라고 말했다.
그러자 잠시 입술을 숟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던 찬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유난히 옅은 그 머리카락이 좋고 예쁜 이마가 좋아요. 틱틱댈때 같이 살짝 찡그려지는 눈썹이 좋구요,
말간 고양이 같은 갈색 눈이 좋아요. 눈을 감으면 곧게 뻗어있는 긴 속눈썹이 좋고 살짝 올라간 눈매도
좋아요. 곧게 뻗어있으면서 끝은 부드러운 콧날이 좋고 좋은 소리는 죽어도 안나오는 그 입술도 좋아요
. 자기 기분 좋아지면 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그 손도 좋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그만.”
예상치못한 수빈의 제동이 걸려오자 말에 심취해 숟가락을 마이크마냥 대고 말하고 있던 찬은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만,이라고 말한 수빈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왜인지 고개를
떨구고 한 손에는 여전히 숟가락을 든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찬은이 걱정스러운 듯 잠시
쳐다보고있으니 수빈이 고개를 들며 그 답지 않은 싱거운 웃음을 보였다.
“밥이나 먹자.”
찬은은 모를거다. 언젠가 자신이 남서우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때 그 녀석이 했던 대답과 지독하게도
닮아있다는 것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닮아있어서 찬은의 입술에서 나오는 한글자 한글자가 남서
우라는 이름을 갖고 머릿속을 쑤셔댔다. 난 그 빌어먹을 녀석의 그림자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녀석의 기억이 너무나도 진해서 다른 색의 그림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그 녀석
의 기억을 지워내던 하얀 물방울 같던 이 아이에게도 누군가가 남서우의 색을 몰래 끼워놓은 듯 그의
색으로 자신을 자극한다.
밥이나 먹자, 하고 수빈은 숟가락으로 자신몫의 오믈렛을 조금 잘랐다. 차마 그 오믈렛이 입안에 들어
가기도 전에 찬은이 답잖은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좋아해요. 그쪽이 좋아요. 기대해버리면 안된다는 거 알면서도 자꾸 기대할만큼 좋아해요. 큰일이야.”
수빈의 갈빛 눈이 그제야 말하고 있는 찬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주 살짝 흔들리던 수빈의 눈이 평정
을 찾곤 대답했다.
“기대하지마.”
“것봐요. 지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내 귀엔 기대하라는 말로밖에 안 들린다니까요.”
찬은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끝까지 웃어보인다. 그런 그 아이를 보며 자신은 잠시동안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부터 이미 그 아이에겐 기대를 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단
순한 사실을 왜 자신은 눈 가리고 보지 않으려 했던걸까.
“참는거 힘들어요. 그래도 강요하는 건 싫어요. 그러니까 참을게요. 내가 좋아하니까요.”
자신을 좋아한다 말한다. 이 아이는 단 한번도 사랑한다 말한 적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아이가
느끼고 있는 감정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것일거다. 이 아이는 자신을 ‘좋아’한다. 좋아하고 좋아해서 기
대하고 기다리고 있다. 홀로 하는 감정을 확신할 수 없다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와줄것을 확신하지 못
한다면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 밖에 쓸 수 없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 아이는 그걸 알
고 하는 말일까.
수빈이 뭐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며 들어올릴때 누군가가 밤바람을 몰고 집 문을 확 열어재꼈다.
우렁찬 목소리로 집에 소리친 남자의 목소리는 꼬일대로 꼬여있었다.
“아가들!! 형아가 아이스크림 사왔쪄! 쭈쭈바 파티하자!”
그 요란한 등장에 수빈이고 찬은이고 자신들의 상황은 망각해버리고 입을 벌리곤 침입자를 향해 각기
다른 말로 소리쳤다.
“형때문에 말 끊겼잖아!”
“뭔 술을 그렇게 마셨어!”
하지만 히죽히죽 웃으며 요한이 들고 있던 2개의 커다란 봉지를 바닥에 좌르륵 쏟아낸 순간 두 남자의
표정은 완벽하게 달라졌다.
“아이스크림이다!!!”
“왠 아이스크림인건데...”
찬은은 어린애마냥 아이스크림을 주우며 요한을 안으로 인도했고 그 자리에서 어이가 없어 굳어버린
수빈은 ‘허’하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한숨소리만 뱉어낼 뿐이었다. 저자식이 집에 오겠다고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요한이 걸어들어오자 확 퍼지는 술냄새에 수빈은 방 안에서 페브리즈를 가지고 나와
요한을 소파로 끌고가며 끊임없이 뿌려댔다. 페브리즈 향기에 발버둥 치던 요한을 쇼파에 앉히며 수빈
이 다시 물어왔다.
“미친 놈. 웬일로 술은 이렇게 많이 마셨어.”
“괜찮아, 괜찮아. 아이스크림 5개만 먹으면 깨.”
손사래질 친 요한은 아이스크림 한다발을 품에 안고 달려온 찬은을 보며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일단 먹고 시작하자고! 아따, 오늘 4차는 아이스크림 파티!”
요한의 말에 찬은은 싱글벙글 웃으며 오믈렛 그릇들도 거실로 가지고 왔고 세 남자는 군말 없이 오믈렛
과 아이스크림이라는 미묘한 궁합을 느끼지도 못한 채 먹어대기 시작했다. 정말 이게 뭔짓이야. 수빈은
벌써 3개째 아이스크림을 먹어대고 있는 요한을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밖은 추워죽겠고만 무슨 아
이스크림을 이렇게 무식하게 사 들고 오냔 말이다. 손끝이 아직도 빨간 요한을 바라보았다. 코도 빨갛
고 얼굴도 불그스름한 게 꼭 어디서 울다 들어온 놈 같다.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어대는 두 녀석을 보
며 수빈은 폭 한숨을 쉬어보았다.
그래, 이렇게 한숨만 쉬어봤자 뭐하겠냐. 일단 먹자. 먹는 게 남는 거라고 하지 않더냐. 일단은 먹고 시
작하자.
다 먹고나니, 요한은 기어코 아이스크림 5개를 해치웠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찬은 혼자 입술을 내밀며
설거지를 하러 주방 쪽으로 들어갔고 소파에 앉은 수빈과 달리 요한은 소파밑에서 소파에 기대 그새 맥
주를 따 마시며 늘어져있었다. 수빈이 미친놈이라고 작게 욕을 하자 요한이 낄낄대며 뭐라 뭐라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속이 쓰려서 소주를 마셨더니 속이 너무 뜨거운거야. 속이 너무 뜨거워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더니 속이
차가워.”
“그러면서 맥주는 왜 마셔.”
“음, 속이 쓰려지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수빈의 한숨 섞인 웃음을 들은 요한이 소파로 고개를 재끼며 수빈이 정말
웃는 건가 확인했다. 그렇게 늙은이 같은 웃음을 낼수도 있구나, 하는 요한의 말에 수빈은 주먹으로 짧
게 대답해주었다. 결국 한대 맞아놓고도 요한은 뭐가 좋은지 웃었다. 잠시 웃고 있던 요한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뱉었다.
“끝났어.”
“뭐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끝내기로 했어.”
맥주를 든 한 손과 다른 손을 함께 들어 올리며 항복 표시를 해 보인다. 왠지 그런 요한의 뒷모습이 싫
었다. 힘 빠진 듯한, 손을 들어 올릴 힘도 없어 보이는 그런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너무 안쓰러워서 등
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었다. 평소 같으면 능청스럽게 말을 뱉어대며 자신을 그 입 하나로 흔들어댔을 요
한의 이런 김빠진 모습이라니. 수빈이 눈을 찡그리자 어떻게 알았는지 요한은 김빠진 웃음을 흘려대며
몸을 틀어 소파에 오른 쪽 팔을 올려놓았다. 수빈의 얼굴이 이젠 보인다. 어이어이, 네가 그렇게 더 성질
난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
“이젠 정상적이게, 보통 사람처럼 여자를 사랑하려고. 손가락질 받고 더럽다 욕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혼자서는 더 이상 못하겠어. 그 사람은 지금이 제일 행복해 보이는데, 절대 날 먼저 밀어내지 못할 사람이니까
내가 알아서 떨어져 나가주려고.”
말한적 있다. 이 녀석은, 이 노란머리의 성질있어보이는 고요한 이라는 녀석은 남자를 사랑한다. 한눈에
반해버렸고, 정신없이 돌진했고, 한방에 나가떨어졌었다. 연적이라고 불릴것도 못 되었었다. 이 녀석이
반해버린 그 남자에게는 이미 오래된, 정말이지 진저리나게 오래된 남자가 있었고 그들은 변함없이 사
랑하고 있다했다. 아무리 그 사이를 찢어보려 해도, 그 사이에 끼여 보려 해도 안된다는 걸 처음부터 알
고 있었단다. 그런 짝사랑을 이 녀석은 지금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하고 있었다.
수빈이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잠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찬은을 보고 난 수빈이 부드럽게 손
을 요한의 머리위로 올렸다. 그래, 그것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랑하기때문에 물러나
겠다는 변명이 여기에서 들러붙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변명이 네 선택에 변명이 될 수 있도록 빌게.
“그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선택을 인정해주는 것 뿐이었다. 자신의 머리를 토닥이는 수빈의 손이 기
분 좋은지 요한이 입가에 멋드러진 웃음을 띄우며 꽉 막힌 목소리를 억지로 뚫어 물어왔다.
“넌 정말 저 녀석한테 아무 감정 없어?”
저 녀석이라고 칭하며 손가락질을 하지도 눈짓을 하지도 않았건만 두 남자 모두 ‘저 녀석’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하 찬은. 이름부터가 하찮은 놈이 어느 순간 인생에 끼어 들어와선 모조리 헝클어 놓고 있
었다. 아무 감정이 없냐고 물어오는 요한의 말에 어쩐지 대답을 할수가 없었다. 아무런 대답을 할수 없
었다.
감정이 없냐고 물었냐. 수빈은 대답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감정은 무슨. 미친듯이 이끌리고 있다. 남서
우의 반지를 낀 손으로 그 녀석에게 손을 뻗을 정도로. 빌어먹게도 이끌리고 있어.
수빈의 침묵에 요한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나는 결국 백기들었지만 저 자식은 아닐거야.”
그 말에 수빈이 싱겁게 웃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 알고 있어. 힘들다고 자신에게 징징거렸으면 거렸지 백기를 들고 순순히 물러나줄 개가 아
니었다. 저 자식은 똥개, 그게 아니라면 늑대의 이빨을 하고 있는 사냥개였다. 그런 녀석이 물러날리 없
지.
수빈의 대답에 다시 한 번 따뜻한 웃음을 지어보이던 요한이 수빈의 굽혀진 무릎에 이마를 가져다대며
눈을 감았다. 따뜻하다. 느껴져오는 온도 자체가 아니라 이 녀석 자체가 따뜻하다. 정말이지 차가운 녀
석일 줄 알았는데. 따뜻하다. 머리에 올려진 수빈의 손이, 이마에 닿은 수빈의 다리가.
따뜻했다. 아이스크림 덕에 꽝꽝 얼어버렸던 것 같은 마음이 눈녹듯 녹아버리는 기분이었다. 그와 동시
에 함께 얼어있던 상처또한 벌어져 피를 줄줄 흘려댄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따뜻했다. 그래서 요한
은 목을 꽉 매운 습기를 억지로 밀어내며 수빈에게 웃음섞어 말했다.
“아, 따뜻하다.”
따뜻하다. 그래서 슬펐다. 잡지 못할 별을 끝내는 놓아버린 자신이 슬펐다. 끝까지 그걸 잡고 늘어지지
못한 자신이 슬펐다. 따뜻하다. 이곳은 따뜻해서 마음놓고 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저주라도
걸린 듯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따뜻하다.
*
결국 짝사랑하던 요한이는 그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접었습니다. 껄껄 저 녀석 원래
생일 축하해, 라는 제 단편 외전에 나오는 녀석이라죠^^ㅋ예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전 메인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찬은이와 수빈이의 알콩달콩한 야식준비입니다.
에이프런 매 주는 남자, 가 로망이예요. 아 이 얼마나 멋진 광경입니까.
스크롤 압박 심하네요. 아이고
안졸리면 2편 풀로 더 들고 오겠습니다.
원래 사랑은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겁니다.
첫댓글 앗~ 일빠닷!!ㅋㅋㅋㅋ 와우~ 연속으로 보니깐 너무좋네요~ 이제곧 서우와 수빈이가 만나겠죠??ㅋㅋ
만나야겠죠. 그래서 풀어야 할겁니다. ^^ㅋ제대로 말이죠.
에휴, 요한이도 난 꽤 맘에 들엇는데... 흐음... 아하하하하하하
요한이같은 케이스가 가장 현실성 있다고 봅니다. 어쩔 수 없는거죠. 돌아갈 수 있는거라면 마음을 돌리는 것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좋은거니까요.
요한이가 짝사랑하는 그 님은 도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요한이 맘을 아프게 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