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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4절-10절.
4절-10절: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66권의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본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중에 한 부분이 됩니다. 그러면 이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 즉 본문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심인지 알아야 되겠지요.
이것은 역사계시요, 역사적으로 있단 말이지요. 또한 형식계시요 모형계시요, 나아가서는 은밀계시이니 이 은밀계시에서 깨닫지 못하면 성경을 못 깨닫는다 그 말입니다.
본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심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요나서를 통해서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어기고 자기의 패역으로 걸어가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것과 같이 자연을 동원시켜서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본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사랑치 않고 모든 이방인들도 이스라엘과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세 번째는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선지자나 평민이나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벌을 내리시고, 순종을 하면 구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또 네 번째는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역사를 하면 같은 역사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보다 이방인이 회개를 더 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방인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했단 말이요. 그래서 이스라엘보다 이방인이 회개를 더 잘하고, 선지자보다도 일반백성들이 회개를 더 잘하고, 또 일반 이스라엘보다도 이방인들이 회개를 더 잘하고, 선지자보다도 이스라엘이 회개를 더 잘하고 이런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또 패역성이 선지자가 제일 많고, 그 다음은 이스라엘, 그 다음은 이방인들이 패역성이 많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만 이런 주장들은 다 완전자이시며 절대자이시고 독존자이신, 그러면서 자존자이신 하나님의 자원적인 구원사역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 그 말이요.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독권적 사역인데 이걸 모르니까 그런 소리가 나온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역사를 바로 알 수 있게 되는데, 세상 모든 사사건건 일어나는 사건들이 왜 일어나느냐?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하시는데 붙잡고 쓰는데 동원된 사건 존재들이라 그 말이요. 이런 것들을 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부절히 해 나간다 그 말이요.
요나를 통해 인간의 패역성과 강퍆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요나를 온전자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역사로써 활동으로써 사랑으로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기에게 부딪히는 모든 사사건건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써 나타내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 말이요. 온전자를 만들기 위해서.
첫째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을 했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자고 하시는데 요나는 말씀을 따라 순종치 않으니까 두 번째로는 자연을 동원시켜서 니느웨로 가도록 역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요나가 몸은 니느웨로 갑니다. 그러니까 이걸 외적으로 볼 때는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을 하고 있으니까 실은 순종 같으나 그 이면적으로 보면 불순종이었다 그 말입니다. 참 순종이 아닌 이런 순종은 인격적 결합이나 내적 결합이 아니니 이는 순종이 아닙니다.
본서에서 또 순종이 아니라 할지라도 역사는 크게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이요. 인간들은 대개는 자기의 순종과 피동성과 인격적 결합의 동행성 이 면에 대해서는 감도를 측정을 하지를 않고 사역에 대한 성과만 보고자 한다 그 말이요. 우리는 내적 인격의 결합의 동행성 그 면을 잘 감지를 해야 되는데 보통 보면 그 면을 잘 안 본다 그 말이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보면 순종을 하는데 있어서 돌변적 무감각 생태의 순종만 하는 신앙이 있고, 인격적 결합에서 동행하는 신앙이 있고, 더 나아가서 자원적 순종적으로 인격적 결합에서 동행을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의 움직임 행동이 자원적이요 소원적이요 인격적 결합에서 동행이 되었을 때에 구원의 효력이 큽니다. 그렇게 됐을 때에 이루어지는 구원은 영 자체의 성장이요, 이성과 영이 결합해가는 성화구원이 됩니다. 자기의 사업이나 가정까지 투자하며 저축하는 소유구원과, 대외적으로 관계를 가져서 사람들을 진리와 생명으로 접선을 시켜서 생명권 내로 끌어들이는 연관구원이 또 잘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구원이 잘 되어도 외적인 일에 대한 성과 면에서는 빈약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외적인 사역적인 성과는 수십만의 니느웨 성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놀라운 성과가 있어났다 할지라도 요나 자기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읽어보면 알 수가 있지요? 그 증거가 이 요나는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해서 생명권 내로 들어간 것을 보고 기뻐하는 대신 하나님께 대해 원망과 불평입니다.
여기서 니느웨는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선 것이고, 요나는 하나님과 대립적 입장에 섰으니 요나 자기 자신은 아직도 사망권에 있는 것입니다. 자원적 소원적 인격적 결합에서 순종이 되어야 자기에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들에 대한 목적성과 소원성이 요나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요나는 불택자의 모형계시가 아니고 택자이면서 타락한 인간의 주관성과 자율성을 그대로 드러내서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소원을 만능의 능력으로 강권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에게 절대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이성의 자유에 대해서는 강권을 쓰지를 않습니다. 몸까지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타치를 하고 들어오지만 자유성이 있는 이성에게는 강권을 쓰지 않는다 그 말이요. 사람의 이성 생각 마음까지는 육체처럼 강권을 쓰지 않는다 그 말이요. 어찌하든지 깨닫게 해서 하나님께 순종으로 자원적으로 바로 돌리려고 그러지 우리 이성의 자유를 무슨 나뭇가지를 꺾듯이 그렇게 하지를 않는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바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모든 자연계를 다 동원시켰습니다. 요나가 타고 가는 이 배, 자기를 숨겨놓은 이 배, 자기를 의뢰해 놓은 이 배는 패역한 요나를 싣고 가는 지식입니다. 은밀계시적으로 보라 그 말이요. 즉 요나가 타고 있는 배는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그 전부를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다 자기 몸을 맡겼느냐 그 말이요. 어느 지식에다 자기 몸을 맡겼느냐? 어느 지식이 자기를 끌고 가느냐? 이것이 요나가 탄 배와 같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배 안에 요나가 있으니 이 배가 요나를 끌고 간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기를 의존하고, 말씀에다 자기를 맡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담아 말씀에다 자기를 싣고 말씀이 가는대로 가야 할 선지자 요나입니다. 이렇게 해야 할 요나가 자기를 배에다 실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는 배에다 실은 게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는 배에다 자기를 실었다 그 말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 말씀의 보호가 아니고 배의 보호를 입으려고 한 거고, 또 배가 가는 대로 자기가 가고 있고.
요나가 처음부터 다시스로 가려고 한 건 아니었지요. 하나님은 니느웨로 가라고 그랬는데 요나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출항하려는 배를 보고 ‘그 배가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니까 ‘다시스로 갑니다’ 그래서 그 배를 탄 거라 그 말이요. 그래서 반대편으로 갔다 그 말이요.
이렇게 해서 배가 가는 대로 자기가 가고, 또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자기를 깊이 숨겨 놨다 그 말이요. 배 밑창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보지 않게, 안 보이게 이불을 푹 둘러 써버렸단 말이요. 그러니 하나님에게 보이겠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차적으로 배를 때려 깨치려고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요나를 때리지 않고 의지하고 있는 그것을 때린다 그 말이요. 여러분들은 뭘 사랑합니까? 하나님 외에 그 무엇을 사랑하면 사람이던 물건이던 직장이던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은 그걸 때려버린다 그 말이요.
또 한 편으로 보면 하나님은 시기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걸 사랑하는 것을 원치를 않는다 그 말이요. 그만큼 시기를 한단 말이요. 사랑하면 시기가 나온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요나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시기를 하셔서 요나가 하나님처럼 의지한 것을 치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호 즉,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살아야 하나 하나님의 보호를 버리고 배의 보호를 입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게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다시스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들, 은밀계시적으로 보면 ‘아, 저 사람이 뭘 탔구나. 어떤 배를 탔구나. 교회는 나오는데 마음은 어디로 붙잡혀 가고 있구나’ 이런 걸 다 볼 수 있다 그 말이요. 이게 은밀계시입니다. 이건 문자적으로 표면적으로 보는 게 아니지요.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를 해칠 분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피해서 배의 보호를 입고 배 밑층에 깊이 들어가서 ‘배야, 너는 나를 보호해 다고’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그 말이요.
요나가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을 이면적으로 보면 진리와 생명과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해가지고 배에게 납치된 거라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한 꺼풀 벗겨서 보고, 또 한 꺼풀을 벗겨서 보면 그와 같은 장면을 볼 수가 있다 그 말입니다.
요나가 제 좋아서 하나님을 피해서 배에 탔는데 이걸 한 꺼풀 벗겨보니까 배에다 자기를 맡겼어. 그렇지요? 이것을 또 한 꺼풀 벗겨보니까 성도가 납치돼 가는 거야. 납치된 거고, 포로가 된 거라 그 말이요. 즉 사망에게 포로라 그 말이요. 하나님을 피해서 가는 이건 전부 다 사망에게 포로라. 결과는 자기 죽는 겁니다.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 거에요. 생명을 피해서 가면 사망이야. 이 사망은 그 결과가 죽는 거에요. 자기에게 이롭고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 말이요.
그런데 임시적으로 하나님을 피해서 가면 뭔가 달착지근하고 뭐가 되는 것 같거든요. 천만에요. 그렇지를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성이 존귀성이 인격 아니요? 인격이 성장하지 못하면 그 무엇도 자기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어요. 이런 자기를 누가 대우해 주겠느냐 그 말이요. 인격이 저질인데 어디를 간들 자기를 대우해 주겠느냐?
사람이 인격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성장할수록 모든 생활면에 인인관계 연관관계 대물의 연관관계 사물의 연관관계성이 바로 되어나가니 사람들이 다 좋아한다 그 말이요. 인간이 올라가요. 이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죄에게 사망에게 물질에게 세상에게 포로가 되어서 가고 있는 이 요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동원을 시키고 자연을 동원시키고 요나를 포로로 잡아가고 있는 이 배를 치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풍파를 보냈잖아요?
사람마다 세상에 살 때에 풍파를 안 겪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풍파를 겪을 적마다 깨닫지 못하니까 자꾸 물질을 잡으러 가지요? 사람에게 기대고, 물질을 잡으러 가고, 환경에 기대고 자꾸 그런단 말이요. 그러니까 그 사건을 통과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섰느냐, 못 섰느냐’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거지요. 전혀 모르는 거지요.
지금 이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이 요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중생한 성도를 표시하는 것이고 상징하는 겁니다. 그러면 중생한 자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진리와 영감에 사로잡혀서, 비물질인 무형체의 말씀에 사로 잡혀서 살라 그 말이요.
이 요나는 영도 진리와 영감으로, 이성과 몸도 진리와 영감 속에 들어가서 진리와 영감이 가자고 하는 대로 가야 할 성도 요나입니다.
성령이 요나에게 말씀을 가지고 왔을 때에 진리 속으로 들어가면 자원적 순종이 생깁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말씀 안에 있는 것은 성령 안에 있는 거요. 이렇게 되면 성령은 그 자기를 보호하고, 또 이성과 몸이 말씀 안에 담기니 말씀이 요나 자기를 보호하면서 니느웨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성과 몸이 말씀 안에 들어오면 그 자기는 진리와 영감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의 보호가 있습니다. 성도가 평소에 말씀을 붙잡고 살면 환난 때에 그 말씀이 자기를 보호합니다.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요 이치이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주격적인 역사로서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말씀 속에 이성이 담겨있게 되면 말씀의 진리이치로서 생각이 나가고, 자기의 몸을 움직여 나가고 이렇게 되니 사망 쪽으로 가지를 않게 된다 그 말이요. 항상 생명 쪽으로 선택이 돼가지고 가게 돼.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요 말씀의 인도라 그 말이요.
‘내가 말씀 속에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하는 이것은 자기의 주관입니다. 들어오면 진리와 영감의 보호를 받고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갈 때에 말씀 안에서 진리의 보호를 입고 갔습니다. 또 ‘사르밧으로 가라’ 그럴 때에 엘리야는 즉시 갔다 그 말이요. ‘가라’ 그럴 때에 ‘조금 있다가 가지요. 한 달 후에 가지요’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그 말이요. 즉시 즉시 움직여 갔다 그 말이요. 갈 때에 자기 혼자만 간 것이 아니라 말씀과 같이 간다 그 말이요. 하나님은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말씀을 해놓고 그냥 내팽개치지 않는다 그 말이요. 보내놓고 말씀이 같이 간다 그 말이요.
요나가 니느웨로 갈 때에 먼저 할 일은 말씀 속에 자기가 담겨져서 자기가 말씀 안에 들어가서 그 말씀 안에서 말씀을 타고 ‘아멘’ 하고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성도 몸도 영도 말씀의 보호를 입게 됩니다.
사드락 메삭 아멧느고는 자기의 피난처를 어디다 두었더냐 그 말이요. ‘금우상에게 절하라’ 할 때에 자기의 피난처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을 가만히 눈여겨보면 ‘제 일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세상에서 항상 사건적으로 들려오는 음성은 성도 앞에 와가지고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세상을 섬겨라’ 그러고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의 사건 속에서 제일 첫째 계명서부터 어기고 있다 그 말이요. 보통 보면 세상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어. 대부분이 그래. 이거는 첫째 계명서부터 벌서 걸려 넘어졌어요.
이러니 자기가 세상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게 되는 거고, 그 다음에 이렇게 되니 이런 상태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무리 불러도 그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게 되고, 그 다음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영적인 면으로 살인이 들어가고, 거짓말이 들어가고, 도둑질이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게 없습니다. 첫째 계명부터 어기고 들어가면 다른 계명도 전부 다 결려 넘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 사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잡을 줄 알아야 됩니다. 지금 보면 전부 다 금우상에게 절하라고 그러지 않아요?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절을 하지 않는 그 사상이 미워서 세 친구를 풀무불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금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는 그 사상 그 말씀이 그들을 보호를 해 주었습니다. 말씀의 보호는 주님의 보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호하는 거라 그 말이요.
풀무불의 사건이 왔을 때에 말씀이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자기가 말씀 안에서 말씀을 붙잡고 살았다면 어려운 사건 환경이 왔을 때에 ‘말씀이여 나를 보호해 주옵소서’ 그게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말씀에 자체화가 돼 나가는 것이니까. 그러나 평소에 말씀의 보호를 입지 않고 말씀 잡지 않고 제 멋대로 살다가 어려운 사건이 왔을 때에 ‘나를 보호해 주옵소서’ 하는 그게 안 먹힌다 그 말이요.
늘 말씀을 받으면서 ‘말씀이여, 나를 가리어 주옵소서’ 해야 할 것이지 평소에 말씀을 버린 사람이 사건이 오니까 ‘하나님이여, 날 살려주시오’ 그러면 그게 뭐요? 그게 자기의 믿음 때문에 살려달라는 거요, 육의 목숨이 두려워서 살려달라는 거요? 육의 목숨이 두려워서. 순서가 그렇게 되는 거지요. 이치입니다. 그런 자가 뭐가 예쁘다고 육의 목숨을 살려주겠어요?
하나님의 택자 요나는 말씀을 피해서, 하나님을 피해서 배로 자기의 보호를 입고 배 안에서 배를 의지하고 배가 가는대로 포로로 잡혀가고 있으니 중생한 성도가 어떻게 믿음으로 살겠느냐 그 말이요.
기독자의 거처지, 의지할 곳, 보호할 곳, 갈 곳, 위치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서 말씀의 보호를 받습니다. 말씀 속에서는 말씀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 이치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다윗이 말씀의 보호를 입고 사니까 블레셋이 공격하고 올라왔을 때에 그들은 다윗의 밥이 됐습니다.
지금 자기는 어디에 숨어있는지? 보이지 않는 나의 보호가 무엇이냐 그 말이요. 인간의 보호, 재물의 보호, 자기의 기술, 자기의 재간 이것이 자기의 보호입니까? 아니지요. 말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그런 것이 다 소용이 없습니다. 또 말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그 자는 인간의 보호를 원하는 거고, 재물의 보호를 원하는 거고, 어떤 기술의 보호를 원하는 거지요.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배를 타고 있는 것이지만 알고 보면 이 성도는 배에 납치되어 가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배에 자기의 몸이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배를 깨뜨리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요나서를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강퍆성이 많고 패역성이 많은 이 요나를 들어서 오늘날 저희들의 마음을 비춰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물질의 보호나 인간의 보호나 무기의 보호나 세상에다 등을 기대고 그 보호를 입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만큼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만큼 하나님의 말씀의 보호, 진리의 보호를 입어야 마땅한 줄 압니다.
그런데 시시때때로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서 세상 쪽으로 가서 붙는 일이 많습니다. 세상 쪽에 붙어가지고 보호를 입으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주여 주여’ 하고 예수 잘 믿는 척하는 그런 일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요나를 보면서 우리의 속마음이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바른 깨달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세상의 전쟁이나 유행바람이나 모든 사건 환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을 위한 구원역사로써 진행해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서 갈 때에 하나님은 풍랑을 보내서 그 배를 깨치려고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당하기 전에 요나에게 하신 역사, 하나님의 의사와 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하며, 더 나아가서 인격적 결합에서 자원적으로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구원을 마음 것 원 것 이루어 가면서 우리에게 붙여주는 모든 사건 환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이용해 갈 수 있는 실력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명철한 지혜와 총명을 주시옵소서. 절대로 미음 팔아먹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영의 눈을 밝혀 주옵시고 모든 사건 환경 속에서 믿음의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요나서 끝)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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