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에서는 2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1) 전반부는 송사문제이며
2) 후반부에서는 한 몸의 원리를 다룬다
(창기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칭시킴)
송사문제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7절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피차 송사하므로 서로간의 허물을 완연히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이 아직 ‘옳으냐 그르냐’로 서로 따지는 것은 어리고 미성숙한 증거이다.
바울의 방법은 송사할 바엔 ‘차라리 손해 보는 것이 낫다’는 쪽이다.
속는 것, 당하고 빼앗겨 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한국교단의 장로회에 재판국을 두는 것은 교회 안의 문제를 교회법으로
재판을 하므로 세상 법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9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아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서로 송사하는 불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을 따지고 계산할 여유가 없다.
10절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언제든지 우상숭배, 간음, 탐색, 남색, 도적, 탐람, 술 취하는 자,
후욕, 토색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계속 그런 상태라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 해결책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당하고 만다.
맞붙어 싸우면 똑 같은 사람이 된다. 악한 사람과 싸워 이기려면 더 악해야 한다.
2) 그 다음에는 교회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자체가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문제를 해결할 권위를 잃고 만다.
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을 같이 보고 있다.
주의 이름 곧 성령과 진리이다.
주 예수의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할 때에 씻음, 거룩, 의롭게 하심을 얻는다.
신앙의 삼팔선이 뚜렷해야 한다.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 있으면
인간관계의 여러 가지의 먹구름이 없다. 자유인이 된다. 하나님과도 성령과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자가 되고 가정과 직장 등 사회인으로서도 자유인이 된다.
12절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제재를 받을 만큼 욕심도 없다는 뜻이다.
13절 부터는 식욕과 정욕의 문제이다.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그런데 이 두 욕심은 같이 연결이 되는 말이다.
식물과 배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즘 들어와서 사람들이 음식에 무척 신경을 많이 쓴다.
그 이유는 전혀 엉뚱한데 있다. 음식을 통한 육신의 정력에 관한 기대감 때문이다.
칼빈이 육신의 사람들에게 ‘부엌이 종교다’고 말할 만큼 사람들이
정력을 위해 먹는 음식에 많은 신경을 쓴다는 말이다.
빌3:19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 곧 육신의 사람들은 ‘배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다음 몸의 문제이다.
이 몸이 육적인 관계에 있느냐 영적인 관계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몸이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는 영적인 관계를 항상 이루어야 한다.
14절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이 주를 살리셨다.
그리고 주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법은 음식으로 몸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주와 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떡(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는 것이다(마4:4)
사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식물은 몸이 된다. 그리고 그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식물은 주를 위하고 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일용하는 양식은 바로 몸이 된다. 그러나 지금 이 세대에는 식물과 약물이
인간의 죄성과 부패성 때문에 잘 못된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잘 못 사용되고 있다.
자신의 몸을 위하여,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배가 바로 하나님이다(빌3:19)
몸이 정욕에 젖지 말아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생식을 위한 본능이다. 인간의 본능가운데 ‘식욕, 성욕, 소유욕’은 본능이다.
자동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위해서 몸이 존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7장에서 남편과 아내의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하게 될 것이다.
15절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지체’ - 부분이며 조각, 기업의 한 부분 그리고 상속물이다.
요13장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그 ‘관계’이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내 안에서 네 몫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지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서로 섞여 버렸다. 나눌 수 없다.
창기의 지체는 음란성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욕은 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된다.
절대 성경의 뜻은 금욕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몸이 그의 지체가 되므로 절제가 되어야 한다.
16절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창기와 한 몸’
- 사람이 둘이 하나(한 육체)가 된다는 것은 인격은 둘이지만 몸은 하나라는 뜻이다.
17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주님과 한 몸 -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맛을 본 사람만이 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영과 생명에 접촉되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만유이시다. 그 분께 접촉이 되면 만유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롬5:1-2절의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요10:35절의 뜻을 확실하게 누려야 한다.
그러나 글로 표현하기에는 오해가 소지가 많아 생략하기로 한다.
18절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음행은 몸의 죄이다. 내적인 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영과 한 몸이 안 된 상태가 바로 죄인의 상태이다.
그 분과 하나가 되는 일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상태에서 한 몸 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다.
고전11장에 ‘자기 몸을 살펴라’는 말씀이 있는데 딴 것하고 한 몸이 되어
있으면서 또 주님과 한 몸이 되려고 하는 자신이 아닌지 살펴보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거짓 고백하는 일이요
양쪽과 다 한 몸이 되려는 음행이 된다.
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안에) 계신 성령의 전’ -몸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리스도들에게 있어서 배우자가 하나의 창기의 악역을 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주님과 하나 되는 일을 방해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가는 진로를 방해하면 아말렉과 같다.
부부의 원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합하는 원리를 알기 위한 자연계시 중에 하나다.
만약 둘이 한 몸이 되는 신비한 연합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쾌락만을 서로 주고받으면 그건 간음이다. 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고 팔면 음란이 된다. 법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영적으로는 간음이 된다.
그래서 간혹 부부간에 너무 돈독한 정이 들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배고픔을 모르는 경우다.
부부간의 사랑이 잘 못되면 음란으로 흐른다.
서로 쾌락을 주고받는 행위만으로 성을 생각하면 그건 음란이 된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이 애써 이를 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뒤에 따라 오는 거리낌 때문이다. 성령이 근심을 하신다.
특히 남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관계에 대한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일’ 그것이 바로 부부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한다. 이 일을 벗어나면 영적인 사람은 성령이 싫어하심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마주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나란히 걸어야 한다.
영적인 믿음의 남편과 믿음의 아내끼리 한 몸이 되면 거기에 신기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녀들까지 경건하게 된다.
성경의 구원은 가족적인 구원이다.
노아의 8식구, 다윗의 아들 솔로몬, 라합의 식구, 고넬료의 집 등의 예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고 하신다.
소돔 성에서 롯의 일가가 구원을 받았다. 창기(사위)들은 다 떨어져 나갔다.
만약 그들이 온전했으면 끝까지 다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거절하면 안 된다.
그 뜻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다 오케이다.
18절의 ‘자기 몸에게 범하느니라’ 신학적으로는 난해한 구절이다.
그러나 체험해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음란이 자기 몸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독소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만은 매우 약하신 분이다.
우리 개념으로는 어린아이와 같다.
우리가 아직 연약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아주 순수해져야 한다.
또 성령님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드신다. 사람이 단순해진다.
사실 성경의 최고봉의 신자들은 시편의 저자들이다.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어휘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경지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토양과 조건과 분위기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죄에게 붙들려 있지 말라.
진리를 몰라 죄인의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한다.
일단 어둠에서 빛으로 탈출하고 난 다음 주의 보혈의 효력으로 죄의식을 떨쳐야 한다
(요일1:7-9)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한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 몸 - 이 몸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성령 안에 내가 있는 몸이다.
아무나의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값으로 산 것’이라고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으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과 영광으로
나아가며 기쁨과 감사로 행복하게 살면서 자신의 그릇과
믿음의 분량대로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 사람은 망설이지만 시간은 망설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은 되돌아 오지 않는다 ".라는 말처럼
오늘도 내일도 ...순간 순간을 놓치지 말고
최고의 하루를 보내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