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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길에 대한 느낌을 적는다
이것은 "청류조영"이라고 부르는 한 네티즌이 쓴 글이다. 여느 문장에서 본 단순한 연길의 음식에 대한 느낌보다는 연길의 도시구도, 문화교육 등에 대한 감수도 볼수 있어 본지는 이를 편집, 전재한다. ㅡ편집자
이곳은 신기한 색채를 띤 한쪼각의 땅이다. 이 땅을 두고 적어도 변강, 빙설, 조선족집거구, 개고기, 불고기, 찰떡, 배추김치, 장국…이러한 단어들을 상상할수 있다.
하지만 진정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그같은 단어들을 구체내용으로 전환시키고 또 더 늘여 상상한다면 또다른 세절을 발견하게 되고 더욱 특수한 내용들을 개괄할수 있을것이다.
◎ 질서 잡히고 깨끗한 거리와 5다(五多)
처음 연길에 왔을 때 느낀 인상이라면 거리가 바로잡히고 깨끗하고 자동차 흐름량이 상대적으로 적은것이였다. 이는 국내 연해도시나 중부지역 차들로 막혀있는 도시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도시를 알기 위해 나는 연변의 지도 한장을 샀다. 이는 내가 낯선 도시에 갈 때면 꼭 챙기는 습관이다. 지도를 보면서 이 도시의 특점을 발견할수 있었다. 도로가 가로세로 놓여있었는데 분포를 보면 남북주향은 대부분 거리(街)로 되여있고 동서주향은 로(路)로 되여있었으며 한갈래 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 도시를 갈라낳고 있었는데 부르하통하라고 부르고 한갈래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데 연집강(연길하)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 두갈래 강은 시구역을 세쪼각으로 나누고 있었는데 이 두 강을 기억하면 연길의 기본적인 분포를 파악할수 있었다.
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이곳에 다섯가지가 많다는것을 발견할수 있다. 사우나, 노래방, 려관, 식당, 상점이 많은것이다. 그중 식당은 불고기성(城), 꼬치구이성(城), 개고기관(馆) 등으로 이름한것이 많았다. 그 밀집도는 연해 발달지역에서도 보기 드문것이였다. 리해하기 힘든것이라면 인구가 40만을 조금 넘고 뚜렷한 기둥산업이라고 없는 도시가 무엇으로 이같은 규모의 소비시장을 지탱하고 있는가 하는것이였다. 하지만 깊은 료해를 거치고나면 아주 론리에 부합되는 해석을 할수 있다. 이 도시는 소비도시로 그 주요 자금은 주로 민간로무수출에서 온 수입이였고 외래 인구의 관광소비였다.
당지 관계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지역에서 한국으로 로무를 나간 사람들이 해다마 벌어들이는 수입이 10억딸라에 달한다고 한다. 인민페로 따진다면 70억원에 달하는 액수인데 그중 대부분이 연변에서 소비된다고 한다.
또 관광업 수입도 가관인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광부문이 밝힌 수치에 따르면 근 5년래 연변의 관광수입은 루계로 126억원을 실현했는데 전 주 GDP비중의 12.6%를 차지하며 길림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길은 한국 서울과 국내 주요도시로 통하는 공항이 있었고 철도와 도로도 비교적 편리했으며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 일본, 로씨야 관광객들이 연길을 찾는데 특히 한국관광객들이 많다고 한다. 국내 관광객들은 장백산 및 주변지역 풍경을 관광하는외 울라지보스또크나 조선 변경지역 관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변지역의 겨울철이 비교적 길어 관광시장의 성수기, 비수기가 뚜렷했고 계절수입도 차이가 컸다. 호텔업을 일례로 성수기는 5월부터 시작되는데 호텔측은 시기에 따라 값을 올리고 10월중순부터 가격이 하락된다고 한다. 비수기 3성급 호텔 표준방의 최저가격이 1일 100원일때도 있었다.
상가의 경쟁도 놀랄 정도였다. 한평방킬로메터 되는 도시 중심지역에 경영면적이 만평방메터 되는 상가가 일여덟집 있었는데 그중 백화점 경영면적은 5만평방메터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상풍 브랜드도 구전했고 장식이 호화로왔으며 규모나 차원은 동북에서 성소재지나 대련같은 도시에서 볼수 있는것이였다.
◎ 이채로운 민족문화
연변지역은 민족특색이 농후하고 문화특징이 뚜렸했다. 기관단체 명칭이나 거리 표식이나 전부 조한문으로 되었는데 좌우로 배렬한다면 조선문이 왼쪽에 씌여있었고 한문이 오른쪽에 씌여져있었다. 만약 상하로 배렬한다면 조선문이 우에, 한문이 아래에 씌여있었다. 시구역이나, 상가나, 호텔이나 어디서도 조선말을 들을수 있었다.
연길은 "한류(韩潮)"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차림새는 한국의 멋이 다분했다. 전통적인 조선족복장이나 생활용품, 이를테면 분홍색, 심록색, 남색이 서로 어울린 한복이나 침상용풍도 시장에서 볼수 있었지만 로인들속에서 인기가 높은것 같았다.
조선족 음식은 내지의 대다수 사람들로 말하면 그다지 낯설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족이 집중된 곳에 와서 여러번 조선족 전통음식을 맛볼수 있다는것은 어느 누구나 느낄수 있는일이 아니다. 확실하게 말해 연길에서 불고기나 양고기꼬치구이, 랭면, 개고기를 운영하는 식당들이 많지만 순 조선족맛을 느낄수 있는 음식점을 찾으려면 어느정도 신경을 쓰고 찾아야 한다. 이곳에서 비교적 이름이 있는 조선족 전통음식점이나 특색음식점을 보면 진달래랭면이나 연길랭면, 풍무양고기꼬치구이, 동방불고기, 매화개장집 등이 비교적 이름이 있는것 같았다.
특히 언급할것은 고추장인데 이는 조선족음식에서 주로 사용되는 조미료라 할수 있다. 고추장 또한 품종이 많았다. 고추장에 대한 조선족의 애착은 맵고 얼큰한것을 좋아하는 사천사람들과 비슷한점이 있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갑자기 한국드라마 "대장금"에서 보던 장을 만드는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다.
아주 위생적이고 깨끗한것을 추구하는 조선족의 습관은 비교적 이름이 있다. 음식을 만들거나 거실을 거두거나 먼지 하나 찾아볼수 없이 정결하게 거두는것이 이들의 습관이였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려관이나 대소를 막론하고 거개가 정갈한 것으로 이름이 있었다. 우리 단위에서 집체적으로 조선족 료리사를 초빙했는데 밥과 료리를 하면서 한쪽으로 주방이나 유리창문의 기름자리를 청소하군 했다. 하여 밥과 료리가 완성되면 주방과 식사칸이 늘쌍 깨끗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지의 한족들은 조선족들은 음식을 만들어 팔 때 자기가 어떻게 먹으면 파는것도 역시 그정도로 만들기에 절대로 위생에서 등한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연길의 교육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 시적으로 유아교육으로부터 중학교, 대학에 이르는 교육구도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 연변대학은 교육부의 211공정에 편입되였다고 한다.
연변에서 매년 대학교 입시성적도 훌륭했다. 2008년 연변1중(조선족학교)에서 북경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9명(원문이 그러함-편집자), 청화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11명에 달했고 기타 중점대학에도 입학한 학생이 적지 않았다.
열정적이고 호객적인것은 조선족의 자고로 이루어진 민풍이였다. 조선족의 또다른 특점이라면 노래 잘하고 춤을 잘 춘다는것인데 민간단체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남녀로소 막론하고 춤판에 나서군 했는데 특히 혼례나 환갑 등 기쁜 날이면 더욱 잘 드러났다.
공공장소에서 모일 때 큰소리로 웨치는 불량한 행위도 때때로 볼수 있었는데 이것은 한족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연길시 남부에 모아산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산이 하나 있는데 산정에 오르면 연길시의 전경을 한눈으로 굽어볼수 있었다. 연길시는 동남북 세면이 비교적 높고 서면이 좀 평탄했는데 말발굽형태의 분지를 이루고 있었다. 부르하통하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유유히 흐르면서 도시에 한갈래 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 에 연길사람들은 다섯개 채색고리를 만들었다. 바로 다섯자리의 다리가 바로 그 고리였다.
2008년 11월 4일
연변방송
첫댓글 그림만 봐도 마음에 와닿네요..좋은글..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연길은 발전 지속형도시고 앞으로도 끊임없는 발전을할 도시입니다.
고향의 소식에 언제가 귀가 솔깃해요.감사합니다.
좋은글 올려주서서 갑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연길이 이렇게 좋을줄 몰랐네요 잘보고갑니다
글 감사히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