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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을 데리러간 레위인
삿 19:1-9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3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4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 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5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6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7 그 사람이 일어나서 가고자 하되 그의 장인의 간청으로 거기서 다시 유숙하더니
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9 그 사람이 첩과 하인과 더불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삿 19:1-9 / [어떤 레위인의 소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었을 때 에브라임 산악지대 북쪽 끝에 어떤 레위인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어떤 여인을 소실로 얻은 일이 있었다. 2) 그런데 그 여인이 여러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며 돌아다니더니 결국 남편 집을 나와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거기서 넉 달째 머물러 있었다. 3) 그래서 그 남편이 종과 나귀 두 필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자기 아내의 마음을 달래 집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아내가 친정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반가이 맞이하여 안으로 모셨다. 장인 또한 사위를 보고 반색을 하였다. 4) 장인이 며칠 쉬었다 가라고 하자 그는 식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흘 동안 처가에서 지냈다. 5)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길을 떠나려고 짐을 꾸리자 장인이 그를 붙들며 말하였다. `이보게, 먼 길을 가려면 기운을 차려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들어가 밥이라도 몇 술 뜨고 떠나지.' 6) 그래서 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밥좀 먹고 술을 몇 잔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장인이 사위에게 말을 건넸다. `이보게, 별일 없으면 자네 오늘 밤만 더 여기서 묵고 가지 그러나?' 7) 그래도 그가 길을 떠나려 하였지만 장인이 하도 간청하는 바람에 하루를 더 묵고 가기로 하였다. 8) 다섯째 되는 날 아침 그 레위인은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려고 짐을 꾸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인이 저녁때까지 쉬었다가 기운이나 차리고 떠나라고 붙드는 바람에 또 주저앉았다. 그래서 장인과 함께 밥먹고는 9) 자기 아내와 종을 데리고 길을 나서려 하는데 `저녁때도 다되고 하였으니 오늘 저녁도 묵고 가는 게 어떻겠는가? 저렇게 해도 다 저물어 가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 오늘 밤도 같이 놀다가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게' 하고 장인이 또 그를 붙들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레위 사람의 첩이 행음하여 유다 베들레헴으로 도망갑니다. 도망 간 여인을 데리러 가는 레위인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3a) 이스라엘 민족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구할 때에 하나님은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 8:7). 본문에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 말씀이 기록되고 있는 사사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죄악상을 말하는 것이고, 기준이 없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부도덕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레위인이 등장합니다. 첩을 얻는 것이 당시의 문화적인 상황으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창 2:24). 레위인은 모세와 아론과 같은 지파 사람으로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역할을 하는 지파였습니다. 더욱 경건해야 할 사람들마저 여느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레위인의 첩은 이스라엘 사회의 신앙적인 무기력과 타락상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예입니다. 더욱이 첩이 행음을 하고 자기의 아버지 집으로 도망갑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녀는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레 20:10). 하지만 이 레위인은 율법을 무시한 채 죄를 가볍게 여기고, 그 여인을 다시 데려오려고 그녀가 도망한 곳으로 향합니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3b-9) 자기 잘못으로 친정으로 돌아온 딸을 그의 남편이 데리러오는 것을 보고 첩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리하여 사위를 환대합니다. 장인은 딸에 대한 사위의 사랑이 회복되기를 기대하였고, 이러한 환대를 통하여서 이 레위인은 이 여인뿐만 아니라 처가와의 관계도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장인의 융숭한 환대와 자신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계획하였던 것보다도 훨씬 오랜 시간 베들레헴에 머물게 됩니다. 지체에 지체를 더하다가 출발했지만 노정에 오르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였습니다.
적용: 당신에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당신의 마음 문 밖에 있나요? 아니면 당신의 마음 문안 중심에 계신가요? 하나님께 당신의 중심을 내어 드리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거룩함도 함께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마음이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넘겨드릴 때 비로소 그분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조치를 취하실 것입니다.
< 설 교 >
부패의 원인과 회복의 길
삿 19장 1~37절 / 양인국목사
1. 17-18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에 대하여 말하였고, 19-21장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부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내용들을 통하여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영적으로 부패할 때 반드시 도덕적 부패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이 한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2. 17-19장까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물들, 즉 미가와 그의 어머니, 미가의 집에 고용된 레위인, 단지파, 첩을 둔 레위인, 레위인의 첩, 그리고 첩의 아버지, 레위인 일행을 유숙시킨 에브라임 사람, 기브온의 불량배 등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 부패가 도덕적 부패를 가져오고 도덕적 부패는 결국 모두를 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단지파는 영적 무지로 인한 왜곡된 신앙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졌고, 단지파는 여기에 더하여 폭력으로 형제의 것을 탈취하는 죄까지 범했다. 레위인들 역시 영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부패했다. 미가의 집에 제사장으로 고용된 레위인은 보다 더 안정된 삶을 위하여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탐욕이 이끄는 대로 행하였다. 물론 첩을 둔 레위인과 그의 첩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부패에 빠져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인이 첩을 둔다는 것 자체 그리고 여인이 첩이 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 부패이고, 또한 행음하고 집을 나간 첩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기 위하여 베들레헴까지 찾아간 레위인의 행위는 레위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도덕적 부패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냐민에 속하는 기브온 사람들은 형제 길손에 대하여 무관심했을 뿐만 아니라 불량배들까지 용납하고(삿19장), 그들의 불법에 대하여는 관심도 두지 않고 자기 지파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들의 편을 드는 도덕적으로 무감각 할 정도로 부패했다(20장).
이들 외에도 자기 집을 찾아온 자들을 기쁘게 영접했던 레위인의 장인과 레위인 일행을 유숙하게 해 주었던 기브온에 거류하고 있는 에브라임 사람 노인도 부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위인의 장인은 레위인의 첩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음하고 집으로 돌아 온 자기 딸을 책망하기 보다는 거두어 주었고 또한 행음한 자기 딸을 다시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찾아온 레위인에 대해서도 어떤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한 기브온에 살고 있는 에브라임의 노인은 불량배들의 횡포에 못 이겨 자기 딸과 레위인의 첩을 불량배들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레위인을 보호하려고 한 행위도 도덕적 무감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한 남자를 보호해 주기 위하여 두 여성을 희생시키고자 한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급한 예들만 보더라도 당시 이스라엘이 얼마나 심각하게 영적으로 부패했고 또한 도덕적으로 부패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을 거룩함으로 인도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레위인들도 부패했고 또한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부패했다. 이처럼 당시 이스라엘은 총체적인 부패함에 빠져 있었다.
17장에서부터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총체적으로 부패한 원인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바르게 인도해 줄 수 있는 영적 지도자의 부재였다. 부패의 사건을 말할 때마다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18:1,19:1)”라는 말씀이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여기 언급하고 있는 “왕”이란 모세나 여호수아처럼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지도자를 말하고 있다. 물론 모세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지도자였지만 또한 정치적인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보다 우선한 것은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반드시 형통하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도자가 없을 때 사람들은 영적인 관심에서 떠나게 되고 그때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사회는 피폐해 가는 것이다. 레위기17장부터 21장까지에서 언급된 부패와 관련된 사건들은 모두 이와 같은 사실들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동일한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왕이 부패하여 영적 지도력을 상실했을 때 그 시대는 피폐(疲弊)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아합과 아하스 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우상숭배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을 때 이스라엘은 그들의 그릇된 지도력으로 인하여 우상숭배에 빠졌고 이로 인하여 사랑을 근간으로 한 사회는 탐욕이 근간이 되었고 결국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여 힘 있는 자들의 온갖 횡포가 자행되는 사회로 변해 버렸다. 특별히 아합시대에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나봇은 영적 지도력을 잃어버린 시대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부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때 반드시 형통함에 이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인도하되 무엇보다 먼저 그들을 영적으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있던 시대는 시간이 더해 갈수록 복된 사회로 세워져갔다.
다시 한 번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을 때, 이스라엘의 환경을 보며 모세의 지도로 인하여 그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할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진 초기 이스라엘의 환경은 절망적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고, 또한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전적으로 바로에게 의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의 명령에 따라서 감당하기 힘든 고역을 감당해야 했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자식까지 버려야 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적환경뿐만 아니라 내적 환경도 절망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굽에서 4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사는 동안 그들의 삶에서 많은 것이 애굽화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정체성조차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총체적인 위기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주심으로 그로부터 영적인 지도를 받도록 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회복할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자신들이 신뢰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굴복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었고, 또한 불가능하게 생각하고 있던 애굽의 노예됩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은혜도 체험하였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할 때 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을 체험했다.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군대로부터 구원해 주신 사건과 사람이 생존하기에 어려운 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일용할 양식을 더해 주신 하나님의 능하심에 대한 체험이야 말로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았던 40년을 돌아보면 그들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출애굽했지만 모세의 영적 지도로 말미암아 불안전한 것들을 극복하며 약속의 땅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가운데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세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영적 지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지속적으로 영적 지도를 받으며 살 때 우리의 삶은 시간이 더할수록 보다 더 온전함으로 세워질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정리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말씀은 “영적으로 부패할 때 반드시 도덕적 부패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이나 공동체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면 결국은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지식은 믿음의 사람로 하여금 개인이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개인이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언제나 영성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영성의 부재는 영적 지도의 부재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길은 영적 지도력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보이는 곳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등에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개인이나 사회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부패해 있으면 반드시 도덕적 부패가 따르기 때문이고 도덕적 부패 가운데 빠지면 결국은 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중요한 사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한 시대를 변화 시킬 수 있는 변화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많은 사람이 더불어 복된 삶을 살고자 수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회를 보다 더 좋은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제도들을 연구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일과 믿음의 사람들이 하는 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은 문제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상만 치유할 뿐 근본적인 것을 치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로 인하여 현재 나타나고 있는 증상이 완화될지라도 곧바로 다른 증상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영적인 부패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영적인 회복에 힘쓴다. 그리고 영적인 부패가 치유되고 영성이 회복되면 그 사회는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지식을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 교회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킬 수 있는 변화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으로서 개인과 공동체의 변화를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이나 사회를 진정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무엇보다도 영적인 회복을 위하여 힘쓰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이 시간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우리와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 주시고 마땅히 행할 일을 행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로 인하여 우리로 인하여 우리의 이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다 더 아름다운 것으로 세워지게 해 주옵소서. 아멘!
선을 넘지만 않으면 되는가
사사기 19:1~9 / 날마다 솟는 샘물 묵상(박희원 목사)
이제 우리는 사사기의 둘째 결론을 다루게 됩니다. 첫째 결론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던 미가의 집안 이야기와 단 지파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한 이야기였고, 둘째 결론은 역시 에브라임 산지에 거류하는 레위 사람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벌어진 일이 12지파 전체로까지 번져가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결론(17~18장)은 미가 가정의 종교적 범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둘째 결론은 이름 없는 레위인의 도덕적 타락과 사명의식 결여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미가가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듯이, 오늘 등장하는 레위인도 자기의 행위에 대해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1-3절).
여기서도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레위인이 나타납니다. 그가 어느 성읍에 살았는지가 특정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레위인도 레위인의 본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첩과 하인을 들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첩을 두는 것은 정상적인 가정이라 할 수 없으며, 레위인에게는 더욱 어울리지 않는 관계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제사장에 대해서만 결혼에 관련된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레위인은 첩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명시적 규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레위인에게 요구되는 정결함과는 거리가 있는 행위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게다가 그 첩은 행음을 하고 그 레위인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첩에게 잘 말해서 데려오고자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끌고 갑니다. 이를 보고 이 여자의 아버지가 기뻐하며 그를 맞이하는데,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녀가 간음의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단죄를 해야 하는데 단죄도 이뤄지지 않았고, 행음하여 도망한 여인을 다시 데려오려 한다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기록된 성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4-9절).
정식 결혼이라 볼 수 없는 관계이지만, 여하튼 장인과 사위가 삼일 동안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다가, 장인이 사위에게 계속 더 있으라고 권하며 이틀을 더 붙잡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단지 에브라임 산지 구석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유다 베들레헴의 거리가 얼마나 멀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만약 그의 집이 에브라임 산지 중에서도 북부에 해당하는 세겜 주변이라고 한다면 걸어서 다녀야 했던 당시로서는 아침 일찍 출발해도 저녁에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걸어서 15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가까운 벧엘이라 하더라도 7~8시간을 걸어야 합니다. 즉 아침 일찍 출발하면 오후 늦게, 저녁에야 도착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레위인이었고, 안식일에 이동하는 것은 안 되니 안식 후 첫날에 자기 집에서 출발하였다 하더라도 베들레헴까지 가는 데 하루는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5일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이 레위인은 안식일을 지키기가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만약 안식 후 첫날에 출발한 것이 아니면 이 레위인은 이미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더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이 레위인이 안식 후 첫날에 출발했다 하더라도, 사실상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3일까지만 머무는 것이 맞았고, 무리해서 머물더라도 5일째 날에는 아침 일찍 출발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일 전에 하루라도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은 장인이 붙잡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주일 준비를 위해 토요일을 조금 여유롭게 비워두지 않고 토요일 밤까지 다른 데 있다가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가려 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그래도 안식일을 지키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레위인이 안식일을 준비하고 지키는 데 그리 큰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국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데에 소홀했던 레위인에게 큰 어려움이 임하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명확한 규정은 없지 않느냐, 또 안식일을 지키기만 하면 되지 그 전날에 안식일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정확하게 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 것만 안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주신 것은 정확하게 안식일 24시간만 지키면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미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법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첩을 얻는 것을 금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문란한 삶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켜야 할 법의 경계까지, 죄로 넘어가는 바로 그 경계까지 다 누려야겠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가장 좋게 보시는 것을 싫어하고 죄를 갈망하면서도 그저 그 선만 넘어가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식의 태도는 결국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누리지 못하게 되는 태도입니다. 혹시 나는 이처럼 죄의 경계선에서 서성이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고, 또 그렇게 선을 넘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머물려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면 잘 권면하여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걷도록 해야겠습니다.
말씀이 없는 삶
삿 19:1-9 / 은석교회
신자의 삶은 세상의 삶과는 달리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삶은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굳게 세우는 것은 말씀을 세움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말씀이 허물어지고 무시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특별한 자로 구별되어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은 참으로 특별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살아가는 것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이유나 목적 등 모든 것은 어둠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을 담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와 신자의 삶은 특별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된 우리의 삶이 말처럼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가를 묻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어둠의 사람과 똑같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뭔가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힘썼다는 느낌이 없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뭔가 양보하지 않고 어둠에 철저하게 맞섰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 특별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자가 왜 특별한 존재인지, 그리고 특별한 존재에게서 보여져야 할 특별한 삶은 무엇인지, 그리고 특별한 삶을 잃어버렸을 때 보여지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봄으로서 특별히 구별된 자로서 특별한 삶을 회복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다운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역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절)라는 말로써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17, 18장과 마찬가지로 레위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레위인이 등장해서 그들의 잘못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어떻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특별히 구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레위인이 부패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극도로 부패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1절에 보면 이 레위인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사실 당시는 남자가 첩을 얻는 것은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인이 첩을 취한 것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타락으로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첩에 대한 레위인의 행동입니다. 2절에 보면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첩이 행음을 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행음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0: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레위인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다면,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이었다면 분명 말씀에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힘썼을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인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었다면 레위인의 첩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말씀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3절에 보면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고 말합니다. 레위인은 첩을 데려오기 위해서 첩의 아비의 집으로 찾아갑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행동이 곧 그 속에 왕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레위인이 첩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안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는 첩을 죽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이스라엘이었고, 특히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존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부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레위인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책망을 하고 그들을 옳은 진리의 길로 인도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인의 구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레위인조차도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쪽으로 행동합니다.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어버릴 수 없기 때문에 진리 문제는 팽개치고 어떻게든 여인을 데려오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은 이미 관심 밖입니다.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힘씁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레위인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레위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갑니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까? 사실 어쩌면 우리는 레위인처럼 말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언제나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좇아 행하면서, 그것 때문에 말씀이 무너지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말씀에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말씀에 어긋난 잘못된 것을 본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비록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고 기쁨이 되는 것이면 묵인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왕이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써 구출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권면하고 가르치기 위한 존재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위해서 따로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 손으로 벌어들이는 소득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먹고 살아감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가르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인은 자신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증거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일을 게을리 하고 자신의 삶에 치우친다면 결국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해도 그들 안에서 그것을 경고하고 책망할 사람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보다 더 큰 심각함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그것을 경고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잘못됨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죄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죄가운데 있을 때 그것을 발견하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죄를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의 복된 모습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레위인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어찌 보면 어두운 바다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길을 모르는 어둠에서 바른 길을 인도해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등대가 무너지면 어둠에 있는 배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하고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레위인마저 등대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이스라엘과 함께 어둠에 몸을 두고 살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4절부터 보면 첩의 장인이 레위인을 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인이 레위인을 붙들자 처음에는 삼일을 유숙합니다. 나흘만에 길을 떠나려고 하자 장인이 '떡을 조금 먹어 기력을 도운 후에 길을 떠나라'(5절)고 합니다. 그 말에 레위인이 다시 함께 먹고 마시면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하나 장인이 간청함으로 다시 유숙하게 됩니다(7절). 그리고 다음날도 역시 떠나고자 한 마음대로 떠나지를 못하고 유숙하게 됩니다(8,9절).
레위인의 장인은 아마 행음을 한 자기 딸을 위해서 레위인을 극도로 대접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붙드는 장인보다는 붙들리는 레위인에게 있었습니다. 말씀보다는 첩을 사랑했기 때문에 첩의 장인이 붙드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레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고자 했다면 장인이 붙든다고 해도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적으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매몰차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말씀은 결코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산다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기쁨이 되는 모든 것이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을 더욱 중요한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마음에 세워두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에 대해서 듣기는 했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하기 때문에 들은 것으로 그쳐버릴 뿐이지 말씀이 삶에서 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삶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이 나무라면 삶은 가지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이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대로 가지인 우리는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라죽고 말뿐입니다.
우리의 삶이 말씀과 상관이 없이 존재한다면 그 삶은 이미 죽은 삶입니다. 말씀과 상관이 없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삶은 전혀 가치 없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평가입니다. 비록 우리는 착한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일을 하면 그 인생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아닙니다. 세상이 칭찬하는 것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칭찬은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칭찬을 듣는 자인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주님에게 붙어 있는가 아닌가를 보실 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이러한 주님의 평가에 대해서도 전혀 두려워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어떤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덤덤할 뿐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1:7절의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는 말씀과 같은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고 사람들의 귀에서 맴돌 뿐 그 마음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움직이는 심령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이러한 상태가 아닙니까? 주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있다는 착각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은 죽은 삶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세상의 재미와 기쁨이 있기 때문에 잘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신자로서 구별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구별된 존재답게 구별된 삶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윤리와 도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양보되고 타협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희생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레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레위인의 모습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말씀으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의 상황과 여건 때문에 말씀을 뒤로하고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적인 관계 때문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진정한 레위인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된 삶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인해서 우리의 잘못됨을 발견하게 되고 애통함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레위인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답게 그에게서 레위인의 삶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말씀을 굳게 세우고 말씀에 대해서만큼은 그 무엇도 양보하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흔적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여러분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워져야 합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을 때 가차없이 책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레위인의 바른 직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직무를 잃어버릴 때 가정 전체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는 부모의 기쁨을 위해서 자식에게 세상적인 출세나 성공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에게 기쁨이 되고 재미가 되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뒤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무너진 것과 같은 가정의 무너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에 대한 경고가 없고 책망이 없는 가정이 바로 말씀이 세워지지 않은 무너진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녀가 부모의 원함대로 안된다고 할지라도 신자된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에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 또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집단인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 말씀은 자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저는 '말은 맞지만 교회의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즉 그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교인들이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말은 맞다는 것은 말씀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말씀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교회를 굳게 세워야 한다는 자기 기쁨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 때문에 말씀이 무시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둠의 세상에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존재로 부름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존재는 그 삶 또한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한 삶입니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고 말씀을 굳게 세움으로서 세상의 어둠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만약 신자가 이 삶에 게을리 하거나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세상의 붙듦에 붙들리고 세상과 함께 어둠에 머무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부터 죄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삶인데도 그런 자신에 대해서 전혀 책망함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삶의 기준과 가치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책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에 머물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뿌리치고 날마다 말씀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참된 레위인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으로 존재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다스려지고 순종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원하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말씀을 굳게 세우는 삶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신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을 책망하시고, 경고도 하시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참된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에 등불로서 존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등불이 되시고 그 등불을 따라 인생의 길을 걸어간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하늘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으로 끝난다면 그가 바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사는 것을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레위 가문과 베냐민 지파가 악을 행함
사사기 19:1-9 / 김두옥 목사
◑ 오늘의 말씀 묵상 ◑
※ Hallelujah!
- 어제는 3월 마지막 날, 다섯째 주일로서 섬기시는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은혜가 넘치며, 신령한 복을 많이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 오늘은 4월 1일 정식으로 새봄의 첫날에 복을 많이 누리는 한주간의 월요일, 평강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 죄악의 위기 앞에 답답 해 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 이유와 해답을 찾는 아침이 되시고 한 주간을 회개하고 믿음의 힘으로 환경을 이겨내시기를 축복합니다.
◑ 본 문 ◑
◑◑◑본문 이해와 요약 ◑◑◑
◗ 19장에서는 왕이 없던 사사 시대에 죄악으로 인한 타락하고 부패했던 죄의 나병 환자 같은 한 사회와 공동체의 범죄의 사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에브라임 산지에 한 레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첩이 있었고, 이 첩이 행음을 하고 본가로 도망 친 것으로 시작됩니다.
- 그래서 레위 사람은 넉 달이 지난 후에 첩을 데려오기 위해 처가로 향하였습니다.
- 레위인이 처가로 가서부터 다시 자기 집으로 오는 도중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에서 비류들에게 당한 봉변의 전말을 소상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 쾌락에 대한 성도의 마음가짐을 제거함으로 죄악이 연속되는 것을 방지해야 합니다.
- 영적 타락과 육적 쾌락에는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으므로 이 쾌락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하는 가장 큰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온 세상적인 유혹들을 말씀으로 단호하게 물리치심으로써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 한편 레위인은 장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머물다가,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 무리해서 출발함으로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 비류들에게 행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 레위인은 안식일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어 자기 집으로 귀향 할 채비를 하였습니다.
- 이런 레위인의 태도는 달리 보면 매우 신앙적인 자세인 듯이 보입니다만, 이는 레위인의 위선적인 일면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 첩을 데리고 살면서, 더욱이 행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처단하지 않는 레위인이 진실된 믿음으로 안식일을 준수할 의향이 있었다는 것은 다소 의심스럽습니다.
- 그는 단지 레위인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얽매여 안식일을 지켰을 뿐이기에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최후의 보류가 되는 영적 지도자의 타락상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선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유사한 성적 범죄가 만연한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도 큰 경종을 울려 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 결론적으로 레위 사람과 그의 첩에 관한 일화를 통해 사사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 같은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기막히는 위기 속에서의 레위인의 태도는 회개보다는 그가 자기 첩을 대신 희생시키는 방법을 취했던 것입니다.
- 이 타락과 악행의 사건은, 사람이 죄로 인해 우둔해지면, 더 큰 위기가 닥쳐 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 또한 하나님을 의뢰하는 대신 남을 희생시키고, 또 온 민족을 전쟁으로 몰아넣게 되었던 것입니다.
- 그 결과적으로 한 지파를 몰살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레위인의 경우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 레위인은 자기첩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기 위해 더욱 잔인하게 그 시체를 12개로 쪼개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보내었습니다.
-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비류의 응징을 호소하였고, 첩의 죽음이 자기 때문임을 알고 회개해도 부족한데, 그는 전혀 자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시체를 12조각을 내는 참으로 흉악하고 잔혹함을 서슴없이 드러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즉시 이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 적용한다면 ◖◖◖
♥ 오늘의 핵심 (P.S)
☞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의 기쁨이다. (사사기19장4-8절)
◈본 구절의 핵심(PS) 의미를 돕는다면;
▶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 4-8절을 살펴보면 레위인의 첩 장인 어른이 자기 사위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사실 성전 봉사의 일을 감당하는 레위인이 첩을 얻었다는 자체가 영적 지도자가 죄라는 나병환자가 되어 죄의 감각을 상실하여 얼마나 부패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 더욱이 본부인이 아닌 첩의 주제에 바람이 났다니 레위인의 첩의 행실이 한마디로 죄악을 먹고 마시는 좋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 여자는 자기의 악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혼인을 하고서도 여전히 성적으로 타락하고 부정한 행실을 서슴없이 자행하였습니다.
- 세상 모든 죄악들이 다 나쁘고 악하지만, 특별히 음행이나 성적 범죄는 더욱 사악하고 치명적인 죄악입니다.
- 왜냐하면 음행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을 더럽히고 훼손하는 엄청난 불경죄이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은 성경 구석구석에서 성적 범죄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그 죄악의 치명적 결과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반면교사를 삼아 믿음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삼가하고 피하여 특별히 음행은 더욱 경계하고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런데 아내를 찾기 위해 4개월이 지난 후에 장인 집에 갔더니 레위인의 장인은 자기 딸이 도망 나온 모습을 보면서도 죄를 질책하지 않고 받아주었고, 또한 생사와 행복의 여부가 오르지 사위에게 달려 있음 알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위 대접에 지극 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 그래서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만류하여 하루 더 머물게 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딸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 사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 딸의 행복을 보장 받는 길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 이와 같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 가정에 자녀들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면, 반드시 그 바라는 바가 성취 되듯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는 그 마음의 소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들의 순종이 부모님께 응답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의 소원 또한 반드시 응답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구약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신 것은 에녹이 이 소원을 가지고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대접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히브리서11장5절에서 “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 기도의 응답과 관련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17장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 소원의 내용이나 크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오늘 이아침에 성령님께서 묻는 것은 “ 지금 나의 믿음과 섬기는 신앙삶이 하나님께 얼마나 기쁨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죄로 인한 근심걸이가 되는 모습은 아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인지? 스스로 자문자답과 자가진단 해 봅시다. 온전한 믿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인가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인자가 다시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안타깝게 찾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 시편145편19절에서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 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이기를 원한다면, 먼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쁨이 되길 힘써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만 열심히 힘쓰는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소원이 강렬해도 응답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 바울처럼 다윗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는 것이 선행 과제입니다.
-고린도후서5장 9절에서“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라고 하였습니다.
- 사도행전8장 22절에서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의 모든 수고에 축복과 상급이 따릅니다.
- 시편37편4절에서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 운동장에서 달음질한다고 모두가 상을 받게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강렬한 소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사람들의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마음의 소원을 이룬 믿음의 위인들이 지닌 공통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니 오늘 4월의 첫날 새 봄을 맞이하면서 지금 내가 속에 있는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일터에서 지금보다 좀만 더 헌신하고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리라 확신하고 결단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레위인과 첩
사사기 19장 1~10절
오늘 본문 사사기 19장 1절을 한 번 보십시오. 말씀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성경을 한 장만 앞으로 넘어가 보십시오. 사사기 18장 1절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8: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한 장만 더 앞으로 가서 사사기 17장 6절을 보십시다.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에서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 보이십니까? 사사기는 무엇이 없는 시대 입니까? ‘왕’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방 나라들은 인간이 왕의 위치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그의 백성들을 친히 다스리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기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갔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참 왕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자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사람들이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이나 율법의 규례를 따라 삶을 살아가지 않다 보니 결국 마음의 탐욕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탐심과 정욕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사회에 나타나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폭력’과 ‘성적 타락’ 입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사회에 나타나는 이 두 가지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레위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1절을 보니까 그가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첩은 두 명 등장합니다. 한 명은 기드온과 결혼하여 아비멜렉을 낳은 첩이고, 나머지 한 명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의 첩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의 문화로 접근하면 첩은 정식 부인보다 낮은 지위를 갖고 있으며, 정식 부인이 불임으로 인해 아이를 갖지 못한 경우에 첩을 얻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만, 그보다는 성적인 욕망을 위하여 계약적으로 첩을 맺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 레위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위하여 첩을 데리고 있다는 것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 보겠습니다만 그는 사람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습니다. 사사기는 이 한 레위인의 모습을 통하여 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그의 첩이 그를 거슬러 행음하고”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번역은 “첩이 그에게 화가났다” 또는 “그를 싫어하다”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첩이 레위 사람을 피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떠났을 때 레위인이 그를 찾아가서 다정한 말로 그녀에게 돌아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레위인의 첩이 ‘행음 했다’는 해석보다는 ‘첩이 레위인을 대항하여 화가 났다’는 해석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레위인과 첩 사이에 불화가 생겨 첩이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 친정집으로 떠난 것이죠. 첩이 집을 떠난 지 넉 달이 지났습니다. 아마도 그 동안 레위인의 마음에 쌓였던 첩을 향한 분노와 앙금이 가라앉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첩과 화해할 마음이 들어 그녀를 찾아 베들레헴으로 떠납니다. 길을 떠날 때 자신과 첩을 태울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그가 첩을 데리고 오겠다는 의지가 단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도착했고, 첩은 그를 아버지 집으로 인도했습니다. 여자의 아버지는 레위인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그도 그러할 것이 출가한 딸을 다시 집에서 데리고 있는 것은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던 시절입니다. 게다가 레위인이 먼 길을 마다하고 딸을 다시 데려가기 위해 왔으니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레위인이 매우 반가웠을 것입니다. 이 때부터 레위인 사위에 대한 베들레헴 장인어른의 아낌없는 환대가 시작됩니다. 당시 풍습에 따르면 사위를 대접하는 기간은 보통 3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머물고 쉬어 가라는 장인의 권유로 레위인은 베들레헴에 무려 5일이나 머물게 됩니다. 이 당시 레위인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사명은 온데 간데없고, 자신의 첩을 찾기 위하여 허송세월 하는 레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레위인의 모습은 사사기의 마지막 사사였던 삼손을 떠오르게 합니다. 사사로서 맡은 이스라엘 구원이란 사명에는 아무런 관심 없이 자신의 탐욕과 육체적 정욕만을 좇아 살아갔던 삼손, 그 역시 자신의 삶을 허송세월 하며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왕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 삶을 의미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인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열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육체적 탐욕을 위해 첩을 두고, 첩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만 보이고 있습니다. 육체적 탐심이 그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안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으셨습니까? 아니면 단지 자신의 탐욕과 육체적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허송세월 하는 허무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계속되는 장인의 환대를 뿌리치지 못하던 레위인은 가장 좋지 않은 타이밍에 베들레헴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날이 저물려고 하는 늦은 시간에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까지 험한 길을 걸어가는 위험한 여정을 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레위인이 얼마나 무분별한 사람이며 충동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시대는 결국 절망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사명을 버린 이 한 사람의 레위인 때문에 나중에 결국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하나가 사라질 정도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왕은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 왕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삶의 왕입니까? 만일 내 자신이 내 삶의 왕이라면 우리들은 영적 사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빨리 우리 자신이 보좌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참 왕 되시는 자리에 앉도록 주님만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사 시대를 종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사람이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그가 속한 한 가정, 한 교회, 한 사회가 변화합니다. 우리 삶에 거짓 왕들을 몰아냄으로써 영적 사사시대를 끝내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참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