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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울드레서 (SoulDresser) 원문보기 글쓴이: 천 혜 향
소울드레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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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너희가 이미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기회다. 너희는 그저 이미 알고 있는 걸 기억해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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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은 어딘가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너희가 이미 그곳에 있고, 에전에도 항상 있어왔다는걸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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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신이 너희 삶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존재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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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너희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선택한 대로 할 수 있는 힘,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것을 너희에게서 도로 빼앗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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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 -말- 행동
세가지가 함께 합쳐져서 하나의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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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생각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2. 두려움은 에너지처럼 끌어당긴다.
3. 존재하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은 궁극의 실체. 그것만이 유일하고 전부다.
사랑의 감정은 너희가 신을 체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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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더없이 기쁜 순간은
너희가 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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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모든 요구를 언제나 들어주리라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요구 자체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걸 직관으로 이해할 때 기도하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된다. 그것은 결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의 진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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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말은 창조의 엔진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다.
'나는' 이라는 두 단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그 말들은 우주에 보내는 진술이며, 명령이다.
이제 '나' 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건
뭐든지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나+성공을 원한다(want)'는
성공이 모자라는(wanting) 너를 만들어내며,
'나+돈을 원한다'는 돈이 모자라는 너를 만들어낸다.
생각과 말에는 창조력이 있기에 다른 결과는 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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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want)는 너희의 진술은
정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wanting)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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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만일 네가 성공과 돈을 원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네 생각과 말과 행동은 서로 일치되고,
따라서 너는 확실히 이것들이 모자라는 체험을 갖게 된다.
“신이시여, 제가 성공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말과 행동으로 옮겨진 그런 관념이나 생각은
그것들이 참된 앎에서 온 것일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는 데서가 아니라,
결과가 이미 만들어졌음을 깨닫는 데서 온 것일 때,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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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는 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선택권을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한 너희의 의지는 너희에 대한 삶의 의지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너희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신이 너희가 하는 일에 여러모로 마음쓰리라는 생각은 너희가 빠져있는 크나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말을 들으면 무척 서운하겠지만, 나는 너희가 뭘하든 마음쓰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라고 아이들을 밖에 나가 놀게 할 때 아이들이 뭘 하는지에 신경쓰는가?
그 애들이 술래잡기를 하든 숨바꼭질을 하든 흉내놀이를 하든, 그것이 중요한 문제일까? 아니다.
물론 너희는 늘 애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애들이 다친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애들을 도와주고 치료해주며, 다시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다음날 다시 나가 놀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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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히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외부 세계를 가라앉혀라. 그러면 내면 세계가 네게 시야sight를 줄 것이다. 너희가 찾아야 하는 게 이 통찰력in-sight이다. 하지만 너희가 외부 현실에 지나치게 깊숙이 빠져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니 가능하면 자주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애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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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영혼은 언제나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앎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영혼은 체험하고자 한다.
네가 자신의 관대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의 관대함을 펼치는 뭔가를 하지 않는다면, 너는 오직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가 자신의 친절함을 알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면, 너는 자신에 관한 개념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네 영혼이 지닌 유일한 갈망은 자신에 관한 가장 위대한 개념을 가장 위대한 체험으로 전환시키는 것. 개념이 체험이 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색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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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사랑이 존재하려면, 또 자신을 순수한 사랑으로 인식하려면 그것의 대립물도 존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신은 자진해서 그 위대한 극단, 사랑의 절대 대립물, 곧 사랑이 아닌 모든 것, 오늘날 두려움이라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두려움이 존재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사랑은 자신을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그 대립물 사이의 이원성을 창조한 이 사건이 바로 인간들이 여러 신화들 속에서 악의 탄생이니 아담의 타락이니 사탄의 반란 따위로 표현한 것이다.
너희는 순수한 사랑을 신이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던 것처럼, 비천한 두려움을 소위 악마라는 배역으로 의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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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나눈 것은 나 자신을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해줄 내 부분들을 충분히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창조주가 자신이 창조주임을 체험으로 아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 무수한 부분들 각각에게(내 영적인 자식들 모두에게) 전체인 내가 갖고 있는 창조력과 똑같은 창조력을 부여해줬다.
너희의 여러 종교가 너희는 신의 "형상대로, 신과 닮은 꼴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을 신으로 인식하기 위해서였다. 나로서는 너희를 통하는 것 말고는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너희에 대한 내 목적은 너희가 자신을 나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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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안다는 것과 그것을 체험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영혼은 자신을 체험으로 알고자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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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일단 물질 우주로 들어가면, 너희는 자신에 관해 아는 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는 그 대립물을 알아야 했다.
너희가 키가 작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것을 깨닫을 때까지는 자신이 키가 크다는 걸 알 수 없다. 너희는 말랐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뚱뚱함이라는 자신의 일부를 체험할 수 없다.
너희는 너희 아닌 것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자신을 자신으로서 체험할 수 없다. 이것이, 즉 너희 아닌 것이 너희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상대성 이론의 목적이자 모든 물질적 삶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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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물질계로 들어오면서 자신에 관한 기억을 지웠다. 말하자면 성(城) 안에서 그냥 깨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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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지금껏 언제나 신성한 전체의 신성한 일부, 그 몸체의 한 구성 부분member이었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 것이다. 전체와 재결합하는 행동, 신에게로 돌아가는 행동을 기억rememberance이라 부르는 건 이 때문이다. 사실상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재구성하는re-member쪽을, 너희의 전체인 내(神) 전체를 체험하기 위해 너희의 여러 부분들과 함께 결합하는 쪽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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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문명화된 사회의
가장 기본되는 개념들조차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폭력 없이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모르고,
너희는 두려움 없이 사는 법을 모르며,
너희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이것들은 기본 중의 기본인 사리분별들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이것들을 시행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그 충분한 이해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다.
몇백만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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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걷는 업보의 길을 판단하려 들지 마라. 너희는 영혼의 계산서 속에서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 알지 못하니, 남들의 성공을 질투하지도 말고, 남들의 실패를 동정하지도 마라. 어떤 것을 재난이라 부르지도 말며, 기쁜 일이라고 하지도 마라. 그것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판단하거나 목격할 때까지는.
한 죽음이 수천의 생명을 살릴 때 그 죽음이 과연 재난인가? 한 삶이 비탄만을 만들어낸다면 그것이 과연 기쁜 일인가? 그러나 너희는 이런 판단조차 내리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남에게 충고하지 말며,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충고하게끔 내버려두라. 각각의 상황은 모두 하나하나의 축복이며 체험 하나하나마다에는 진짜 진정한 보물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존재하는 빛이 되라.
하지만 어둠을 저주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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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어떻게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만일 너희가 완벽하길 바라고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길 바랐더라면, 나는 너희를 너희의 고향인 절대 완벽 상태에 그대로 남겨뒀을 것이다. 이 과정의 전체 핵심은 너희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요, 참된 자신으로서의 그리고 너희가 참으로 되고자 하는 바대로 너희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선택권까지 갖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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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너희의 선택과 결정과 창조들이 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
지옥은 "잘못된 사고"로 너희가 겪는 고통이다. 그러나 잘못된 사고란 용어조차도 틀린 것이다. 잘못된 것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
지옥은 기쁨과 정반대되는 것.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는 있으되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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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며 겪는 모든 것을 축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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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너 자신의 규칙을 제정하고 바로 네가 그 지침들을 설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왔고, 지금 얼마나 잘해나가는지 판단하는 사람도 너다. 왜냐하면 너야말로 자신이 참으로 누구이고 무엇인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자하는지를 판단해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잘해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너희 이외에 어느 누구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왜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하고 나쁘다고 규정하겠는가?
나 스스로 너희에게 준 선택권을 너희가 행사한다는 이유로 내가 너희를 벌주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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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가치 있게 여기려면, 먼저 자신을 가치 있게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을 축복받은 존재로 여기려면, 먼저 자신을 축복받는 존재로 여겨야 한다. 다른 사람의 성스러움을 인정하려면, 먼저 자신이 성스러운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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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얘기하려는 것은
너는 언제나 네가 창조하는 걸 얻고,
너는 항상 창조한다는 것이다.
나는 네가 요술처럼 출현시키는
창조물들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단지 네게 더 많이, 아니 더 더 더 많이
출현시킬 수 있는 힘을 줄 뿐이다.
만일 네가 이제 막 창조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선택하도록 하라.
신으로서 내가 하는 일은
네게 항상 그럴 기회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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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삶에서 일어난 일들 모두가,
너나 너와 관련된 영혼들이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로 했고
원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너희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일어났던 완벽한 사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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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영혼의 목표는 그 모든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도록.
영혼은 완벽한 사랑을 체험하려면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다 맛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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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영혼이 한 번도 아래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위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번도 오른 쪽에 있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왼쪽에 있을 수 있겠는가? 차가움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며, 악을 거부하고서 어떻게 선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선택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영혼은 뭔가가 될 수도 없다. 영혼이 자신의 숭고함을 체험하려면,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숭고함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숭고함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은 공간에서만 숭고함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다. 따라서 영혼은 숭고하지 않음을 절대로 비난하지 않는다. 영혼은 그것을 축복한다. 자신의 다른 부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그 속에서 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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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모든 게 잘된다. 너희가 이 게임에서 지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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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모르는 걸 체험할 수는 없다. 그리고 너희는 천국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바로 지금 "천국"에 있음을 모른다. 보다시피 너희에게 이것은 악순환이다. 너희는 자신이 모르는 걸 체험할 수 없고, 즉 체험할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고,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없다.
내가 이런 설명을 하는 건 너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알아내고, 그리하여 그것을 체험해보라는 것이다. 앎은 체험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준다. 그런데 너희는 그 반대라고 상상한다.
사실 너희는 너희가 체험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자신이 안다는 걸 모를 뿐이다.
예컨대 너희는 신이 존재함을 안다. 하지만 자신이 그걸 안다는 걸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너희는 늘상 서성거리며 신을 체험하길 기다리고 있다. 너희가 신을 체험하는 동안에도 줄곧. 결국 너희는 알지 못한 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체험을 전혀 하지 못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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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어디도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있는 꼭 그대로의 자신 외에 다른 어떤 존재도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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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으로 가고 있다.
너희가 말하는 식의 천국이란 어디에도nowhere없다. 이 단어에서 w와 h 사이를 약간 벌려보라. 그러면 너희는 천국이 지금now .......여기here라는 걸 알 것이다.
출처 - 닐 도날드 월시 '신과 나눈 이야기'중
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내용인데
모든 문장이 가슴에 와닿고,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보다는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주는 책이긔!
이 책이 소설이든 아니든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이럴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불교의 교리와도 비슷한 내용들이 많아서 정말 모든 진리는 다 똑같고 각자의 종교로 그걸 알려주는구나 싶었긔
(그럼에도 우리가 여태껏 알았던 특정 종교의 교리를 반박하는 내용도 있고요미)
종교가 있든 없든 한번쯤 보면 인생에 도움될 만한 내용들이 많아서 어제부터 열심히 추리고 추려서 올려보긔
영화 '소울'의 22번처럼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체험하기 위해 지구에 왔다고 생각하면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이나 힘듦, 아픔 모두 선물과 같다고 생각하긔
온 세상이 내 놀이터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자긔!
엄청나게 긴 글이지만 그럼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드님들 모두 항상 행복하시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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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명상팁인데
숨을 아주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면서
들숨에 지금 날숨에 여기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거긔
이걸 몇 번 반복하다보면 호흡에만 집중하게 되는데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현존하게 되더라긔
머릿속 비우면서 현재에 집중하는데 최고의 방법같긔
첫댓글 명상하러 가야지.. 글 고마워:)
너무좋다 고마워
오 대박 좋은 글이다 ㅠㅠ 고마워 ㅎㅎ
좋은 글 고마워 정독했어 주기적으로 봐야겠다
좋은글고마워!!
좋은글이다ㅠㅠ!!
좋아.. 고마워
고마워 요즘에 마음챙김하고 있는데 아리송하던것들이 해결됐어
이거 너무 ㅜㅜ필요한 글이다. 고마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