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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리에투바(영어로 리투아니아)
6.1
개요
리투아니아어를 쓰며 인구4백만명에 면적은 한국의 2/3수준이나 발트3국중에서는 가장 큰 국가이다. 동쪽은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해, 남쪽은 폴란드, 그리고 북쪽은 라트비아와 접하고 있다. 11세기에 라틴연대기에서 역사상 처음 등장한다.
13세기에 대공국으로 국가가 수립되었고 14세기에 요가일라 공이 폴란드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하면서 국가연합이 되고 15세기 독일과의 전쟁에 승리하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후 폴란드와 운명을 같이한다. 2차대전후 약 10%의 인구가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망명하였다.
6.2빌뉴스(폴란드어로 빌노)
빌니아강과 네리스강의 합류상에 위치한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인구는 54만명이다. 원래 발트인 정착촌으로 슬라브인들이 거주하였고 11세기부터는 유태인들도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옛 이름은 빌니아강에서 유래한 빌나였다.
14세기에 게디미나스 대공이 성채를 세웠고 그의 다음 세대에 폴란드의 왕을 겸하게 된 브와디스와프2세는 시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16세기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인 지그문트2세가 왕국을 이전하면서 최고전성기를 맞지만 17세기에 러시아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학살되었고 18세기에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1차세계대전중에는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폴란드와 소련, 독일이 계속 번갈아 지배하다가 2차세계대전이후 소련에 병합되었지만 다수석을 차지한 인민전선이 주도한 의회가 1990년 3월11일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과 18개월간의 무력투쟁끝에 연방이 해체되면서 이를 인정받는다.
원래 폴란드인과 유태인이 다수였지만 해체전 소련의 폴란드인 이주정책으로 인해 지금은 58%가 리투아니아인이고 19%가 폴란드인, 14%가 러시아인, 4%가 벨라루스인으로 보다 다국적인 구성을 가진다.
시의 중심부는 대성당광장으로 북쪽에 게디미나스 언덕이 있고 남쪽으로는 동구에서 가장 큰 구시가지가 뻗어있다. 게디미나스 언덕에는 도보로 혹은 후니클라를 탑승하고 올라갈 수 있는데 그곳에는 15세기에 세운 완성된 성채중 유일하게 남아 역사적인 상징이 된 게디미나스 탑이 있고 구시가를 전망하기 좋은 장소이다.
구시가를 둘러보는데는 약 2시간이면 충분하다. 물론 박물관 등을 둘러본다면 그만큼의 시간을 추가해야 겠지만 바로크, 고딕, 르네상스 등의 양식이 적용된 교회가 시내 여기저기 있어서 인구도 많지않은데 이 많은 성당을 건축하느라 고생했을 옛 시민들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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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스티(영어로 에스토니아)
7.1
개요
에스토니아어를 사용하는 인구 2백만명에 면적은 한국의 절반수준인 북유럽 국가이다.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과 북쪽은 발트해, 그리고 남쪽이 라트비아와 접해있다. 상고시대로 부터 에스토니아인들이 거주하였으며 13세기 독일에 의해 정복되었고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에 의해 지배되었다.
다른 발트 3국과 같이 러시아 10월혁명으로 1918년에 독립했으나 1940년 소련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고 북한과 같이 단일 후보를 내세운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였으며 그 의회가 소련 연방에 가입하게 만들어 위성국가가 되었고 1991년 소련 연방해체와 같이 독립하였다.
7.2 탈린
이번에 방문한 나라중 유일하게 유로를 사용하는 에스토니아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로 인구40만이다. 기원전 3000년에 사용된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었고 11세기에는 최초의 요새가 건축되었다.
스칸디아비아와 러시아의 무역을 중개하는 중요한 항구로서 13세기에는 독일과 덴마크의 침입을 받고 덴마크 왕국에 정복을 당했고 한자동맹의 일원이 된다. 14세기에는 덴마크가 독일에 지배권을 양도하며 소련과 독일이 번갈아가며 지배하다가 1991년 8월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하게된다.
현재 인구는 에스토이아인이 52%와 러시아인이 39%로 대다수를 이루며, 에스토니아어가 공용언어이나 러시아어도 많이 사용된다. 이 곳은 2차세계대전의 말기에 소련폭격기로 부터 많은 공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구시가지는 아직도 중세적인 매력을 가지고있어 1997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으로 선정하였다.
이 곳의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성 오라프 교회이다. 12세기에 노르웨이의 오라프2세(세인트 오라프)를 기리기 위해 125미터의 높이로 건설되어 덴마크의 침공전까지 스칸디나비아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원래 카톨릭 성당이었던 이 곳은 종교개혁으로 루터교회로 바뀌었고 1950년에 다시 침례교회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발틱3국이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만약 시간이 부족하다면 대표로 방문할 곳으로 탈린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 다녀보니 역시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헬싱키와 상트페테스부르그로 가는 페리항구와 구시가가 가까우며 독특한 빨간 고깔모양의 지붕으로 특징지워지는 탈린 구시가는 오밀조밀한 골목길과 함께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8. 라트비야(영어로 라트비아)
8.1 개요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인구 200만이고 면적은 한국의 2/3에 해당하는 북유럽의 국가이다. 동쪽은 러시아, 서쪽은 발트해, 남쪽은 리투아니아, 그리고 북쪽은 에스토이나와 접하고 있다. 최초의 역사는 4천년전 발트인이 거주하면서부터 시작한다.
12세기 독일이 리가에 진출하여 시를 건설하였으나 16세기 러시아가 침입하자 독일이 리투아니아에게 양도하였고 그 보호아래 리보란드 공국과 쿠를란트 공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웨덴에 의해 점령되었고 결국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되었으며 이후 다른 발트3국과 역사를 같이하게 된다.
8.2 리가
발틱3국중 가장 큰 인구 70만의 도시로 라트비아의 수도로 발트해와 다우가바강에 접해있다. 13세기에 독일 브레멘의 주교였던 알베르트가 도시를 건설했고 한자동맹에 가입하여 발트해 연안의 주요 상업도시로 번영을 누렸다.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왕국을 거처 17세기에 스웨덴이 점령했고 18세기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18년 독립하여 러시아대신 영국이나 독일과 주로 교역하였으나 2차세계대전후 소련에 병합되었다가 소련연방해체후 1991년 8월 다시 독립을 인정받았다.
원래 대다수를 차지하던 라트비아인은 소련병합전후 이민과 이주로 감소하고 산업환경이 좋은 라트비아로의 러시아인의 유입이 증가하여 현재 인구는 라트비아인이 45%, 러시아인이 40%이며 라트비아어가 공용어이나 러시아어도 많이 사용된다.
이곳의 구시가는 19세기 목조건물과 아르누보양식이 뛰어난 가치가 있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적으로 선정되었다. 강 동쪽의 구시가는 19세기 베를린, 파리, 로마풍의 중심건물지구, 2차대전 이전 2층 주택가와 5-18층인 소련지배기의 아파트지구로 구성되어있다.
대표적인 건축물인 성 피터교회를 보면 13세기에 건축된 뽀족한 첨탑이 있는 고딕양식은 물론 10세기에 유행한 육중한 특질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후 증축된 부분은 17세기에 유행한 불규칙적인 곡선을 가진 바로크양식까지 갖추고있어 흥미롭다. 시에서나온 노란 가방을 든 가이드가 매일 12시에 무료 도보투어를 여기서 시작하며 구시가와 러시아거리의 두가지 옵션이 2-3시간에 걸처 이루어진다.
발틱3국을 모두 둘러본 결과 서로 유사하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른 것을 나열하자면, 리투아니아는 소박하고 에스토니아는 세련되었으며 라트비아는 다소 세속적이어서 도시 전체를 보면 다수가 추천하는 대로 탈린을 방문하는 것이 제일이고 개개의 유적을 보려면 리가를 그리고 아기자기한 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빌뉴스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한다.
러시아입국전 리가를 마지막 도시로 결정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영어도 3국중에는 가장 않통하고 대도시여서인지는 몰라도 가장 불친절했으며 러시아관련 건물도 가장 많이 남아있어 러시아입국전 문화적충격을 줄이기위한 준비에는 완성맞춤이었다.
9. 로시야(영어로 러시아)
9.1
개요
세계에거 가장 넓은 국가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면적은 한국의 170배이고 인구는 1억4천만명이다. 동쪽 태평양, 서쪽 유럽의 여러나라, 남쪽 중국을 포함한 여러나라, 그리고 북쪽은 북극해에 접해있다. 최초의 형성은 9세기 노르만인 루리크가 노브고로드 공이 되어 그 일족이 동쪽 슬라브인의 거주지역을 지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연대기에 기록되있다.
중심지는 키예프였고 지배층까지 슬라브화된 키예프 공국은 9세기에 동로마제국에서 동방정교와 비잔틴문화를 수용했으나 13세기에 몽골에 정복되어 킴차크 한국이 지배하게되었다. 14세기에 변방이었던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시의 세금징수를 담당했고 15세기에는 이를 중심으로 독립을 추진하여 17세기에 로마노프 왕가를 수립하고 시베리아까지 정복한다.
19세기에는 연해주를 청으로 부터 획득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세우고 이를 연결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했다. 하지만 러일전쟁, 1차대전, 그리고 대전중인 1917년 2월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지고 이어 블라디미르 레닌이 지도하는 볼세비키의 10월혁명으로 소비에트(러시아어로 협의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1922년 왕당파인 백군을 섬멸함으로서 내전을 마무리하고 인근 15국가를 통합하여 소비에트연방을 건국했다.
2차대전후 초강대국이 되어 미국과 냉전을 펼쳤지만 1970년부터 경제가 침체되면서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시작되었지만 이에 반대하는 공산당의 쿠테타가 불발하면서 소련 연방이 붕괴되고 연방의 중심 공화국이었던 러시아가 소련의 위치를 계승하게 되었다.
9.2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 하구의 델타지대에 형성된 섬과 운하로 이루어진 인구 470만의 러시아 제2의 도시로 1918년까지 200년간 수도였다. 차르 표트르 대제가 서구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1703년에 설립한 이 도시는 이름이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로 불리기도 했으며 근대 러시아 학술문화의 중심지로 도심이 1990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의 자연환경은 도시를 설립하기에 좋지않은 습지로 이를 메우기 위해 모든 출입자에게 돌을 가져오라는 칙령이 내려졌고 수많은 노예들이 동원되어 고된 노동으로 사망하는 경우에는 습지로 던져버려서 뼈위에 세운 도시라는 별명이 있고 석조 건축물도 금지되었으며 교회의 재산도 국고로 환수하였으며 이에 반하던 귀족과 종교세력을 편들던 황태자까지도 1718년에 처형되었다.
당시 수도로서 러시아 혁명에도 중심이 되어 러일전쟁이 막마지에 이른 1905년 1월 평화적 시위를 하던 수백명의 사망자를 낸 피의 일요일, 1917년 2월혁명, 그리고 10월혁명의 무대가 되었고 2차대전당시 29개월간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명이 아사하면서도 지켜내어 영웅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의 명소는 두말할 필요없이 겨울궁전과 그 관내에 있는 헤미티지 박물관이다. 평균 고도 3,600미터에 위치해 숲이 드문 티벳에도 포탈라궁전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여름궁전이 있듯이 추운 겨울에 상대적으로 따뜻함을 즐기기위한 겨울궁전이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1754년에 건축되었고 베르샤유궁전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정교한 조개무늬가 특징인 로코코양식으로 내부를 그리고 외부는 불규칙한 곡선이 특징인 바로크양식으로 장식하였고 회화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헤미티지 박물관의 일부로서 1,057개의 홀과 방이 공개되있다.
러시아는 아직도 비자에대한 제한이 심하고 비용도 초청장을 포함하여 16만원이 소요된다. 하지만 내년부터 한국인에 대해 비자면제가 시행된다니 기대된다. 또한 외국인이 7일이상 체제하는 도시에서 거소를 신고해야 하는 제도가 있어 불편하다.
러시아인은 대부분 예의가 없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길에서 부딛히면 우리같으면 왠만하면 서로 미안하다고하며 웃으며 지나갈 텐데, 오늘 역에서본 러시아인들은 상호 전방주시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하자 서로 째려보면서 지나간다. 그래도 듣던 것 보다는 많이 좋아져서 입국심사도 부드러웠고 지하철에서 환승역을 찾을 때도 영어는 하지 못하면서도 러시아어로라마 알려주려하는 점에서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싶다.
9.3
모스크바(영어로 모스코)
1130만명이 거주하는 유럽최대의 도시이자 러시아의 수도인 이 도시는중심부를 흐르는 모스크바강에서 그 이름이 기원한다. 대표적인 건축물은 모스크바강과 녜글린나야강이 서로 만나는 보로비쯔끼 언덕위에 12세기에 목재로 요새를 두른 크렘린이고 이는 도시가 새로 지어질 때마다 재축되었다.
현재의 크렘린은 중세 유럽 축성예술의 대표적인 본보기로 15세기 이태리 건축예술가에 의해 세워졌다. 성채의 윤곽은 삼각형 모양으로 성벽의 길이는 2,235미터이다. 한개의 중량이 8키로인 벽돌로 쌓아 만든 성벽은 높이가 5미터네서 19미터에 이르며 두께는 3.5미터에서 6.5미터까지이르고 붉은광장과 같이 199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개인적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성 바실리 성당은 이반뇌제가 몽골제국 징키스칸의 큰 아들이 건국했던 캄차크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한 것을 기념하여 16세기에 세웠다. 이 성당은 9개의 건물로 구성되는데 8개가 중앙건물을 둘러싸고 있으며 귀족을 누르고 몽골족을 물리쳐서 러시아 왕권의 근간을 확립하기는 했지만 폭군으로 불리우던 이반황제는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을 건축할 수 없도록 완공후 건축가들의 두눈을 뽑았다는 루머가 돌기도했다.(하지만 건축가중의 하나인 보스토니크가 성당 완공후에도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오늘 둘러본 모스크바는 생각보다는 훨씬 자유로워보였다. 걱정하던 경찰의 불심검문도 없었고 한국, 중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단체여행객들로붉은 광장은 붐볐으며 거기에 있는 최고급 백화점인 굼에서는 세계의 명품을 팔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유명한 푸쉬킨이 살았던 아르바트거리를 통하여 왔는데 음악, 책, 그리고 그림이 어울려진 즐거운 산책이 되었다.
9.4
시베리아
원래 몽골족을 비롯한 유목민족의 터전이었던 시베리아는 17세기 카자흐족을 앞세운 러시아에 의해 정복되어 유배지로 활용되었고 부동항을 찾던 러시아의 동진정책에 의해 시베리아횡단열차가 1차세계대전중에 완공되면서 지금은 인구1500만명으로 철로를 따라 늘어선 도시들에 인구가 집중되고 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9천키로가 넘는 지구 최장의 철도로 상트페테스부르그로의 연결은 물론 환바이칼철도와 몽골횡단열차, 그리고 중국행열차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진다. 철도는 북위56도까지 올라가며 여름에는 해가 자정까지 지지않는 백야현상이 발생하고 겨울에는 반대인 극야현상이 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울란우데까지 4박5일을 시속 60키로로 움직이는 3등열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각 차량의 내부는 6인실로 2층침대가 있는 9개의 객실이 있고 양측에 화장실과 220볼트 전원이 그리고 앞방향에 맞교대로 24시간 근무하는 차장실과 냉온수공급대가 있어 샤워는 불가능하지만 기본적인 생존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5일간의 열차생활을 지내고 목적지인 울란우데역에 도착하니 마치 수용소에서 석방되는 기분이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어만 들으면서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차장과 다른 54명 승객들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하지만 즐거웠던 점도 많았다. 앞 좌석의 러시아 아저씨들에게 매일 보드카와 러시아어 고문을 당해야 했던 것이나 태양과는 반대로 동쪽으로 시속 60키로의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안에서 색다른 시간체험을 한 것이나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볼 수있었던 점 등은 좋은 추억이 될 듯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실 여러분을 위해 약간의 팁을 부언하자면, 우선 가격은 모스크바-울란우데간 3등 침대차가 6,500루블(약 25만원)인데 러시아 철도청에서는 영어로 온라인 발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영국 여행사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7,800루블이 되며 2등과 1등은 각각 2배와 4배인데 탑승객은 1등차 기준 3등차가 3배이므로 가격 효율성은 가장 높다.
러시아 기차요금은 저렴한 편인데 성수기에는 표준요금의 120%를 받고 비수기에는 80%를 받으며 특별한 날(3월9일)은 50%만 받으므로 기간을 잘 조정하고 약간의 러시아어를 익히면 4,500루불 혹은 그 이하로도 약 6천키로의 4박5일 여행이 가능하다.
러시아어를 단기간 익히는 것은 어렵지만 러시아 키릴문자는 표음문자이르모 약 1주정도면 읽을 수 있다. 알파벳과 유사하지만 6개만이 동일하게 발음하고 나머지는 다르게 읽는다. 대부분 키릴문자만으로 거리나 역이름이 표시되어있으므로 지도를 읽거나 위치를 아는데 상당히 유용하다.
걱정했던 머리감기는 작은 병(약 300미리리터 내외가 좋다)으로 물을 3-4회 받아서 매일 할 수 있었다. 다만 충전은 앞뒤와는 별도로 차장실에서 두칸 떨어진 7번좌석과 반대 쪽에도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스마트폰은 충전이 되는데 노트북은 되질 않아서 준비해간 영화를 보지않고 동료가 가져온 세계사책 2권과 사회과부도를 읽으면서 5일을 보냈다(그중 사회과부도는 2회독하고 그 결과 내년에는 아라비아반도를 중심으로하는 이슬람문화권을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시차가 5시간(블라디보스톡까지 간다면 9시간)나므로 식사는 하루 평균 4회를 했고 기차시간은 모스크바시간에 고정되므로 시계가 아니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깨면 먹는 생활을 했다. 그리고 내리기 1시간전에 현지시간으로 조정했다.
마지막으로 5일간 먹고 자고 읽다가 오랬만에 관광을 하느라 걷기 운동을 했더니 종아리 근육이 땡긴다. 그동안은 하루 백미터내외의 걷기만 했고 내리는 날 내가 탑승한 3호차에서 19호차까지 왕복 약 600미터를 가본 것이 전부였으니까. 어쨌든 특이한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첫댓글 ^^* 글 감사합니다.
역시 제게는 사진은 안보이는군요.^^*
여행, 인내가 필요했겠어요.^^*
오랜 시간의 기차여행으로.....^^*
요 몇년 사이 유라시아 여행가는 분들이 많더군요
현대화가 안 된 곳들이 많아서 무척 신비롭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