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정은 모두 소화시켰는데 결정적으로 손님이 없어서 김이 새 버렸어요. 시간 때우기로 오겜1-6화를 보다가 인간은 배운 놈이든 못 배운 놈이든 하나같이 사악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어요. 더 이상 내가 악동이라는 걸로 인해 죄책감을 갖지 않을 겁니다. 친구였던 상우(박해수)의 배신을 통해 외국인 등쳐먹는 머리 좋은 한국인의 모습을 보았고, 지연이가 탈북자 새벽을 울린 것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알려준 감동 신호였어요. 새벽이가 탈북자 표정 연기를 썩 잘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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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영감 일남이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아주는 휴머니즘은 며칠 전에 스피커 잭 하나 꽂고 7만 원을 눈퉁이 치고 간 개자식과 영락 없이 닮았네요. 성기훈 캐릭터는 밥맛이지만 이정재 이노무새키 연기 하나는 끝내줍디다. '모래시계' 고현정의 수호 무사-CJ 여왕의 남자-비열한 깐부로 성장한 이정재를 리스펙트 합니다. 내 참, 오겜1을 오겜2로 알고 7편까지 또 봤다는 것 아닙니까? 오겜1편 개봉 때 후기까지 써 놓고 다시 본 셈인데 어쨌거나 1편 개봉 때보다 더 재미있게 보았어요.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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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봐도 놀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임0령이 이0용을 버리고 (주)대상을 선택한 것이나 필자가 봉준호를 버리고 황진혁으로 갈아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징어 게임이 '헤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스케일과 작품성은 찬사가 마땅합니다. 개인적으로 '기생충'(봉준호)보다 '소년이 온다'(한강)보다 '오겜시리즈'가 더 훌륭하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신중세주의(Neo- Medievalism)를 아시나요? 필자는 오겜의 히트 배경에는 신중세주의로의 회귀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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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로 인해 개별 국가들의 주권이 점점 더 침식당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근세 이전(중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같습니다. 과거에는 한 국가가 자신의 영토 내에서 절대적 주권을 행사했으나, 오늘날 한 국가의 주권은 나라 밖의 다양한 기구나 조직의 정치적, 경제적 간섭을 받습니다. 유럽연합을 생각해 보시라. 이 상황은 하나의 영토 내에 황제와 교황과 제후와 그 밖의 다양한 주권 세력이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던 중세를 닮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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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들리 불(Hedley Bull, 1932~1985)이 '무정부 사회'(1977)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이 정치학 용어를 문화의 영역에 끌어들여 새롭게 대중화한 것은 움베르토 에코라고 합니다. 에세이'중세에서 꿈꾸기'(1986)에서 그가 말하길"현재 우리는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중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시기를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기묘하게도 환상적 신중세주의와 책임 있는 문헌학적 조사 사이를 오가고 있다." 에코 자신이 쓴 소설 '장미의 이름'(1980)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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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추리소설은 중세에 대한 진지한 문헌학적 연구가 깔려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소설, 영화, TV, 혹은 비디오 게임에서 중세적 판타지가 화려하게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해리 포터(2001), 반지의 제왕(2001), 나니아 연대기(2005) 같은 영화를 생각해 보시라. 물론 '신중세주의'라고 무조건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상상력의 중세적 특징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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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위손'(1993), '크리스마스 악몽'(1993), '찰리와 초콜릿 공장' (2005), '슬리피 할로우'를 만든 팀 버튼(Tim Burton, 1958~) 감독의 동화적 상상은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인해 ' 네오고딕'이라 불립니다. 대표적 네오고딕 건축물 중 하나인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1840~1870)을 보려고 우리 예주가 서유럽 투어를 했다는 것 아닙니까? 김예주! 서유럽 기행을 칭찬해! '네오고딕'은 18~19세기에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존재했고, 이 건축 운동은 문학에도 영감을 주어 같은 시기 영국 문단에 고딕소설의 유행을 낳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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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의 '나자렌느'파는 피상적 장인성에 매몰된 신고전주의를 비판하며 예술의 영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중세 후기와 초기 르네상스로 돌아가려 했고. 영국의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로 (Raffaello Sanzio 1483~1520)이후에 등장한 기계적 화풍에 반대하여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또한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1896)의 '예술과 공예 운동'은 산업화에 반발하여 중세의 공예로 되돌아가려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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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디자인의 대명사가 된 바우하우스조차 초기에는 산업적 디자인의 조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중세적 길드를 표방한 바 있어요.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합니다.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바뀌면서 대중의 의식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계몽의 시대에는 대중에게 책을 읽혔지만, 오늘날 정보는 더 이상 읽는 것 (Text)이 아니라 보거나 (Image) 듣는 (Sound) 것이 되었습니다. 라틴어 성경 책을 못 읽는 대중에게 성화를 그려 주고, 탁발승단이 무지한 대중에게 이야기 설법을 들려주던 중세와 비슷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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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시대에 텍스트의 신성함을 고집하는 인문학 연구자 집단은 중세의 수도원과 비슷해질 거라 말했어요, 이 모든 변화의 또 다른 원인으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성격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루서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가 가진 기술은 산업혁명의 그것과 달리 거의 마술적 성격을 지닌다고 해요, 오늘날 우리는 픽셀을 조작하여 원본과 똑같은 복제를 만들거나 신화에나 등장할 만한 키메라를 만들어낼 수가 있으며, 나노 수준의 물질을 조작하여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니 한마디로 마술과 기술을 가르던 경계가 사라진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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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은 마술을 미신이라 가르쳤으나, 이제 기술 자체가 마술의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대중의 정신이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중세적 의식으로 되돌아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후쿠야마의 종말론이나 헌팅턴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인류 진화의 끝'이라는 것 같고, 제너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충돌"이 종말의 징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패거리(clique) 문화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은 문명의 충돌인가, 역사 종말의 징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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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파성과 이념적 양극화로 갈라져 극도로 양분화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문명의 충돌 같기는 합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복고가 뜬다'는 카피와 '신 중세로의 회귀'는 같은 맥락일까요? (라브리 공동체,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영성 운동) 주식 시장의 붕괴-채권과 주식의 차별화-비트코인의 열광 등등은 정말 신 자본주의 현상일까? 에에공! 골치가 아프긴 해도 살아남으려면 찬찬히 생각하고 허투루 넘기면 안 될 것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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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c 마케팅의 기본은 팬-덤 층을 잡는 것입니다. 관건은 팬덤인데 제가 아날로그 세대라서 이것저것 낯선 게 많아요. 에에공 플래폼이나 코딩을 부탁해! 근데 희한하지요? 아직도 세계를 움직이는 기업들은 꼰대 세대들이라고 합디다. 이 양반들이 가슴을 움직일 때 팬덤이 열광하는 걸 알고 발 빠르게 움직인 결과 대박을 친 것 같아요. 나의 에예공! 디지털 시대 마케팅은 플랫폼-좋은 경험-팬-덤으로 확산되는 수순을 거친다니 참고하시라. 작금의 필자의 관심사는 '확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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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수-랩'을 어떻게 빅 사이즈로 만들까 고민이 많습니다. 요한복음(1장)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인간은 종종 자신의 본모습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으로 인정받고 평가받고 싶어 한답니다. 주변의 칭찬이 사실이 아니고 과장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 소리를 듣고 싶고 또 믿고 싶어 합니다. 확장과 겸손 사이에서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2025.1.3.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