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92년 겨울 그리고 1993년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바야흐로 전자소년 대학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에 가는 날.
학생회비를 내고 그날 저녁 학교앞 **회관에서 거하게 거국적으로
의기투합하는 모임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모두가 나도이제
대학생이라는 마음에 뿌듯~ 선배들이 권하는 술한잔에 뿌듯~
한 시간..
그 시간 불광2동 학교 뒷길에 있던 우리 19칸 짜리 한옥집은
전기 합선으로 산화되고 있었다. 불이야~~
난 그것도 모른채 마냥 좋아라 하면서 2차~ 3차..
그리고 불광동이 너무멀어...(학교가 봉천고개에 있당. 서울의 극과극)
종로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머물고 이튿날 아침 아버지로부터의 전화
*(^(&^$%$#)_))*(&(
아버지로 부터 화재 소식을 전해듣고 참하 집으로가지 못하고...
동생이 뜯어 말렸음....
서대문에 임시거처를 얻어 살게되었다.
며칠후 불광동 집에 친구와 갔었는데(같이 모형하던) .
집이 2차대전 디오라마에 나오는 딱 그 모양으로 한옥의 기둥하고
서까래그리고 기와가 얼마간 남은채 집은 아작이 나있었다.
그당시를 묘사하자면.
진화작업으로 인해 물벼락을 받은 황토 지붕이 다 내려 않고 역시
황토벽도 내려않아 집안은 온통 흙밭이었고
20여년간 꾸준하게 모아온 나의 재산목록들이 모두 화마의 저녁식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살림살이와 당시 가게에 내다팔 물건들까지 몽땅..
잠시 목록을 들자면
음반....테입 엘피...그리고 약간의 씨디..
기타. 피아노 ㅜ_ㅜ^^^
소니 캠코더 ㅜ_ㅜ^^^^^ 나의 전용 오디오..
그리고 86년부터 안쉬고 모아온 뉴타입. 몇권 빼고 다 있던 취미가.
20여권의 일본모형잡지... 40여권이 넘는 모형자료집...애니메이션
자료집...(당시 뉴타입 별책 100%시리즈는 한 반정도 있었다.)
만화...(그것도 원본)...비디오테입등등등...
그리고 모형들
모형공구. 재료(지금 쓰는거와 거의 같다. 물론 실리콘도 포함...)
자작 메카닉들.. 인형들. 몽땅.
입학식때 입을 양복 신입생 기념으로 산 피씨. 봄옷..
(고딩내내 교복으로 일관~ 모처럼 빼입으려고 한봇따리 샀는데)
마지막으로
내 서재. ㅜ_ㅜ 그 많던 책들 우엥~~~~~~~ㅠ_ㅠ ㅠ_ㅠ ㅠ_ㅠ T_T
뭐 이렇다. ... 음.
당시의 친구의 말을 되새겨보면
"야 이건 어떡하지? 쓸 수 있을까?"(물론 쓸수 있음을 알지만
너무 상심해서...그냥 물어보았다)
"음. 자료로 쓰려면 쓸수 있지. 담아."
"응 그래" 여기엔 건담센티넬 등등을 피롯한 모델그래픽스계의
별책들이 수두룩. ㅜ_ㅜ... 당시 100앤에 5~600원 하던 시절에
그런 책이 백만원도 넘었다. 그걸 다 어떻게 벌어서 산건데. ㅜ_ㅜ
에혀~
그 일이 있고나서.
내가 처음으로 산건 타자기 였다. 중고 타자기 ..그리고 피씨를 샀다.
중고 타자기를 산건 산자락에 있는 우리집에서 서대문로타리가 모두
내다보였는매 새벽에 내다보면 정말 감상에 젖었다. 새벽공기가 깨끗하기도 했고.
그리고 그해 말에 오디오를 장만했다...청계천 도깨비시장에서
스피커오지게 큰거..약 1.2미터짜리 두개와 서라운드용으로 세개
베이스 용으로 두개...그리고 앰프...
가격은...10만원 조금 넘었지..(청계천의 힘이다...)
그리고 휴대용 CD플래이어를 샀다....이걸로
오디오를 구축한거지...요...근데 신문팔이가 도둑질간 내 cd플래이어.
ㅜ_ㅜ..하여간
하나하나
살림을 장만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습관이 하나둘 늘었다. 그것은
모형을 만들어보 갖지 않는 것이었다. 뭘 만들어도
박스나 진열장에 넣지 않았다. 물론 그리 많이 만든 것도 아니었지만
거의다 누구 주고 그랬다. 왤까?
지금 생각해 보면. 감상을 하다가도 없어지고 나면 그 상심이 너무
크기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차라리 주자!
불에 거멓게 타서 녹아내린 것들을 보고난 후의 내 심경의 변화는
그랬다.
그후 10여년이 지나서 군에서 제대하면서
우연히 친구가 보내준 피겨와 마크투를 대하면서
차츰차츰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인생살이가 새옹지마인 것 같다.
그 후 우리는 길음동으로 이사를 갔고 그 집은 지난해 가을
이명박의 뉴타운 계획으로 땅값이 딱 10배가 올랐고
또한 도시계획에 의해 팔 수 밖에 없었다. 모 건설회사에서
과일이며 꿀이며 들고와서 제발 팔아달라고 하기에
벼락부자가 이렇게 되는 것인가 새삼 느끼면서 길음동의 집을...
할머니집..우리집. 두채..처분하고 일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나는 직장때문에 이곳 부산으로 내려오고 ...
만일 그때 불이 안났더라도 불광동도 역시 이명박이의 뉴타운 계획에
떠밀려 수십억대의 (집에 텃밭도 있었고 광도 별채도 창고도 있었으니)
재산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집의 주인도 아니었고..
그집을 꼭 샀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겠나...싶다.
그래서 반세이님에게 상경을 슬며시 권한다.
요즘 서울근교의 그린벨트지역 내지는 준농림지 내지는 농림지는
사고 팔기는 힘들고 비싸도 전세도 들어가 사는 것은 무지 쉽다.
일예로.
구리시, 능곡, 하남시, 양평 부근의 농촌마을 등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많이 있다. 이곳은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주인만 있는 빈집이다
이런 곳에 전세 내지는 월세로 들어가는 것은 어떨까한다.
물론 거제도가 싫거나 나쁘거나 해서 옮기라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 아니니 정모를 하더래도 매번 반나절씩 들여서 올라가야하고
자주 갈 수도 없고 같이 일을 하거나 협력업체들도 서울-경기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금형이나 케스팅은 안양쪽에서..
안되면 개미님네 동네로 가도 좋다. 경기도 이천엔 도예촌이 있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서울과도 가까와 불과 한시간 반 거리이다.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인생에 있어서 자기 자신이 스스의 의지와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살
아가는 것 같이 생각하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는 내일 무슨이일 일어날지 오늘일이 내일 어떻게 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제 그리고 지난해에 했던 일들은 돌이켜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94년 대학의 꿈을 접고 전자소년을 캐릭터계에 몸을 던지게 한
영화 쇼생크 탈출에 이런 말이 있다.
Fear can hold U prisoner
Hope can set U free
두려움 속에 갇혀나느냐, 희망을 갖고 자유롭게 사느냐.
이 영화속의 주인공은 누명을쓰고 들어간 교도소에서
19년간 작은 쇠붙이로 감방벽에서 하수관까지
길을 뚫으며 부도덕한 교도소장의 회계사가 되어 그의 재산을
은닉하여 후에 탈출하여 재산을 가져간다.
(p.s. 중간에 휘가로의 결혼 중 "저녁바람 시원하게" 라는 아리아가
흘러나온다. 뿅~간다. 전자소년도 거의 맛탱이 갔던 기억이...)
첫댓글 참 교감이 되는 글입니다 행님, 작업실 정리하다가 잠시 들어 왔었는데 따뜻한 글을 하나하나에 힘이 많이 나는군요 정말 감사해요 반세이는 네년쯤에 서울부근으로 상경할 생각이에요 그때 행님이 말씀해주신 곳 유심히 알아보아야 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행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