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공 묘역에 가다.
춘천의 서면에 장절공 신숭겸 묘가 있습니다.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라고 꼽는 길지이기도 하지요. 80년대 서면에는 그 흔한 도로가 없었습니다. 마치 육지 속의 섬처럼 있었던 곳이지요.
대학 다닐 때 신숭겸 신도비를 탁본하러 화선지 옆에 끼고 서면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소양로에서 통통배를 타고 금산 나루터에 내려 한 시간을 걸어야 장절공 묘역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신숭겸은 927년 왕건과 견훤의 공산성 전투에 참여합니다. 형세가 불리하여 왕건이 죽을 위치에 처했지요. 그때 신숭겸은 왕과 옷을 바꿔입기를 청합니다. 왕건을 숲에 숨기고 왕의 수레를 타고 전투에 임하여 장렬히 전사합니다. 군사들이 목을 거두어 견훤에게 바쳤는데 왕건이 아니어서 큰 실망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자기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린 장수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그리하여 왕건은 자신이 묻힐 자리를 신숭겸에게 양보하고 황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하지요. 지금도 봉분이 3개인데 도굴을 염려해서였다는 설이 있기도 합니다.
신숭겸 묘소는 뒤에 할아버지 산이 급하게 강으로 내달려 멈춘 곳에 평지가 이어지고 울울창창한 금강송이 주변을 아우르고 있으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 안에 포근히 안겨있고 앞에 강을 두르고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서면에 박사가 그리 많이 배출되는 이유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합니다.
산과 땅, 물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하는 지리를 풍수라고 하는데 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약자로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명당은 뒤에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땔감과 건축재료를 구할 수 있고 앞의 물은 생존에 필요한 농업용수 및 식수를 쉽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과 앞의 강이 자연적 방어벽이 되기 때문에, 외적을 막는 데에도 용이하지요.
조선 말기에 풍수에 따른 명당을 추적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당에 묘를 쓴 집안의 자손이 망한 경우도 많았고 흉지에 묘를 쓴 집안이 흥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더 많이 베풀고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어디(명당, 길지)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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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복> 님의 글입니다.
타지에 사는 지인이 춘천 관광지에 대해 물으면, "춘천? 뭐 볼게 있는데? 별로."란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대개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막상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익숙해서 특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겠죠. 장절공 묘역에 어릴 적 한 번 가본 적이 있던가? 기억에 남아 있지 ㅇ낳습니다. 전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