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정만주원류고 권3; 부족3; 백제(百濟)]
o "삼가 생각건대, 백제는 후한(後漢) 때 이미 사전(史傳)에 보이기 시작한 이래, 진(晋)나라를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사신이 해마다 통했다. 그 나라 왕은 원래 부여 왕 구태(仇台)의 후예로 부여(夫餘)로써 성씨를 삼았다.
구국(舊國:온조백제)은 마한(馬韓)에 속해 있었는데 진대(晉代) 이후로 마한(馬韓)의 옛 땅을 전부 차지하고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郡)을 겸유하였으며 백제군(百濟郡)을 스스로 두었다.
[송서(宋書)]에서는 ‘다스리던 곳을 일러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고 하고, 그 도성(都城)은 거발성(居拔城)이라’라고 했으니 백제군(百濟郡)은 바로 진평이요, 거발성(居拔城)은 바로 진평성(晉平城)이다. 마단림(馬端臨)이 ‘진평(晉平)은 당나라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그 일대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실은 지금 금주(錦州). 영원(寧遠). 광녕(廣寧)의 경내이다.
그런데 [일통지(一統志)]에 ‘거발성(居拔城)은 지금 조선(朝鮮)의 경내에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양(梁)나라 천감(天監:무제) 때에 남한(南韓)으로 옮겨갔던 성(城)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통(普通:무제)이후에 여러차례 고구려를 격파하고 그 왕 쇠(釗:고국원왕)의 목을 베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 치소가 있는 성(城)을 고마(固麻)라 한다고 하였다.
[북사(北史)]에도 ‘거발성(居拔城)은 바로 고마성(固麻城)이다’라고 하였는데 만주말로써 이를 상고해보니, 고마(固麻)라는 말은 ‘거문(格們격문,gemun)’의 음이 변한 것이다.
[당서(唐書)]에서 이 나라의 왕이 사는 곳은 동.서 두 성에 있다고 하였은즉 거발(居拔)은 바로 만주말인 “탁파(卓巴)”로서 두 성(城)이 모두 왕도(王都)였던 까닭에 다들 거문(格們)을 거발(居拔)이라 칭한 것이다. 한편, “건거발(建居拔)”이란 말이 있는데 이 때의 ‘建’자는 곧 한문으로 [통고(通考)]에서는 이 세 글자를 죽 이어서 성(城)의 이름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통고(通考)]에는 또 “남쪽으로 신라와 접해 있다”고 하고 [당회요(唐會要)]에 “동북쪽으로 신라에 이른다”고 하였는바, 백제의 지경을 상고해 보니, 서북쪽으로는 오늘날 광녕(廣寧). 금주(錦州). 의주(義州)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 해(海). 개(蓋)에 걸쳐있고, 동남쪽으로 조선(朝鮮)의 황해(黃海). 충청(忠淸). 전라도(全羅道)의 제도에서 끝이 나, 동서가 좁고 남북이 길죽하다. 따라서 유성(柳城)가 북평(北平)을 기준으로 신라가 있는 곳을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게 되지만 경상(慶尙)과 웅진(熊津)을 기준으로 이를 따져보면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에 있게 된다. 또 북위(北魏) 때 백제가 물길(勿吉)과 공모해서 힘을 합해 고구려를 취하려 했던 것을 보더라도 동북쪽이 역시 물길과 인접해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초기에 신라의 60~70성을 다시 빼앗으매 그 영토가 더욱 넓어지게 되자, 소정방(蘇定方)이 바다에 배를 띠우고 군사를 건너게 하여 웅진(熊津)으로부터 그 나라 북쪽을 향해 진격하였던 것인데 웅진(熊津)은 바로 한강(漢江)으로서 조선국(朝鮮國)의 도성(都城) 남쪽 10리에 있었던 것인즉 오늘날의 도성(都城)이요, 또한 백제의 남쪽 경계이기도 하였다. 그 뒤에 부여융(夫餘隆)은 신라가 무서워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고지(故地)는 신라. 발해. 말갈로 나뉘고 말았다.
부여풍(夫餘豐)이 몸을 빼서 달아나 그 행방을 모른다고 했는데 후당(後唐) 때에 백제라는 나라가 있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지원(至元:원세조) 초기에도 여전히 조공하는 사신을 통하였으니 그 지서(支庶:서자)가 바다의 한 모퉁이에 목숨을 부지하면서 그대로 이전의 나라 이름을 사용하였으니, 국조(國祚:왕위)가 여전히 존재하였던 것이고, 따라서[당서(唐書)]에 일럿으되 마침내 끊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또 [북사(北史)]에 그 나라에는 5방(方)이 있고 10군(郡)을 관할한다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에 6방(方)에서 각각 10군(郡)을 관할했다고 하니 다스렸던 군은 50~60인데 정방(蘇定方)이 얻은 것은 겨우 37군(郡)이요, 아직 5분지의 2를 얻지 못했다. 이는 반드시 남은 무리들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발해. 거란(契丹)과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서로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이 성하여 신라와 더불어 견줄만 하였고, 사서에서는 이들의 습속은 기마와 활쏘기를 숭상하고, 아울러 전적(典籍). 사서(史書)를 매우 좋아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이 믿을 만하다고 하겠다. 그 나라는 국내에 후왕(侯王)들을 많이 둠으로써 훈의(勳懿)에 보답하였다. 송.제(宋.齊)이래로 이미 그렇게 하였던 것인 즉 또한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