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KAIST)는 1971년에 설립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이 땅에 불모지였던 '과학기술'의 혁혁한 진보와 급격한 성장을 이끌었던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였다.
설립 이후 명석한 두뇌들이 기술보국이란 신념으로 카이스트에 몰려들었다.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 TECHNOLOGY>의 약자가 바로 'KAIST'였다.
한 해 학부생 약 4천명, 석사과정, 박사과정까지 총 1만명 가량의 영재들이 밤을 지새우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분야의 요람이다.
절친한 친구 두 명의 아들이 '카이스트'에 들어갔다.
한 명은 나의 고딩 친구(A)였고 다른 한 명은 대학 친구(B)였다.
A 아들이 B 아들 보다 한 해 선배였다.
A 아들은 소싯적부터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각종 수학 & 과학 경진대회에 나가면 상을 휩쓸었다.
칭찬과 호평이 자자했다.
당연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해당 지자체의 과학영재로 선발되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도 대표로 출전할 정도였다.
A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그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했을 때 A는 친한 친구들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했었다.
기쁘고 즐거운 자리였다.
젊은 청년의 밝은 미래를 추호도 믿어의심치 않았다.
나도 아낌없이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장차 교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런 기대를 안고 또 세월이 흘렀다.
늘 그렇지만 시간은 번개처럼 빨랐다.
작년 연말에 A와 식사를 함께 했다.
그가 먼저 보자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다.
한 해 동안 서로의 땀과 수고에 대해 위로와 격려를 보냈고 새해 덕담도 나눴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는데 그 시간에 A가 자신의 가슴 속 깊은 고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A의 얘기를 듣고 나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A 아들이 카이스트에서 학부 졸업 후 석박사 통합과정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학위취득 1년여를 앞두고 부모님과 상의할 문제가 있다면서 집에 왔다고 했다.
풀 죽은 모습으로 집에 와서 딱 한마디를 하더란다.
"저는 지쳤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학업을 포기하겠습니다. 석사는 마치겠지만 박사과정은 포기하려고 합니다. 졸업하면 일반사병으로 군에 입대할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25년 이상 네 교육을 위해 우리도 모든 걸 투자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니 마음대로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거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냐? 그리고 이건 상의도 아니고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더냐. 정말로 기가 막히는구나"
"저는 지쳤습니다. 완전 번아웃되었어요. 더 이상 공부에 대해선 의지도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A 아들이 카이스트를 떠나기 전 한 해 동안 아내는 노심초사하면서 내내 눈물로 기도했고 적극적으로 아들을 설득했다고 했다.
A는 일 년 간 아들과 거의 말도 섞지 않았고, 대면하지도 않은 채 쓰린 속을 달래며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단다.
결국 아들은 석사만 겨우 마친 상태에서 쓸쓸하게 캠퍼스를 떠났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하여 지금 복무 중이라고 했다.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A 부부에겐 아들이 둘이었는데 큰 아이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어 고교를 졸업한 뒤로 '베이커'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둘째는 어려서부터 영재로 소문이 자자했고 그 둘째가 A 부부의 삶의 의미이자 소망이었다.
그렇게 영민하고 똘똘했던 아들이었는데 얼마나 힘들고 지쳤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싶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친구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러면서 A의 한탄과 낙심을 들어주고 또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도 그 친구를 몇 번 만났었는데 유달리 표정이 밝지 않았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도 자식을 키웠던 부모 입장이라 더욱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1월 17일 금요일 저녁.
서초동에서 대학 학과 친구들의 신년회가 있었다.
16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서로의 근황과 덕담을 주고 받느라 넓은 룸이 왁자지껄했다.
이미 절반 정도는 은퇴를 했고, 절반 가량은 1-2년을 남겨놓고 있었다.
식사 중간 쯤에 B가 내 옆으로 오더니 맥주 한 잔을 따라주었다.
"현회장, 식사 후에 커피는 내가 살게"
"고마운 제안이다만,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사실은 내 아들이 이번에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 2월에 졸업하는데 애비로서 정말로 뿌듯하고 감사해서 그래"
"오오, 이런 경사가 있나. 그렇다면 당연히 커피를 사야지"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고지했다.
모든 친구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B의 소감을 들었고 모두가 격하게 축배를 들었다.
수년 전에 B의 아들이 카이스트에 입학했다는 얘길 듣긴 했었다.
그는 워낙 조용한 친구라 몇몇 친구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B는 밥을 사는 일도 없었고 입학 후엔 좀처럼 아들 근황을 얘기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 밤, 대학 친구들 신년회에서 B가 아들의 박사학위 취득과 국립 연구소 취업을 알려주었다.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물론 학위가 전부는 아닐 테지만 나는 B와 B 아들에게서 정중동의 열정과 진득한 '형설지공'을 느꼈다.
마치 내일처럼 기쁘고 감사했다.
B는 강원도 출신이었다.
나는 그의 시골 본가에도 가보았다.
연로하신 양친께 인사도 드렸고 식사도 하고 왔다.
평생 두 분이 경작하셨던 농토는 그리 넓지 않았다.
전형적인 강원도의 빈농이셨다.
형제자매들 중 장남인 B만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다.
집안 형편이 그닥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B는 대학을 다닐 적에도 늘 주경야독하는 삶을 살았다.
알바를 두 곳에서 하기도 했었다.
부모님 어깨의 짐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였다.
취업을 했어도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첫 회사의 경우, 실적 악화와 구조조정으로 뜻하지 않게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그 이후에 다른 곳에 계약직으로 들어갔지만 급여는 초라했다.
늘 빠듯한 살림이었으나 그는 특유의 근면과 성실로 우직하게 가정을 이끌었다.
"B야. 시골에 계신 연로하신 부모님이 더 좋아하셨겠다"
"그렇잖아도 손자가 카이스트에서 박사를 취득했다고 동네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했다며 좋아 하시더라고"
"그래. 당연히 그러셔야지. 부모님이 어찌 아니 그러시겠니. 그 첩첩 산골에서. 결국 자네가 자식농사 잘 지은 거다. 잘 키웠어 친구야"
"내가 무슨 역할을 했다고. 지가 열심히 노력한 거지. 또 하나가 있다면 어려운 형편에서도 언제나 조용하게 집안에 웃음꽃과 잔잔한 향기를 피워준 아내에게 감사할 뿐이지"
나도 B의 아내를 알지만 그 분은 큰 박수와 찬미를 받아 마땅한 인품이자 헌신의 실천자였다.
이 땅의 청년들아.
동시대를 살아가도 저마다 길은 다르고 세상은 넓다.
젊다는 건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던 길을 계속 갈 수도 있지만 U턴할 수도 있고 P턴 할수도 있다.
대로에서 벗어나 좁고 구불구불한 길로 접어들어 외롭게 혼자만의 길을 갈 수도 있다.
다양한 길을, 서로 다른 철학과 나침반을 가지고 각자의 행보로 뚜벅뚜벅 가주기를 기도하고 있다.
아직은 모른다.
'지천명'이나 '이순' 이후에 인생의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희'나 '산수' 이후에 심각하게 변형되고 굴절되는 인생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인생은 끝날 때까지 잘 모를 뿐더러 예측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타인의 평가나 세상의 잣대에 너무 신경쓰지 말고 당당하고 호기롭게 자신만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
청춘의 시기는 가능성의 시기이며 충분한 시간이 있기에 가슴이 떨리고 설렌다.
헌신, 열정, 사랑, 감사가 있다면 어떤 분야나 어떤 모습이든 각자의 인생은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믿는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거라.
세상의 기준이나 잣대가 인생의 정답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청년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사랑한다.
파이팅 !!!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