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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에 속한 기브아
삿 19:10-21
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일어나서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안장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이 그와 함께 하였더라
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4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18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19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삿 19:10-21 / 그러나 그 레위인은 오늘만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길을 떠났다. 아내를 데리고 안장을 씌운 나귀 두 필을 이끌고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예루살렘 맞은편까지 오자 11) 해가 지려고 하였다. 종이 그 레위인에게 `주인님, 저 성읍으로 들어가 밤을 지내고 내일 길을 떠나시지요?' 하고 말하자 12-13) 그가 `우리가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이 살지 않는 이방인 성읍에 들어가서 밤을 보낼 수가 있느냐? 기브아로 가서 밤을 지내는 편이 낫겠다. 아니면 라마로 가서 밤을 지내든지 해야겠구나' 하고 대답하였다. 14) 그들은 계속해서 길을 재촉하였다. [유숙할 곳을 찾다] 해가 다 떨어질 때쯤에 그들은 베냐민 지역에 있는 기브아 가까이로 가고 있었다. 15) 기브아로 들어가서 밤을 지내려고 성읍 길거리에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집에 들어와서 밤을 묵으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 해가 완전히 넘어가서 어떤 노인이 들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노인네는 에브라임 산악지대 출신으로 기브아에 와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곳 기브아 사람들은 모두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었다. 17) 그 노인은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거리에 있는 나그네 일행을 보았다. 그래서 그 레위인에게 `그래, 고향이 어디시오? 어디로 가는 길이기에 이렇게 늦었소?' 하고 묻자 18) 그 레위인이 `예, 유다 베들레헴에서 오는 길입니다. 에브라임 산악지대 북쪽에 살고 있지요. 여호와의 집에서 일을 하는 몸입니다. 그리로 가는 길이지요.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처가에 갔다가 이렇게 돌아가는 길인데, 밤이 깊어 가는데도 우리 일행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군요. 19) 우리한테는 나귀에게 먹일 겨와 여물도 있고요. 아내와 종과 제가 먹을 양식과 포도주도 넉넉히 있어요'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하였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게. 우리 집에도 자네 일행을 대접할 만큼은 다 있다네. 이렇게 길거리에서 밤을 지샐 수는 없지. 어서 따라오게나.' 21) 노인은 그 일행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고는 그 일행과 함께 발을 씻은 후 먹고 마셨다.
레위인의 일행이 늦은 시간에 기브아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밤을 지내고자 하지 아니하여(10-13) 레위인이 늦은 시간에라도 떠나기로 한 것은 아마도 안식일에 봉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출발한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서쪽 편을 지나치게 됩니다. 아직까지는 예루살렘이 여부스라고 불리는 것은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편 레위인의 종은 날이 어두워지자 예루살렘에라도 들어가기를 간청합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들짐승이나 도적 때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레위인은 기브아나 라마로 가서 머물겠다고 결정합니다. 한편 기브아는 예루살렘 북쪽 약 6.4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민족 베냐민 지파가 다스리고 있는 성읍이기에 레위인에게는 이방인의 성읍보다는 안전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가 진후 기브아에 도착했으나(14-21) 해가 지고 레위인 일행은 라마까지는 못가고 베냐민 땅인 기브아에 들어갑니다. 신명기 10장 19절에 의하면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브아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레위인 일행을 영접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기브아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지 않는 기브아 사람들도 이는 후에 벌어질 끔찍한 일의 암시가 됩니다. 레위인 일행이 낙담하고 있을 때에 한 노인이 나타나 영접합니다. 그 노인이 레위인 일행에게 “그대는 안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안심은 샬롬입니다. 이는 평안을 비는 말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입니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의 생활과 광야의 떠돌이 생활을 통하여서 얼마나 평안을 갈구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노인은 전통 대로 아브라함(창 18)과 같이 롯(창 19)과 같이 그리고 말씀(신 10:19) 대로 나그네를 영접합니다(창 18; 19; 신 10:19).
적용: 당신은 누구를 통하여서 샬롬(평안)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다만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샬롬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혹시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을 살아야지’ 하시나요. 어제 수확한 만나가 있으니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나에게 필요한 은혜는 어제의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오늘에 딱 맞는 신선한 은혜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날마다 새롭습니다. 그 은혜를 기대하며 오늘 새롭게 말씀 앞에 복음 앞에 앉으십시오. 복음에는 우리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 설 교 >
냉대와 환대
삿19:10-21
1. 덕이 되고 본이 되는 삶을 삽시다(10-14)
레위 사람은 첩과 종과 같이 일어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종이 레위 사람에게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하자 레위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 된다 하면서 기브아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인과 교제하면 종교적으로 더러워진다는 사상에서 취해진 것으로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레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축첩하는 삶을 통하여 본을 보이지 못하고 덕이 되지 못한 자가 종교적인 형식을 통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형식만 취하는 외식적인 행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전혀 덕이 되지 못하고 본이 되지 못하면서 믿음이 있는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17-18절에서도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대답을 함으로서 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축첩에 대한 회개 보다는 종교적 의식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요. 지나친 종교적인 면을 강조함으로 나의 죄성을 감추려는 의도는 없는지요. 의식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어 체질화된 신앙인으로서 덕이 되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삶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덕이 되고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외식을 버리고 진정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발견하여 진솔한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2. 나그네를 대접합시다(15, 20-21)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습니다.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하며 장사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줍니다.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 가르침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20-21절에 보면 한 노인이 레위인 일행을 영접해 줍니다. 이 노인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16절)입니다. 그 노인은 레위인이 나귀와 사람들의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도 불구하고 그 노인은 자기가 친히 그것을 공급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나그네를 매우 친절히 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도 한 때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는 아무런 소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공동체 내에 완전한 삶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시민권은 물론, 손님으로서의 권리도 없는 사람과 다른 나라 백성들 사이에 임시로 거주하는 외국인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생활해 나가는 거류인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로서 영원을 바라 볼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도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할 나그네임을 기억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위로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3. 인생의 목적을 확실히 합시다(16-19)
이미 날은 저물어 밭에서 일하던 노인이 돌아오는데 아직도 잠잘 곳을 정하지 못한 채 성읍 거리에서 방황하는 레위인 일행에게 묻습니다.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이 나그네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생활해 나가는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이 많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탓하고 안되면 말고 식의 삶의 산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가 과학은 더욱 발전되어지고 물질적으로는 점점 풍요로워져 가지만 정신적으로는 더욱 황폐해 가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하는 속도를 정신세계가 따르지 못하고 더욱이 영적으로 피폐함으로 정신세계는 더욱 힘들고 어렵기에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여 삶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철학자들은 아직도 이것을 풀지 못하기에 더 혼미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뜻과 섭리가 있어 택함 받은 우리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살며, 주의 영광을 구하다, 수한이 다 하면 아버지 나라에서 영원한 기업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더 이상 무엇 때문에 고민하겠습니까?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저 감사하고 설레지 않습니까? 기대되지 않습니까?
사람이 육신은 떡을 먹고 살고, 정신세계는 문학 예술 철학을 먹고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말씀을 통하여 다시금 우리의 가치를 정립합시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우리를 보내신 목적을 이루어 갑시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최선을 다 함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교회
사사기 19:10-21 / 장영기목사
그러나 그 사람은 하룻밤 더 머물 마음이 없었다. 그는 여장을 챙겨 길을 나섰고, 안장을 지운 나귀 두 마리와 첩과 종과 함께 여부스(예루살렘)에 이르렀다. 여부스에 이르자 날이 거의 저물었다. 종이 주인에게 말했다. "늦었으니, 여기 여부스 사람의 성읍에 들어가서 밤을 지내야겠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말했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성읍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기브아까지 마저 가자." 그는 종에게 지시했다. "계속 가자꾸나. 기브아나 라마에서 밤을 지내야겠다."
그들은 계속해서 갔다. 그들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 근처에서 마침내 해가 졌다. 그들은 기브아에서 밤을 보내려고 거기서 발길을 멈추었다.
레위인이 가서 성읍 광장에 앉아 있었으나, 그들을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저녁 늦게 한 노인이 하루 일을 마치고 밭에서 돌아왔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이었는데, 기브아에서 잠시 살고 있었다. 그곳 주민은 모두가 베냐민 사람이었다.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광장에 있는 여행자를 보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어디서 오셨소?"
레위인이 말했다. "우리는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의 외진 곳으로 가는 길이지요. 저는 그곳 사람입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우리를 맞아들여 묵게 하는 사람이 없군요. 우리가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에게는 나귀에게 먹일 여물과 짚이 있고, 이 여자와 젊은이와 제가 먹을 빵과 포도주도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걱정 마시오. 내가 당신들을 돌봐 주리다. 성읍 광장에서 밤을 보낼 수야 없지 않겠소." 그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들이고는 나귀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들은 씻고 나서 잘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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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거리던 레위인도 더이상 머물기는 그랬는지 드디어 일어납니다.
좀 진작에 일어서지 날이 저물어 갈 때 일어나는 건 또 뭡니까?
하룻밤 더 자면 또 붙잡힐 것 같아서 마음먹은 김에 당장 짐을 쌌나봐요.
결과적으로는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여부스지역에 도착했을 때 날이 저물려고 합니다.
베들레헴에서 10km정도 되는 곳이지요.
종은 여부스에서 하루 머물자고 합니다. 충분히 합리적인 제안이지요.
그런데 레위인은 굳이 기브아까지 가자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부스는 이방인의 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점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됩니다)
이왕이면 동족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자는 것이지요.
(아무래도 밤을 지내기에는 같은 민족의 땅이 안심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여부스를 그냥 지나쳐 5km정도를 더 가서 기브아에 이르지요.
베들레헴부터 약 15km를 걸어온 셈입니다.
마침내 해가 저물었지요.
레위인은 성읍으로 들어가 광장에 앉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나그네가 성읍 광장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거든요.
그런데 베냐민 지파인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율법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당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들이었거든요.
그러지 않고 있는 기브아 사람들의 모습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동족들의 환대를 기대하고 찾아온 레위인은 실망했을 것 같네요.
그런데 드디어 지나가던 노인이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마침 알고보니 레위인의 거주지인 에브라임지파 사람이었네요.
신기하게도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났으니 레위인은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굳이 기브아까지 와서 머물려고 한 보람이 있네요.
지금 우리 사회는 나그네를 환대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글쎄요.. 도시의 경우에는 나그네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졌다고 봐야겠지요.
하루에도 몇번씩 이사를 들고나는 시대이니
아예 '우리 동네'라는 개념도 많이 희박해졌습니다.
(전세값이 자꾸 올라서 집없는 사람들은 늘 나그네가 되고 있어요ㅜㅜ)
시골 인심도 예전같지 않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우리 교회는 약자들을 환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사실 교회가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오면 좀 난처해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아둘람 굴에서 다윗에게 모였던 사람들처럼,
예수님 주변에 모여 들었던 사람들처럼
교회는 원통하고 빚지고 상처입고 가난한 자들이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이고 또 그러기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많이 찔리네요 ㅜㅜ
아무튼 마음씨 좋은 노인과 레위인 일행은
집에 들어가 씻고 먹고 마시며 단란한 저녁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로 몰려오고 있는 먹구름을 알지 못한채...
호크마주석(삿 19:10-21)
=====19:10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 이처럼 레위인이 밤중에라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은 아마 그 다음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였으므로 안식일에는 성소에서봉사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여부스 맞은편'은 예루살렘의 서쪽을 가리킨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까지는걸어서 약 1시간 반 거리이다.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세겜 쪽의 에브라임 산지로 가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의 서쪽에 있는 도로틀 반드시지나야 한다. 한편 여부스(Jebus)라는 이름은 여부스 족이 다욋 시대까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삼하5:6).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11:4-9 강해, `예루살렘'을 참조하라.
=====19:11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사이다 - 레위인 일행이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렀을 때이미 날이 어둑어둑 해졌다. 그러자 레위인의 종은 이처럼 레위인에게 여부스 사람의성읍에 들어가 밤을 지내자고 간청한다. 왜냐하면 밤 에는 들짐승이나 도적때의 공격을 받기가 쉬우므로 더이상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인은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로 부터 해를 받을지도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종의 청을 거부했다.
=====19:12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 -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가나안을정복 하였지만 아직 미 정복지가 남아 있었둣이(1:19-21,27-36) 예루살렘 역시 다윗시대까지 가나안 후기 원주민인 여부스족(Jebusites)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1:21 주석참조.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 기브아(Gibeah)는 예루살렴 북쪽 약6.4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베냐민 지파의 지경이다(수 18:28).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 10:26).
=====19:13
라마 - 기브아에서 북쪽으로 약 3.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수 18:25). 현재의 엘람(er-Ram)으로서, 과거 여사사 드보라의 고향이자(4:5)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이기도했다(삼상 7:17).
=====19:14
해가 진지라 - 레위인 일행이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완전히 져버려 더이상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라마 까지 가지 못하고 베냐민 땅 기브아에머물게 되었던 것이다.
=====19:15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 레위인 일행이 앉아 있던 거리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광장으로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공회(公會)를 열거나 재판을 행하기도하며 장사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창 19:1 주석 참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 - 레위인 일행이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들을 환대하는 기본적인 예절을 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는 것은 기브아 사람들의 성품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보여준다(창18:3-8;19:2,3; 마25:43;벧전4:9). 즉 나그네를 사랑하고 대접하라는 것이 율법의가르침 이었는데도(신10:19) 그들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였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레위인과 그의 첩과 하인은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에서 머물기를 마다하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사는 성읍까지 오면서 가졌던 기대를 한꺼번에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 밖에없었을 것이다(Wycliffe).
=====19:16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레위인 일행에게 친절을 베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 한사람을 소개하면서, 기브아 성읍에는 타지(他地)에서 온 이 한 사람 외에는 정직한 사람이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거하는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 `게르'(* )는 '나그네(손님)로서 체류(거주)하다'는 뜻의 '구르'(* )에서 온 말로, 타지에서 온 사람을 가리킨다.
=====19:17,18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 노인이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을때 레위인은 이처럼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당시 `여호와의 집` 즉`회막'은 실로에 있었다(수 18:1;삼상4:3,4). 그런데 실로는 레위인의 집이 있던에브라임산지(1절)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때문에 본절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대하여서는 학자간에 서로 견해가 다르다. 먼저 혹자는 본절을`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Keil). 그러나 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그의 첩과 화해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를 드리러 실제로 `여호와의 집'으로 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말한다(Cundall). 반면, 또다른 사람은 이 레위인이 단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기를 원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Cassel). 그런데 70인역(LXX)에서는 이를 `나의집 으로'로 번역하고 있어서 카일(Keil)의 주장이옳음을 반증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위인이 `여호와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고 말함으로써 그 노인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의도를 가졌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왜냐하면 실제로 레위인 일행은 그 노인으로부터 크게 환대를 받았었기 매문이다(19, 20절).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 여기서 `영접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아사프'(* )는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가벼운 선심을 쓰거나 계산에 의거하여 일정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뜨거운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하는것'을 가리키는 `카라'(* )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이로 보아 레위인 일행은 기브아에서 숙박비를제공하려 해도 유숙할 장소를 얻지못했던 것 같다(15절).
=====19:19
우리에게는...부족함이 없나이다 - 레위인은 노인이 마음에 부담을 갖지 않도륵 하기 위하여 나귀 두 마리와 자신과 자기 첩과 종이 먹을 양식과 짚은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 속에는 기브아 사람들에게 단지 하룻밤 묵고 갈 숙소만을 요구했는데도 그들이 받아주지 일았다는 탄식이 내포되어 있다(Pulpit Commentary).
=====19:20
그대는 안심하라 - 이 노인은 레위인의 염려를 이해하고 안심시켰다. 여기서 `안심하라'에 해당하는 원어는 `솰롬'(* )으로서, 평안을 기원하는 히브리인의 인사이다. 이러한 히브리 인사에서 우리는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나 광야의 방황생활 중에서히브리인이 얼마나 평안을 희구(希求)했는지를 알 수있다.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 옛부터 거리에 앉아 있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데리고가 후히 대접하는 것이 히브리인의 관습이었다(창18:1-8;19:1-3). 만일 그렇지않을때는 공회 앞에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신10:19;욥 31:32). 따라서 그 노인은전통적 관습대로 나그네가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에 상관없이 자기 양식으로 그들을대접하려고 했던 것이다.
=====19:21
이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귀도 잘먹였다. 이는 곧 그가 진정한 마음으로 나그네들을 사랑하고 대접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발을 씻고 - 고대 근동에서는 여행자들이 주로 샌달을 신고 흙먼지 길을 다녔다.그러므로 손님을 영접하는 주인은 반드시 발씻을 물을 내어놓는 것이 예의였다(창18:4;24:32;43:24;요13:5-14).
냉대와 환대
사사기 19장 11~21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베들레헴에 있는 장인의 집을 떠난 레위인과 그의 일행은 ‘여부스’라는 이름의 도시 맞은편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이름입니다. 다윗이 이 성을 정복하기 전 가나안 사람들이 살 때 이름이 ‘여부스’였습니다. 레위인이 여부스에 도착할 즈음에 날이 저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레위인의 종이 그에게 더 늦기 전에 여부스에 들어가서 머물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방인의 성읍에서 머물 수 없다고 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기브아까지 가기로 결정합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자손의 땅입니다. 이방인의 성읍에서는 나그네로서 대접받기가 어렵고, 게다가 잘못하면 해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여부스가 아니라 기브아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이죠. 해가 저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위인의 일행은 힘든 여정을 강행하여 기브아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은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나그네를 영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발견하자 즉시 그들을 맞아들여 발도 씻기고 휴식을 취하게 하고 떡과 송아지 요리도 제공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나그네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천사였습니다. 또한 창세기 19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역시 자기 동네에 찾아온 나그네들을 집으로 영접했는데 그 역시 하나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그네를 보면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명기 10장 19절을 보면 “(10: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실망스럽게도 기브아 사람들 가운데는 나그네인 레위인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앞서 레위인은 이런 냉대를 당할 것이 싫어서 이방인의 성읍인 여부스를 피해 피곤한 발걸음을 옮겨 왔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기브아 성읍에서는 그 누구도 그를 환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면 레위인 일행은 지금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곳은 성문 근처 광장으로 기브아 주민들의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활동이 일어나는 활기찬 장소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장소이죠.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분명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주민들 혹은 다른 볼일을 끝내고 이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 낯선 레위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긴 여정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레위인은 몹시도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처럼 나그네를 무시하고 냉대하는 것은 율법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레위기 19장 33-34절 말씀을 보면 “(19:33)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그네에게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나그네에 대한 환대를 거부한 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이기적으로 살아갔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 때 한 노인이 저녁이 되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16절을 보니 이 노인은 본래 기브아 사람이 아니고 에브라임 산지 출신으로 기브아에 거류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인의 목적지가 에브라임 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인 셈이죠.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노인은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는 레위인 무리를 발견하고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기브아 주민 모두가 레위인에게 냉대를 베풀 때, 오직 이 노인 한 사람만큼은 레위인에게 환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레위인은 이 노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19절 말씀을 보면, 자신이 끌고 온 나귀와 그의 첩과 하인이 먹을 모든 음식과 포도주가 다 있으니 숙소 곧 잠자리만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 레위인에게 더 큰 환대를 베풉니다. 20-21절 말씀을 봅시다. “(19:20)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19:21)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레위인을 만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노인도 사정이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에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인은 레위인의 일행이 하룻밤 머물며 사용하는 모든 것을 자신이 다 담당하겠다고 말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대는 안심하라!” 이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 라크”입니다. ‘이 노인을 놓치면 어떻 하나? 길거리에서 자야하나?’하고 불안해하며 긴장하고 있는 레위인의 마음을 안도하게 했습니다. 노인은 레위인이 쓸 것을 다 담당할 것이며 그를 관대하게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읽기 어렵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레위인 일행이 노인의 집에 들어가서 발을 씻고 마시는 사이 나귀들에게 먹이고 짐승을 돌보는 일을 한 것이 바로 이 노인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약속한대로 레위인 일행에게 환대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로부터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나그네를 대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는 레위인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기브아 사람들처럼 지금도 이웃의 어려움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차갑고 사랑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대접하고 사랑하고 극진한 사랑을 베풀고 살아가야 합니다. 냉대의 시대 속에서도 사랑의 환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들과 나누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브아에서 동족에게 천대 받는 레위인
사사기 19장 11-21절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세상은 어떻게 봅니까? 욕심 많은 사람, 말이 많은 사람, 고집이 센 사람, 실속은 없고 말한 대로 살지 않는 사람, 인정하기 싫지만, 그런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러니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세력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평가할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사사 시대 말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장인의 환대를 받은 레위인은 오후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결국 에브라임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동족 베냐민이 사는 기브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냉대를 당합니다. 다행히 에브라임 출신으로 그곳에 거래하고 있던 한 노인을 만나 그의 집에서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게 됩니다.
기브아에 도착한 레위인 일행(11-15)
교회가 사탄과 싸우는 일도 힘든데,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세상으로부터 더욱 신뢰를 잃어버려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가 대외적으로 지역 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 같이 고민하고 실천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잃은 신뢰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레위인과 그의 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를 뿌리치고 늦은 오후에 떠납니다. 여부스(현 예루살렘) 근처에 갔을 때 해가 지려 하였기에 레위인의 종은 여부스 성읍으로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조심스럽게 요청합니다(11). 여부스는 베냐민 지파에게 주신 땅인데, 그들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당시는 가나안 토착민인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은 이방 사람에게 속한 여부스에 들어가지 않고 그 대신 기브아로 가겠다고 말합니다(12). 당시 이방인은 제의적으로 부정한 존재이며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사회적 이유로 그는 여부스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기부하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이방인이 사는 여부스보다 동족이 사는 기브아가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브아는 여부스에서 8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며 훗날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동족의 땅이 훨씬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부스 대신 기브아를 선택한 것이 현재까지는 매우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레위인의 선택은 뒤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가 이방인의 땅 여부스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고 정결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정말 안전한 여행을 원했다면, 장인의 제안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나는 것을 택해야 했습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말고 라마라는 다른 장소에도 머물 수 있을 것이라며, 여부스 말고 다른 선택지를 제안합니다(13). 지리적으로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에브라임으로 가는 길은 남북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가다가 동쪽으로 빠지면 되는데,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가면 제일 먼저 여부스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 기브아와, 그 다음이 라마입니다.
즉, 종은 여부스쯤 와서 이제 유숙을 하자 하였고, 레위인은 이방 땅이라는 이유로 좀 더 북쪽에 있는 기브아나 혹은 좀 더 갈 수 있으면 라마까지 가자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레위인의 모습을 보면 에브라임까지 가는 길을 매우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들이 열심히 갔지만, 결국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 해가 져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14).
여기서 기브아가 베냐민 지파에 속했다는 사실을 밝히므로 훗날 기브아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방 땅에서 이방 민족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동족에게 저지른 범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은 하룻밤 머물기 위해 기부하러 들어갑니다. 성문에서 레위인의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일행은 사람을 기다리기 위해 성문 가까이 있는 광장으로 가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거두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15). 이것은 이 당시 관습에서 볼 때,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여행객이 자신의 성읍으로 오면, 그를 자신의 집에 하룻밤 재워주는 것은 당연히 그 성읍 사람들이 해야 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도 아닌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여행자가 성읍에 들어와서 자신을 영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회적 연대의식 혹은 도덕이 붕괴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 일행을 영접한 노인(16-21)
선을 베푼 사람들이 하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써 인간답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돌봄과 베풂과 배려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워 쌓고 경계하고 빼앗는 데만 몰두하는 세상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돌봄과 베풂과 배려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읍인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유속하려고 했던 레위인 일행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1) 환대하지 않는 기브아(16-19)
이제 한 노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의 사람이라고 본문을 소개하면서, 그가 외지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16). 이것은 베냐민 사람들의 무정함과 에브라임 출신의 노인의 호의를 비교하기 위한 포석입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들과 다르게 눈을 들어 나그네를 바라보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와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17).
이런 호의에 레위인은 자신이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로 간다고 말하고, 자신의 집이 에브라임에 있음을 밝힙니다(18). 여기서 ‘여호와의 집’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레위인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다며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노인에게 설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신을 영접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레위인은 최대한 겸손하게 자신들을 종과 여정으로 지칭하며 자신들과 자신들의 나이가 먹을 충만한 음식과 사료가 있음을 길게 설명하였습니다(19). 이것은 노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잠만 재워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인은 기브아 성읍 사람들의 야박함을 체험한 후,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이 노인에게서도 거절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장인의 지나친 환대에 지쳐 급하게 나온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환대에 지쳐 나온 사람들이 이제는 환대를 구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장인의 지나친 환대나 기브아의 지나친 냉대와 레위인의 구걸에 가까운 모습들은, 당시 사회가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비정상과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만연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 레위인의 간청에 대한 노인의 대답(20-21)
노인은 레위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는 레위인이 스스로 쓸 것을 담당하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자신이 뭐든 쓸 것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20). 그러고는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나귀에게 먹을 것을 주고 발을 씻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물과 음식을 제공해 줍니다. 고대 근동에서 손님이 집에 오면 나귀와 손님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비정상적인 베냐민 사람들과 달리 노인은 매우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한 대를 베풀었습니다(21). 그리고 이런 환대의 레위인은 장인의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먹고 마시며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폭력이 난무하는 잔인한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죄악 된 삶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정결한 행실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