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의 덕수궁 돌담길에서
하루 종일 흐리던 하늘이
저녁 무렵 빗방울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산을 재촉하며 발걸음을 서둘렀지만
우리는 오히려 속도를 늦추었다
비가 내릴 때만 들리는 그 잔잔한 리듬이
어디선가 오래된 기억을 깨우는 듯했기 때문이다
덕수궁 돌담길로 향하던 순간
바람은 차가웠고 공기는 축축했지만
당신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그 온기가 내 손끝에 닿는 순간
걱정과 불안은 잠시 자리를 잃고
그저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이 시간만이
조용히 살아 숨 쉬었다
돌담에 부딪혀 내려앉는 빗소리는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천천히 걷는 우리의 발끝에
비가 작게 토닥이며 리듬을 맞추는 느낌이었다
위로처럼 부드럽고
기억처럼 은은하고
사랑처럼 조심스러운 소리였다
우산 아래 좁은 공간에
둘만의 숨결이 고요히 모였다
비를 피해 담벼락 아래를 따라 걸을수록
우리는 말수보다 눈빛이 많아졌다
세상은 회색빛으로 젖어갔지만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만은
유독 따뜻한 색 하나가 오래 머물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라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춥지 않았다
물기 어린 바람이 스쳐 가도
당신의 손이 내 손을 감싸며
오늘의 낭만을 놓치지 말라는 듯
살포시 힘을 주었다
돌담길 위로 가을이
잠시 멈춰 서는 것만 같았다
비가 더 촉촉해지던 시간
우리는 우산 모서리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잊었다
말이 없어도 충분한 순간이었다
고요 속에 서로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 온기는 빗소리와 섞여
작은 향기가 되었다
사랑은 때때로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빗속의 산뜻한 정적에서
은근히 자라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담길을 걷던 그 밤
비는 세상을 적셨고
당신은 내 마음을 적셨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도
서로에게 깊은 문장이 되어 있었다
지나고 나면
가장 아련하게 따라오는 장면들은
늘 이처럼 소소한 순간들이었다
우산 아래 좁은 틈에서
젖은 바람을 함께 견디던
그 부드러운 눈빛과 온기
그것이 오늘 밤
가장 오래 남는 풍경이 되었다
비는 여전히 조용히 내리고
돌담길은 검은 윤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오늘만큼은 세상의 어떤 소음보다
당신의 걸음 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 소리가
앞으로의 날들에도
내 곁을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첫댓글 맞바람을 가르며 천천히 길에 몸을 맡기고
낯선 풍경의 결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고
걷다 문득 멈춘 자리에서 하루가 고요히 흔들리고
스치는 빛과 소리가 작은 용기를 남기고
여행 끝자락에서 다시 시작할 나를 조용히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