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리는 경서, 맞는 경서, 함께 폭력에 맞서다!
나, 강경서, 주먹만큼은 남자애들한테도 빠지지 않는다.
박진철을 닥치게 하는 데도 주먹만 한 것이 없다.
녀석이 먼저 깐족거렸으니 맞아도 싸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했다.
그런데 서경서와 가까워진 뒤로 전처럼 주먹을 휘두를 수가 없다.
서경서와 박진철이 자꾸 겹쳐 보이는 까닭이다.
서경서의 몸과 마음에 보랏빛 멍을 아로새긴 그 사람과
나 자신이 자꾸 겹쳐 보이는 까닭이다.
나도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아닐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강경서는 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싸움꾼이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이유 없이 주먹을 휘두르진 않는다. 박진철 패거리에게 얕보이지 않으려고, 더는 지분거리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과 친구들을 지키려고 주먹을 드는 것뿐이다. 담임의 귀염둥이이자 학부모회장의 아들인 박진철에게 밀리지 않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주먹밖에 없으니까.
경서가 처음 박진철에게 주먹을 휘두른 건 친구 영라 때문이다. 박진철이 영라의 브래지어 끈을 마구 잡아당기며 아줌마라고 놀리는 꼴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한테도 지고는 못 사는 녀석이 여자애한테 맞고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경서는 걸핏하면 시비를 걸어오는 박진철을 상대하느라 온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다. 담임은 사정도 모르면서 경서를 사고뭉치 취급한다. 엄마는 한 번만 더 싸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경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제 행동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박진철이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작신작신 밟아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담임이 뭐라고 하든, 제 행동은 정당하고 또 정의로우니까.
그런데 자신과 이름이 같은 전학생 서경서의 비밀을 알게 된 뒤로 전처럼 주먹이 막 나가지 않는다. 서경서가 제 몸에 손만 갖다 대도 질색하는 이유, 친구들 앞에서 체육복 갈아입기를 꺼리는 이유, 걸핏하면 감기 몸살을 핑계로 결석하는 이유를 알게 된 뒤로 말이다.
경서는 비밀을 지켜 달라는 서경서의 부탁을 들어주려 한다. 친구의 부탁이기도 하지만 어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까닭이다. 솔직히 어른들에게 털어놓는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엊저녁까지 함께 놀았던 서경서가 또 감기로 결석한다는 담임의 말을 듣고 나니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무방비하게 내던져진 친구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 경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한다!
정당한 폭력은 없다
강경서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폭력의 흔한 가해자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해자라는 자각은 조금도 없다.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은 그저 정당방위이거나 정당한 응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박진철과의 갈등을 해결할 방법도 더 강한 폭력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런 경서의 생각은 ‘아동 학대’라는 엄청난 폭력과 마주하면서 지각 변동을 겪는다. 서경서 모녀라는 거울에 자신과 박진철의 관계를 비춰 보면서, 그 엄마의 폭력이 어떤 이유로든 정당하지 않듯 자신의 폭력 또한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다.
아동 학대의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그 날, 강경서는 비로소 폭력의 가해자 노릇에서도 놓여난다. 제 동생을 괴롭힌 박진철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끝끝내 참아낸 것이다. 제 친구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하여…….
《경서 친구 경서》는 정성희 작가가 오랜 습작기를 거쳐 세상에 내놓은 첫 책이다. 그런 만큼 ‘반폭력’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아이들의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 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동 학대를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비교항으로 놓은 점도 놀랍다. 두 경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두 폭력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가정이나 교실에서 아이들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마중물 삼아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작가 소개
글쓴이 정성희
서울예술대학에서 극작을 공부했습니다. 만화, 영화,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재미있는 작품은 보고 또 봅니다.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만화나 영화처럼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있습니다. 《경서 친구 경서》는 세상에 내놓은 첫 책입니다.
그린이 안은진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어린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엄마가 되면서부터입니다. 《나는 나의 주인》, 《악어 우리나》, 《생각한다는 건 뭘까?》, 《생태 통로》, 《나의 수호천사 나무》를 비롯한 여러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책 속으로
“아까 진철이 형 엄마 왔는데, 누나더러 동네 깡패 새끼래. 누나가 진철이 형 코피 터트렸다면서.”
코피는 나도 났다. 뺨도 맞고 가슴도 걷어차였다. 지금도 그 자리가 욱신욱신 쑤신다. 치사한 자식, 창피한 줄도 모르는 머저리, 맞은 게 뭐 자랑이라고 엄마한테 이를까.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박진철이었다. 일부러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치마가 올라가는 바람에 아이들이 구멍 난 내 팬티를 보았다. 팬티에 구멍이 난 건 나도 몰랐다. 알았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거다. 떠들썩한 웃음과 놀림을 한 번에 잠재우려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박진철을 흠씬 패 주는 수밖에 없었다. 후회하지는 않는다. 잘못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들킬 줄 알았다면 끝장을 보는 건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11쪽
“저는 서경서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노란 원피스 이름이 나랑 같은 경서란다. 반 아이들이 키득대며 나를 흘끔거렸지만, 나는 그 애한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 경서가 두 명이기는 하지만, 한 명이 워낙 특별해서 헷갈릴 일은 없을 것 같구나.”
담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담임은 나를 ‘강경서’나 ‘경서야’라고 부르지 않았다. ‘야!’ 또는 ‘너!’, 그것도 아니면 ‘이 자식!’이나 ‘이 새끼!’라고 부른다. 그러니 헷갈릴 턱이 없다.
“경서는 저기 진철이 옆에 앉아라.”
담임이 ‘경서’라는 이름을 저렇게 상냥하게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 알았다.
-15~16쪽
“참, 아깐 왜 교탁 뒤에서 옷 갈아입었어? 넌 가슴이 작아서 브래지어 안 했잖아. 혹시 한 거야?”
등에 손을 댔을 뿐인데, 경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피했다. 그러고는 내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한 듯 무섭게 째려보았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 그건 정말 무례한 짓이야. 너처럼 이것저것 참견하는 애는 딱 질색이야!”
경서는 표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획 돌아서서 혼자 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방금 들은 게 정말 경서가 한 말인지, 내가 잘못 들은 건지 헷갈렸다. -69~70쪽
경서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방바닥만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있기도 어색해 방을 나가려고 할 때다. 헐거운 폴라티 사이로 드러난 경서의 뒷덜미가 온통 보랏빛이었다. 문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처음에는 속옷인 줄 알았다.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았더니, 전에 팔뚝에서 보았던 것 같은 피멍이었다.
“너 여기 왜 그래?”
지난번보다 멍이 더 짙은 게 손만 갖다 대도 욱신욱신 아플 것 같았다.
“뭐가?”
경서는 당황한 듯 한 손을 뒷덜미에 갖다 댔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나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물었다. 경서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176~177쪽
아줌마 손이 올라갈 때마다 은색 플루트가 반짝거렸다. 웅크린 경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플루트가 몸에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하며 경련을 일으킬 뿐이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아줌마가 플루트를 침대에 던지더니 경서 머리카락을 덥석 움켜잡았다. 힘없이 딸려 일어난 상체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줌마는 사정을 두지 않고 경서 머리를 벽에다 박아 버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비명을 손바닥으로 막으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떨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투둑, 등 뒤에서 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푸른 감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206~207쪽
이호준이 장난을 치다 그만 박진철 남방을 잡아당겼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박진철은 앞가슴을 풀어헤친 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웃어 댔다. 녀석은 부끄러운 듯 서둘러 옷을 바지 안으로 쑤셔 넣었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녀석의 옆구리에 든 푸른 멍을. 지난번 내가 발로 걷어찼을 때 생긴 것 같다. 나는 머릿속이 멍해져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211~212쪽
박진철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감긴 눈까풀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고 보니 몸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안에서 신음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오며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박진철이 건성으로 잡고 있는 내 손을 뿌리치고 숨을 헐떡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녀석은 당장에라도 달아날 태세로 나와 뒷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경고야. 두 번 다시 세강이 놀리지 마. 한 번만 더 내 동생 울리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정말이야!”
나지막이 말하고 돌아서는데 종이 울렸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점심시간이 끝났나 보다. 담임이 곧 들어올 것 같아 일단 자리로 가서 앉았다. 책상 밑에서 마주 잡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꾸 눈물이 나려 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을 날리지 않아 다행이다. 만약 박진철을 때렸다면 나도 그 아줌마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다. -244~245쪽